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의 게임”, 너희들은 주인공이 아니야!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또는 “불과 얼음의 노래(A Song of Ice Fire)” 저자인 조지 쌍알(R. R.) 마틴을 소개하자면 이 할배는 1948년 미국 뉴저지주 베이욘의 빈민가 출신으로 어머니는 아일랜드인, 아버지는 이탈리아 혼혈이었답니다. 처음 만든 이야기가 자기가 기르는 거북이들이 자꾸 죽는 걸 보고 거북이들 사이에 흉흉한 음모와 모략이 펼쳐지는 이야기였다니 참으로 꾸준한 양반입니다. 마블코믹스 광팬으로 출판사에 독자투고로 시작해서 미국버전 동인지 작가로 글쓰기를 시작하여 이후 SF 단편소설로 등단했고 휴고상, 네뷸러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범상치 않았는데 주로 판타지와 호러를 섞은 SF를 썻고, <환상특급> <맥스 헤드룸>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이 <왕좌의 게임>에도 거대 장벽과 그 장벽에서 작동하는 기계들 같은 SF적 요소가 많이 나오죠.

<왕좌의 게임>을 요약하자면 “복잡한 스토리라인 속에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만들어놓고 이들이 멋진 대사를 치게 하고는 죽여 버리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쌍알 마틴 옹이 “나한테 잘해. 안 그러면 다음은 티리온 차례가 될거야. (Be Nice To Me Or Tyrion Is Next)” 라는 팻말을 들고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되었는데, 정말 그러고도 남을 인간입니다. “나한테 다음 권이 언제 나오냐고 누가 물어볼 때마다 스타크家 애 하나씩 죽일거야”라고 협박하는 사진도 있고요.

“이번엔 내 차례인가?”

왕좌의 게임이 인기 있는 이유도 사실 그 때문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늘 긴장해야 하죠, 누가 어느 순간 갑자기 죽을지 모르니까요. 원래 주인공은 안죽고, 죽더라도 뭔가 의미있게 죽는 게 대부분의 소설들의 불문율인데 여기선 안 그럽니다. 그냥 갑자기 그냥 막 뜬금없이 죽어요. 즉, 이 소설은 판타지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를 처참히 박살내는데, 그럼으로써 그 어떤 판타지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현실감을 느끼게 합니다. 개x끼들이 권력을 잡고 다 질 것 같던 전쟁에서도 이기고 약자들은 죽고 배신자들이 떵떵거리고 잘 사는 장면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정치판의 현실이 떠오르기도 하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판타지물의 전형은 톨킨 옹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입니다. “반지의 제왕”은 J.R.R. 톨킨이 북유럽의 옛 설화들을 수집하고 조립해서 새로 만들어낸 유럽설화의 집대성판인데요, 이 양반은 1892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살다가 73년에 사망했으므로 19세기부터 20세기를 산 사람입니다. 1925년부터 195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헌학과 언어학 교수로 재직한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그가 만들어낸 호빗과 휴먼과 엘프와 드워프와 마법사, 그리고 드래곤과 오크와 기타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세계가 이후 모든 서양판타지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SF쪽으로 전환되어서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기본 틀이 되었고, 게임으로 전환되면서는 테이블 보드 게임에서 시작해서 “디아블로”나 “울티마 온라인”, “워크래프트”, 우리나라의 “리니지”의 바탕이 되었고요. <무협소설>이 중국문화권 사람들이 꿈꾸는 신화의 표현이라면, 이 반지의 제왕 속 판타지 세계는 영국미국 문화권 사람들이 공유하는 신화입니다.

“마이 프레셔어스으리~“

사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북유럽의 옛 설화들과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문장력으로 장식된 1, 2차 세계대전의 판타지적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영국은 인간들과 엘프, 드워프로 구성된 반지원정대를, 사우론은 히틀러를, 사루만은 그 꼬붕인 무솔리니쯤을 상징하는 셈이고요, 인간 같지 않은 오크들은 식민지 주민들이나 일본사람들 쯤을 상징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우리에겐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선포된 계기라서 꽤 그럴듯한 전쟁 같지만, 사실 따져보면 양쪽편 다 식민지들 더 많이 차지하려는 싸움질이었고요. 이건 2차 세계대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식민지를 많이 갖고 있거나 더 이상 가질 필요 없는 나라(미국과 영국, 뒤늦게 소련) vs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해서 식민지를 마구마구 필요로 했던 나라들(독일, 일본, 이태리)간의 싸움이었던 거죠. 물론 2차 세계대전에서는 그놈의 히틀러와 나치가 인종청소라는 엽기적인 짓을 저지른 덕분에 선과 악의 전쟁처럼 보이지만 사실 미국이나 영국이 히틀러가 나쁜 놈이라서 전쟁을 한 건 아니었고, 히틀러를 죽였다고 해서 악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가 2차 대전 덕분에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그런 것을 제외하고 나면 1차 대전은 약 1천만 명이 죽었고, 2차 대전은 약 5천 만명이 죽어나간 비극일 뿐입니다. 사실 2차 대전 정리과정에서 지금의 중동 갈등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지금 테러가 난무하는 세상이 된 거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반지의 제왕”은 신화이지만, 동시에 역사에 대한 거대한 왜곡물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모든 신화들은 다 이런 속성이 있죠. 우리는 어떤 큰 사건이 벌어지면 그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려합니다. 그 사건을 이야기 구조로 바꾸어서 기억하게되고 그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말하는 어떤 의미나 교훈은 그런 과정에서 추출되는데, 예를 들자면 “사필귀정”, “역사는 정의의 편이다.” 뭐 이런 거 말이죠.

