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TV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CES 2012에서는 다양한 신제품이 발표되었다. TV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많은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OLED TV 였고 그 다음은 스마트 TV였다. 특히 전세계 TV 시장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삼성전자의 스마트 TV 플랫폼은 관심의 촛점이었다.


당장 인터넷상에서 볼 수 있는 국내외 평가를 종합해 보면 호의적인 반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예상과는 달리 안드로이드 OS를 채택하지는 않았지만 반응속도나 사용자 UI는 썩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siri 만큼 똑똑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쓸만한 음성인식 기능에 동작인식까지 덤으로 갖췄고, 스마트폰과의 콘텐츠 공유 기능인 Allshare는 애플의 airplay보다 훨씬 더 쓸만해 보였다. 그리고 앵그리버드가 아무 문제 없이 휭휭 돌아가는 모습을 선보이는 장면에선 다들 감탄사를 내뱉었다, WoW!

하지만 궁금한 건 이거다. 내가 이걸 왜 사야 하는 거지? 50인치 대화면 TV에서 앵그리버드를 하려고?

아무래도 대부분의 스마트TV 기획자나 개발자들은 스마트폰(이라기보다는 아이폰)의 성공 공식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다. 즉,

1) 뛰어난 사용자 UX,
2) 오만가지 앱이 득시글거리는 앱스토어,
3) 인터넷과의 연동

이 스마트 TV를 성공시킬 열쇠라고 믿는 모양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스마트”란 단어를 공유한다 할지라도 폰은 폰, TV는 TV다. 둘의 성공 공식이 동일할 리 없다.

핸드폰은 전화를 걸어 대화를 나누고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걸 주목적으로 하는, 그 태생부터 굉장히 능동적인 기기다. 데이터 통신망을 이용해 웹브라우징을 하고, 짧은 문자 메시지를 긴 이메일로 확장시킨 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게임은 이미 피쳐폰 시대부터 쏟아져 나왔다. 이런 기능을 제대로 쓰려면 편리한 UI를 갖춰야 하는 건 당연지사.

그러나 거실 TV는 굉장히 수동적인 기기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무식한 게으름뱅이를 위한 바보상자이다. 쇼파에 반쯤 드러누운 자세로 귤을 까먹으며 아무 생각없이 드라마를 보다 말고 갑자기 TV 화면에 이메일을 띄우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거라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보는 편이 훨씬 빠를 텐데.

하지만 TV에서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기능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게 VOD(Video on Demand)다.

여기서 잠시 미국 시장으로 눈을 돌려보도록 하자. 미국은 TV소유 세대수의 약 8할이 케이블TV나 위성방송, IPTV를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2011년부터 이들 대형 케이블 TV업체들은 iPAD를 비롯한 타블렛 대상의 방송 서비스에 일제히 힘을 쏟기 시작했다.

타임워너 사의 조사에 따르면 2006년 당시 정시방송의 주당 시청 시간은 31.7시간이었지만 VOD(video on demand) 시청 시간은 주당 0.4시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데 2011년에는 VOD의 시청 시간이 주당 2.5시간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2.5시간이라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건 고연령층까지 포함한 평균치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스마트폰에 익숙한 젊은 세대만을 계산에 넣는다면 이 수치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 요즘은 내 주변에서도 셋탑 박스나 IPTV에서 필요할 때마다 영화를 사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꿋꿋하게 토렌트나 웹하드를 뒤지는 인간들의 숫자가 훨씬 많긴 하지만.

MP3 플레이어의 킬러 콘텐츠가 음악이고, 스마트폰의 킬러 콘텐츠가 앱이라면, 거실 TV의 킬러 콘텐츠는 영상일 수밖에 없다. 아이팟은 음악을 유통하는 뮤직 스토어를 통해 MP3 플레이어 시장을 평정하고, 아이폰은 앱을 유통하는 앱스토어를 선보이며 핸드폰 시장을 뒤흔들었다.

그렇다면 거실 TV가 스마트 TV로 진화하기 위한 열쇠는 자명하다. 그것은 영상물 유통의 혁신에 있다.

