“나잇 & 데이”, 재미와 씁쓸함을 함께 느끼다






평범한 노처녀가 우연히 비밀요원과 만나 사건에 휘말리고 이 과정에서 사랑도 얻게 된다는 지극히 뻔한 설정의 <나잇 & 데이 (Knight and Day)>는 그러나 톰 크루즈와 카메론 디아즈가 그 배역을 맡아 출연하게 되면서 일약 화제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만약 이 영화에 톰 크루즈와 카메론 디아즈가 출연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솔직히 <나잇 & 데이>는 두 배우가 아니었다면 굳이 봐야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코믹 로맨스 액션’ 장르에 충실하다.

부담없이 보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팝콘 무비의 법칙에 충실하다 못해 진지한 메시지 전달은 커녕 논리적인 개연성조차 제대로 챙길 겨를 없이 마냥 달리기만 하는 작품이 <나잇 & 데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나잇 & 데이>에는 톰 크루즈와 카메론 디아즈가 나온다. 두 배우가 얼토당토 않는 각본과 연출의 부실함을 채워주면서 관객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선사한다는 말이다.










<나잇 & 데이>에 출연한 톰 크루즈와 카메론 디아즈를 보면 이 영화야말로 두 배우가 헐리웃과 세계 영화 시장에서 더이상 초일급 배우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증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50대의 나이에 가까워진 톰 크루즈는 첨단 미용 성형술의 도움을 받아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케이티 홈즈와의 결혼 이야기를 하던 중에 소파 위로 올라간 이후 확실히 예전만은 못한 편이다.

물론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는 초일급 배우라고 해서 작품성과 오락성을 겸비한 특급 프로젝트에만 항상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좋아하던 배우가 생활비나 벌러 나온 듯한 느낌을 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경험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트로픽 썬더>(2008)에서의 이미지 변신이 환영할만 했을지언정 이런 식의 눈에 띄는 하향 곡선은 그야말로 안타까운 마음마저 들게 만든다. 드디어 실사 영화 연출에 도전장을 내미는 브래드 버드 감독과의 차기작 <미션 임파서블 4>(2011)은 아마도 톰 크루즈의 영화 경력에서 마지막 잔치가 될 가능성이 높지 않나 싶다.



그나마 톰 크루즈는 형편이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불과 몇 년 사이에 제대로 삭아버린 모습 그대로 카메라 앞에 나서고 있는 카메론 디아즈 때문이다.

마음은 여전히 <마스크>(1994) 시절이실테고 <미녀 삼총사 2>(2003)까지만 해도 생동감 넘치는 매력을 과시했었지만 이번 작품에서 카메론 디아즈는 먼저 결혼하는 동생을 둔 노처녀가 아니라 거의 과부처럼 보이고 있는 지경이다.

그렇다고 다른 배우들처럼 보톡스 시술 후유증으로 이상하게 부어버린 입술을 들이미는 것 보다야 낫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나름 로맨틱 코믹 액션 영화인 <나잇 & 데이>와 같은 영화에서는 마치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을 대접받은 것처럼 불만스러워 할 수 밖에 없다.

여성 관객들에겐 어떻게 받아들여졌을런지 모르겠지만 카메론 디아즈는 비밀 요원과 사랑에 빠지는 ‘귀여운 여인’이 아니라 CIA나 FBI의 베테랑 요원 쯤으로 나와줘야 하는게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나잇 & 데이>는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눈요기 영화로서는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개연성이라곤 일절 없는 전개를 보여주고 있는 데다가 별다른 고민 없이 써제낀 듯한 마지막 장면의 로맨스 대사들이 헛웃음을 자아내긴 하지만 몇 군데 확실하게 터뜨려주는 코믹함과 액션 장면들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미국 내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등지를 오가며 촬영한 근사한 풍경까지 보여주고 있으니 그저 보는 동안 충분히 즐기고 상영관을 나서는 순간 깨끗이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애초에 톰 데이 감독에 크리스 터커와 에바 멘데즈의 조합으로 영화가 만들어질뻔 했었다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 편이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다. 톰 크루즈와 카메론 디아즈의 캐스팅으로 그나마 이런 정도 규모의 영화가 나올 수 있게 된 것이긴 하겠지만 애초에 패트릭 오닐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자체가 팝콘 영화 수준을 넘어서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톰 크루즈에 대한 오랜 팬심으로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작품이다. 피터 사스가드와 폴 다노, 비올라 데이비스와 조르디 몰라 등의 출연은 그야말로 재능의 낭비요 알바 뛰러 잠시 출연한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 정도다.


