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일리언 2”, 쓸데 없는 짓의 의미


영화를 보다보면 등장인물들이 정말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는 걸 보곤 한다.

예를 들어 영화 “스크림”에서 “웨스 크레이븐”이 하나하나 지적하기도 했지만, 공포영화에서 여자희생자들은 꼭 2층 3층으로 도망친다. 현관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것이 더 안전할 텐데 말이다. 그 높은 곳에서 밖으로 뛰어내릴 것도 아니면서 자꾸 위로 위로 올라간다. 그 결과 그들은 도망칠 곳을 찾지 못해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질질 짜다가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열지 않아도 될 문을 열거나,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물건을 건드려서 일을 그르치는 것도 영화 속에서 종종 벌어지는 쓸데없는 짓이다. 그런 장면을 벌인 당사자는 또 얼마나 민망할까.

예를 들어, 영화 “반지의 제왕” 1편에서 폐허가 된 드워프 왕국에 들어가서는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고는 괜히 해골을 건드려 우물에 빠트리는 바람에 잠들어 있던 오크들을 죄다 깨워버린 피핀을 생각해보라. 그를 지켜보는 내가 대신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 한심이가 3편에서는 멋진 모습도 보여준다 ...

사실 이런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우연히 영화 『에일리언 2』를 다시 봤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리플리(“시고니 위버”)는 리더가 갖추어야 할 미덕이 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범이다.

그녀는 그 잘 훈련된 공수부대원 전부가 패닉에 빠져 있을 때도 냉철하게 상황판단을 하고, 팀원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면서 살 길을 찾아나간다. 그 뿐만 아니라 그녀는 능숙하게 기계를 다룰 줄도 안다. ‘파워로더’를 다루는 그녀를 보라.

57년간 냉동되어 있던 그녀가 어떻게 그 첨단 기계를 조종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0년 전 컴퓨터의 인터페이스와 지금 컴퓨터 인터페이스는 거의 석기시대와 철기시대만큼의 차이가 있는데 건설용 중장비들은 안 그런 모양이다.) 어쨌든 그녀는 훌륭한 리더일 뿐만 아니라 현실에도 밝은 현장요원이다.

게다가 그녀는 용감하고 희생적이기까지 하다. 에일리언에게 납치된 어린아이 ‘뉴트’를 구출하기 위해서 홀홀단신 에일리언의 소굴까지 찾아 들어가는 그녀의 그 강인한 이미지는 이후에 등장하는 여자 영웅 영화의 원형이라 할 만큼 멋졌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그녀조차도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그것도 바로 그녀가 영웅의 모습을 한껏 드러낸 뉴트 구출장면에서 말이다.

그 상황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자. 원자로 냉각기가 손상되어서 몇 분내에 공장시설 전체가 핵폭발을 일으킬 예정이다. 리플리는 천신만고 끝에 뉴트를 찾아냈고, 눈앞에 펼쳐진 에일리언 알 무더기를 볼모로 퀸 에일리언을 협박해서 퇴로를 확보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합리적인 선택은 간단하다. 뉴트를 데리고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시설이 폭발하는 순간 퀸 에일리언도, 나머지 에일리언 떼거리들도, 그 괴물이 낳아놓은 수많은 알들도 모두 한줌 재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쓸데없이 알들에 총질을 하고, 화염방사기를 쏘고, 그것도 모자라서 퀸 에일리언의 알집에 유탄을 쏘아댄다. 그 결과, 쓸데없이 분풀이를 하느라 시간을 낭비한 리플리는 시설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탈출하지 못하는데다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퀸 에일리언까지 들이닥치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연출하고야 만다.

죽음을 예감한 그녀가 어린 뉴트를 끌어않고 ‘눈 감으라’고 중얼거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가 저지른 짓은 정말 아무런 쓸데가 없었다. 그건 에일리언들에 대한 복수도 아니었고, 뉴트를 구출하는 데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그 만용은 결국 아무 죄도 없는 뉴트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이다.

후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간신히 탈출한 모선에까지 퀸 에일리언이 쫒아온 덕분에 충직한 사이보그 비숍은 반동강이가 나고, 결국 모선 전체가 위기에 처하고 만다. 물론 어찌어찌 리플리가 파워로더로 퀸 에일리언을 쫓아내면서 일이 마무리된 것 같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음은 『에일리언 3』을 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리플리?