어느 나라든  TV 콘텐츠 시장에서 절대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주파수를 독점하고 있는 공중파 방송국이다. 그 다음은 지역별로 난립한 케이블 TV 회사들이다. 이들 방송에 비하면 DVD, 블루레이, VOD 등 홈비디오 시장의 비중은 굉장히 낮은 편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방송 시장의 총 매출 규모는 10조를 넘어가는 반면, 홈비디오 시장 규모는 기껏해야 3, 4백억 정도에 그칠 뿐이다.

지난 수십년간 TV는 브라운관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고, HD 해상도로 바뀌고, 아예 브라운관이 사라지고 PDP와 LCD로 바뀌는 등, 재탄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하지만 바뀐 건 물리적인 부분일 따름이었다. 실질적으로 콘텐츠를 틀어쥔 게 방송국이란 사실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가전회사는 주연이 아닌 조연에 불과했고, TV는 방송국이 일방적으로 송출하는 드라마나 뉴스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기 위한 깡통에 불과했다!




그런데 … 지금 가전회사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온 것이다. 방송국 눈치를 보지 않고, 직접 방송국에 맞먹는 플랫폼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말이다. 그것도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전세계를 상대로 장사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전세계 TV 시장에서 탑을 달리는 삼성전자의 작년 한 해 평판 TV 판매량은 대략 4300만대, 올해 목표는 5천만대라고 한다. 만일 삼성이 자사 TV 물량을 고스란히 스마트 TV로 전환한다면, 그리고 공중파 방송국에 준하는 콘텐츠 유통 플랫폼을 개발해 탑재시킨다면, 매년 대한민국 전체 인구에 필적하는 5천만명의 시청자를 기본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만한 숫자라면 VOD는 뒤로 미뤄놓고 광고만 팔아도 돈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가기 위해서 풀어야 할 숙제가 한둘이 아니다. 저작권자들과 지리한 협상을 통해 컨텐츠를 확보하고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인터넷 환경이 열악한 국가에선 어떤 식으로 컨텐츠를 공급할지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숙제는, 공중파나 케이블보다 더 쉽고 간단하고 편리하게 컨텐츠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공중파 방송은 안테나만 세우면 볼 수 있다. 케이블 TV에 전화 한 통만 넣으면 채널이 순식간에 백여 개로 늘어난다. 그렇다면 스마트 TV는 전원선만 꽂으면 즉각 수백 개의 채널을 저렴하게(또는 공짜로), 그리고 손쉽게 볼 수 있다는 걸 장점으로 내세워야 한다. 대체 어떤 식으로?

글쎄, 그걸 잘 모르겠다. 그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궁리해야 하는 건 삼성이나 LG같은 제조사들의 몫이다. 하지만 어느 쪽에서도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스마트 TV에 스마트폰의 기능을 우겨넣는데 급급한 것 같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TV를 파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 국가의 방송국을 능가할 수도 있는 절대적인 방송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그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고 있다니 말이다. 그리고 기껏 내놓은 스마트 TV라는 건 스마트폰의 화면을 가로세로로 뻥튀기한 물건에 불과하다.

하긴 뭐, 아이패드도 처음엔 아이폰의 뻥튀기판에 불과하단 비아냥을 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패드는 들고 다닐 수도 있고, 침대에 누워서 만지작거릴 수도 있고, 후장을 자극하는 치질의 고통과 맞서 싸우기 위해 화장실에 가져갈 수도 있다.
 

반면에 거실 TV는 …… 흠, 더 이상 구구절절 말할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당신은 그 리모컨조차도 맘대로 쓸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건 당신 게 아니라 사모님 거니까!


영진공 DJ Han



 

“스테이션 에이전트”, 친구가 있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주인공 핀 역을 맡은 “피터 딩클리지”, 굉장히 낯익은 배우라 생각했는데 막상 imdb.com 필모그래피에 낯선 영화들만 있습니다. 결국 저 역시 이 사람을 그냥 ‘난장이 배우’로 봤던 것일까요. 신체상의 특성이 필요한 역에 언제나 조연으로 출연하다가 드디어 주연을 맡는구나! 라면서 축하하는 마음이었는데, 역시 편견이란 놈의 위력은 셉니다. 저 역시 어쩔 수 없는,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나름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인 것이죠.

