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우스 스테노는 어디서 튀어나온 듣보잡일까?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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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과학혁명의 물결은 지구과학으로도 흘러들었다. 그리하여 이제 지구 자체도 연구 대상이 되었고 지구의 기원은 풀어야할 스도쿠 문제였다. 하지만 제아무리 셜록 홈즈라도 사건을 조사하려면 단서가 있어야 하듯이 지구의 기원을 연구하려면 바탕이 되는 어떤 단서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자료라고 해봐야 성경의 창세기 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 당연히 초창기 지구 기원에 관한 연구와 가설은 창세기라는 앞마당 안에서만 뛰어놀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연구를 시작한 자연학자들의 눈에 점차 곤혹스러운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조개나 고대 생물처럼 생긴 돌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이 현재에는 볼 수 없는 생물이었고 바다생물처럼 생긴 돌들이 쌩뚱맞게도 산꼭대기나 내륙 깊은 곳에서 발견되기도 하는게 아닌가.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창세기가 말하고 있는 노아의 홍수 밖에는 없었다
. 옳거니!

그러나 대홍수는 어떻게 조개나 생물의 뼈 들을 돌처럼 만들며
, 또 이것들이 어떻게 깊은 땅속에 묻히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더구나 일부지역에서 엄청나게 많은 조가비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한차례의 노아의 홍수로는 이런 결과는 만들어 낼 수 없어보였다.

당시엔 지구의 창조는 당연히
6,000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토록 짧은 기간에 산이 불쑥 생기고 바닷물이 바짝 말랐다는 이야기는 SF소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화석에 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은 바다 생물과 비슷하게는 생겼지만 그건 그냥 땅속에서 자란 특별한 돌이라고 했던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생활하던 스테노 형님은 피렌체 메디치가의 페르디난도
2세가 해안에서 잡은 상어를 해부하게 되었다. 스테노는 해부를 통해 상어의 이빨이 당시 약물로 쓰이던 혀돌(tongue stone)이라는 돌과 너무도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연히 그 혀돌은 땅속에서 자라거나 폭풍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혀돌

그러나 스테노 형님은 이런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해부학자로서 사람과 동물의 몸을 통해 몸 속에 있는 기관이나 조직은 제각기 맡은 기능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연하게 완전히 똑같은 이빨이나 조가비가 만들어질 순 없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들이 단단한 암석 속에 묻히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 결국 스테노는 쿨하게 해부학 연구를 접고 화석을 연구하는데 온 시간을 바친다. 흥미를 느낀 갑부 페르디난도 2세 역시 스테노의 연구 비용 전액을 지원해 주었다. 그리하여 노력 끝에 상어 이빨과 내륙 깊숙한 암석층에서 발견된 화석 잔해물에서 드러난 특징들을 비교해 그 잔해물이 상어의 이빨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1667년 출판한 [해부한 상어의 머리]에 실린 삽화…

스테노 형님이 해부한 것이 정말 상어였을까?! -_-


이후 스테노는 지질학의 기초가 담겨있는 그의 걸작 [자연적으로 고체에 파묻힌 고체에 관한 논문의 서문]을 발표하였다. 이 책에서 스테노는 수정과 같은 무기물 고체와 조개나 뼈와 같은 유기물 고체의 생성이 다르다는 데 주목했다.

그래서 화석이 묻혀 있는 암석이 본래 연한 퇴적물이었으나 조개나 뼈가 묻힌 뒤 오랜 세월에 걸쳐 굳어지면서 단단한 암석이 되었음을 알아냈다
.

스테노가 제기한 퇴적암 개념은 지질학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699년 출판된 [자연적으로 고체에 파묻힌 고체에 관한 논문의 서문],

연구비를 대준 페르디난도 2세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혀있다.

