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치 미 이프 유 캔”, 양키즈가 게임을 이기는 이유


왜 뉴욕양키즈가 맨날 이기는지 아니?
강타자 미키맨틀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아니, 상대팀이 양키즈의 줄무늬 유니폼을 보고 기가 죽어버리기 때문이란다.

– 영화『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프랭크와 아버지의 대화 –

『Being There』(국내 출시명『찬스』) 라는 영화가 있다.

챈스 라는 이름의 나이 한 40 된 개인집 정원사가 그 주인공인데 이 아저씨, 고아출신에 워낙에 약간 머리가 둔한데다가 평생을 그 집에서 나무키우는 일만 해서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나무키우는거 하고 TV 보는 거 밖엔 없다.

그런데 이 정원사가 살던 집 주인이 그만 죽고, 집도 정리가 되는 바람에 정원사는 졸지에 길거리로 나앉게 된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던 이 아저씨, 그만 도로 한복판에서 어정대다가 차에 살짝 치이는데 하필이면 그 차가 미국 제일의 억만장자 재벌 차였던 덕분에 이 아저씨의 인생은 요상하게 풀려가기 시작한다.

차에 치일때 입고 있던 옷이 깔끔한 정장(그에겐 하나뿐인 정장이라 주인이 고급으로 사준 모양인데, 평소엔 입을 일이 없었으니)이었던 덕분에 이 아저씨는 억만장자에게 뭔가 그럴듯한 인물로 오해받는다. 그리고 그가 내뱉는 무의미한 몇마디들이 꽤 의미있는 뜻인것처럼 들리면서 억만장자는 그를 친구로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다. 덕분에 이 바보 정원사 아저씨는 갑자기 억만장자 곁에 나타난 신비의 인물로 주변사람들에게 비춰지게 되고 졸지에 주목받기 시작한다.

오해는 오해를 낳고 그의 뒤를 아무리 캐봐도 나오는게 없다는사실은 (당연하지, 원래 아무것도 없었으니) … 정보기관에서조차 더더욱 그를 대단하게 신비한 인물로 평가하게 만들고,

TV토크쇼에 나와서도 나무 키우는 얘기만 했는데 그게 현 정치상황에 대한 아주 훌륭한 통찰로 오해받으면서, 그는 비밀에 쌓여있지만 아주 머리가 좋고 영향력도 대단한 인물로 간주된다. 그 결과 그는 실제로 큰 영향력을 갖게 되고, 나중에 억만장자가 죽고난 다음에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낙점찍히는데서 얘기는 끝난다.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오해를 통해서 뭔가 있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아주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 될 수 도 있다는 얘기였다. 챈스 역을 맡은 사람이 유명한 배우 “피터 샐러즈”(『닥터스트레인지 러브』의 바로 그 아저씨)였던 이 영화는 좀 길다는 거 빼놓고는 정말 재미있었다.


겨울에는 꽃이 피질 않아요. 하지만 봄이 되면 꽃이 피죠 …

그 말씀은 조만간 경제가 좋아진다는 뜻인가요??



실제로 이런게 사기라면, 사기는 우리 일상 속에 종종 일어나는 거 아닐까.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다이아몬드 자체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이아몬드를 가치있다고 인정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생겨난 것일까? 나는 그 손톱보다도 작은 돌맹이가 몇백만원씩 해야 하는 이유를 도저히 그 돌 자체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다이어몬드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냥 여러 보석들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지금처럼 보석의 왕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DeViers라는 남아공의 다이어몬드 회사에서 “Diamond is Forever”(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007영화의 제목이었기도 하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결혼식=다이아몬드” 라는 공식을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시킨 다음부터였다.

1980년대, 코카콜라의 아성에 도전하기 위해 펩시콜라사에서는 펩시 챌린지(Pepsi Challenge) 라는 행사를 시도했다. 눈을 가린 시음자들에게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를 마시게 하고는 어느 콜라가 더 맛있는지 고르게 한 것이다.

그 결과 펩시콜라를 선택한 시음자가 절반을 넘었다. 이는 두 회사 콜라의 맛에는 감별할만한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펩시콜라가 더 맛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사였다. 만약 소비자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코카콜라 대신에 펩시콜라를 선택할 것이라는 게 회사의 복안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코카콜라를 마셨다. 어째서 그랬을까?

트위첼의 책 Living it Up(럭셔리 신드롬)에는 또 다른 펩시챌린지가 등장한다. 사람들에게 컵에 따른 에비앙 생수와 기타 여러 가지 다른 생수, 그리고 수돗물을 마시게 한 후 어떤 물이 제일 맛있는지를 물어본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생수맛을 감별하지 못했다. 심지어 수돗물이 제일 맛있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맛있다고 느낀건 생수 자체의 맛이 아니라 생수의 상표였던게 아닐까?

영화 『매트릭스』에는 주인공인 네오가 숟가락을 구부리는 초능력 소년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한다.


숟가락꼬마: 숟가락을 구부리려고 하지 말아요. 그건 불가능해요. 그 대신에 진실을 인식하려고 해봐요.
네오: 무슨 진실?
숟가락꼬마: 숟가락은 없다는 진실 말예요.
네오: 숟가락이 없다고?
숟가락꼬마: 그걸 깨닫고 나면 구부러지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될 거예요.


숟가락은 없다(There is no spoon).
따라서 숟가락이 구부러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숟가락을 보는 내 마음이 구부러지는 것이다.

이는 왜 사람들이 코카콜라를, 에비앙 생수를 더 맛있다고 느끼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콜라가, 생수 그 자체가 맛있는 것이 아니라 그 콜라와 생수를 보는 내 마음이 맛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솝우화에 허영에 찬 까마귀 이야기가 있다. 대충 이렇게 진행된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허영과 자만에 찬 어떤 까마귀가, 공작새들이 떨구고 간 깃털을 주워서 자기 털에다 꽂았다. 그리고는 그전 친구들을 얕잡아 보며 자신만만하게 아름다운 공작새들 무리 속으로 찾아갔다.