졸지에 뉴저지의 낡은 역사에 가게 된 핀. 정신없고 산만한 사고뭉치 아줌마 올리비아와 연일 시끄럽게 말 거는 조와 엮이게 됩니다. 핀은 난장이이고, 올리비아는 좀 정신 나간 아줌마고, 조는 이민 2세에 핫도그 파는 청년이죠. ‘성별과 연령과 장애와 상처를 넘어선 우정’이라고 혹자들은 나이브하게 말하겠지만, 그들이 친구가 되는 건, 아니 딱 그들로만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건 그들이 난쟁이이고 아들을 잃은 후 정신이 나가버린 아줌마이며 배운 것 없고 할 줄 아는 거 별로 없는 이민 2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즉, 다들 약점이 있고 주류 사회에 결코 낄 수 없는 ‘헛점투성이’ 인간이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들과, 소위 자신을 정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뭐, 이런 설정과 줄거리, 그리하여 이들이 마침내 마음을 열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아름다운 우정을 갖게 된다는 영화는 세상에 넘쳐나고 흔합니다. 하지만 역시나 이 영화가 제 기대 이상이었고 어필을 했던 건 배우들의 호연 탓이겠죠. 감독이 차분히 연출을 쌓아가는 솜씨도 꽤 안정적이고요.

핀과 올리비아가 서로 상처를 뱉어내며 결국 오열하는 장면에서 같이 울고 말았습니다. 역시나,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저 어떨 땐, 어떻게 할 바를 몰라서 결국 자신을 걱정해주는 이를 할퀴어대고, 결국 그 앞에 허물어져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는 거죠.

소소한 하나 하나에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은 오히려 강력한 방어기제를 갖고 더욱 무뚝뚝하게 굽니다. 핀의 도피처는 기차였고, 올리비아의 도피처는 그림이었지요. 남의 친절은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럽고 귀찮기만 합니다. 때론 나의 친절은, 다른 이에게 별로 주목받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가면의 제스처이기도 해요. 남 앞에서 적당히 빵긋빵긋 웃으면, 상대는 더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습니다. 헌데 우리의 주인공들은 그 기술마저도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고 때로 그 상처를 한 잔의 술이나 한 개피의 담배로 겨우 폭발 직전 상태로 진정시키며 삶을 영위해 나갑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그 상처들이 ‘낫지는’ 않아요. 다만 우리는, 누구나 그런 상처를 하나쯤은 가슴 깊이 숨겨둔 채, 그저 혼자 있을 때 혼자서만 분출하다가, 다른 이에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생긋 웃을 뿐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실, 상처에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상처를 가리는 기술이 늘고 방어기제의 기술이 세련되지는 것에 불과한 건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저 혼자 아프고 저 혼자만 힘들다고 생각하는 철딱써니들이 넘쳐나는 것도 같은 이유인지도 몰라요. 남들의 웃음 속에서 아픔을, 상처를, 절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저 웃는 얼굴 뒤에 나보다 더 큰 상처를 꾹꾹 억누르고 있으려니, 라는 상상은 절대로 해보지 못하는 사람들.

약해빠지고 아무 대책 없고, 이를 악물고 그저 ‘오늘 하루’ 잘 버티는 게 오늘의 희망사항인 사람이 단지 남에게 폐끼치고 싶진 않다는 이유에서 상처를 숨기면, 상처가 없는 줄 알고 상처를 하나둘, 셋, 계속 안겨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 뻔뻔한 인간들은, ‘당신은 강하니까 잘 버텨낼 거예요’ 같은 말을 덧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위로를 한답시고, 실은 내가 주는 상처 버텨내라고 강요의 주문을 하고 있는 셈이죠. 상대가 얼마나 아플지는 피상적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그만큼 아파봐야 알까요? 아니요, 자기가 그만큼 아프면, 이 바보들은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아픈 줄 알고 날뜁니다.

어찌됐건 이들은 그럭저럭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친구가 됩니다. 석양을 바라보며 맥주를 나눠마시는 모습은 진부한 클리셰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핀과 올리비아와 조에게 각자 서로 친구가 생긴 건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영진공 노바리

“더 게임”, 성공으로 인한 성격장애 치료하기



샌프란시스코의 비싸고 경치 좋은 곳에서 사는 백만장자 증권 중개인 니콜라스 밴 오튼(“마이클 더글러스”)은 자기 잘난 맛에 살면서 남의 실수는 용납하지 못하는
자칭 타칭 완벽주의자이다.