스테노는 이러한 퇴적암 개념을 훨씬 규모가 큰 지층에도 똑같이 적용했다. 그리하여 지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층층이 연속적으로 퇴적된 것임을 알아냈다. 맨 아래 있는 지층이 가장 오래된 지층이며, 퇴적물은 평평하게 쌓여 수평층을 이루고, 퇴적물은 옆으로 넓게 퍼져 나가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기울거나 절단되고 겹친 암석층은 지각이 움직였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자연적으로 파묻힌….]에 실려있는,
토스카나 지역의 지층이 쌓이고 지형이 

형성된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다이어그램


그러나 스테노 형님 역시도 한낱 인간이었다
. 시대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성경의 그늘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는 토스카나의 지층을 관찰해 육지가 바닷물로 뒤덮인 적이 최소 두 번이고, 그 중 적어도 한번은 지층이 기울면서 바뀌었으리라는 결론에서 그의 연구는 끝을 맺는다.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스테노는 자신이 연구한 과학은 창세기의 부족한 기록을 메우는 길이라 여겼다
. 스테노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는 모두 그랬다. 우리가 현재 본좌라 일컫는 대부분의 자연과학자들은 종교인이었고 그래서 그들이 발표한 자연과학서는 성경의 내용을 보완하고 있었다. 둘 다 신학자들이 쓴 저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론이 창세기를 보완하는데 쓰였다고 해서 창조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한마디로 가당찮은 이야기다
. 그렇게 치면 19세기 전까지 대부분의 생물학자, 지질학자들은 창조학자로 불러야 할 것이다.

이후 린네니 뷔퐁이니 퀴비에 등과 같은 생물학자와 지질학의 본좌들이 서로의 머리채를 붙잡고 지구의 나이와 기원에 대해
, 자연사에 대해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스테노의 이러한 업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18세기에 들어서며 현존하는 바다와 멀리 떨어진 곳에도 화석이 있다는 것과, 이것이 한 때 살아 있었던 생물체의 잔해라는 것은 폭넓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형님은 학자로서 한창 이름을 떨치던 때에 일부 동료 과학자들에게 크게 낙담을 하고
, 1667년 과학자의 길을 스스로 그만두고 성직자가 되었다. 그리곤 사제로서 독일 북부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다 1686년에 4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해부학자로서 해부학 연구를 통해 근육
, 심장, 뇌에 관한 통설을 뒤엎었으며, 지질학의 창시자로서 암석층을 살펴서 지구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과학적 원리들을 처음으로 주장한 니콜라우스 스테노 형님은,

결코 듣보잡이 아니다
.




* 참고 및 발췌 *

로버트 헉슬리 저
곽명단 역, [위대한 박물학자], 21세기 북스, 2009.
졸 쉐켈포드 저강윤재 역, [현대 의학의 선구자 하비], 바다출판사, 2006.
[현대 과학의 풍경], 궁리, 2008.
존 그리빈 저강윤재김옥빈 역, [과학], 들녘, 2004.
 http://www.ucmp.berkeley.edu/history/steno.html


 



영진공 self_fish


 

니콜라우스 스테노는 어디서 튀어나온 듣보잡일까? (1/2)


구글은 111일에 니콜라우스 스테노 탄생을 기념하는 로고를 대문에 달아 놓았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 생소했을 그의 이름을 보며 그냥 그 동네에서 유명한 사람인갑다 하며 넘겼을 것이다.

문제는 호기심 가득한 이들이 그가 누군지 클릭했다가, 무려
위대한 창조학자라고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면서 이름도 생소한 이 형님은 머나먼 이국 땅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구글에서 올린 프로필을 보면
,


“니콜라스 스테노는 자신이 직접 관찰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론을 수립해 과학적 방법을 연구에 도입한 지질학자로 알려졌으며, 지층의 누적에 대한 이론을 발표해 층서학의 아버지로도 불립니다.”

라고 떡하니 쓰여 있다.