영진공 신어지

 


 

패스트푸드 네이션, “일상의 작은 것 하나하나가 정치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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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 하나가 가진 정치학만 이해해도 ...
몇 년 전 영국에서 커피 농가를 착취하는 초국적 거대 커피기업들에 대한 보이콧 운동이 벌어지며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참가했을 때,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콜린 퍼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매일 마시는 커피 한 잔, 그 안에 담긴 만큼만의 정치에 관심을 가져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의 일상 하나하나가 복잡다단한 정치와 경제, 무역과 직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탈정치’란 하나의 거대한 허상의 거짓말이다.) 우리가 흔하게 마시는 커피 한 잔은 물론이고, 하루 세 끼 먹는 밥과 매일 갈아입는 속옷도 마찬가지다. 오늘 끼니 중 하나로 먹은 햄버거 하나도 예외가 아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패스트푸드 네이션>은 우리가 어쩌면 오늘 낮에 점심으로 먹었을지도 모를 햄버거에 담긴 거대한 사회정치적 의미를 추적해 들어간다.

2006년에 일찌감치 수입되었지만 촛불정국을 타고서야 겨우 개봉될 수 있었던 <패스트푸드 네이션>은, 지금 쇠고기 문제가 터지면서 극적으로 개봉할 수 있었지만 그 쇠고기 정국과 미묘하게 핀트가 어긋나 있는 게 사실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많은 관객들이 <패스트푸드 네이션>을 보고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지금의 쇠고기 정국의 어떤 한계와 새로운 방향성에 대한 힌트를 받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영화는 쇠고기의 위생문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고기 과소비’의 시대에서 식량, 그것도 고기를 ‘공장제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만들어내는 탐욕스러운 근대 대량생산 체제와 더불어 소위 ‘불법사람’의 노동착취 문제까지 다루니까. 사실 이 영화가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오히려 저 이민자들에 대한 비인간적 노동착취에 대한 고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 먹고 살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사회에서 목숨을 내걸고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향하는 곳은 값싼 고기가 넘쳐나는 소위 ‘풍요의 땅’ 미국이다. 그 값싼 고기는 규격에 맞춘 공장제 대량생산에 의해 가능한데, 이를 위해 동물들은 옆으로 한걸음 움직이기조차 좁은 공간에서 마치 물건들이 창고에 쟁여지듯 갇혀 얼른 살을 찌우고 마블링을 만들기 위해 동종의 동물을 섞은 사료를 먹고 살이 찐 뒤 도축장으로 옮겨져 햄버거 패티로 거듭난다. 동물만이 억압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근대적 대량생산 공장체제에도 인간의 노동력은 필요하기 마련. 이를 위해 동원되는 것은 불법이민자 신세라는 이유로 온갖 위험과 불공평을 감수해야 하는, 불법으로 국경선을 넘은 사람들이다. 고된 노동을 견디기 위해 심지어 마약의 힘을 빌어야 하는 이들이 사고로 무참히 팔다리가 짤린들, 그는 해고되고 (고된 노동을 견디기 위해 마약을 먹었다는 이유로) 보상금도 받지 못한다. 여성들은 자신의 성을 대가로 일자리를 구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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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불법이주한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가혹한 조건에서의 노동이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이른바 ‘노동소외’가 바로, 영화의 처음 시작에서 제기되는 이른바 “음식에 소똥이 들어간” 이유이다. 결국 우리가 값싸게 먹고 즐기는 모든 생산품들은, 우리보다 더 가난한 누군가의 노동을 (말 그대로)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값싼 햄버거 하나에 들어가는 쇠고기 패티 한 장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말그대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게 한 대가인지, 이 영화만큼 생생하게 보여주는 영화도 드물 것이다. 문제는, 우리는 이런 대량생산 체제가 우리에게 주는 안락함과 풍요를 거부할 용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량생산 체제를 통해 생산된 ‘값싼 물품’을 주로 소비하는 사람들은 결코 상류층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디자이너의 값비싼 옷을 걸치는 사람과, 제3세계에 세워진 공장에서 만들어진 값싼 티셔츠를 입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그리고 그 옷을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국 이 자본주의가 동작하는 모습이란 거대한 먹이사슬, 더욱이 약한 자가 더 약한 자를 뜯어먹으며, 혹은 약한 자가 더 약한 자의 피눈물에 기생하며 생존하면서도 그에 대한 인간적인 죄책감 같은 것을 전혀 느낄 필요가 없이 ‘안전하게 차단’ 해주는 – 소비자 개인은 구체적인 생산자 개인을 알지 못한다 – 거대한 톱니의 모습이다. 이 영화는 그 톱니를 폭로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대중예술이 해야 할 의무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영화가 그런 의무에 너무 사명감을 많이 가진 탓인지 전반적으로 너무 산만하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다 다루려다 보니, 실비아(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를 중심으로 한 멕시코 불법이민자의 이야기와 돈 앤더슨(그렉 키니어)을 중심으로 한 자본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 앰버(애쉴리 존슨)를 중심으로 한 또다른 판매 고용 노동자(즉, 알바) 및 환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엮이지 못한 채 따로 논다. 사실 이 영화는 돈 앤더슨에서 시작해 앰버의 주변 이야기로 갔다가, 실비아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돈 앤더슨의 회사네 풍경은 ‘에필로그’ 정도에 해당한다.) 이렇게 진행돼 가면서도 중간중간 교차하는 방식이 별로 다소 거칠고, 영화를 지루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한국의 아주 일반적인 관객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을 이슈인 ‘이주노동자’ 문제를 전면에 놓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 면에서 분명 링클레이터의 용기는 박수를 쳐줄 만하지만, 이것을 만드는 방식에 조금만 더 재치와 유머를 섞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실비아가 소 내장제거반 작업실로 따라가며 더도 덜도 아닌 딱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참 보는 사람 가슴 미어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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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몰랐는데, 보면 볼수록 이쁘더란… 이쁘기론 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도 만만치 않다만 사진이 없다.