공작새들은 당장에 이 침입자를 간파하고, 작은 까마귀의 그 빌려 꽂은 깃털을 뽑고, 주둥이로 쪼면서 마구 쫓아냈다. 불행한 작은 까마귀는 가혹한 벌을 받아 몹시 슬퍼하면서, 그전 친구 있는 데로 돌아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기 친구들 틈에 끼려고 했다.
그러자 친구들은 이 작은 까마귀가 전에 얼마나 으시댔는가를 생각하고, 큰 소리로 호통치면서 자기네 무리에서 쫓아내자 이 작은 까마귀가 바로 조금 전에 얕잡아 본 친구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자연이 만들어 준 그대로 만족해 있었다면 손윗 사람들의 징계도 받지 않고 또 친구들의 경멸도 받지 않았을 텐데.”


이솝 이야기에는 늘 교훈이 따라다니는데, 이 이야기의 교훈은 너 자신을 알아라(Know then thyself)이다. 보다 정확하게 하자면 네 분수를 알아라, 너의 본질에 충실하라 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예들은 이 까마귀가 어쩌면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한다.
까마귀의 잘못은 자기 주제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정말 제대로 잘 연출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공작새에게 들키지만 않았다면, 그의 정체성 그의 본질은 까마귀가 아니라 공작새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마치 드비어스의 상술이 먹혀들지 않았더라면 다이아몬드는 지금도 여전히 평범한 보석중 하나에 불과할 수 있었고, 코카콜라의 유서깊은 반복광고가 먹혀들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그냥 맛있는 콜라를 선택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어서 은행의 융자가 절실하게 필요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럴듯한 턱시도를 입혀서 그럴듯한 차의 운전기사처럼 연출하고 자기는 그 차의 뒷자석에 앉아 은행을 찾아간다. 그리고 왜 이래야 하는지를 물어보는 아들에게 맨 처음 나온 교훈을 알려준다.


양키즈가 강해서 이기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양키즈는 강할 거라고 믿기 때문에 이긴다는 교훈. 이건 너 자신을 알고 네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이솝의 이야기와는 정 반대의 아주 발칙한 교훈이다.

유감스럽게도, 공작새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실패한 까마귀처럼 아버지는 실패했다.
하지만 아들은 그 교훈을 가슴깊이 새기고 실천에 나선다. 전학간 학교에서 일주일간 (학생이 아니라) 임시교사 노릇을 해보기도 하고, 가짜 결석계를 제출하러 온 여학생에게 진짜 결석계처럼 보이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몰락이 확인되자 아들은 집을 나가서 판을 더 크게 벌인다.

수표를 위조하고, 위조 수표가 먹혀들어가려면 수표를 내놓는 사람의 신분이 그럴듯해야 함을 깨닫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위조한다. 당시 가장 잘 나가는 직업인 비행기 조종사에서 의사로, 특수요원으로 다시 변호사로 그는 정체성을 바꾸어나간다. 프랑스에서 FBI에게 체포되기 전까지 최소한 5년간, 그는 성공했다. 250만 달러를 위조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녔고, 심지어 진짜 변호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얘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사람들은 말했을 것이다. 아무리 5년간 잘 살았다 하더라도 그건 결국 일장춘몽이고 사기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미성년자에다 고등학교 중퇴에 불과한 그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수감생활의 대부분을 FBI에서 위조수표 수사 담당 요원으로 일하면서 보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만큼 수표위조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진짜 요원이 된것이다.

이 수표는 ... 은행 직원 짓이네요.

게다가, 형기를 마치고 나서는 위조하기 어려운 수표 제조법에 대한 특허를 내서 그 특허로 수백만달러를 다시 벌어들였고, 지금도 잘 나가는 보안회사의 오너가 되어 있다. 그의 자서전은 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가 되어서 다시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말이다 …


그는 양키즈의 승률에는 정말로 그 줄무늬 유니폼의 힘이 작용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영화로 뭘 보여주려고 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서 내가 본 것은 이미지의 승리, 이 발칙한 원칙의 승리였다.

물론 그가 그 증명을 위해서 단순히 사기만 친건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의와 성의를 다해서 사기를 쳤다. 그 결과 그는 한가지 영역에서 전문가가 된 것이다. 아버지가 그에게 가르쳐준 또 다른 교훈 처럼, 그는 우유에 빠졌으나 포기하고 빠져죽은 생쥐가 아니라 죽기살기로 헤엄을 쳐서 우유를 치즈로 만들어 디디고 살아남은 생쥐가 된 것이다.


PS.
앞에 인용한 영화 『Being There』의 원작자는 폴랜드 태생의 미국이민자인 Jerzy Kosinsky라는 양반인데, 이 양반 역시 상당한 구라꾼이었던 모양이다.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구라를 잘 치기로 유명했다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구라인지 잘 구분이 안됐다던가. 그의 인생도 구라와 사실의 오묘한 혼합이었던 모양이다.

배경도 명확하지 않던 이 양반(본인은 예일대 출신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구라였다던가 …)은 미국에 와서 백만장자와 결혼했고(곧바로 이혼했는데, 이혼후 여자는 자살했단다),

자크 모노 같은 유명한 철학자의 임종을 사진찍어서 유명해지기도 했고, “워런비티” 주연의 『Reds』라는 영화에서 단역이지만 중요한 역을 맡기도 했고, 소설과 희곡도 썼다. 그러다가 58세가 되던 1991년에 갑자기 자살해버렸단다.

이 영화 『Being There』 도 결국 본인의 인생을 은유한게 아니었을까 싶다.