그러니 주변에 친구도 없고 아내도 떠나고 동생 콘래드(“숀펜”)와도 연락을 끊고 지내지만 별 문제의식이 없다. 평소와 다름없이 잘난 척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무안을 주던 어느 날, 동생이 CRS라는 체험서비스회사의 가입신청서를 보내온다. 호기심으로 가입신청서에 서명하고, 귀가하던 오튼은 집 앞에 드러 누워있던 사람을 차로 치고는 대경실색한다. 알고 보니 그건 사람이 아니라 마네킹!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일이 자꾸만 꼬이다가 결국 경찰에 쫓겨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이건 이후 그가 겪을 고난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일이었는데 이 모든 것은 그가 가입한 체험서비스의 시작이었다 ……

『세븐』으로 유명한 “데이빗 핀쳐”의 1997년작 『더 게임』(The Game)이라는 영화의 줄거리다.

이 영화에 대한 평은 대부분 나쁘다. 그런 평에는 나도 동감이다. 어디까지가 게임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놓고 끝까지 관객과 게임을 벌이는 영화의 전개 자체는 그럭저럭 참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결말은 여전히 황당했다.

왜 동생은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가며 형에게 죽을 고생을 시키고 결국에는 절망의 나락에까지 떨어트리는 게임서비스를 하게 만든 건지, 그래서 결국 뭐 어쩌자는 거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돈지랄하는구나’ 라는 생각 뿐 이었다.

온갖 스턴트와 특수효과로 치장한 영화 자체도 그렇고, 좌절을 겪을 일이 워낙 없어서 비싼 돈주고 “좌절을 겪게 해주는 게임”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 자체도 그저 ‘돈지랄’ 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나고보니 이게 단순한 돈지랄 이야기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지위가 높아질수록, 힘이 생길수록, 돈을 더 많이 벌수록, 망가진다 ……

그게 완전히 돈이나 지위 권력 때문만은 아니다. 원래 그런 사람에게는 망가질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권력이나 지위가 적을 때는 스스로 조심도 했고, 약자로서의 인식이 나름의 정의감을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더 이상 조심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서서히 숨겨두었던 어두운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에게 새로 주어진 권력이 그 어두움을 그냥 개인적인 어두움으로 끝나지 않고 주변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게 만들게 된다. 결국 이런 사람은 성공할수록 더 나빠지고 망가진다. 그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좋은 일을 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성공하는 바람에 추악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벌어지는 거다.

사실 이건 일부 인간들만의 이야기는 아닐지 모른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소위 잘 나가거나 높은 자리하시는 분들 치고 망가지지 않는 인간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동물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잘나가도 망가지지 않을 인간성은 없을지도 모른다.

1969년에 로렌스 피터라는 사회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관료제도하에서) 인간은 자신이 감당 할 수 없는 지위까지 승진한다.
그 결과 모든 관료는 무능해진다”

‘피터의 원리’ 라고도 불리는 이 명제를 인간성과 성공에 적용하면 다음처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이 감당할 수 없는 지위까지 성공한다.
그 결과 모든 성공한 자는 흉악해진다”

그건 그렇다 치자. 문제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 것이냐는 거다.
진심 어린 충고를 하면 될까? 천만에, 이런 사람들은 이미 간이 배 밖으로 나와버렸고, 귀는 자기에게 유리한 말만 골라듣는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오히려 그 충고를 비수로 바꾸어 뒤통수를 치는 것으로 앙갚음을 할 뿐이다.

심리치료를 한다면? 자기 합리화와 방어기제로 든든하게 무장한 그의 심성에는 그 어떤 치료사도 소용이 없다. 아니 그런 사람은 아예 상담이나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길 테니 말이다.

간단하게 말하자. 모든 인간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이 변화하고자 할 때는 자신이 변화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했을 때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의 압박이 자신에게 절박하게 다가올 때에만 변화를 시작하려 한다는 거다.