허나 “왕좌의 게임”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왕좌의 게임은 지금까지 판타지에 대해서 기대하던 것들을 하나씩 배반하는 이야기입니다. 드라마 속에서도 배반이 마구 벌어지지만 이야기 전체에서 의미나 교훈을 찾으려는 독자와 시청자들의 노력에 대한 배반은 그보다 더합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들: 정의, 원칙, 명예, 용기, 신의/성실, 심지어 지략이나 돈, 권력 조차도 소용이 없는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이 드라마의 모토는 “가차없는 세상”이지요.

원래 판타지 영화의 원칙대로라면 스타크 가문이 주인공일테지요. 위에 언급한 가치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들이니까요. 하지만 이들이 작살나는 건 모두 바로 그 가치들 때문입니다. 네드 스타크가 죽은 건 명예와 정의,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죠. 케이틀린 스타크가 티리온을 체포할 때 역시 명예와 신의성실에 따라 협력했던 사람들도 다 잦되고요. “피의 결혼식”도 결국 불문율은 안 깨겠지 라는 순진한 기대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원작에서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오류 때문이었다던데 제이미 라니스터가 볼튼한테 스타크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한 말을 볼튼이 오해하면서 … 그렇다면 더 황당한 전개이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렇다고 지략과 돈과 권력까지 갖춘 라니스터 가문이 계속 떵떵거리고 잘 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더 놀라운 건 아직 본편인 얼음과 불의 전쟁은 시작도 안했는데 정작 그 본편에서는 인간이 주인공이 아닐 거 같다는 점입니다. 불의 마녀가 말했듯이 지금까지 다섯 왕의 전쟁은 그냥 몽매한 인간들이 벌이는 왕좌의 게임이었을 뿐, 진짜 전쟁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얼음괴물들과의 전쟁이고, 여기에는 남쪽에서 올라온 불뿜는 용들이 주인공이 될 듯합니다. 이 용들은 용 엄마 말도 잘 안듣는 애들인가 봐요.

Margaret Mahler 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우리의 자아가 발달하는 과정은 결국 나와 내가 아닌 것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봤습니다. 이걸 대상관계 이론이라고 하는데요, 말러에 따르면 우리는 처음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세상과 나의 구분이 없는 상태로부터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걸 정상적 자폐단계라고 하는데, 이때는 내 마음과 현실이 구분이 안되고요, 꿈꾸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꿈에서의 모든 사건들은 결국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것인 것 처럼, 이때는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이 곧 나입니다. 그러다가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하면서 드디어 자아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죠.

내가 아닌 것은 뭐냐하면 결국 내 맘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들인데, 다시 말해서 세상이 내 맘과는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사실, 즉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우리에게는 자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하고, 자아가 생기면 우리는 자아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게 됩니다. 자아의 영역을 넓힌다는 건 결국 내 자유를 늘리는 것인데, 3살 때쯤 이런 개념이 생기는데 그래서 그때 미운 세 살이 되는 것이랍니다. “싫어!” “안 해!”라는 말이 최초의 자유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다음에야 우리에게 지능이라는 것이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지능은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상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구석을 찾고 조작하는 능력입니다.

이 드라마도 시청자들에게 일종의 이런 성장과정을 경험하게 합니다. 정의가 이기고 불의가 패퇴하는 사건이 당연히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할 때는 우리는 소설을 진짜 세계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과 구분하지 못하는 자폐 단계인 것입니다. 이러면 소설 속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게되죠.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기대한 대로 소설이 전개되지 않을 때,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한 애가 속절없이 댕강댕강 대가리가 잘려나갈 때, 이 세계가 나와 상관없이 내 외부에 존재하는 나와 독립적인 세계라는 걸 깨닫고 그제서야 이 세상의 작동에 대해서 진심으로 알려고 합니다. 물론 이 단계에서 자기 기대대로 드라마가 전개되지 않는다고 화내는 인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발달을 거부하는 것인데요, 소설을 자기 소망충족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죠. 마치 여자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연애를 포기하고 2D에 만족하는 오덕과 같은 상태라고나 할까요.