이렇게 정리해보니 리플리가 저지른 그 만용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쓸데없는 짓 Top 10 리스트에 올릴 만큼 엄청난 과오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종종 이런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곤 한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 것일까?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그래야만 영화가 재미있어지기 때문이다.

리플리가 얌전하게 소굴에서 빠져나와 모선으로 탈출했다면 일은 깔끔하게 마무리되었겠지만, 위기일발 탈출도 없었을 것이고 영화사상 가장 멋진 결투로 손꼽히는 퀸에일리언과 파워로더 대결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쓸데없는 짓은 사실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진행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 애한테서 손떼, 이 ㅆㄴ아!!!

파워로더 미니어쳐 ...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있다. 아니, 사실 따져보면 쓸데없는 짓으로 점철된 곳이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쓸데없는 짓 덕분에 세상을 사람을 더 잘 알게된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벌인 덕분에 우리는 깨달음을 얻고 그런 깨달음이 나중에 진짜 중요한 일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자기 할 일도 바쁘니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게 가장 깔끔할 것 같은 사람들끼리 눈이 맞아서 쓸데없이 연애질을 벌인 결과, 자기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냥 얌전히 헤어져도 되는데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고 나면 후회가 든다. 그냥 서로 좋게 헤어져도 되는 거였는데 왜 쓸데없이 원한을 남겼을까 …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고, 그와 다시 마주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마치 쓸데없이 퀸 에일리언을 화나게 한 덕분에 그 괴물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인지를 확실하게 경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재미있으면 다 용서된다니까 ...

어쨌든 이런 쓸데없는 짓거리들 덕분에 우리는 인생을 매끈하게 흘려보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대끼며 고생하지만, 그 결과 우리는 기계처럼 효율적이지만 무미건조한 활동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생명체의 그 변화무쌍함을 체험하며 살수 있게 된다.

요약하면, 영화 속에서 쓸데없는 짓은 영화를 재미있게 하고, 현실에서 벌이는 쓸데없는 짓은 우리에게 진정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뭐 아무리 그렇더라도 결국 중요한 건 결과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쓸데없는 짓을 저질렀는데 그 결과는 그저 한심할 뿐이라면 관객들이 짜증을 낼 것이고, 현실에서 쓸데없는 짓의 결과가 그저 고생뿐이라면 후회만이 남을 뿐 일테니 말이다.

영진공 짱가

“에일리언”, 소통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내 주변에 조류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몇 명 있다.

어떤 사람은 어릴 적에 집에서 닭 잡던 기억, 그 중에서도 목이 반쯤 잘린 닭이 뛰어다니던 모습에 대한 기억 때문에 새를 무서워하게 되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히치콕의 영화 ‘새’를 본 이후로 새 한 마리는 무섭지 않은데 떼로 나오면 무서워진다고 한다.

하지만 조류공포증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설명은 비둘기를 무서워하는 한 친구의 이야기였다. 비둘기를 무서워하는 그녀는 비둘기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때 그녀가 비둘기의 눈동자를 보며 “비둘기에게는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다” 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비둘기가 무서워졌다는 것이다 ……



사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만약 그게 두려움의 이유라면 그녀는 진짜 아무런 생각이 없는 존재인 자동차나 컴퓨터를 더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런 생각이 없다.” 는 말은 실제로 생각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비둘기라고 왜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심리학자들은 ‘생각이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뇌의 활동’ 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날고 걸어다니고 모이를 주워먹고 하는 비둘기의 행동은 결국 그 새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느낌은 왜 생기는 걸까? 그건 새의 사고방식이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진화론적으로 보면 당연하다. 새는 파충류에서 진화한 존재고, 우리는 포유류의 자손이다. 새의 조상은 공룡이나 뱀이고 우리의 조상은 원숭이인 것이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 등장하는 영악한 괴물 벨로시랩터와 새는 동족이다. 실제로 벨로시랩터의 동작을 표현하기 위해서 CG 애니매이터들은 타조나 독수리 같은 조류의 행동방식을 주로 참고했다.

상대방이 정말 아무 생각이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건 그가 실제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를 말한다. 상대의 속을 알 수 없는 이유는 그와 나의 사고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고, 이렇게 자기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에 대해서 인간은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있다. 앞서 얘기한 새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도 결국 그 종족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는 느낌이다.

