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전쟁”, 세상의 단순한 이야기를 블록버스터에 담아낸 영화


기억이 정확한지는 장담할 수 없는데 ‘1’자를 날카롭게 간 샤프심으로 ‘7’자로 고쳤던 것만은 확실하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보충수업료 통지서를 새벽 5시 30분에 엄마의 눈앞에 디밀었던 건 분명히 잠결에 별 생각 없이 안경도 끼지 않고 그냥 주시리라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엄마의 “지우개 가져와봐라”라고 나직이 읊조리는 한마디는 재앙이었다.


아노미, 인샬라,

알고도 모른척하는 사람은 무섭다.
그게 사람이 아닐 땐 더욱 그렇다.

정체뿐만 아니라 그 근원마저 불확실한 다른 생명체가 지구를 덮치는 우주전쟁은 그 제목의 진부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래, 제목 따위야 후지면 어떠냐? 스티븐 형아에, 톰 형아에, 당시 10세 전후 최고미녀 다코타양까지 최고의 진용을 갖추지 않았더냔 말이다. 이 셋의 진용만으로도 비슷한 타 영화에게는 그야말로 ‘트라이포드’같은 놈들이었던 것을 ……

“꿈과 용기와 희망을”이라는 ‘5共’ 풍의 1980년대적 카피의 우리나라 포스터와는 상관없이 스필버그의 영화들은 영화 자체의 힘이 넘쳤다. 녹조낀 서해안 바닷가에 폐타이어 끼고 놀던 우리가 플로리다 광활한 푸른 해변에 15미터짜리 죠스의 꿈이 있을리 없었고 국민소득 3만불짜리 미국 중산층 가정사를 배경으로 한 아이들의 스펙타클 모험 이야기가 우리에게 줄 용기는 없었다.

뿐이랴? 수 천번을 침략당하고도 “그래도 살아는 있었네”라는 자조적인 국사교과서 멘트를 끈질긴 민족의 저력으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우리에게 당당히 문화침략자로서 영웅시되는 헤리슨 형이 어떤 희망을 줄 지 알지 못했다. “꿈과 용기와 희망을”은 미국시민권자이며 중산층 정도에 살며 최소한 백인쯤은 되어줘야 가능한 케치프레이즈였지 최류탄을 머리에 맞고 국가 기관 지하에서 탁치니 억하고 죽어나갔던 군부독재하의 암울한 우리에게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는 그저 두 시간짜리 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스필버그는 영화를 잘 만들고서도 권력의 소외자들에게는 뻥쟁이, 뽕쟁이로 몰릴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겠는가?

“우주전쟁”(2005)은 나이를 먹어가며 조금씩 솔직해지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역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의외로 답은 간단하며 실제로 정의는 대단치 않고 살거나 죽는 건 가오다시 잡을 틈이 없다는 세상의 아주 단순한 이야기들을 블록버스터라는 공룡의 아가리에 집어 넣는 담대함에 역시 스티븐 형은 대가다란 생각이 든다.

“아미스타드”에서부터 변화를 꾀한 스티븐 스필버그는 “우주전쟁”을 통해서 확실히 자신의 나와바리를 넘겨 버렸고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난 아직도 밤 10시 미팅 시간 잡아놓고 2시간 뒤에 술이 떡이 되어서 나타난 클라이언트의 홍보성 광고 제안서 단가로 고민하는 중이다. 그래도 “우주전쟁”에서 보여준 스티븐 형아의 화법대로라면 난 아직 살만하다.

난 비루하고 비겁하고 비리비리한 소시민이지만 쳇, 수 억년 벼르고 벼르다가도 어이없이 당하는 바보들도 있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란 말인가?

영진공 그럴껄

“캐치 미 이프 유 캔”, 양키즈가 게임을 이기는 이유


왜 뉴욕양키즈가 맨날 이기는지 아니?
강타자 미키맨틀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아니, 상대팀이 양키즈의 줄무늬 유니폼을 보고 기가 죽어버리기 때문이란다.

– 영화『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프랭크와 아버지의 대화 –

『Being There』(국내 출시명『찬스』) 라는 영화가 있다.

챈스 라는 이름의 나이 한 40 된 개인집 정원사가 그 주인공인데 이 아저씨, 고아출신에 워낙에 약간 머리가 둔한데다가 평생을 그 집에서 나무키우는 일만 해서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나무키우는거 하고 TV 보는 거 밖엔 없다.

그런데 이 정원사가 살던 집 주인이 그만 죽고, 집도 정리가 되는 바람에 정원사는 졸지에 길거리로 나앉게 된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던 이 아저씨, 그만 도로 한복판에서 어정대다가 차에 살짝 치이는데 하필이면 그 차가 미국 제일의 억만장자 재벌 차였던 덕분에 이 아저씨의 인생은 요상하게 풀려가기 시작한다.

