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공포영화를 즐기는 이유


공포영화를 즐기는 이유를 심리적으로 설명하자면

첫 번째,
같은 경험도 반복함에 따라 불쾌감이 쾌감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과정이론(opponent process theory)에 따르면 처음에 불쾌하던 경험들이 반복하면 할수록 오히려 쾌감이 증대된다고 하죠.


중독성 음식들이 대개 처음 먹는 사람들에겐 불쾌감을 주고, 헌혈이나 고공낙하 같은 것도 처음에는 공포와 긴장을 유발하지만
익숙해질수록 오히려 쾌감이나 안도감을 더 많이 줍니다.

공포영화도 그런 경우로 설명이 됩니다.
반복단련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의미라 하겠죠.




두 번째,
공포영화는 미스테리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아주 절박한 미스테리죠.


공포영화의 주인공에겐 왜 이런 일이 벌어졌고, 범인이 누구이며, 나는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것인지를
알아내고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셈입니다.
그걸 제때 알아내면 살고 그러지 못하면 죽죠.

이렇게 절박한 미스테리에서는 관객들도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기 좋습니다.



세 번째,
공포영화의 사회적 의미도 있습니다.
공포영화를 보는 순간 극장안의 모든 사람은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모두가 공포라는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 거죠.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그걸 같이 보는 사람도 아주 뚜렷하고 단순한 감정으로 하나 될 수 있다는 건

상당히 매력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죠. 사회적인 욕구가 반영된 셈입니다.

네 번째,
공포영화는 원초적 감정의 해방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공포영화에서는 필연적으로 죽음이나 분노, (원초적)죄의식, 원한 같은 원초적인 감정을 다룹니다.
그 감정들은 누구나 경험한 것이지만 평소에는 쉽게 표출하기 어려운 것들이죠. 공포영화라는 장르에서만 해방시킬 수 있는 감정인 셈입니다.



물론 공포영화를 즐기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생래적 기질과 후천적인 경험으로 설명해야겠죠.

 

우선 생래적으로 자극추구성향이 강한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이 나뉩니다. 자극추구성향이 강한 사람들일수록 더 짜릿하고 위험한 경험을 찾습니다. 이들에게 일상생활은 지루함으로 가득차있죠.


차를 몰아도 더 빨리, 더 위험한 길로 운전하고,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해도 사고나기 쉬운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입니다. 형사
, 격투사, 특수부대원, 좋지 않은 경우에는 범죄자가 되기 쉬운 사람들이죠.


하지만 대개의 사회에서는 지나친 자극추구를 막습니다. 고로 이들은 평소에 약간 좌절된 상태인데, 공포영화는 그런 사람들에게 대안이 되죠.


반면 자극추구성향이 낮은 사람들은 일상생활 만으로도 충분한 자극을 받습니다. 지나친 자극에는 거의 토할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되죠. 공포영화는 이들에겐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고문이 됩니다.




후천적으로는 공포영화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개인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있겠죠. 특히 우리나라 공포영화들의 배경은 가족이나 이웃공동체의 관계와 연관이 많습니다. 영화를 보며 예전에 겪었던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되면 그냥 영화가 아니라 좀더 깊숙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게 반드시 불쾌한 경험이 되는 건 아니죠.
아시아 공포영화가 그런 식인 이유는 아시아 관객들이 모두 그런 경험 맥락을 공유하기 때문이니까요.


어쨌든 첫 공포영화의 경험이 심한 불쾌감이 되면 알러지와 비슷하게 다음 번 경험은 더 나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건 처음 말한 반대과정이론과는 다른 경로인데 둘의 차이는 경험 초기가 아니라 경험이 끝난 다음에 있습니다.


반대과정 이론이 성립하려면 첫 경험이 처음에는 불쾌했어도 끝난 뒤에는 평소보다는 덜 불쾌한 상태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만약 그 첫 경험이 처음부터 끝까지 불쾌감으로만 가득하다면 반대과정이 작동할 여지가 사라지니까요.


영진공 짱가

“망량의 상자”, 처연한 엽기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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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떤 인터뷰에서 요즘 읽은 책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책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이 책, <망량의 상자>라고 대답했다.