영화 『에일리언』에서 그 에일리언들이 겁나게 무서운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에일리언이 무서운 이유는 그놈들의 힘이 무지막지하게 세기 때문만도 아니고, 그놈들의 피가 황산이기 때문만도 아니며, 입이 이중 삼중이어서도 아니다. 그놈들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긴 것부터 우리와 전혀 다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그놈들에게는 악의가 없다는 점이다.



에일리언은 애초부터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숙주를 찾아 기어 들어가게 되어 있고, 변태를 마치고는 숙주를 죽이고 튀어나오게 되어 있고, 튀어나온 다음에는 주변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잡아죽이게 되어있다. 그들은 특별히 악의가 있어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다. 그냥 살육이 원래 그들의 삶의 방식일 뿐이다. 유전적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는 거다. 고로 그들과 우리는 정말 아무런 소통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행동에 따라서 그들의 행동이 바뀐다면 뭔가 대화나 관계 개선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런 건 전혀 없다. 고로 남은 건 죽느냐 죽이느냐의 문제뿐이다.



『프레데터』도 그렇지 않느냐고? 프레데터도 에일리언과 같은 외계인이고, 인간을 사냥감으로 여긴다는 점은 비슷하다. 하지만 사냥감 중에서도 꽤 괜찮은 실력을 가진 대상은 나름대로 존중해주며 사냥한다. 그리고 무기가 없는 사람이나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은 문명도 있고 나름대로 규범도 있고 도덕도 있는, 우리와 비슷한 존재이다. 사실 프레데터는 인간에 대한 은유라고 보면 된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무지막지한 프레데터, 즉 지구 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포식자는 바로 인간이니까 말이다.

『13일의 금요일』시리즈의 제이슨은? 그놈도 앞뒤 가리지 않는 살인마이긴 하다만, 제이슨이 그렇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단 그놈은 인간 아닌가.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프레디 크루거는? 그놈은 우리의 꿈속에 존재하며, 우리의 생각을 가지고 노는 존재다. 따라서 프레디가 무서운 이유는 에일리언이 무서운 이유와는 정 반대이다. 그가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무서운 게 아니라, 우리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드라큘라들은? 사실 이들은 우리보다 한 수준 높은 존재, 즉 일종의 초월자라는 점에서 다른 괴물들과는 다르다. 드라큘라는 악마의 다른 모습인데, 악마는 땅에 저주 받은 천사이고 천사는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이다.

어떨 때는 인간보다 더 인간답고, 인간에 대해서 훤히 꿰고 있다는 점에서 프레디와 비슷한 이유로 두려운 존재이다. 하지만 블레이드에서처럼 꽤 멋있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불멸 불사의 몸으로 모든 인간의 문명을 경험해왔으니 그 어떤 인간보다도 지적이고 고상할수도 있는 거다.



http://www.fred-katrin.de
에일리언 디자인의 원형을 제시한 H.R.Gigger의 갤러리.
거기에서 가져온 이미지 두 개
 

같은 인간이라도 그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낄때, 소통을 통해 상대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느낄때, 우리는 그를 에일리언처럼 대하게 된다. 히틀러 치하의 나치가 유태인들에게 저지른 행태도 결국 그런 신념(유태인은 악함을 타고난 존재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최종적 해결은 말살밖에 없다는)의 결과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이런 종류의 적대감과 분노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게 아닐까.

영진공 짱가

 

“가르시아 효과”, 꽃으로도 때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



 

가르시아 효과는 이 현상을 최초로 발견한 학자 John Garcia 박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미각혐오학습(taste aversion learning)이라고도 한다.

당신이 어떤 음식A를 먹은 뒤에 독성물질로 인해 발생하는 전형적인 증상, 예를 들어 구토, 어지럼증, 두통, 복통을 경험하면 그 이후부터 그 음식A에 대해서는 전혀 식욕을 느끼지 않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 현상은 쥐부터 개나 닭이나 고양이나 사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척추동물에게서 나타난다.

지렛대를 누르면 먹이가 나온다는 사실을 쥐에게 학습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하루, 어떤 경우에는 일주일간이 필요하다. 개에게 종이 울리면 먹이가 나온다는 사실을 연상시키기 위해서도 역시 일주일 이상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미각혐오학습은 단 한 번의 시행만으로 충분하다. 딱 한번만 먹고 배탈이 나면 순식간에 그 음식이 꼴보기 싫어지는 거다.