나는야 내 의지로 발달을 거부하지

사실 이 드라마를 제대로 즐기면 그런 깨달음을 경험하는 순간을 맞이해야 합니다. 네드 스타크가 죽은 건 그가 단지 명예와 정의와 원칙을 따라서만이 아닙니다. 힘이 생존을 위해서 작동하는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요. 바리스 경이 네드에게 “도대체 어쩌자는 생각으로 당신이 알게된 사실을 세르세이에게 말한 거요?” 라고 질문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롭도 마찬가지죠. 원칙을 따르다가 비극에 처합니다.

그런데 원칙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구현해냈을 때 의미가 생기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걸 통해 그 사람의 능력이 증명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걸 구현한 인간을 따르는 것이고요. 그러다 보면 그게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는 것인데 그러기 전까지 원칙이나 정의는 그저 누군가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정의가 이겨야 되고 그렇지 못하다면 세상이 불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에 포기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정의는 언젠가 이길꺼야 따위 기대만 하며 손가락만 빨고있을 수만도 없습니다. 정의가 못이긴 건 그만큼 준비와 노력을 안했고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니 뭐가 어쨌든 일단 이겨놔야 정의든 뭐든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 가차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그저 겸손일 뿐이었습니다. 티리온 라니스터가 오래 사는 이유도 그것인 듯 보입니다. 그는 오만할 수 없는 존재죠. 제이미 라니스터도 겸손을 배우면서 오히려 쓸만한 인물이 되는 건지, 아닌 건지 …

영화로 본 남자들의 연애심리

연애 할 때 남자는 어떻게 변할까요?

그걸 다 얘기한다는 거는 불가능한 일이니 대표적으로, <연애소설>속 지환(차태현)과 <내 아내의 모든 것>에 등장하는 성기(류승룡)을 예로 들어 살펴 보겠습니다.

<연애소설>의 지환은 우연히 마음에 꽂힌 여자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다가 뒤늦게 자전거 타고 쫓아가서 어설픈 고백을 하고,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시계로 얼굴을 가린 채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해주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매우 닭살스럽지만 내성적이고 소심한 공부벌레들에겐 상당히 공감가는 모습이죠. 그런데 그 겁 많고 조심스럽던 이 남자, 극장에서 자기 여자친구 옆자리에 다리를 올려놓은 건달에게 발을 치워달라고 요구하기도 하죠, 물론 속으로는 덜덜 떨고 있습니다만. 그 이전에는 한번도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없었을 이 인간이 처음으로 용기를 낸 것 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혼자 샤워를 하면서 뿌듯해 하기고 하죠. 연애 할 때 남자는 이렇게 변하게 됩니다.

<내 아내의 모든 것>에 등장하는 성기는 바로 이런 모습의 극대화 버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연애할 때 남자는 시인이 되고, 영웅이 되며, 철학자와 박애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내성적이던 권상우는 학교 일진들과 옥상에서 결투를 벌이고, <프리티우먼>에서 냉혹한 인수합병가였던 리처드 기어는 갑자기 가치 있는 물건을 만드는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하고는 맨발로 잔디를 걸어보잖습니까 … 이게 모두 다 연애 때문입니다.

원래 남자들은 그렇게 키워지지 않았죠. 남자들의 관계는 목표달성을 위한 계약관계로 신의성실의 의무는 목표달성까지만 유효하다고 배웁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상대방의 속마음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고, 서로 깊이 알려고 하지도 않고요 그저 우리가 적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면 됩니다. 남의 내면에 대해 무관심하면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는 법인지라 그래서 남자들은 감정을 이해하거나 잘 묘사하거나 감정을 교류하는 분야에서 초보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던 남자가 연애를 하면서 일시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연애할 때는 내성적이던 남자는 외향적이 되고, 외향적이던 남자는 내성적이 됩니다. 왜냐하면 연애는 자기 성찰과 상대와의 소통을 모두 필요로 하는데 자기성찰을 위해선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내성능력이 필요해지고 소통을 하기 위해선 마음 속의 감정과 생각을 상대에게 드러내는 외향성이 필요하기 때문인 거죠.