교코쿠 나쓰히코의 책은 처음에 <항설백물어>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꽤나 재미있었다. 일본의 설화와 기담을 활용해서 정의를 세우고 다니는 탐정 사기단 이야기다.
 
이들은 귀신을 믿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귀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믿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그 지식을 활용해서 범죄자를 처단하고 정의를 세운다. 처음에는 화자가 오락가락 하는 글쓰기 방식(아, 중간에는 이 말을 누가 하는 건지 정말 알 수 없더라고…)이나 난데없이 지팡이를 쿵 찍으며 뭐라 웅얼거리는 식의 불친절한 이야기 방식에 적응하기가 좀 힘든데, 이야기가 끝날 때가 되면 대충 합리적으로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그렇게 짜맞춘 전체적인 사건의 모양새가 꽤나 참신했다. 이성과 비이성이 적절히 뒤섞인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재미있었고.


<항설백물어> <속항설백물어> <광골의 꿈> 일본어판의 표지들 …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우부메의 여름>을 봤다. 이건 초반이 엄청나게 힘들다. 난삽하다고 해야 할지, 무겁다고 해야 할지 … 의식과 경험과 감각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해석을 주요 등장인물인 ‘교고쿠도’의 입을 빌어 강의 형식으로 풀어내니 당연히 힘들다. 등장인물들도 꽤 많은데 이름들이 하나같이 다 그 이름이 그 이름같아서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가면 그동안 여기저기 널어놓은 괴담, 설화, 심리학(특히 정신분석학)적 단서들이 하나씩 연결되면서 속도가 붙는다. 교고쿠도네 헌책방으로 가는 길처럼 중간까지는 엄청 힘들다가 내리막 직전에 현기증이 나고 그 다음에는 일사천리 … 그 결과 드러난 사건의 진상은 아 … 엽기적이었지만 참신했다.

마침내 <망량의 상자>에 이르러서는 전작 <우부메의 여름>이 귀여워보일 정도다.

이제는 기담과 이상심리학 뿐만 아니라 일본의 근대사와 의학까지 곁들여지고, 벌어지는 범죄의 뒤엉킴도 한 3배쯤 복잡해지며 그 결과 드러난 사건의 진상은 …
“처연한 엽기”라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책의 뒷맛은 찜찜하고 애잔하면서 끔찍하고 기괴하기 그지없다. 한동안은 정신이 좀 이상해지는 느낌이었을 정도다.

사실은 아직도 나는 ‘호오~’의 잔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 … 그 ‘호오’ … 진짜 소름끼친다. 이 평도 사실 이렇게 글이라도 써 놓으면 그 망량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서 쓰는 것이다 -_-;;;


원판 소설은 표지가 이런 모양이다 …

이 책이 어떤 면에서 대단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일단 미스테리로서는 결격사유가 많다.

원래 미스테리는 일종의 게임, 저자와 독자가 벌이는 머리싸움이다.
그래서 공평하게 게임을 전개하기 위해서 필요한 규칙이 있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아는 것을 독자도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바로 나쓰히코의 미스터리는 바로 이 부분에서 애매하게 반칙을 한다.

<우부메의 여름>이 특히 그렇다.
이 이야기의 화자라는 인간(소설가 세키구치)이 어딘가 나사가 빠진 인간이라서 남들이라면 당연히 보았어야 할 것을 못본다. 만약 그가 제대로 보기만 했으면 이야기는 초반에 끝나버렸을 것이다. 결국 이 미스테리의 트릭은 화자의 눈이 삐꾸라는 점에 있었던 거다. 그러니 사실 이야기의 결말은 꽤나 허탈하고 싱거운 셈이다.

하지만 그 미스테리가 풀린 뒤에 드러나는 사건의 진상이 워낙 상상을 뛰어넘게 엽기적이라 … 독자들도 그 반칙 트릭을 보고서도 (세키구치 처럼) 모르고 지나치는 일이 벌어진다.