영진공 짱가

 

“결혼 피로연”, 인생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


학부시절, 노년심리학을 배우면서 우리는 노년기의 심리적인 특성을 ‘우내성경애조유의’ 라고 외웠다. 기억력 나쁜 내가 아직도 이건 잘 기억하는걸 보면 참 신묘한 기억법이었던 모양이다. 하나 하나 살펴보자.

우선 노년기가 되면 사람들은 우울해진다(우). 몸도 예전 같지 않고, 외모도 삭아버려서 아무도 자신을 매력적인 사람으로 봐주지 않는데다가, 사회적인 활동에서도 점차 밀려나 뒷방 늙은이가 되어가니 우울해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늙으면 내향적이 된다(내). 사실 내향성과 우울증은 거의 같이 가는 증상인데 사람들은 침울해지면 밖으로 나도는 대신에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혼자만의 상념에 빠진다. 그게 내향성이다. 평소에 매일같이 친구 불러내서 술 퍼먹던 사람도 우울해지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된다. 우울한 자의 유일한 친구는 자기 자신이니까.

또한 성역할이 바뀐다(성). 대부분 남자 노인들은 여성적이 되고, 여자 노인들은 남성적으로 바뀐다. 칼 구스타프 융은 그 이유를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의 세력관계가 역전된 탓이라고 설명했지만, 일부에서는 호르몬의 변화로 설명한다.

사실 남성성이라는 것 자체가 사회적 역할에 기대어 만들어져 있는데 (그래서 실직한 남자는 심리적으로는 거세된 남자와 비슷하다) 그 사회적 역할이 하나씩 사라지는 노년기에 남자가 남성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대로 남자가 주도권을 놓으면 누군가 그걸 다시 잡아야 하는데 그 역할을 여자노인이 하기 쉬우니 여자가 남성적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늙으면 사람이 경직되어 뻣뻣해진다(경). 신체적으로도 유연성이 줄어들고 심리적으로도 그렇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모험심이 줄어들며, 도덕적으로도 경직되어간다. 늙은 개는 새 재주를 배우지 못한다가 아니라 새 재주를 못 배우는 개가 늙은 개란 얘기다.

늙으면 또한 옛것에 대한 애착이 늘어난다(애). 쓸데없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그러다 보면 정작 필요한 것을 못 찾는 수도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 쓸데없는 물건들이 자신의 정체성이니까. 내가 예전에 입었던 옷들, 읽었던 책들, 샀던 물건들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은 노인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단지 우리는 아직 그렇게 많이 쌓아둘 만큼 정체성의 역사가 길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늙으면 조심성이 늘어난다(조). 역시 당연한 일이다. 늙으면 몸이 특히 뼈가 약해져 잘 부러지는 데다 부러진 뼈가 잘 붙지도 않는다. 정정하던 노인도 한번 뼈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그대로 가버리시는 경우도 많다. 사람이 활동을 계속 해야지 정신도 온전한데 병원에 오래 누워 있다보면 활동을 못하니 정신이 혼미해지고 덩달아 몸도 약해지면서 결국 급격하게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니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떨어지는 나뭇잎도 조심해야 하는 건 말년 병장보다는 노인들이다.
 

마지막으로 노인들은 후대에 뭔가 유산을 남기려 하고(유) 그걸 통해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의). 사실 유산은 자식을 위해서 남기는 게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흔적을 남기려는 욕구의 표현일 뿐이다. 유산은 재물인 경우도 있지만, 정신이나 전통인 경우도 많다. 어쨌든 누군가 내 존재를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내가 누군가에게 뭔가 영향을 미쳤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유산상속의 욕구인 것이다. 사실 자식은 사람들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유산이자 흔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를 낳는다. 그 고생을 하면서도 말이다.

전통사회에서는 노년기의 이런 욕구들을 채우기가 비교적 수월했다. 일단 험한 꼴 볼 때까지 오래 사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거니와, 한해라도 오래 살았다는 것이 비교우위를 갖는 동네이니 사회적 지위의 박탈도 좀 적었고, 변화가 없는 사회이니 경직되어 있다는 것이 별 흠이 되지도 않았고, 후손들이 대부분 고분고분 말을 들어줬으니 전통이라는 유산도 전수하고 삶의 의미도 찾기 쉬웠다.

하지만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 경우에는 노년이 매우 고달파진다. 순환이 반복되는 사회에서야 한해라도 오래 살아서 경험을 축적했다는 게 득이 되지만, 작년 다르고 내년 다른 세상에서는 축적된 경험도 별 소용이 없다. 그러니 사회적 지위의 박탈도 금방 닥쳐오기 마련이다. 게다가 경직성은 변화에 적응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도 (돈을 빼고는) 정신적 유산을 받길 원치 않는다. 갑자기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리는 거다. 게다가 오래 살기까지 하니, 그 고달픈 노년을 이전 세대보다 몇 십년이나 더 지속해야 하는 현대인은 참으로 불쌍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후자의 노년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본다. 진짜 삶의 진실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니까 말이다. 나는 유산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 공수래 공수거라는 진실을 어떻게든 기만해보려는 눈가리고 아옹질이라고 본다. 전통이 제대로 전수된다는 것은 결국 매 세대마다 결국 다르게 해석되고 재창조된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그 전통은 이전세대의 것이 아니라 당대의 것이라고 봐야 하니 말이다.

자손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기억해주지 않는데 손주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로지 유전자의 입장에서야 자손이 필요하지만, 개개인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보자면 자손은 그냥 놓고 떠나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칼릴 지브란은 부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자녀라는 화살을 미래로 쏘아보내는 활일 뿐이다. 자녀는 당신이 아니라 미래에 속한 존재이다.” 라고 말이다.