차에 치일때 입고 있던 옷이 깔끔한 정장(그에겐 하나뿐인 정장이라 주인이 고급으로 사준 모양인데, 평소엔 입을 일이 없었으니)이었던 덕분에 이 아저씨는 억만장자에게 뭔가 그럴듯한 인물로 오해받는다. 그리고 그가 내뱉는 무의미한 몇마디들이 꽤 의미있는 뜻인것처럼 들리면서 억만장자는 그를 친구로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다. 덕분에 이 바보 정원사 아저씨는 갑자기 억만장자 곁에 나타난 신비의 인물로 주변사람들에게 비춰지게 되고 졸지에 주목받기 시작한다.

오해는 오해를 낳고 그의 뒤를 아무리 캐봐도 나오는게 없다는사실은 (당연하지, 원래 아무것도 없었으니) … 정보기관에서조차 더더욱 그를 대단하게 신비한 인물로 평가하게 만들고,

TV토크쇼에 나와서도 나무 키우는 얘기만 했는데 그게 현 정치상황에 대한 아주 훌륭한 통찰로 오해받으면서, 그는 비밀에 쌓여있지만 아주 머리가 좋고 영향력도 대단한 인물로 간주된다. 그 결과 그는 실제로 큰 영향력을 갖게 되고, 나중에 억만장자가 죽고난 다음에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낙점찍히는데서 얘기는 끝난다.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오해를 통해서 뭔가 있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아주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 될 수 도 있다는 얘기였다. 챈스 역을 맡은 사람이 유명한 배우 “피터 샐러즈”(『닥터스트레인지 러브』의 바로 그 아저씨)였던 이 영화는 좀 길다는 거 빼놓고는 정말 재미있었다.


겨울에는 꽃이 피질 않아요. 하지만 봄이 되면 꽃이 피죠 …

그 말씀은 조만간 경제가 좋아진다는 뜻인가요??



실제로 이런게 사기라면, 사기는 우리 일상 속에 종종 일어나는 거 아닐까.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다이아몬드 자체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이아몬드를 가치있다고 인정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생겨난 것일까? 나는 그 손톱보다도 작은 돌맹이가 몇백만원씩 해야 하는 이유를 도저히 그 돌 자체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다이어몬드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냥 여러 보석들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지금처럼 보석의 왕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DeViers라는 남아공의 다이어몬드 회사에서 “Diamond is Forever”(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007영화의 제목이었기도 하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결혼식=다이아몬드” 라는 공식을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시킨 다음부터였다.

1980년대, 코카콜라의 아성에 도전하기 위해 펩시콜라사에서는 펩시 챌린지(Pepsi Challenge) 라는 행사를 시도했다. 눈을 가린 시음자들에게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를 마시게 하고는 어느 콜라가 더 맛있는지 고르게 한 것이다.

그 결과 펩시콜라를 선택한 시음자가 절반을 넘었다. 이는 두 회사 콜라의 맛에는 감별할만한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펩시콜라가 더 맛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사였다. 만약 소비자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코카콜라 대신에 펩시콜라를 선택할 것이라는 게 회사의 복안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코카콜라를 마셨다. 어째서 그랬을까?

트위첼의 책 Living it Up(럭셔리 신드롬)에는 또 다른 펩시챌린지가 등장한다. 사람들에게 컵에 따른 에비앙 생수와 기타 여러 가지 다른 생수, 그리고 수돗물을 마시게 한 후 어떤 물이 제일 맛있는지를 물어본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생수맛을 감별하지 못했다. 심지어 수돗물이 제일 맛있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맛있다고 느낀건 생수 자체의 맛이 아니라 생수의 상표였던게 아닐까?

영화 『매트릭스』에는 주인공인 네오가 숟가락을 구부리는 초능력 소년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한다.


숟가락꼬마: 숟가락을 구부리려고 하지 말아요. 그건 불가능해요. 그 대신에 진실을 인식하려고 해봐요.
네오: 무슨 진실?
숟가락꼬마: 숟가락은 없다는 진실 말예요.
네오: 숟가락이 없다고?
숟가락꼬마: 그걸 깨닫고 나면 구부러지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될 거예요.


숟가락은 없다(There is no spoon).
따라서 숟가락이 구부러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숟가락을 보는 내 마음이 구부러지는 것이다.

이는 왜 사람들이 코카콜라를, 에비앙 생수를 더 맛있다고 느끼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콜라가, 생수 그 자체가 맛있는 것이 아니라 그 콜라와 생수를 보는 내 마음이 맛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솝우화에 허영에 찬 까마귀 이야기가 있다. 대충 이렇게 진행된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허영과 자만에 찬 어떤 까마귀가, 공작새들이 떨구고 간 깃털을 주워서 자기 털에다 꽂았다. 그리고는 그전 친구들을 얕잡아 보며 자신만만하게 아름다운 공작새들 무리 속으로 찾아갔다.