나는 이 영화가 단순히 “미국 쇠고기 더럽대요”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고 있는 그 모든 상품들이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내 손에 들어온 것인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피가 섞여들어간 것인지, 우리의 일상의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어떻게 모두 정치와 자본주의의 작동의 결과물인지, 다시 한번 깨우쳐주는 그런 영화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단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미행, 감시, 도청당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살해협박까지 받은 사람들의 피눈물이 섞인 핸드폰과, 어린아이가 눈이 멀어가면서까지 만든 축구공, 역시 어린아이가 아침부터 밤까지 공장에서 일하며 만든 운동화와 커피와 면옷과… 그들이 그저 남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는 사실까지도,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 각자 통찰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영진공 노바리

ps1. 영화가 원래 2006년에 수입돼 그해 부산영화제에서 공개됐는데, 영화사로서는 늦게 개봉하게 된 게 한편으로 도움을 받은 면도 없진 않다. 예컨대 그 사이에 폴 다노가 확 떠줬다던가… 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가 주연을 맡은 영화가 소규모나마 개봉이 됐다던가… 물론 폴 다노나 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알아보는 사람은 아직 그렇게까지 많진 않다. 게다가 어쨌건 영화가 창고에서 묶이게 되면 그만큼 비용이 올라가고 가치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ps2. 강기갑 의원이 영화를 함께 봤다. 끝나고 기자간담회도 했는데, 열심히 취재를 해놓고 결국 기사를 못 썼다. 그나저나 가까이서 본 강기갑 의원은 초큼… 무서워 보이더란… 실은 이 날, ‘한국의 도축 및 검수 시스템 역시 엉망 아닌가’ 뭐 이런 질문을 하려다가 간이 떨려서 말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