『와호장룡』으로 유명해진 “이안” 감독이 1993년에 만든 영화 『결혼 피로연』은 바로 그 노년을 받아들이는, 아니 인생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대만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매끈하게 살고 있는 여피족 게이 남자와 그의 미국인 애인(물론 남자)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진짜 주인공은 그 게이 남자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자식이 자신의 정신적 유산을 전수 받기를 바라고, 자기가 남긴 유산이 지속된다는 증거를 보여주길 다시 말해서 결혼해서 손주를 낳아주기를 바란다. 당연히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은 행여 꿈도 꾸지 못한다. 이런 아버지의 끝없는 성화에 못이긴 아들은 가짜 신부를 하나 구해서 가짜결혼식을 열어 아버지를 초대한다.

드디어 유산을 남기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미국으로 날아온 아버지. 그러나 눈치만 100단이 되어버린 노인네는 점차 일이 자신의 기대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그 과정은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부담스럽지 않게 연출되었다) 다행히도 이 아버지에겐 사실을 기만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가 남아있었다. 결국 마지막에 아버지는 어쩌다 보니 생물학적인 손주를 임신까지 한 명목상의 며느리가 아니라, 아들의 진짜 애인인 사이먼을 며느리로 인정한다. 아버지가 해변에서 사이먼과 산책을 하다가 건네는 붉은 돈봉투는 바로 그걸 상징한다.

우리 아들을 잘 부탁하네

그리고 아버지는 빈손으로 대만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이 노인네가 공항의 검색대 앞에서 금속탐지를 받기 위해 양손을 들어올리는 장면에서 끝난다. 평론가 정성일은 그 장면을 일종의 항복선언이라고 해석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그 모습은 항복한 패잔병처럼 처연하기보다는 마치 하얀 학이 날개를 펴드는 것처럼 우아했기 때문이다. 신선이 따로 있나? 삶의 진실을 받아들인 사람이 신선이지 ……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이 속세에서 뒹굴어 댈 때, 신선은 학처럼 날아가는 것이다.

빈손으로 말이다.

영진공 짱가

 

“인셉션”, 꿈 속에서는 시간이 압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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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학부시절에, 그게 벌써 20년쯤 전 …
프로이트의 <꿈의 분석> 인가, 아니면 그의 책을 인용한 다른 책에선가
꿈의 특성에 대한 예화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꿈에서는 시간의 압축이 엄청나다고 …

어떤 사람이 꿈 속에서 프랑스 대혁명에 휩쓸려들어서 중요한 사건들을 목격하고는
어쩌다 보니 반혁명분자로 지목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마침내 사형 당일날 길로틴 앞에 꿇어앉아 지나간 인생을 회고하고 온갖 감상에 잠기다가 드디어 길로틴 칼날이 자기 목으로 떨어지던 순간에 꿈에서 깼다고 합니다.

그런데 잠에서 깬 순간 실제 자신의 머리 위로 침대 머리판이 떨어지고 있더란 거죠.

그 책에서 프로이트는 이 사례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 꿈은 침대 머리판이 떨어지려고 뿌지직거릴때 시작된 것이라고 …

이를 감지한 무의식이 꿈을 통해 그를 깨운 것이죠,
자다가 머리에 떨어지는 물건에 맞아서 다치지 않도록.

그렇다면 그 뿌지직 삐걱삐걱 거리던 물건이 마침내 떨어지기까지 걸린 몇초의 시간동안,
꿈꾸는 이는 프랑스 혁명의 시작부터 단두대까지에 이르는 수개월 혹은 수년의 시간을 꿈꾼 겁니다.

현실에서의 몇 초가 꿈속에서는 그렇게 길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죠.

이걸 읽으면서 “맞아, 그래!”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내용은 거의 기억하지 못해도 이 꿈 예시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희미하긴 하지만요.

저는 학부시절부터 수업시간에 잘 졸기로 유명한 인간이었는데,
가끔은 수업을 듣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그 꿈 속에서도 졸기도 했고 …
그러다가 흠칫 하고 깨면 순식간에 꿈속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었죠.
남들은 조용히 수업듣는데 저 혼자서 다른 차원으로 이동했던 기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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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의 이 영화는 바로 이런 꿈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한 소품입니다.
이야기 자체는 정말 간단하고 작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이야기가 꿈의 특성을 치밀하게 활용한 연출을 통해서,
다층구조로 전개가 되니 참으로 특이한 경험이 됩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 놀란이 아니었으면 만들 수 없었던 영화입니다.
“다크 나이트”의 성공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헐리웃에서 이런 이야기에 이런 투자를 할 리가 없죠.

그리고 영화의 제목인 <인셉션(Inception)>의 뜻은 사전에 나오는 “징조” “조짐” 뭐 그런 의미라기 보다는,

(훔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디셉션(Deception)의 반대로 (생각의 씨앗을) “심는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영화가 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영화 자체가 관객들에겐 하나의 인셉션이죠.

그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어떤 결실을 맺을지는 각자의 일이고 …


영진공 짱가


 

영화로 수다떨기 (3), 초능력에 대하여



 



Q. 오늘, 주제는 ‘환상의 초능력’이에요. 박사님은 어렸을 때, 슈퍼맨 흉내내다가, 옥상에서 뛰거나 뭐 그런 적 없으세요? 어린시절 그런 사람들 꽤 많더라구요.

– 저는 스스로 수퍼맨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어서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영화와 현실은 다른 세계라는 걸 알고 있었던 듯해요. 하지만 유리겔라가 TV에서 숟가락 구부리는 쇼를 할 때는 따라했었죠. 물론 숟가락은 전혀 구부러지지 않더군요.

Q. 왜 인간이 고통스러운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신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는 말이 있는데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어떤 능력을 가지고 싶은 욕망. 그건 어떤 심리일까요?