이 학습과정은 당신의 의지와도 무관하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왜 이 음식을 싫어하게 되었는지 기억 못하는 경우도 있다. 미각혐오학습은 당신의 무의식수준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사실은 음식에는 아무 죄가 없어도 가르시아 효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

멀쩡한 음식을 먹인 다음에 일부러 초음파를 위장에 쐬거나 롤러코스터를 태워서 속을 뒤집어놓아도 결국 우리의 몸은 롤러코스터나 초음파가 아니라 그 무고한 음식을 싫어하게 된다. 우리 몸은 구토, 어지럼증, 복통에 대해서만큼은 언제나 음식의 탓으로 여기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지렛대를 눌러 먹이를 먹는 법을 배우는 건 천천히 해도 안 굶어죽는다. 하지만 먹어서는 안되는 음식을 알기 위해서 여러 번 그 음식을 먹어야 한다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아마 아주 먼 옛날에는 미각혐오도 지렛대처럼 느리게 배우는 개체들도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독이 든 풀이나 지나치게 썩은 고기를 너무 자주 많이 먹은 덕분에 약해져서 자손을 남기지도 못하고 죽었다. 우리들은 모두 한 두번 만에 먹으면 안되는 음식이 뭔지 깨우칠 수 있었던, 그래서 살아남은 선조들의 후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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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시아 효과의 의미를 일반화해보자. 우리는 무언가 우리의 생존에 직결되어 있는 것일수록 더 빠르게 배울 수 있다. 그렇다면, 뭔가를 빠르게 배우게 하려면 그것을 생존과 직결시키면 된다. 생존의 문제를 다루는 곳은 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편도체다. 이 편도체가 자극을 받으면 학습은 가르시아 효과를 따르게 된다.

이제 지금까지 당신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협박받으며 학습해본 적이 있나? “내일까지 이걸 다 외우지 못하면 밥을 굶을 줄 알아.” “시험문제 하나 틀릴 때마다 네 신체의 일부에는 강렬한 통증이 가해질 것이야.” “너 이걸 못하면 죽을 줄 알아.” 그 협박이 심각하고 진지해서 당신의 편도체가 자극을 더 많이 받을수록 더 효과적인 학습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체벌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며 어떤 경우에는 학습을 촉진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어떤 기억을 머릿속 깊이 각인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편도체는 지극히 단순한 것 밖에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그 내용은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외워야 했던 공식이나 연표나 구구단이 아니라 매를 때리겠다고 협박하던 교사인 경우가 많다. 즉, 어떤 교사가 가르시아 효과를 기대하고 체벌을 실시한다면 그 결과는 교사에 대한 원한을 깊이 간직한 학생들을 배출하는게 최선일 것이다.



영진공 짱가


 

“결혼 피로연”, 인생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


학부시절, 노년심리학을 배우면서 우리는 노년기의 심리적인 특성을 ‘우내성경애조유의’ 라고 외웠다. 기억력 나쁜 내가 아직도 이건 잘 기억하는걸 보면 참 신묘한 기억법이었던 모양이다. 하나 하나 살펴보자.

우선 노년기가 되면 사람들은 우울해진다(우). 몸도 예전 같지 않고, 외모도 삭아버려서 아무도 자신을 매력적인 사람으로 봐주지 않는데다가, 사회적인 활동에서도 점차 밀려나 뒷방 늙은이가 되어가니 우울해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늙으면 내향적이 된다(내). 사실 내향성과 우울증은 거의 같이 가는 증상인데 사람들은 침울해지면 밖으로 나도는 대신에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혼자만의 상념에 빠진다. 그게 내향성이다. 평소에 매일같이 친구 불러내서 술 퍼먹던 사람도 우울해지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된다. 우울한 자의 유일한 친구는 자기 자신이니까.

또한 성역할이 바뀐다(성). 대부분 남자 노인들은 여성적이 되고, 여자 노인들은 남성적으로 바뀐다. 칼 구스타프 융은 그 이유를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의 세력관계가 역전된 탓이라고 설명했지만, 일부에서는 호르몬의 변화로 설명한다.