영화 속의 성기는 바로 그런 양성성을 발휘하는 남자의 대표적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닭살 돋는 대사들 … “(나를 못찾으면)미아보호소에 가 있어요. 당신은 애기니까.!” … 이런 닭살돋는 대사를 거리낌없이 내뱉으려면 용기와 자신감이 어찌 아니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신감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신과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래서 닭살 대사는 주변에겐 닭살인데 둘 사이에선 서로의 신뢰를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난다는 점이죠. 여자들은 연애할 때는 그렇게 멋있고 자상하던 자기 남자가 결혼하더니 촌스럽고 무뚝뚝한 모습으로 변했다고 하는데, 그거 오해입니다! 사실 남자는 원래 촌스럽고 무뚝뚝했으나 연애 때문에 잠깐 변신을 했었던 거죠. 공주가 키스를 해 준 개구리가 왕자가 되는 건 동화 속 얘기가 아니라 현실이었던 겁니다.

<내 아내의 모든 것>에 등장하는 두현(이선균)도 그런 남자였습니다. 한때는 두현도 로맨틱하고 용감했었죠. 일본에서 처음 만난 정인에게 “저기요, 이런 미인을 만난 것도 영광인데 제가 밥한번 살께요.”라고 던지는 것 자체가 두현에겐 대단한 일이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목표를 달성한 뒤에는 이런 변화가 끝나고 원상태로 복귀합니다.

이제 두현의 목표는 다른 것들로 교체됩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성공하기 같은. 아내를 비롯한 삶의 나머지 요소들은 그저 그 목표달성에 필요하거나 방해가 되는 조건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정인은 그런 무뚝뚝하고 촌스러운 남자랑 결혼한 게 아니라 연애할 때의 균형잡힌 그와 결혼한 건데, 결혼 후에도 그런 모습을 기대하며 계속 행동하는데 두현이 받아주지 않으니까 갈수록 그 행동의 강도가 높아진 거였습니다.

정인이 이렇게 말하죠 … “침묵에 길들여지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에요. 하지만 전 계속 말할 거예요. 제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을 거예요.” … 이건 두현이 변하더라도 자신은 변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마음은 정인이 두현에게 하는 대사 “나는 예뻤고.. 당신은 멋졌고.. 우린.. 아름다웠잖아.. 나.. 아직 예뻐?” 에서도 드러납니다.

성기가 “나는 네 아내를 그냥 원래대로의 여자로 대해줬을 뿐이야”라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두현도 성기와 정인의 관계가 진전되는 것을 보며 뒤늦게 정인의 심정을 이해하죠. “니가 항상 투덜대는 게 외로워서 그런 거였더라고. 내가 외로우니깐 그렇더라고.”

연애가 남자에게 발휘하는 마법은 어떤 경우에는 오래 가고 어떤 경우엔 금새 사그라지게 됩니다. 그 차이는 일차적으로 남자에게 달려있지만 어느 정도는 여자의 몫도 있습니다.

왜인고하니, 남자는 처음에 여자의 이미지 때문에 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걸 목표로 삼고 움직입니다. 하지만 목표달성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다시 새로운 목표를 찾아 움직이게 됩니다. 물론 대개 그 목표는 성장이나 발전과 같은 것이죠.

그러니까 남자가 그녀를 통해서 변화할 것이라 기대하는 한, 그리고 그 변화가 그에게 반가운 한, 그에게서 연애는 끝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퍼맨, 헐크, 배트맨의 심리학

 


 


 


 



 


 

수퍼맨: 신 혹은 천사



수퍼맨은 현대판 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슈퍼맨을 볼 때마다 지상의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천국에서 내려온 천사를 그린 <베를린 천사의 시> 라는 영화를 떠올리곤 합니다. 그는 하늘 저편에서 내려왔고, 애초부터 고귀하고 순수한 성품을 타고났고, 거기다가 지구상의 그 어떤 존재보다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이라기 보다는 신에 가깝습니다.


 


수퍼맨의 능력은 보통 인간의 능력과 비슷하지만 질적으로 다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 시선으로 눈빛공격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빛 공격은 심리적인 것이죠. 하지만 수퍼맨은 정말로 눈빛이 레이져 광선입니다. 우리도 숨을 들이마시고 내쉼으로써 촛불 정도는 끌 수 있지만 수퍼맨의 들숨과 날숨은 허리케인만큼 강하고 용암도 식힐수 있을만큼 차갑죠. 수퍼맨의 청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인간의 능력을 초월(super)합니다. 그런 그가 정체를 숨기고 마치 평범한 인간인 것처럼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신이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옛날 이야기들을 연상하게 하는 설정이죠.



 






神 티를 팍팍 내는 포즈 …



 



수퍼맨을 이해하는 심리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재들의 고민이죠. 이건 ‘미운오리새끼’ 이야기랑 비슷합니다. 수퍼맨은 어릴 적에는 자신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지요. 그의 고민은 남들보다 뒤쳐저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너무 앞서기 때문에 생깁니다. 마치 오리들 사이에서 자라난 백조처럼 말이죠.