<망량의 상자>는 또 다른 주변인 주인공 기바 형사가 주요 화자로 등장한다.
게다가 얼빠진 소설가 세키구치도 화자로 끼어들고 … 그 와중에 서로 다른 계열의 두 싸이코가 한데 만나서 정말 엽기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

소설의 중반쯤 되면 누군가가 유괴(?)되는데, 나도 그 사건의 트릭은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 내 상상의 수준을 한두단계쯤 뛰어넘고도 또 끝까지 아주 비릿한 엽기의 향취를 풍기며 끝낸다.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처음 책에 등장하는 소설에 담겨있다. 그걸 처음 읽을 때의 느낌과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었을때의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

망량의 상자에서 저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 중 하나는 특별한 범죄라고 해서 반드시 특별한 사람이 저지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누구나 잠깐씩 망량의 손길이 닿는 순간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정신줄을 놓는 순간이다. 저자에 따르면 범죄는 악인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몇몇 상황의 겹쳐짐에 의해서 발생한다. 우리들 모두는 성장하면서 각자의 욕구를 축적해간다. 그 중에 일부는 몇몇 우연한 만남 탓에 그 욕구가 조금 특이한 방향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그동안 축적한 욕구의 충족이 완벽하게 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어떤 순간이 마지막 방아쇠를 당긴다. 그것이 엽기적인 범죄가 되기도 하고, 행복의 완성이 되기도 하며, 누군가에게는 둘 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망량의 상자에 등장하는 범죄는 모두 끔찍함의 엣지를 달린다. 하지만 알고보면 거기에 진짜 끔찍한 인물은 하나도 없다.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최선을 다한, 알고보면 조금씩은 처연하고 조금씩은 안타까우며 조금씩은 공감이 가는 인물들이다.

특히 마지막까지 남은 범죄자의 경우가 더 그렇다. 그에겐 정말 별다른 죄가 없다. 그는 그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적응 해왔을 뿐이다. 하지만 어느 짧은 순간 그가 ‘이 세계’가 아니라 ‘저 세계’의 맛을 보면서 그는 엽기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교고쿠도가 말했듯, 행복해지는 방법은 간단했다. 인간이기를 그만두면 되는 거였다.


오른쪽이 저자 교고쿠 나쓰히코

이 책의 저자인 교고쿠 나쓰히코는 참으로 특이한 인물이다. 미술디자인과 소설을 병행하는데, 공식석상에 손가락 없는 장갑을 끼고 기모노를 입고 나타난다. 거기에 일본의 고대 근대 역사와 각종 기담에 대한 해박한 지식, 거기에 정신분석학에 대한 나름의 깊은 이해까지 녹여냈다는 점에서 이 양반은 일본의 움베르토 에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사건의 구성은 에코보다 한 두 수 위다. 특히 엽기적인 면으로 … 일본에서는 아마도 A급과 B급을 두루 망라하는 문화계의 스타인듯 하다.


이 소설은 만화와 애니매이션, 그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엔 소설보다는 만화가 더 많이 알려진 모양이다.


검색하면 나오는게 이런 이미지들이니 …


하지만 기왕 읽으려면 소설을 읽으시길 추천한다.

영진공 짱가

시사모엔 알이 있다

지난 주엔 대학 동아리 친구 몇을 만났다. 나까지 넷, 알고 지낸지 이제 십년이 넘어가는 사이다.

비가 오고 있었다. 대학교 앞이라 어지간한 메뉴는 만원 어치씩 파는 횟집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산낙지와 오징어 튀김을 놓고 술병을 기울이다가, 이윽고 다른 안주를 주문하자는 말이 나왔다. J가 ‘시사모 구이’가 어떻겠냐고 물었다. J를 뺀 나머지 셋은 아직 시사모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맛있다는 그녀의 말에 우린 시사모 구이를 주문했고, 잠시 후에 시사모들이 접시에 담겨 나왔다.

 ”이런 물고기구나. 맛있네.”
 “그치? 알이 꽉 차 있어서 얼마나 맛있다구.”

J의 말대로 시사모마다 알이 꽉 들어차 있었다. 이 시사모에도, 저 시사모에도 있었다. 혹시 이번에 집어드는 놈엔 없는 게 아닐까 하며 콱 깨물어도 역시 빈틈없이 알은 꽉 차 있었다.

 “어라, 알이 다 있네.”
 “그러네.”
 “이거 신기하다. 어떻게 다 알을 품고 있지?”

시사모를 처음 먹는 셋이 희한해 하자 J가 말했다.