사실 남성성이라는 것 자체가 사회적 역할에 기대어 만들어져 있는데 (그래서 실직한 남자는 심리적으로는 거세된 남자와 비슷하다) 그 사회적 역할이 하나씩 사라지는 노년기에 남자가 남성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대로 남자가 주도권을 놓으면 누군가 그걸 다시 잡아야 하는데 그 역할을 여자노인이 하기 쉬우니 여자가 남성적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늙으면 사람이 경직되어 뻣뻣해진다(경). 신체적으로도 유연성이 줄어들고 심리적으로도 그렇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모험심이 줄어들며, 도덕적으로도 경직되어간다. 늙은 개는 새 재주를 배우지 못한다가 아니라 새 재주를 못 배우는 개가 늙은 개란 얘기다.

늙으면 또한 옛것에 대한 애착이 늘어난다(애). 쓸데없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그러다 보면 정작 필요한 것을 못 찾는 수도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 쓸데없는 물건들이 자신의 정체성이니까. 내가 예전에 입었던 옷들, 읽었던 책들, 샀던 물건들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은 노인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단지 우리는 아직 그렇게 많이 쌓아둘 만큼 정체성의 역사가 길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늙으면 조심성이 늘어난다(조). 역시 당연한 일이다. 늙으면 몸이 특히 뼈가 약해져 잘 부러지는 데다 부러진 뼈가 잘 붙지도 않는다. 정정하던 노인도 한번 뼈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그대로 가버리시는 경우도 많다. 사람이 활동을 계속 해야지 정신도 온전한데 병원에 오래 누워 있다보면 활동을 못하니 정신이 혼미해지고 덩달아 몸도 약해지면서 결국 급격하게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니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떨어지는 나뭇잎도 조심해야 하는 건 말년 병장보다는 노인들이다.
 

마지막으로 노인들은 후대에 뭔가 유산을 남기려 하고(유) 그걸 통해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의). 사실 유산은 자식을 위해서 남기는 게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흔적을 남기려는 욕구의 표현일 뿐이다. 유산은 재물인 경우도 있지만, 정신이나 전통인 경우도 많다. 어쨌든 누군가 내 존재를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내가 누군가에게 뭔가 영향을 미쳤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유산상속의 욕구인 것이다. 사실 자식은 사람들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유산이자 흔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를 낳는다. 그 고생을 하면서도 말이다.

전통사회에서는 노년기의 이런 욕구들을 채우기가 비교적 수월했다. 일단 험한 꼴 볼 때까지 오래 사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거니와, 한해라도 오래 살았다는 것이 비교우위를 갖는 동네이니 사회적 지위의 박탈도 좀 적었고, 변화가 없는 사회이니 경직되어 있다는 것이 별 흠이 되지도 않았고, 후손들이 대부분 고분고분 말을 들어줬으니 전통이라는 유산도 전수하고 삶의 의미도 찾기 쉬웠다.

하지만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 경우에는 노년이 매우 고달파진다. 순환이 반복되는 사회에서야 한해라도 오래 살아서 경험을 축적했다는 게 득이 되지만, 작년 다르고 내년 다른 세상에서는 축적된 경험도 별 소용이 없다. 그러니 사회적 지위의 박탈도 금방 닥쳐오기 마련이다. 게다가 경직성은 변화에 적응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도 (돈을 빼고는) 정신적 유산을 받길 원치 않는다. 갑자기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리는 거다. 게다가 오래 살기까지 하니, 그 고달픈 노년을 이전 세대보다 몇 십년이나 더 지속해야 하는 현대인은 참으로 불쌍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후자의 노년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본다. 진짜 삶의 진실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니까 말이다. 나는 유산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 공수래 공수거라는 진실을 어떻게든 기만해보려는 눈가리고 아옹질이라고 본다. 전통이 제대로 전수된다는 것은 결국 매 세대마다 결국 다르게 해석되고 재창조된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그 전통은 이전세대의 것이 아니라 당대의 것이라고 봐야 하니 말이다.

자손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기억해주지 않는데 손주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로지 유전자의 입장에서야 자손이 필요하지만, 개개인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보자면 자손은 그냥 놓고 떠나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칼릴 지브란은 부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자녀라는 화살을 미래로 쏘아보내는 활일 뿐이다. 자녀는 당신이 아니라 미래에 속한 존재이다.” 라고 말이다.

『와호장룡』으로 유명해진 “이안” 감독이 1993년에 만든 영화 『결혼 피로연』은 바로 그 노년을 받아들이는, 아니 인생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대만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매끈하게 살고 있는 여피족 게이 남자와 그의 미국인 애인(물론 남자)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진짜 주인공은 그 게이 남자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자식이 자신의 정신적 유산을 전수 받기를 바라고, 자기가 남긴 유산이 지속된다는 증거를 보여주길 다시 말해서 결혼해서 손주를 낳아주기를 바란다. 당연히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은 행여 꿈도 꾸지 못한다. 이런 아버지의 끝없는 성화에 못이긴 아들은 가짜 신부를 하나 구해서 가짜결혼식을 열어 아버지를 초대한다.