 


영재들도 그렇습니다. 남들보다 머리가 좋은 아이들은 학교에서 잘 지낼 것 같지만 사실은 정 반대입니다. 대부분의 영재아이들은 선생님에게 딴지를 걸거나 논쟁을 벌이고(예를 들어, 선생님 말씀이 틀렸는데요. 이런 식으로 말이죠), 정상적인 수업은 너무 지루하기 때문에 딴짓을 하다가 사고를 치고, 친구들과도 전혀 다른 취미생활을 하다 보니 왕따를 당하기 쉽습니다.


 


비정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균에서 벗어나면 누구든 비정상이죠. 지나치게 낮은 지능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높은 지능도 문제가 되는 겁니다.


 








얘야, 교실에선 네가 선생보다 똑똑하다는 걸 티내면 안된단다 …


(이건 실제로 영재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첫번째 기술입니다)


 



두 번째 심리는 상황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정체감입니다. 수퍼맨은 그의 고향별 크립톤 행성에서는 정말 평범한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지구에 오면 그는 수퍼맨이 되지요. 그의 유일한 약점이 크립톤 별의 물질인 크립토나이트라는 것도 이와 직결됩니다. 크립토나이트 앞에서는 그도 평범한 인간이 되는 거예요.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여, 유명 연예인은 TV나 영화 속에서는 정말 멋있고 대단해서 평범한 우리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의 어린 시절을 잘 아는 친구들은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알거나 혹은 좋지 않은 모습을 뒤에 숨기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쟎아요. 아인슈타인도 우리는 인류의 평화를 걱정하는 순수한 과학자라는 모습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의 가족들은 무책임하고 위선적인 남편이자 아버지로 그를 기억하기도 한다지요.







 



 


 

헐크: 억압과 폭발



헐크와 부루스 배너는 인간의 양면성을 상징합니다.

헐크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억압’이라는 방어기제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말하길 우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욕구나 본능을 억누르고 부정하면서(이게 억압입니다) 무의식 속에 숨겨둔다고 했거든요. 그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거죠.

 


헐크의 다른 모습인 부루스 배너 박사는 착하고 점잖고 폭력을 싫어하는 공부벌레 순둥이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정말 완벽하게 착하고 점잖기만 할까요? 그렇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죠.


 


인간에게는 공격성이라는 본능이 있습니다. 즉 우리 모두에게는 공격성이 있는데 부루스 배너 박사는 그 공격성을 무의식 속에 꼭꼭 가두어둔 겁니다. 그러다가 과학실험이 우연히 이상한 영향을 미쳐서 그의 무의식 속에 감금되어 있던 공격성이 뛰쳐나오는 겁니다. 헐크가 바로 그 모습이죠.


 







난 늘 화가 나 있어… 평소엔 그냥 참고 있을 뿐이야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심리학의 원리는, 지나친 억압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 주변에도 헐크처럼 되는 사람들이 있지 않던가요? 평소에는 순둥이처럼 굴다가 갑자기 분노를 폭발시켜버리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깁니다. 불만이나 분노를 그때 그때 해결했더라면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인정도 받고 대우도 더 좋아졌을텐데, 갑자기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버럭버럭 화를 내니까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하게 되지요. 그러다보면 직장을 잃을 수도 있고, 분노를 폭발시키며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물건을 부수었다면 손해배상을 해야 하거나 심하면 감옥에 가야 하는 등의 큰 손해도 보게 됩니다.




보통 건강한 사람들은 자기의 본능이나 욕구를 지나치게 억압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생산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하지요. 이런 방식을 ‘승화’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공격성이 높은 사람들이 자기 공격성을 승화시키면 경찰관이나 소방관, 혹은 격투기 선수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들이 발휘하는 공격성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공격성이죠.


 



 



 


 

배트맨: 강박과 불안



배트맨의 기본 심리는 불안감 입니다.

배트맨은 법이나 경찰을 믿지 않습니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 대로변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았던 그는 국가권력이 개인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자력구제의 원칙을 따릅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생활은 필연적으로 불안감을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사회와 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렇다고 믿기 때문에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지요. 하지만 더 이상 사법 시스템을 믿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그래서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결국 그걸 해결해야 하는 주체는 나 혼자라고 생각한다면, 도시는 끝없는 두려움의 원천이 됩니다. 모두를 의심해야 하고 늘 자기를 방어할 준비를 해야 하지요. 배트맨의 삶이 그래서 시작됩니다.


 


배트맨은 자기의 정체를 숨깁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믿을 수 없으니까요. 배트맨이 방탄망또와 배트카를 비롯한 온갖 장비를 몸에 두르고 다니는 이유는 범죄로부터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배트맨의 심리상태는 편집성 성격장애와 강박성 성격장애가 혼합된 모습입니다.