 “시사모엔 원래 알이 있어.”
 “근데 지금 전부 다 알이 있는 거 같은데?”
 “응. 얘들은 항상 알이 있어.”
 “어떻게 알이 항상 있을 수 있어? 그게 가능해?”

우린 시사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항상 알을 품고 있는 생물이라니 웃기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지 뭔가.

 
“알을 계속 품나 보지.”

 “그래도 알을 낳긴 낳을 거 아냐. 그러면 알이 없어야지.”
 “하지만 이건 항상 알이 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글쎄.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시사모엔 늘 알이 있었어.”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거지. 어떻게 계속 알을 품고 있냐는 거야.”
 “얘들은 알을 안 낳아? 품고만 있어?”
 “허 참 이놈들 괴상하네.”
 “닭도 매일 알을 낳잖아.”
 “시사모도 알을 매일 이만큼씩 낳는다고? 그럴리가. 그렇대도 어쨌든 알을 낳을 거 아냐.”
 “그러면 그땐 알이 없어야지.”
 “하지만 알이 늘 있다는 거잖아.”
 “잡으면 언제나 알이 있는 거잖아.”
 “항상 알을 품고 있는 물고기인 거네.”
 “뱃속에 가득 만들어 놓고 매일 한알씩만 내보내는 건 아닐까?”
 “설마. 그리고 그걸 다 낳으면?”
 “하나 낳으면 바로 하나를 새로 만들고.”
 “됐어. 이거 사실은 알이 아니라 살인 거 아냐?”
 “아, 이거 살이야?”
 “아니, 아니. 알이야.”

이미 적당히 취한 넷이서 시사모를 앞에 놓고 아무리 토론(?)을 해도 그럴듯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종업원까지 부르고 말았다.

 “저기요, 질문이 있는데요. 이 시사모 속에 있는 게 알 맞죠?”
 “네, 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시사모에 알이 있나요?”
 “시사모엔 원래 알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알이 없는 시사모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 더 작은 것들 말고, 이만큼 큰 것들을 잡는 거죠. 그러면 알을 품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알을 낳으면요? 걔들 중에서 이미 알을 낳아버린 애들은요?”
 “글쎄요. 제가 일하면서 본 시사모엔 항상 알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그 이상은 몰라서 다른 답변은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대한지 얼마 안 됐고, 다음 학기쯤 복학을 생각중일 것만 같은 분위기의 종업원은 그렇게 ‘-습니다’ 체로 더이상의 술주정을 거부하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의문이 풀릴 도리가 없었다. 별 수 없이 우린 다른 이야기를 해나갔다. 아주 잠시 지렁이와 조개의 번식에 대해 이야기했고, 문득 집단 자살이 화제에 올랐고, 일반적인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종교 이야기로 넘어갔고, 환생과 내세에 대해 떠들었다. J가  이명박과 신정아의 눈이 닮았다고 주장해서 한바탕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느새 시사모는 딱 네 마리 남았다. K가 접시의 네 귀퉁이에 시사모를 한 마리씩 놓으며 말했다.

 “자, 이제 한 마리씩 먹으면 되겠다.”

그러자 다시 시사모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딴생각 하는 걸 눈치챈 Y가 물었다.

 “얘기 안 듣고 뭐해?”
 “미안. 자꾸 시사모 생각이 나서. 이놈들, 이 괴생물체들.”
 “하하, 괴생물체.”
 “아니지, 어쩌면 생물이 아닐지도 몰라. 사실은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제품인지도 몰라. 종업원들이 일렬로 앉아서 매일 이것 뱃속에 알을 넣고 조립하는 거야.”

……

자정은 이미 지났고 비는 계속 내렸다.

가게 밖에선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취한 양복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가 비를 맞으며 노상방뇨를 시도하고 있었고, 옆에 있던 여자는 남자를 부축하랴, 취해서 조준할 정신도 없는 남자 대신 고추를 잡아주랴 정신이 없어 보였다. 오줌이 안 나오는지 한참 비틀거리던 남자는 결국 넘어지고 말았고, 여자는 그를 부축해서 어디론가 가 버렸다. 잠시 그들에 집중하던 우리는 다시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수다에 수다를 거듭하다가, 그 남자처럼 취하기 전에 자리를 접고 헤어졌다.