드디어 유산을 남기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미국으로 날아온 아버지. 그러나 눈치만 100단이 되어버린 노인네는 점차 일이 자신의 기대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그 과정은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부담스럽지 않게 연출되었다) 다행히도 이 아버지에겐 사실을 기만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가 남아있었다. 결국 마지막에 아버지는 어쩌다 보니 생물학적인 손주를 임신까지 한 명목상의 며느리가 아니라, 아들의 진짜 애인인 사이먼을 며느리로 인정한다. 아버지가 해변에서 사이먼과 산책을 하다가 건네는 붉은 돈봉투는 바로 그걸 상징한다.

우리 아들을 잘 부탁하네

그리고 아버지는 빈손으로 대만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이 노인네가 공항의 검색대 앞에서 금속탐지를 받기 위해 양손을 들어올리는 장면에서 끝난다. 평론가 정성일은 그 장면을 일종의 항복선언이라고 해석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그 모습은 항복한 패잔병처럼 처연하기보다는 마치 하얀 학이 날개를 펴드는 것처럼 우아했기 때문이다. 신선이 따로 있나? 삶의 진실을 받아들인 사람이 신선이지 ……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이 속세에서 뒹굴어 댈 때, 신선은 학처럼 날아가는 것이다.

빈손으로 말이다.

영진공 짱가

 

인간의 앉은 자세에 대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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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저 사람들을 보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우리는 사적인 관계가 있는 회사의 제품 발표회장에 와 있었다.
나로서는 이런 모임은 매우 낯선지라 그저 이리저리 두리번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건 내 친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에게 맞은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슬쩍 가리키며 질문을 하는 것이다. 생경한 장소가 주는 당혹스러움을 곁에 있는 동료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질문으로 배출하려 하다니… 참으로 비틀린 인성이다
억지로 여유를 부리며 대답해주었다.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 아마 저 친구들은 우리들보다는 이런 곳에 자주 온 것 같구만.
우리 처럼 허둥거리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보니 말일세.”

그러나 그는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진지한 척 썰을 풀어대기 시작한다.

“앉는 자세는 의외로 많은 것을 알려준다네, 예를 들어 깊숙이 의자에 앉은 사람은 마음도 편하게 앉아 있는 셈이지. 하지만 의자의 앞쪽에 엉덩이를 걸치고 조마조마하게 앉은 사람은 마음도 앉아있을 여유가 없다네.
빨리 그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드러나는 걸세.

마찬가지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계속 움직인다는 것은 역시 그 자리에서 걸어 나가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네. 그러니까 엉거주춤 앉아서 다리를 꼼지락거리고 있는 자세는 뭔가 급하게 할 다른 일이 있거나,
그 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의 공통된 모습이라네.
지금 자네처럼 말이지”

그 말을 듣자마자 꼬았다풀었다 하던 내 다리를 중지시켰다. 생각지 못한 역습이다.
하지만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

“그렇다면 저 네 남자는 어떤 마음 상태라는 건가?”

또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1,2,3,4 번이라고 치세.

일단 1 번 남자는 이런 자리가 익숙하네. 저 친구의 엉덩이는 의자의 뒤까지 깊숙이 들어가 자리잡았쟎은가. 게다가 나머지 세 남자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바지(찢어진 청바지)를 입고서도 특별히 위축되어 있지 않거든. 여기가 내 자리야! 라는 메시지를 겉으로 드러내려는 것일세.

게다가 저 친구는 한쪽 손을 턱에 괴면서 지금 이 자리의 목적에 보다 집중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지.  즉, 그는 나머지 어중이 떠중이들과는 달리, 자신이야 말로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며 남들 신경쓰지 않고 내가 이 자리에 온 이유에 집중하겠다는 의사를 표명중일세.