이 말 대로면
위대한 창조학자가 아니라 창조학을 깨부순 위대한 지질학자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니던가. 도대체 이런 아이러니한 프로필을 가지고 있는 이 형님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형님의 이름은 라틴어로 니콜라우스 스테노
(Nicolaus Steno, 1638~1686)이며 코펜하겐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명 개천 출신의 용으로 거듭나며 우선은 천부적인 해부능력을 바탕으로 해부학자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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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유럽은 갈릴레오가 뿌려놓은 과학의 씨앗들이 꽃을 피우며 과학혁명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시기였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데카르트는 세상 만물은 마치 기계처럼 움직인다는 기계론을 들고 나오며 시대 트렌드를 만들었다. 이러한 기계론 열풍은 당연히 인간과 동물은 어떻게 움직이는 것일까?’, ‘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우리 인체의 신비를 설명하는 데에도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특히 기계론의 아빠라 할 수 있는 데카르트는 자기 분야도 아니면서 아무데나 기계론의 잣대를 갖다 대며 똥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

17 세기 초의 의학계에는 훌륭하신 하비형님이 나타나셔서 아직까지도 의학계의 수학의 정석 같은 구닥다리 갈레노스의 이론들 중 심장과 혈액순환에 관한 내용을 버전업시키고 있었다. 하비는 심장은 근육질이고 강력한 심장 근육의 수축에 의해 피가 동맥으로 뿜어져 나간다고 하였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심장이 근육 펌프라는 하비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심장은 피가 증발할 때까지 피를 가열하는 수동적인 기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증발된 피는 심장을 부풀리면서 동맥에 압력을 가하며, 이 압력이 맥박의 원인라고 본 것이다.

기계론이 비록 시대적 트렌드이긴 했지만 이 이론은 교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 기계론 말마따나 세상 만물이 능동적인 자아를 가지고 알아서 움직인다면 신은 실업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계론에 관한 논쟁은 위에 적은 것처럼 데카르트가 심장을 가지고 떠드는 바람에 하비까지 끌어들이게 된다. 데카르트의 심장에 대한 주장은 하비의 혈액순환 개념을 변용해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하비가 정립한 개념을 제멋대로 바꾸어 써댔다.

하비의 이론은 데카르트와 달랐지만 그는 여러 가지 개인사정으로 데카르트와 말싸움할 시간이 없었고 결국 하비형님은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만다
.

이런 기계론 추종자들의 분야를 넘나드는 참견은 스테노 형님의 시대에 까지 계속되었다
. 뛰어난 해부학자인 스테노는 해부를 통해 심장이 신축성 있는 섬유들의 뭉치이며 누구들 말마따나 생기를 불어넣으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기계론이 사회, 과학 전반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심장이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한창 나이였던 스테노 형님은 하비 형님처럼 가만히 있지 않았다
. 그는 1665년 파리 강연을 통해 기계론자들에게 뻐큐 한방을 찰지게 날려 주신다.

파리 강연은 뇌에 관한 것이었다
. 뇌 조직은 연하고 부드러워 해부하기 무척 어려웠다. 따라서 뇌의 구조와 운동에 관한 추측이 난무했고 당연히 참견쟁이 데카르트 역시 일찌감치 한마디 거들었다. 데카르트는 영혼이 송과선 안에 들어앉아 꼭두각시 인형처럼 조직의 끈을 비틀고 돌리고 잡아당기면서 신체를 조절한다고 주장했다당연히 데카르트의 이런 주장은 해부학적 관찰이 아닌 송과선에 앉아있는 영혼의 연역적 추론을 통해서였다.





철이가 앉아있는 곳은 마징가의 송과선이다!


 



스테노는 해부를 통해 알게 된 뇌의 구조에 관해 발표하며 송과선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음을 밝혀내어 기계론자들의 뇌 이론에 냉수마찰을 해준다. 그러면서 스테노 형님은 과학은 자연을 관찰한 사실을 근거로 삼아야하며 제아무리 명쾌하다고 할지라도 순전한 추론을 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카리스마 있게 경고하였다.


스테노 형님의 이런 뛰어난 해부학적 지식은 이후 지질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는데 귀중한 시발점을 만들어 준다.

2부에서 계속 ……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