 


편집성 성격장애자들은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모두가 나를 질투하고 시기하며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여기죠. 그래서 자기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면 누군가의 음모라고 여기고 복수를 준비합니다. 의처증, 의부증 같은 것도 편집성 성격장애의 일종인데, 이게 심해지면 정말 남을 해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무서운 성격장애죠.


 


강박성 성격장애자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하는 일이 잘못될 까봐 늘 불안해합니다. 세균에 감염될까봐 맨손으로 문손잡이도 안 만지거나 악수도 못하고, 옷에 뭐가 묻을까봐 공원벤치에 앉지도 않고 음식점에도 못 들어가고, 일을 할때도 뭐가 잘못될까봐 끝없이 재검토를 하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유형입니다. 그게 다 그저 불안하기 때문이지요. 배트맨이 온갖 장비로 완전무장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조커는 배트맨의 악몽 속에서 기어나왔음직한,



배트맨이 두려워하는 모든 것의 총합





 

우리 모두에게는 어느 정도의 강박증도 있고 약간의 편집증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건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용한 성격입니다. 화장실에서 용변을 본 뒤에나 외출하고 돌아와서 손을 씻는 것은 아주 좋은 습관이죠.

 


우리 세상에서는 언제든 사기 당하거나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유비무환의 정신을 가지는 것도 좋은 일이죠. 하지만 그게 지나치면 문제가 됩니다.


 


 


영진공 짱가


 


 


 


 


 


 


 


 


 


 


 


 


 


 


 


 


 



 

“프로메테우스”, 파랑새 설화의 SF 버전



 


 


 


 



 


 


 


 


 


* 스포일러 잔뜩 … 주의 요망 *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인 세부사항에서 빈틈이 많긴 하지만, “프로메테우스 (Prometeus)


는 여운이 깊게 남는 영화다.


 


그 이유는 이 영화의 정서적인 구조가 아주 간결하고 두툼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믿음과 배신의 과정, 선망과 환멸의 과정, 그리고 원망과 복수의 과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3가지 과정은 우리가 성장하며 겪었던, 그 중에서도 가장 뇌리 깊숙이 남았던 정서적 경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영화는 외계인과 인간, 탐사대와 데이빗 이라는 구도를 사용한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관객들은 한 인간형 외계인이 웅대한 지구의 자연 속에서 정체불명의 물질을 섭취하고 분해되는 장면을 본다. 배경음악이나 주변 환경, 그리고 그 사건의 결과를 보며 대개의 관객들은 그것이 진화를 촉발하기 위한 일종의 희생이라고 해석한다.


 


그로부터 수억 년 후, 인류는 고대 벽화들 속에서 그 외계인의 자취를 찾아내고 흔적을 따라 우주탐사여행을 떠난다. 이 프로젝트의 발제자인 두 고고학자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들은 그 픽토그램을 부모가 남겨놓은 초청장이라고 해석하고, 자신들이 부모를 찾아가는 첫 번째 자녀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이 외계인들에 대해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 기대와 희망은 행성에 도착한 이후 그들이 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헬멧을 벗고 무모한 탐사를 벌였는지를 설명한다. 그들은 전적으로 자신들의 창조주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분들이 우리에게 해롭거나 나쁜 것을 주실 리가 없어.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두신 거야!”


 


하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인류가 만들어낸 새로운 종, 안드로이드 데이빗에 대해서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적극적인 차별을 한다. 데이빗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들이 그렇게 만든 것에 불과하며, 데이빗에게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즉 영혼이 결여되어 있다고 믿는다(사실 데이빗에게 결여된 유일한 능력은 아마도 생식능력 뿐이리라). 그래서 그들은 데이빗이 인간을 흉내낼수록 더 거부감을 보인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그 데이빗은 찰리 박사에게 질문한다. “인간은 왜 자기를 창조했을까?”


 


사실 이것은 인류가 외계인에게 묻고자 하는 질문이다. 찰리는 “그냥 그저 그럴 수 있으니까.”라고 답한다. 별다른 이유도 없고, 큰 뜻도 없고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해 본거지 라는 얘기다. 이 대답에 대한 데이빗의 반응은 저릿하다. “만약 (니들) 창조주로부터 그런 대답을 듣게 된다면 (너는) 어떤 기분일까?”


 


이 두 가지의 태도, 자기들의 창조주에 대해서는 원대한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자기들의 창조물에 대해서는 비하와 경멸적 태도를 보이는 인간의 이중성은 사실 복선이다. 그 복선은 외계인의 DNA가 인류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사실 과학적으로는 말이 안되는) 단서를 통해 결말을 암시한다.