공작새들은 당장에 이 침입자를 간파하고, 작은 까마귀의 그 빌려 꽂은 깃털을 뽑고, 주둥이로 쪼면서 마구 쫓아냈다. 불행한 작은 까마귀는 가혹한 벌을 받아 몹시 슬퍼하면서, 그전 친구 있는 데로 돌아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기 친구들 틈에 끼려고 했다.
그러자 친구들은 이 작은 까마귀가 전에 얼마나 으시댔는가를 생각하고, 큰 소리로 호통치면서 자기네 무리에서 쫓아내자 이 작은 까마귀가 바로 조금 전에 얕잡아 본 친구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자연이 만들어 준 그대로 만족해 있었다면 손윗 사람들의 징계도 받지 않고 또 친구들의 경멸도 받지 않았을 텐데.”


이솝 이야기에는 늘 교훈이 따라다니는데, 이 이야기의 교훈은 너 자신을 알아라(Know then thyself)이다. 보다 정확하게 하자면 네 분수를 알아라, 너의 본질에 충실하라 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예들은 이 까마귀가 어쩌면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한다.
까마귀의 잘못은 자기 주제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정말 제대로 잘 연출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공작새에게 들키지만 않았다면, 그의 정체성 그의 본질은 까마귀가 아니라 공작새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마치 드비어스의 상술이 먹혀들지 않았더라면 다이아몬드는 지금도 여전히 평범한 보석중 하나에 불과할 수 있었고, 코카콜라의 유서깊은 반복광고가 먹혀들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그냥 맛있는 콜라를 선택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어서 은행의 융자가 절실하게 필요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럴듯한 턱시도를 입혀서 그럴듯한 차의 운전기사처럼 연출하고 자기는 그 차의 뒷자석에 앉아 은행을 찾아간다. 그리고 왜 이래야 하는지를 물어보는 아들에게 맨 처음 나온 교훈을 알려준다.


양키즈가 강해서 이기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양키즈는 강할 거라고 믿기 때문에 이긴다는 교훈. 이건 너 자신을 알고 네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이솝의 이야기와는 정 반대의 아주 발칙한 교훈이다.

유감스럽게도, 공작새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실패한 까마귀처럼 아버지는 실패했다.
하지만 아들은 그 교훈을 가슴깊이 새기고 실천에 나선다. 전학간 학교에서 일주일간 (학생이 아니라) 임시교사 노릇을 해보기도 하고, 가짜 결석계를 제출하러 온 여학생에게 진짜 결석계처럼 보이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몰락이 확인되자 아들은 집을 나가서 판을 더 크게 벌인다.

수표를 위조하고, 위조 수표가 먹혀들어가려면 수표를 내놓는 사람의 신분이 그럴듯해야 함을 깨닫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위조한다. 당시 가장 잘 나가는 직업인 비행기 조종사에서 의사로, 특수요원으로 다시 변호사로 그는 정체성을 바꾸어나간다. 프랑스에서 FBI에게 체포되기 전까지 최소한 5년간, 그는 성공했다. 250만 달러를 위조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녔고, 심지어 진짜 변호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얘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사람들은 말했을 것이다. 아무리 5년간 잘 살았다 하더라도 그건 결국 일장춘몽이고 사기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미성년자에다 고등학교 중퇴에 불과한 그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수감생활의 대부분을 FBI에서 위조수표 수사 담당 요원으로 일하면서 보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만큼 수표위조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진짜 요원이 된것이다.

이 수표는 ... 은행 직원 짓이네요.

게다가, 형기를 마치고 나서는 위조하기 어려운 수표 제조법에 대한 특허를 내서 그 특허로 수백만달러를 다시 벌어들였고, 지금도 잘 나가는 보안회사의 오너가 되어 있다. 그의 자서전은 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가 되어서 다시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말이다 …


그는 양키즈의 승률에는 정말로 그 줄무늬 유니폼의 힘이 작용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영화로 뭘 보여주려고 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서 내가 본 것은 이미지의 승리, 이 발칙한 원칙의 승리였다.

물론 그가 그 증명을 위해서 단순히 사기만 친건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의와 성의를 다해서 사기를 쳤다. 그 결과 그는 한가지 영역에서 전문가가 된 것이다. 아버지가 그에게 가르쳐준 또 다른 교훈 처럼, 그는 우유에 빠졌으나 포기하고 빠져죽은 생쥐가 아니라 죽기살기로 헤엄을 쳐서 우유를 치즈로 만들어 디디고 살아남은 생쥐가 된 것이다.