– 상상력 덕분이죠. 우리는 지금 현재에만 구속되지 않고 다양한 미래와 가능성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지금은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생각을 해볼 수 있어요. 여기서 “어쩌면 이렇게 할 수도 있을텐데…” 라는 생각은 “왜 지금 나는 그렇게 못하지?” 라는 의문으로 연결이 되는 거죠.

아마 이런 의문이 없었다면 인류 발전도 없었을 겁니다. 날수 있다면.. 뭐도 뭣도 할 수 있을텐데 라는 상상이 비행기를 만들었고, 지구 밖으로 나가볼 수 있다면 어떤 일이 가능할텐데.. 라는 상상이 우주선을 만들어 내듯이요. 아서 클라크라는 유명한 SF작가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충분히 진보한 과학기술은 마술과 다르지 않다”.
과학기술이 결국 초능력에 대한 상상을 현실로 만든다는 거죠.

Q. 뭐 초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번 숭례문 화재 때도 잽싸게 불을 끈다든지, 시간을 되돌려서 정말 엄청나게 실수했던 일을 만회한다던지, 그런 거요.

– 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죠. 문제는 시간을 되돌리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점이지만요. 이런 것들은 과거에 대한 상상인데 아무 노력도 없이 이런 상상만 하는 건 후회로 연결이 되요. 하지만 과거에 대한 상상을 좀더 구체적인 실천으로 변환시키면 역사가 되죠. 역사를 공부하는 것도 결국 과거를 통해 미래에 대비하려는 노력이니까요.


아오…

Q. 영화 <왓 위민 원트>에서는 여자의 속마음을 읽는 한 남자가 나와요. 이심전심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남자와 여자, 너무 다른 거라는 걸, 이 남자는 알아가죠?

– 그렇죠. 근데 사실 이 남자가 그 전에는 여자의 마음을 전혀 몰랐느냐 하면 그건 아닐 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생활하면서 가장 많이 머리를 쓰는 게 바로 상대방의 생각을 읽는 것이거든요. 대화를 할 때도 얘가 왜 이런 얘기를 하지? 나는 뭐라고 대답해줘야지? 등등을 끊임없이 생각하는데 바로 그게 이 영화에서 다루는 초능력인 독심술이죠.

이 남자의 경우도 그래요. 이 사람은 바람둥이였쟎아요. 여자의 마음을 읽을 줄 모르는 바람둥이는 거의 없습니다. 어떻게 접근해야 상대방의 마음을 열 수 있는지 아는 것 자체가 독심술이니까요. 원래는 잘 나가던 이 남자가 곤경에 빠진 이유는 여자들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어요. 사람의 마음은 환경에 따라 달라져요.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도 높아지고 권한이 늘어나면서 여자들은 계속 바뀌었던 거죠. 근데 멜 깁슨은 구시대 여자들의 마음은 잘 읽었지만, 바뀐 새로운 세상의 여자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전혀 몰랐던 거고요.


참고로 What women want? 라는 제목은 원래 프로이트가 자기 책에 한탄하듯 쓴 글

Q. 그런데요, 이게 또 너무 속마음을 다 알아차려도 문제가 안될까..싶을 정도로 초능력이란 게 좀 무서울 때가 있어요.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 안되는 것처럼 영원히 타인의 마음 한 켠은 모르는 것도 좋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더라구요.

– 사실 우리의 뇌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첫째,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일, 그리고 남들은 내 맘을 맘대로 읽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말씀처럼 원활한 사회생활과 사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 한 켠에 남들이 몰라도 되는 것들 숨겨놓을 필요가 있거든요.
남이 내 마음을 읽는 경우를 걱정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마음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겁니다. 남들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경우도 있죠. 그러니 남들이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읽는다면 정말 무섭지 않겠어요?


내향적 일본문화에서 독심술을 거꾸로 해석한 영화, <사토라레>

Q. 영화 속 초능력 중에서 아주 많이 등장한 소재는 시간을 뛰어 넘는 것일거에요. 얼마 전 개봉한 <시간을 달리는 소녀>나 <빽 튜 더 퓨처>, <네스트>, 또는 다른 선택의 결과를 보여줬던 <패밀리 맨>, 한 순간에 머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소망이지 않나..하는데요?

– 사람들의 소망은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시간을 되돌린다는 상상은 최근에 특히 더 많아졌는데, 아마도 되감기가 가능한 매체들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현대미술의 대가인 백남준씨가 예전에 한 말입니다. 그 분은 1970년대에 벌써 비디오 플레이어 때문에 시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아예 바뀌어버릴 것이라고 예측했고 그래서 비디오 아트를 시작했죠.

옛날 사람들이 가장 원초적으로 가진 소망이 뭔지를 보려면 그 시대 사람들이 말하는 극락 혹은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보면 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극락에는 질병이 없고, 죽음도 없고, 일하지 않아도 평생 굶을 걱정이 없으며, 전쟁이나 다툼이 없죠. 그것들이 아마 당시 사람들을 가장 많이 괴롭히던 것들일 거예요.

Q. 그리고 또, 많은 맨..시리즈들이 초능력을 다루고 있어요. <슈퍼맨 리턴즈>, 그리고 <스파이더맨>, 초능력자들의 종합세트 등. 그들은 때론 그때, 사람들이 원하는 영웅의 초상을 가지고도 있는데요?

– 그래서 계속 새로운 초능력 영웅들이 등장하는 것일 겁니다. 예를 들어, 수퍼맨은 그야 말로 모든 면에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거의 기독교의 구세주같은 존재죠. 수퍼맨은 시간도 되돌리쟎아요. 못하는게 없죠. 이건 가장 원초적인 소망의 현신이지만, 그만큼 미숙한 소망이기도 해요. 무조건 최고! 이런 생각은 너무 단순하쟎아요.