다음날이었다.
돌잔치가 열린 분당에 갔다가 지인의 승용차를 얻어 타고 서울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길이 막혔고, 차에 탄 사람들끼리 각자 가지고 있는 음악들을 돌려가며 스피커로 들어보고 있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문득 지난밤의 시사모가 떠올라 입을 열었다.

 “시사모 아세요?”
 “그럼요.”
 “시사모엔 항상 알이 있대요.”
 “그렇죠.”
 “어떻게 그럴 수 있죠? 항상 알이 있다뇨.”
 “아, 그게요.”

한 분이 입을 여셨다.

 ” 산란기에 잡아서 냉동 보관하는 거니까요.”
 “……간단하네요.”
 “간단하죠.”

간밤에 그렇게 열광하던 시사모에 대한 의문은 그렇게 간단히 풀려버렸다.
그런데 전혀 시원하거나 개운한 기분이 아니었다.
항상 알을 품고 있는 물고기, 대체 언제 알을 낳는 건지, 낳기는 하는 건지, 알을 낳는 게 목적이 아니라 품고 있는 게 목적인 물고기, 언제 어떤 놈을 잡아도 뱃속에 알이 그득한 신비로운 물고기… 가 사라진 것이었다.
허탈하고 아쉬웠다.
우연히 주운 보석 브로치를 다시 또 금방 잃어버린 사람의 심정으로 터덜터덜 집에 돌아왔다.

잘 가라, 하룻밤 내 마음의 괴생물체였던 시사모들아. 사실은 너희를 각별히 여기려 했다.
그런 괴생물체가 하나쯤 있어 주면 나는 사는 게 조금 더 신날 것 같은데, 너희는 아니었구나.
 

열빙어(시사모)
[명사]
 [동물] 바다빙엇과의 물고기. 몸의 길이는 15cm 정도이고, 가늘고 길며 옆으로 평평하다. 등 쪽은 엷은 풀색이고 배, 몸의 양쪽 언저리는 은백색이다. 주둥이 끝이 뾰족하다. 우리나라 북부에 분포한다. (출처: 다음사전)
영진공 도대체

스테이 (Stay, 2005)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먼 영화”



이완 맥그리거의 이전 출연작인 <아일랜드>나 방은진의 감독 데뷔작 <오로라 공주>가 비평적으로는 별로 칭찬받을 만한 구석이 없는 영화라고 할 지라도 일단 대다수의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는 영화들이었다고 한다면, <스테이>와 같은 영화는 꽤 준수한 스타 캐스팅과 기대 이상의 높은 완성도를 갖추었으면서도 관객들로부터는 철저하게 외면 당하는 정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스테이>는 다루고 있는 내용이 너무 어렵다거나 내러티브의 구성이 혼란스럽기만 하고 정리도 제대로 안해주고 끝을 맺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영화 속의 혼란, 즉 주인공이 경험하는 혼란스러움의 진상이란 것이 최종 결말에서 마침내 밝혀졌을 때 ‘고작 그런 거였나’라는 반응 밖에 얻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다시 말하자면 <스테이>는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으나 이야기의 출발점 자체가 다수 관객들의 동감을 얻어내기가 쉽지 않은 설정의 영화였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일부 관객들은 미스테리의 결론이 다소 허전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작품 전체를 쉽게 폄하하지는 않는다. <스테이>는 이야기의 최종 결말에 앞서 러닝타임 전체에 걸쳐 보여지는 밀도 높은 연출과 배우들의 성실한 연기, 거의 모든 컷과 씨퀀스에서 돋보이는 탁월한 비주얼, 그리고 이 영화가 끌어들이고 있는 다양한 이종 장르들과 메타포의 풍성한 배합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포만감을 선사해주는 영화다. 앞으로 이완 맥그리거에게는 <아이 오브 비홀더>, 나오미 왓츠에게는 <멀홀랜드 드라이브>나 <21그램>과 함께 자주 언급될만한 이 영화는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나면, 다름 아닌 젊은 캐나다 출신 배우 라이언 고슬링의 영화로 모든 내용이 다시 정리되고 기억될 작품이기도 하다. 실망스럽기만 한 스릴러 영화가 아니라 사실은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의 간절하고도 슬픈 감정의 깊이를 전달하고자 했던 영화 <스테이>의 진짜 표정이 라이언 고슬링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