PS.
앞에 인용한 영화 『Being There』의 원작자는 폴랜드 태생의 미국이민자인 Jerzy Kosinsky라는 양반인데, 이 양반 역시 상당한 구라꾼이었던 모양이다.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구라를 잘 치기로 유명했다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구라인지 잘 구분이 안됐다던가. 그의 인생도 구라와 사실의 오묘한 혼합이었던 모양이다.

배경도 명확하지 않던 이 양반(본인은 예일대 출신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구라였다던가 …)은 미국에 와서 백만장자와 결혼했고(곧바로 이혼했는데, 이혼후 여자는 자살했단다),

자크 모노 같은 유명한 철학자의 임종을 사진찍어서 유명해지기도 했고, “워런비티” 주연의 『Reds』라는 영화에서 단역이지만 중요한 역을 맡기도 했고, 소설과 희곡도 썼다. 그러다가 58세가 되던 1991년에 갑자기 자살해버렸단다.

이 영화 『Being There』 도 결국 본인의 인생을 은유한게 아니었을까 싶다.

영진공 짱가

 

“더 브레이브(True Grit)”, 코엔 형제의 정통 서부극 리메이크





“진정한 용기”(True Grit)라는 멋진 원제목을 갖고 있는 영화 <더 브레이브>는 법 보다 무력이 위세를 떨치던 시절의 – 안그랬던 시절이 어디 한번이라도 있었느냐만은 – 이야기다.

아버지를 죽이고 인디언 거주지역으로 달아난 범인 톰 채니(조쉬 브롤린)를 잡기 위해 14살 소녀 매티(헤일리 스타인펠드)가 연방 보안관 출신의 백전노장 루스터 코그번(제프 브리지스)를 고용하고, 여기에 톰 채니에게 걸린 다른 현상금을 노리는 텍사스 레인저 출신의 라보프(맷 데이먼)가 가세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정통 서부극에 가까운 작품이 <더 브레이브>다.










코엔 형제 감독의 영화를 놓고 ‘정통 서부극’에 가깝다고 묘사한다는 것은 사실은 코엔 형제 특유의 장르 비틀기나 블랙 코미디의 요소들이 그 만큼 부족했다는 뜻이 된다. 물론 코엔 형제라고 해서 이렇게 다소곳한 표정의 서부극 한 편 만들지 말라는 법은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늘상 기대해왔던 바와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가 전개되고 결국 마무리가 되고 나면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더 브레이브>는 한 편의 서부극으로서는 괜찮은 편이고, 코엔 형제의 영화로서는 다소 심심한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 브레이브>는 코엔 형제 최초의 서부극이기도 하지만 두 번째 리메이크 영화이다. 동명의 원작은 1969년작으로 존 웨인이 애꾸눈의 술고래 보안관 루스터 코그번을 연기했었고, 이후 루스터 코그번을 주인공으로 하는 두 편의 영화가 추가로 제작이 되었으니 아마도 코엔 형제와 그 나이 또래의 미국인들에게는 나름 “추억의 캐릭터”와 같은 존재가 바로 루스터 코그번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더 브레이브>에서 루스터 코그번이 처음 등장하는 법정 장면은 어린 매티의 시선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몇 십 년만에 부활한 서부극의 괴짜 캐릭터를 다시 맞이하는 지금의 미국인 관객들의 심정을 고려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원작의 예고편을 찾아보니 <더 브레이브>에서 봤던 씨퀀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코엔 형제는 최대한 원작에 충실한 방식으로 리메이크를 진행했던 것 같으니 <더 브레이브>에서 유난히 정통 서부극의 느낌이 나고 있는 건 어쩌면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란 생각이다.

그렇다면 코엔 형제는 어떤 이유로 유명 서부극의 리메이크 프로젝트에서 각색과 연출을 맡게 된 것일까? 자세한 경위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사실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자로 나선 작품이라는 점, 그리하여 <더 브레이브>는 코엔 형제 영화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내에서 1억불 이상의 흥행 수익을 올린 히트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원작 서부영화의 내러티브를 충실히 따라라고 있는 <더 브레이브>에서 가장 큰 볼거리라면 역시 좋은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을 들 수 있겠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험한 길을 나선 14살 당돌한 소녀 – 이 캐릭터가 미국 사회가 법치주의 국가로서 디딤돌을 놓는 데에 기여해온 유태인들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 역할의 헤일리 스타인펠드와 이제는 루스터 코그번 만큼이나 백전노장의 배우가 되신 제프 브리지스, 그리고 비교적 작은 역할이었음에도 각자의 몫을 충실히 해주는 맷 데이먼과 조쉬 브롤린, 그리고 오랜만에 봐서 더욱 반가웠던 배리 페퍼의 연기 모두 보기 좋았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