수퍼맨은 이런 초능력 영웅의 원형이지만 그 덕분에 인기도 적죠.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능력은 제한된 반면 그 제한된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좀 더 우리 삶과 닮아있어요. 게다가 능력이 부족하니 머리를 많이 써야 하고 그러면 영화가 더 재미있죠. 그런 면에서 수퍼맨보다는 스파이더맨이 좀 더 현대적인 영웅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개인적으로 스파이더맨은 2편이 최고. 그 중에서도 저 지하철 장면 마지막 부분, 시민들이 얘를 감쌀때. 엉엉…

Q. 그래서 그런가요. 영화 <점퍼>에서 점퍼들을 없애려는 ‘팔라딘’들이 있듯이, 이들을 늘 소탕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 그것도 일종의 제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그러면 너무 불공평하쟎아요. 한쪽은 펑펑 순간이동 하는데 나머지는 그걸 그냥 구경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사람들은 불공평한 게임은 재미없어서 안봐요.


난 정말, 지금 데쓰노트만 쓸 수 있다면 여생이 절반으로 줄어도 무관함.

Q. 소탕하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초능력자들의 능력. 별로 달갑지 않죠. 그런데, 초능력자들이 마음만 잘 못 먹으면요, 사회적으로 정말 물의를 일으킬만한 능력들도 꽤 많이 나와요. 가령 영화 <데스노트> 같은 경우, 노트에 이름을 적기만 하면, 사람이 죽어요.

– 물론이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쟎아요.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거든요. 근데 이 사회가 사람들 개개인에게 기대하는 능력에는 범위가 있어요. 그걸 넘어선다면 언제나 문제가 되죠. 너무 똑똑하거나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일종의 초능력자들인데 그들 역시 대부분 사회생활 하기가 쉽지 않아요. 게다가 <데스노트> 쯤 되면 아주 무시무시하죠.

근데 사실 초능력자가 되면 머리는 아주 나빠질 것 같기도 해요. 우리들은 모두 초능력자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에겐 지능이라는 정신능력이 있거든요. 이 능력 다른 동물에게는 거의 없습니다. 다른 동물들이 보기에 인간은 초능력자처럼 보이겠죠. 몸은 비리비리한 것들이 어떻게 저런 괴상한 도구를 만들어서 우리를 이기지? 하면서… 우리는 지능을 키워서 살아남은 초능력자들이죠.

하지만 다른 초능력에 너무 의존하면 지능을 쓸 일이 없어지고, 결국 바보가 되겠죠. 데스노트의 라이토가 가면 갈수록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는 이유도 아마 초능력에 너무 의지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사실, 따지고보면 덕 라이만 이나 스필버그, 카메론 같은 사람들이 진짜 초능력자…

Q. <데스 노트L:새로운 시작>에서는, ‘전인류 말살프로젝트’를 저지하려는 L의 모험이 시작되어요. 지금의 인간은 악이기 때문에 모두 갈아엎어야 한다는 ‘사신’의 불신과, 이를 막기 위해선 세상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L의 믿음.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는 줄거리였는데요….

– 데스노트에서 라이토 같은 경우는 철없이 초능력에만 의지하려는 미성숙한 우리 모습을 대표한다면, L의 입장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을 대표하는 역할이예요. 초능력으로 한방에 뭘 해결하는건 애초에 불가능하니까 이성적으로, 노력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거죠.

Q. 오늘 영화 속 초능력으로 말을 나눠서 그렇지 초능력, 초자연, 심령으로 많은 사람들이 유혹 당하기도 하는 게 현실 속의 이야기에요. 어떤 심리 테스트에는 1. 투시, 2. 예지 3. 순간이동 4. 염력 5. 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능력, 6.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 중 어느 것을 가지고 싶은가? 뭐 이런 걸로 심리 테스트도 있던데…영화 속 초능력, 박사님은 어떤 능력이 부럽던가요?

– 저도 성격검사 도구를 개발할 때 비슷한 질문을 넣은 적이 있어요. 투명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평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성격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염력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게으르거나 남들을 놀래키는 힘을 원하던 사람일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물론 예지능력이 제일 부러워요. 과학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소망에서 시작한 거거든요.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것이 과학인데 이건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정말로 그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하는 과정 이예요. 지금도 그런 예지능력을 가진 도구를 개발하려고 연구하고 있고요.


수퍼맨이 좋아요, 스파이더맨이 좋아요?

Q. 네, 오늘 이런저런 영화 속 심리학, 초능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많이 되었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구요, 다음 주 어떤 내용으로 만나볼까요?

– 글쎄요. <유주얼 서스펙트> 이후로 우리나라 관객들이 영화를 볼 때 늘 염두에 두는 요소 중에 하나가 반전이거든요. 반전 강박증이라고 할 만큼.. 반전이 없으면 재미도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요. 이 영화 속 반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는 건 어떨까요?



영진공 짱가

영화로 수다떨기 (1), 사랑에 대하여



6월 2일, 꼭 투표합시다!

2008년에 라디오 불교방송에서 잠깐 진행했던 코너
<금요스페셜, 장근영의 영화 속 심리학>을 글로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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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오늘은 영화 속 심리학, -사랑-에 대해서 좀 알아보고자해요. 사랑타령, 어떨 때는 지겨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 또 예술작품들, 상업품들이 ‘사랑’에 의존해 살고 있는데요, 인류사가 사랑의 역사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구요. 이게 어떻게 정의 내리기가 참 어려운 거에요.