 


그네들도 결국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들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냥 할 수 있으니까 만들어 본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애들이 ‘왜 우릴 만드셨나요’ 따위의 질문을 하러 1조 달러를 들여 수조킬로를 건너왔다고 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영화의 결말은 여기서 이미 결정되었다. 인간이라면 데이빗을 어떤 곳에 “인간 대신” 보낼까? 안락하고 친절한 환경? 아니면 인간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험하고 독한 환경? 자기들은 하지 않을 것을 남에게는 기대하는 자가당착.


 


 


하지만 너는 웨일랜드 제품이야 ...



 


 


데이빗이 인간에게 가지는 감정. 여기서 잠깐, 감정은 합리적인 정보처리의 결과물이다. 아무리 인조인간이라 해도 정보처리능력으로는 인류 상위 1%에 해당할 데이빗에게 감정이 없을 리 없다. 물론 그 감정의 양상은 아마도 빅뱅이론의 셀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지만. 어쨌든 데이빗이 인간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비커스가 웨일랜드 회장에게 가지는 감정을 통해 드러난다.


 


데이빗을 만든 것은 인간이나 데이빗이 인류 전체에게 신세를 진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데이빗이 그나마 가장 큰 신세를 진 사람은 자본을 댄 웨일랜드 회장이다. 하지만 나머지 인간들은? 그들과 데이빗은 사실 동격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더욱 데이빗을 차별하려 든다. 비커스가 특히 그렇다. 웨일랜드의 인정을 향해 투구하는 그녀는 서자 앞에서 적통을 인정받기를 바라는 적자다. 그리고 그녀가 웨일랜드에게 가지는 감정은 바로 원망과 복수심이다.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치 줄 것 처럼 폼은 다 잡으면서도 결코 주지 않는 존재에 대해 느끼는 감정. 데이빗은 인간들에게 거의 비슷한 감정을 경험한다. 그 감정은 나중에 엘리자베스가 외계인에게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가 종반을 향해 가면서 관객들은 더 이상 영화의 첫 장면을 숭고하고 거룩한 희생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 장면은 처형이거나, 그들만의 종교적 의식이거나, 아니면 그저 치기 넘치는 도박이었을수도 있다. 이 장면이 인류 창조를 묘사한다고 봤을 때, 결국 이런 해석과 감정은 창조 자체에 대한 것이 된다.


 


 




 



 


굳이 영화 프로메테우스가 말해주는 인류 창조의 비밀을 이야기하라면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나 의미 따위는 아예 없는 것이다. 우리를 만든 애들도 아무 개념 없이 저지른 짓이고, 당연히 우리가 그네들에게 고마워하거나 그네들을 숭배할 이유 따위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네들에게 무슨 대단한 대답이 있으리라 기대하기 보다는 지금 여기 나 자신에게서 인생의 답을 찾는 것이 최선이다.


 


물론 이건 인류 공용의 진리라기 보다는 그저 리들리 스콧 개인의 이야기겠지만, 그렇게 보자면 “프로메테우스”는 전 인류가 공유하는 ‘파랑새’ 설화의 SF 버전인 셈이다.


 



 



영진공 짱가


 


 


 


 


 


 


 


 


 



 


 


 


 


 


 


 


 


 


 


 


 


 


 


 


 


 


 


 


 


 


 


 


 


 

“더 게임”, 성공으로 인한 성격장애 치료하기



샌프란시스코의 비싸고 경치 좋은 곳에서 사는 백만장자 증권 중개인 니콜라스 밴 오튼(“마이클 더글러스”)은 자기 잘난 맛에 살면서 남의 실수는 용납하지 못하는
자칭 타칭 완벽주의자이다.

그러니 주변에 친구도 없고 아내도 떠나고 동생 콘래드(“숀펜”)와도 연락을 끊고 지내지만 별 문제의식이 없다. 평소와 다름없이 잘난 척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무안을 주던 어느 날, 동생이 CRS라는 체험서비스회사의 가입신청서를 보내온다. 호기심으로 가입신청서에 서명하고, 귀가하던 오튼은 집 앞에 드러 누워있던 사람을 차로 치고는 대경실색한다. 알고 보니 그건 사람이 아니라 마네킹!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일이 자꾸만 꼬이다가 결국 경찰에 쫓겨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이건 이후 그가 겪을 고난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일이었는데 이 모든 것은 그가 가입한 체험서비스의 시작이었다 ……

『세븐』으로 유명한 “데이빗 핀쳐”의 1997년작 『더 게임』(The Game)이라는 영화의 줄거리다.

이 영화에 대한 평은 대부분 나쁘다. 그런 평에는 나도 동감이다. 어디까지가 게임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놓고 끝까지 관객과 게임을 벌이는 영화의 전개 자체는 그럭저럭 참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결말은 여전히 황당했다.