하지만 그의 꼰 다리는 심리적인 방어를 의미할 수도 있다네. 그렇다면 그 내면은 꼭 편하지만은 않다는 뜻이지. 바디랭귀지 연구자들은 꼰 다리의 방향을 보고 그 사람이 방어하려는 상대를 알아본다네.  그들의 이론이 맞다면, 1번 남자는 오른쪽 허벅지를 빗장 삼아 나머지 세 남자와 자기 사이에 벽을 세운 상태라 할 수 있네. 즉, 그는 무의식적으로 나머지 남자들과 자기는 다른 존재임을 드러내려고 하는 거지.”

“그럼 2 번은 어떤가?”

“2 번은 가장 평범한 자세일세. 안 그래도 비좁은 자리인데다 뻔뻔한 3번의 양반자세로 인해 더 불편해진 상태인데, 그럼에도 여유 있게 다리를 꼬고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 중이네. 그러나 힘이 들어간 손가락, 살짝 맞잡은 두 손은 역시 꼬인 다리와 함께 전체적으로 편하지 않은 심정을 드러내네.

아마 그가 불편한 이유는 이 자리 탓이라기 보다는 3번 탓일 가능성이 높아보이네.
물론 익숙한 사람이라면 저런 자리 자체를 피했을 것이니 이런 자리에 자주 오는 사람은 아닐 것 같구만.”

“옆자리 인간때문에 불편하다는 건 나랑 비슷하군. 그럼 3 번은?”

그는 나를 힐끗 보더니 빙긋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3 번은 가장 전형적인 한국남자의 자세를 보여준다네.
저 친구는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에 크게 걸치면서 2 번의 사적 영역(personal space)를 침범하고 있네. 물론 뻔뻔한 심리와는 무관하게 허벅지가 굵어 1 번이나 2 번과 같은 자세가 불편한 남자들도 이런 자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지.

하지만 그의 허벅지 굵기는 나머지와 크게 다르지 않거든. 고로 저건 그냥 오냐오냐 하며 키워낸 한국남자 심리의 발로일세. 저렇게 남을 불편하게 하면서도 자기 양손은 편안하게 걸친 다리 위에 걸쳐져 있으며 손가락에도 대충 힘이 빠져 있네.

즉, 저 친구는 자신이 남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사실 자체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일세.”

이건 좀 너무하다 싶어 제지했다.

“저 친구가 꼭 뻔뻔해서 저러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 않은가?
만약 옆자리에 친구가 앉아있어서 저렇게 편한 자세를 취한 거라면 어떤가?”

그러나 이 인간의 난도질은 멈추지 않는다.

“2 번도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면 3 번의 저 방만함은 주변 사람들과의 친밀감 탓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2 번은 3 번과는 달리 상당히 불편해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3 번은 자신이 남들보다 대단하기 때문에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는 자기애성 성격이거나, 남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잘 모르는 자기중심적 성격일 가능성이 높다네.

그러면 저 인간은 과연 이 자리에 어울리는 존재냐 하면 그건 확실하지 않네.
저 친구의 여유가 익숙함의 결과인지 아니면 근거없는 자신감의 결과인지 알 수 없으니까. 저런 인간들 치고 자기 주제파악 제대로 하는 인간은 거의 없거든”

괜히 3 번에게 미안해진다.
우리가 이런 험담을 하고 있다는 걸 저 친구가 알고 있을까?
빨리 다음 친구로 넘어가기로 했다.

“4 번은 가장 진지하네. 저 친구 자세의 각도를 보게나.
몸은 전체적으로 앞으로 기울어져있으며 두 다리도 방어에 신경쓰고 있지 않지.
게다가 저 친구는 의자 전체를 사용하지 않고 앞에 치우쳐 앉았는데,
아마도 이 행사 후에 가야 할 다른 곳이 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네.

저 친구의 자세는 불안함을 드러내기 보다는 조급함을 드러내고 있네.
빨리 이 자리에서 목표를 달성하고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것이지.
아마 이런 자리에 자주 와 본 적은 없지만, 자신의 의지로 찾아온 것도 아닌 것 같네.
다시 말해서 저 친구는 초청되거나 업무상의 이유로 여기에 온 거지.
이 자리는 어쩌면 바로 저 친구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준비된 곳이라는 얘길세.”

나는 이 허접한 대화를 기억해 두었다가
어떤 잡지 기자가 질문할 때 거의 그대로 사용했다.
문제는 그 잡지가 뭐였는지, 그리고 그 기사가 언제 어떻게 나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선가 이와 비슷한 글을 읽으신 독자가 계신다면
그 기사가 이렇게 시작된 것임을 알아주시길 바란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