그럼 이런 사람들이 왜 굳이 자기 자신을 고치려 해야 할까? 그럴 이유가 없다.
남들을 무시하고 이용하고 사기를 쳐도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약간 문제가 생겨도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서 진압하고 무시할 수 있다면 그는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이 계속 잘 나가는 한, 이들의 문제는 고칠 수 없다는 얘기다 된다. 그렇다면 남은 유일한 치료법은 그들을 좌절시키는 것이다. 진짜로 절박한 상황에 집어넣고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진짜 좌절을 겪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자니 그 사람을 도와주자는 건지 실제 공격하는 건지 구분이 안된다. 특히 상대가 당신과 가까운 사람이라면 그런 시도를 해서 성공해봐야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었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고, 어설프게 해서 실패하면 역으로 당신에게 진정한 위기가 닥칠 것이다.

결국 남에게 비난 받지도 않고, 자신도 안전하고, 효과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짜 같지만 진짜는 아닌” 좌절상황을 제공하는 것이다. 마치 스쿠루지 영감에게 찾아온 친구 귀신이 제공해 준 것과 같은 체험 말이다. 이런 맥락을 알고 나면, 영화에서 하고자 했던 것이 뭔지 이해가 된다.

“다 게임이었어. 형이 더 이상 망가지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거든…”

이라는 동생의 마지막 말은 바로 그 얘기였다. 너무 늦어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기 전에 지나친 성공으로 인해 망가져가는 형을 돌이켜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아! 이 아름다운 형제애여 ……

그러나, 이런 이해에 도달했다고 해도 여전히 현실의 우리에게 이 영화는 환상일 뿐이다.

우리에겐 그런 쑈를 할 돈도 없고, 돈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실감나는 체험서비스를 제공할 회사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그런 어둠의 포스에 먹혀가는 인간을 걱정해주기 보다는 그들로 인해 황폐해져 가는 우리 자신의 삶을 더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일부 인간은 지나치게 성공해서 망가지고, 더 많은 다른 인간들은 그 지나친 성공으로 인해 망가진 작자 때문에 성공하기도 전에 망가진다는 거다.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

영진공 짱가

니콜라우스 스테노는 어디서 튀어나온 듣보잡일까? (2/2)





17
세기 과학혁명의 물결은 지구과학으로도 흘러들었다. 그리하여 이제 지구 자체도 연구 대상이 되었고 지구의 기원은 풀어야할 스도쿠 문제였다. 하지만 제아무리 셜록 홈즈라도 사건을 조사하려면 단서가 있어야 하듯이 지구의 기원을 연구하려면 바탕이 되는 어떤 단서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자료라고 해봐야 성경의 창세기 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 당연히 초창기 지구 기원에 관한 연구와 가설은 창세기라는 앞마당 안에서만 뛰어놀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연구를 시작한 자연학자들의 눈에 점차 곤혹스러운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조개나 고대 생물처럼 생긴 돌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이 현재에는 볼 수 없는 생물이었고 바다생물처럼 생긴 돌들이 쌩뚱맞게도 산꼭대기나 내륙 깊은 곳에서 발견되기도 하는게 아닌가.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창세기가 말하고 있는 노아의 홍수 밖에는 없었다
. 옳거니!

그러나 대홍수는 어떻게 조개나 생물의 뼈 들을 돌처럼 만들며
, 또 이것들이 어떻게 깊은 땅속에 묻히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더구나 일부지역에서 엄청나게 많은 조가비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한차례의 노아의 홍수로는 이런 결과는 만들어 낼 수 없어보였다.

당시엔 지구의 창조는 당연히
6,000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토록 짧은 기간에 산이 불쑥 생기고 바닷물이 바짝 말랐다는 이야기는 SF소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화석에 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은 바다 생물과 비슷하게는 생겼지만 그건 그냥 땅속에서 자란 특별한 돌이라고 했던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생활하던 스테노 형님은 피렌체 메디치가의 페르디난도
2세가 해안에서 잡은 상어를 해부하게 되었다. 스테노는 해부를 통해 상어의 이빨이 당시 약물로 쓰이던 혀돌(tongue stone)이라는 돌과 너무도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연히 그 혀돌은 땅속에서 자라거나 폭풍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혀돌

그러나 스테노 형님은 이런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해부학자로서 사람과 동물의 몸을 통해 몸 속에 있는 기관이나 조직은 제각기 맡은 기능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연하게 완전히 똑같은 이빨이나 조가비가 만들어질 순 없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들이 단단한 암석 속에 묻히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 결국 스테노는 쿨하게 해부학 연구를 접고 화석을 연구하는데 온 시간을 바친다. 흥미를 느낀 갑부 페르디난도 2세 역시 스테노의 연구 비용 전액을 지원해 주었다. 그리하여 노력 끝에 상어 이빨과 내륙 깊숙한 암석층에서 발견된 화석 잔해물에서 드러난 특징들을 비교해 그 잔해물이 상어의 이빨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1667년 출판한 [해부한 상어의 머리]에 실린 삽화…