대중문화가 사랑을 애용하는 이유는 사랑이 다양하면서도 공감이 되는 감정이기 때문일 겁니다. 일단 사랑은 아주 센 감정이예요. 김현식씨가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웃고, 운다” 고 했쟎아요. 근데 그 사랑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람들 숫자만큼의 사랑이 있다고 할 수도 있을만큼 다양한 것이 사랑이죠.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사랑이야기는 매번 결국엔 같은 내용이면서도 그때마다 다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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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영화 속 사랑, 뭐 대부분의 영화가 러브 라인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어가는데요, 심리학에서는 이 사랑을 어떻게 접근하고 있나요?

심리학계에서 사랑에 대한 연구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사랑은 너무 당연한 감정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연구보다는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일 지도 모르죠. 어쩌면 심리학자들이 좀 공부만 하고 정작 실생활에서는 별로 로맨틱하지 못해서였는지도 모르고요.
 
부모의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 보울비라는 사람이 연구를 한 것이 유명하고, 그 외에는 스턴버그라는 학자가 사랑의 삼각형이라는 주제로 연구한 것이 있습니다. 사랑의 색채학 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 이론을 제시한 “존 앨런 리”는 심리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로 알고 있어요. 게다가 제가 알기로는 적극적인 동성애 커뮤니티 운동가라고도 하더군요. 어쨌든 존 리의 사랑 색채이론이 대중적인 인기가 많죠. 사랑을 세 가지 색채로 구분하고 그 색의 혼합으로 다시 세가지 색을 더 만들어서 모두 6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게 대부분의 사랑경험을 설명하기 딱 좋은 틀이거든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랑도 거의 모두 이 여섯가지 유형 중의 하나로 구분할 수 있어요.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 등장하는 좀 괴상한 사랑도 이 색채로 구분이 되죠.




Q. 영화 <게이샤의 추억>…치요가 어린시절 한 남자를 마주하고, 꿈을 ‘게이샤’로 바꿀만큼,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거는 그런 내용에 동양적인 미가 돋보이던 작품이었는데요….

솔직히 그게 말이 됩니까. 사랑을 얻기 위해서 기생이 되다니요.
물론 게이샤가 그 시대에 농부의 딸이 전문예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는 점은 고려해야겠죠. 하지만 우리나라 기생도 사실 전문 예술인이었지만, 사랑을 얻기 위해서 기생이 된다는 이야기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사랑에 상처받고 복수를 위해서 기생이 되겠죠.

그러니까 <게이샤의 추억>은 “서양인이 오해한” 일본적인 정서에서나 이해가 되는 이야기죠. 어쨌든 영화는 그것도 사랑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사랑은 존 리의 사랑 유형으로 구분하자면 에로스 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로스 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은 행복 그 자체예요. 동화 속 주인공처럼 이상형을 운명처럼 만나서 그 후로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마무리되는 사랑이죠. 치요도 어둡고 막막한 현실에서 잠깐 키다리 아저씨를 만난 순간의 행복이 이후에 희망이 되고 동기가 됩니다. 언젠가는 꼭 그 아저씨를 다시 만나 영원히 행복해질거야. 라는 희망. 이게 치요의 사랑인거죠.


Q. 자신의 인생에서 꿈과 목표가 동기부여가 ‘사랑’에 의해서 원동력을 얻어서 그것들을 이루어가면 참 해피엔딩일건데, 또 사람 사는 일이 그렇지가 않을 때가 많죠. 그랬을 때, 사랑에 의한 파괴력 또한 어마어마하게 그려지는 영화들이 많죠….

원래 효과가 좋은 약들이 부작용도 무섭거든요.
사랑도 그렇죠. 특히 매니아적 사랑이 무섭습니다.
근데 이게 인과응보예요. 매니아적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원래 처음에는 사랑을 하찮게 보고 게임 하듯이 남을 울리는 사랑만 하던 사람인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가 어느 날 임자를 만나면 미치는 거죠. 게임의 본질은 속임수인데, 속임수와 열정적 사랑이 만났으니 의처증 의부증이 되는 겁니다.


매니아적 사랑의 예, 하츠모모(공리)


Q. 소개팅자리나 누구만나는 자리에 심리학 박사이기에 자신의 마음이 들킬까봐 사람들이 더 불편해한다던가 그런 거는 없나요?

십여년 전에는 정말 많이들 그랬는데, 요즘은 좀 덜 한 것 같아요.
누가 봐도 당연한 이야기를 해도 역시 심리학 박사는 달라… 이런 식의 반응을 받는 경우는 꽤 있죠. 근데 사실 제 경험에 따르면 실천에 강한 사람들은 이론을 파지 않는 것 같아요. 사람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으니까 심리학을 하는 거 같거든요.


Q. 어떤 심리학에 의하면요, 첫 눈에 반하는 사람들, 보통은 콤플렉스와 콤플렉스의 만남일 경우가 많다고들 해요. 그러니까 소심한 사람은 좀 활달한 사람을,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배려가 많은 사람을, 뭐 이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진 사람에게 반하는 경우, 많다던데요?

물론 많죠. 그 이론의 원조는 플라톤일 겁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원래 인간이 너무 강해서 신을 위협했대요. 그래서 신들이 인간을 반으로 쪼개버렸고, 그 반쪽들이 각각 남자 여자가 된거죠. 어쩌다 헤어졌던 나의 반쪽을 만나면 대퇴부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전기충격이 흐르고, 눈에서는 불꽃이 튀고… 뭐 그런 얘기죠. 그런 경우를 상호보완적인 사랑이라고 하죠. 자기와 전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경우죠. 말씀처럼 자신을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그런 사랑에 빠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그렇다면, 너무 완벽한 사람, 보기에는 멋지지만 사랑하기에는 좀 꺼려지는 사람 아닐까해요..뭔가 채울 것이 없잖아요.