왜 동생은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가며 형에게 죽을 고생을 시키고 결국에는 절망의 나락에까지 떨어트리는 게임서비스를 하게 만든 건지, 그래서 결국 뭐 어쩌자는 거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돈지랄하는구나’ 라는 생각 뿐 이었다.

온갖 스턴트와 특수효과로 치장한 영화 자체도 그렇고, 좌절을 겪을 일이 워낙 없어서 비싼 돈주고 “좌절을 겪게 해주는 게임”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 자체도 그저 ‘돈지랄’ 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나고보니 이게 단순한 돈지랄 이야기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지위가 높아질수록, 힘이 생길수록, 돈을 더 많이 벌수록, 망가진다 ……

그게 완전히 돈이나 지위 권력 때문만은 아니다. 원래 그런 사람에게는 망가질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권력이나 지위가 적을 때는 스스로 조심도 했고, 약자로서의 인식이 나름의 정의감을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더 이상 조심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서서히 숨겨두었던 어두운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에게 새로 주어진 권력이 그 어두움을 그냥 개인적인 어두움으로 끝나지 않고 주변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게 만들게 된다. 결국 이런 사람은 성공할수록 더 나빠지고 망가진다. 그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좋은 일을 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성공하는 바람에 추악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벌어지는 거다.

사실 이건 일부 인간들만의 이야기는 아닐지 모른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소위 잘 나가거나 높은 자리하시는 분들 치고 망가지지 않는 인간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동물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잘나가도 망가지지 않을 인간성은 없을지도 모른다.

1969년에 로렌스 피터라는 사회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관료제도하에서) 인간은 자신이 감당 할 수 없는 지위까지 승진한다.
그 결과 모든 관료는 무능해진다”

‘피터의 원리’ 라고도 불리는 이 명제를 인간성과 성공에 적용하면 다음처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이 감당할 수 없는 지위까지 성공한다.
그 결과 모든 성공한 자는 흉악해진다”

그건 그렇다 치자. 문제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 것이냐는 거다.
진심 어린 충고를 하면 될까? 천만에, 이런 사람들은 이미 간이 배 밖으로 나와버렸고, 귀는 자기에게 유리한 말만 골라듣는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오히려 그 충고를 비수로 바꾸어 뒤통수를 치는 것으로 앙갚음을 할 뿐이다.

심리치료를 한다면? 자기 합리화와 방어기제로 든든하게 무장한 그의 심성에는 그 어떤 치료사도 소용이 없다. 아니 그런 사람은 아예 상담이나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길 테니 말이다.

간단하게 말하자. 모든 인간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이 변화하고자 할 때는 자신이 변화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했을 때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의 압박이 자신에게 절박하게 다가올 때에만 변화를 시작하려 한다는 거다.

그럼 이런 사람들이 왜 굳이 자기 자신을 고치려 해야 할까? 그럴 이유가 없다.
남들을 무시하고 이용하고 사기를 쳐도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약간 문제가 생겨도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서 진압하고 무시할 수 있다면 그는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이 계속 잘 나가는 한, 이들의 문제는 고칠 수 없다는 얘기다 된다. 그렇다면 남은 유일한 치료법은 그들을 좌절시키는 것이다. 진짜로 절박한 상황에 집어넣고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진짜 좌절을 겪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자니 그 사람을 도와주자는 건지 실제 공격하는 건지 구분이 안된다. 특히 상대가 당신과 가까운 사람이라면 그런 시도를 해서 성공해봐야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었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고, 어설프게 해서 실패하면 역으로 당신에게 진정한 위기가 닥칠 것이다.

결국 남에게 비난 받지도 않고, 자신도 안전하고, 효과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짜 같지만 진짜는 아닌” 좌절상황을 제공하는 것이다. 마치 스쿠루지 영감에게 찾아온 친구 귀신이 제공해 준 것과 같은 체험 말이다. 이런 맥락을 알고 나면, 영화에서 하고자 했던 것이 뭔지 이해가 된다.

“다 게임이었어. 형이 더 이상 망가지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거든…”

이라는 동생의 마지막 말은 바로 그 얘기였다. 너무 늦어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기 전에 지나친 성공으로 인해 망가져가는 형을 돌이켜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아! 이 아름다운 형제애여 ……

그러나, 이런 이해에 도달했다고 해도 여전히 현실의 우리에게 이 영화는 환상일 뿐이다.

우리에겐 그런 쑈를 할 돈도 없고, 돈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실감나는 체험서비스를 제공할 회사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그런 어둠의 포스에 먹혀가는 인간을 걱정해주기 보다는 그들로 인해 황폐해져 가는 우리 자신의 삶을 더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일부 인간은 지나치게 성공해서 망가지고, 더 많은 다른 인간들은 그 지나친 성공으로 인해 망가진 작자 때문에 성공하기도 전에 망가진다는 거다.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