스테노 형님이 해부한 것이 정말 상어였을까?! -_-


이후 스테노는 지질학의 기초가 담겨있는 그의 걸작 [자연적으로 고체에 파묻힌 고체에 관한 논문의 서문]을 발표하였다. 이 책에서 스테노는 수정과 같은 무기물 고체와 조개나 뼈와 같은 유기물 고체의 생성이 다르다는 데 주목했다.

그래서 화석이 묻혀 있는 암석이 본래 연한 퇴적물이었으나 조개나 뼈가 묻힌 뒤 오랜 세월에 걸쳐 굳어지면서 단단한 암석이 되었음을 알아냈다
.

스테노가 제기한 퇴적암 개념은 지질학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699년 출판된 [자연적으로 고체에 파묻힌 고체에 관한 논문의 서문],

연구비를 대준 페르디난도 2세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혀있다.

스테노는 이러한 퇴적암 개념을 훨씬 규모가 큰 지층에도 똑같이 적용했다. 그리하여 지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층층이 연속적으로 퇴적된 것임을 알아냈다. 맨 아래 있는 지층이 가장 오래된 지층이며, 퇴적물은 평평하게 쌓여 수평층을 이루고, 퇴적물은 옆으로 넓게 퍼져 나가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기울거나 절단되고 겹친 암석층은 지각이 움직였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자연적으로 파묻힌….]에 실려있는,
토스카나 지역의 지층이 쌓이고 지형이 

형성된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다이어그램


그러나 스테노 형님 역시도 한낱 인간이었다
. 시대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성경의 그늘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는 토스카나의 지층을 관찰해 육지가 바닷물로 뒤덮인 적이 최소 두 번이고, 그 중 적어도 한번은 지층이 기울면서 바뀌었으리라는 결론에서 그의 연구는 끝을 맺는다.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스테노는 자신이 연구한 과학은 창세기의 부족한 기록을 메우는 길이라 여겼다
. 스테노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는 모두 그랬다. 우리가 현재 본좌라 일컫는 대부분의 자연과학자들은 종교인이었고 그래서 그들이 발표한 자연과학서는 성경의 내용을 보완하고 있었다. 둘 다 신학자들이 쓴 저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론이 창세기를 보완하는데 쓰였다고 해서 창조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한마디로 가당찮은 이야기다
. 그렇게 치면 19세기 전까지 대부분의 생물학자, 지질학자들은 창조학자로 불러야 할 것이다.

이후 린네니 뷔퐁이니 퀴비에 등과 같은 생물학자와 지질학의 본좌들이 서로의 머리채를 붙잡고 지구의 나이와 기원에 대해
, 자연사에 대해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스테노의 이러한 업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18세기에 들어서며 현존하는 바다와 멀리 떨어진 곳에도 화석이 있다는 것과, 이것이 한 때 살아 있었던 생물체의 잔해라는 것은 폭넓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형님은 학자로서 한창 이름을 떨치던 때에 일부 동료 과학자들에게 크게 낙담을 하고
, 1667년 과학자의 길을 스스로 그만두고 성직자가 되었다. 그리곤 사제로서 독일 북부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다 1686년에 4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해부학자로서 해부학 연구를 통해 근육
, 심장, 뇌에 관한 통설을 뒤엎었으며, 지질학의 창시자로서 암석층을 살펴서 지구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과학적 원리들을 처음으로 주장한 니콜라우스 스테노 형님은,

결코 듣보잡이 아니다
.




* 참고 및 발췌 *

로버트 헉슬리 저
곽명단 역, [위대한 박물학자], 21세기 북스, 2009.
졸 쉐켈포드 저강윤재 역, [현대 의학의 선구자 하비], 바다출판사, 2006.
[현대 과학의 풍경], 궁리, 2008.
존 그리빈 저강윤재김옥빈 역, [과학], 들녘, 2004.
 http://www.ucmp.berkeley.edu/history/steno.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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