왜 그런 사람들 있쟎아요.
너무 빵빵하게 가진 것이 많아서 선물을 해주기도 부담스러운 사람들.
이미 다 가지고 있으니 더 해줄 게 없고, 어줍쟎게 해주다간 오히려 우스워질 것 같은 사람들. 
사실 우리가 사랑을 시작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거절에 대한 불안이예요.
내가 상대방에게 사랑한다고 했는데, 상대방이 “미안, 우리 오빠 동생으로 지내… ” 이러거나, 아니면 “뭬야? 감히 나를 뭘로 보고!” 이러면 어떻게 하나…
그러면 정말 심장이 제대로 찢겨나가고 입장 완전히 구겨지는거쟎아요.
그러니 상대방이 너무 대단해 보이는 것도 사랑의 장애가 되죠.

게다가 너무 문제가 없는 관계도 문제예요.
문제가 없다는 건 사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거든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라는 영화가 딱 그 이야기예요.


슬쩍 미스터 미세스 스미스로 넘어가고 …


Q. 집도 좋고, 차도 좋고, 직업도 좋고, 거기에다 외모까지 출중한 두 부부, 문제가 너무 없어도 문제인 그런 케이스네요. 너무 풍족한 세상에 불만이 쌓여가는 문제이기도 하구요…

위생가설이라는 게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 알러지가 문제인데, 이게 우리 환경이 너무 위생적이어서 그렇다는 가설이죠. 기생충에도 감염되고, 감기도 매년 걸려주고, 흙밭에서 놀면서 세균도 많이 접하고… 이러면 면역체계가 바빠서 딴 짓을 못하는데, 감염이 없어지면 면역체계가 할 일이 없으니까 이젠 자기 몸을 공격하는 바람에 알러지가 생긴다는 건데, 요즘 학계에서는 꽤 유력한 가설로 인정받고 있어요.

근데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좀 그래요. 원래 사회관계는 전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들이거든요. 당연히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관계 라는 게 발전을 하기 마련인데 아예 문제가 없으면 오히려 관계 자체가 불필요해지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뭐하러 같이 살지? 이딴 의문이 생기고, 그냥 이혼이나 할까… 이렇게 되는 거죠.

이 영화에서도 브란젤리나 커플은 서로 너무 상대방의 사생활을 존중해요. 서로 터치 안하고 부부로서 각자 할 일만 하죠. 그러다 보니 불만은 생기는데 문제로 불거지지는 않고, 계속 속에서만 쌓이는 거죠. 하지만 나중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서로 죽일듯이 싸우게 되고, 외부에서 큰 문제가 닥쳐오니까 오히려 다시 사랑의 불꽃이 활활 타오른다 …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Q. 뭐 그렇다고 문제를 만들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뒤짚어서 지금 위기나 어려움에 부딪힌 연인이나 부부들, 함께 그 위기를 해결해가는 과정, 또 한 번 사랑을 확인하는 기회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어요…

맞습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옛 말씀 틀린거 하나 없습니다.
문제가 생기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인생의 필연이거든요.
중요한 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죠.

Q. 사랑, 사랑인가 아닌가? 고민하는 입장도 있을거에요. 워낙 친해져서 없으면 허전한데, 또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는 좀 뭔가 밍숭한, 우정에 가까운 그런 경우, 과연 어떻게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사랑은 본인이 가장 잘 아는 거라고 봅니다.
자기가 사랑이라면 사랑인 거고, 아니라면 아닌 거죠.
하지만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 중에는 정말 친한 친구에 가까운 사랑도 있어요.

일단 사랑의 기본은 “너밖에 없다” 입니다. 나는 너도 사랑하고 너도 사랑하고 모두를 사랑해. 이따위 말은 그냥 헛소리죠. 모두를 사랑하는 건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근데 친구 중에도 너밖에 없다는 친구가 있다면 그게 사랑일 수 있어요.
 
심리학자 스턴버그는 사랑의 핵심 요소는 열정, 친밀감, 책임의식 이라고 말해요. 그 중에 열정은 처음에 반짝 타올랐다가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사라지는데, 친밀감은 서로를 오래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축적이 되죠. 책임의식은 원칙 문제라 시간의 흐름에도 변함이 없다고 할 수 있고요. 처음에는 서로 애매하게 좋아하다가 시간이 지나도 나를 너만큼 잘 알고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구나… 그래서 너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사랑이겠죠.

Q. 이게 처음부터 열정적인 사랑이라면 괜찮은데, 우정에서 비롯된 사랑은 마음에 열정이 있더라도 표현하기가 참 민망한 경우가 있어요.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나 <청춘 만화>, <우리, 사랑일까요?> 이런 류의 영화처럼 극적으로 헤어지거나 다치거나 하지 않으면요.

민망하다는 그 감정의 배후에는 용기의 부족이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 라는 대답이 나올까봐 두려워서 계속 진짜 친구로 지내는 거죠. 이럴 때는 “밑져봐야 본전이지” 라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어차피 친구로 지내는데, 그냥 친구로 지내라는 말 듣는게 뭐 손해겠어요. 말씀하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도 마지막 순간 두 주인공이 “밑져봐야 본전이지” 라는 생각으로 들이대니까 해피엔딩 되쟎아요. 청춘만화 에서도 권상우가 망가질 대로 망가지니까 김하늘이 드디어 용기를 내고요.


슬쩍 청춘만화도 건드려 주고 …

Q. 그래도 이런 친구같은 관계, 꽤 멋진 사랑의 관계가 아닐까..하는데요?

음, 당사자들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갈걸요.
뭐 원래 강건너 불구경이 보기는 더 좋지만 말이죠.

Q. 네, 오늘 이런저런 영화 속 심리학,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많이 되었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구요, 다음 주에는 어떤 내용으로 금요일의 시간 기다릴까요?

잔인성이 어떨까요. 최근에 관심을 받는 영화 중에 <추격자>라는 영화가 있는데 인간의 잔인성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