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 가장 무서운 것은 사는 일


귀신보다 무서운 건 사람

여섯 일곱살 무렵. 빛과 어두움에 대한 개념이 생기고 깜깜한 것이 무서워지던 때였다.깜깜한게 뭐가 무섭냐는 엄마의 말에 “귀신이 나올까봐 무섭다.”고 얘기했더니, 엄마가 “귀신이 뭐가 무섭니. 하나도 안 무섭지.”라는 엄마의 말. “엄마. 엄만 그럼 뭐가 무서워?”라고 묻자 엄마가 “나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 라고 말했다. 내가 사람이 뭐가 무섭냐고 얘기했고, 엄마는 ‘글쎄 그럴 때가 온단다. 귀신보다 사람이 무서운 때가’라고 대답했다. 당시의 나는 귀신이 너무 무서울 때라 얼른 그런 날이 왔으면 했다.

그리고 또 초등학생 어느 날인가였다. 골목 저 건너편집에 불이 났다. 까맣고 앙상하게 뼈대만 남긴채 집은 잿더미가 되었고, 다행히 그 집 식구들은 모두 무사히 대피해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한동안 화재 목격의 충격은 지속되었다. “엄마 불 날까봐 무서워.” 엄마가 “불은 잘 안나. 불이 무섭긴 하지만 조심하면 그렇게 무섭지 않다.” 나는 또 예전의 그날 처럼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그럼 뭐가 무서워?” 엄마는 조용히 대답했다. “엄마는 돈이 무섭다.”

삼십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나도 이제는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고, 화재보다 돈이 무섭다. 가끔 격심한 공포에 시달릴 때는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는 소위 멘붕(멘탈붕괴)상태일 때. 그때는 사람보다 돈보다 내가 무섭다.

‘화차’는 그 모든 것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영화였다.

진짜 공포는 고어가 아니라 바로 삶

영화는 굉장히 잔인한 사건을 내용으로 하고있지만, 고어적인 묘사는 하지않는다. ‘추격자’같이 정을 박고, 자르고, 매달고, 파묻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펜션에서 선영(김민희) 혼자 피칠갑한채 오열하는 것이 ‘피’의 전부이다. 선영이 사창가에 팔려갔다는 것이 암시되지만, 사창가에서 학대당하는 장면이 나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시종일관 으스스하고 공포스러운데,그 공포는 시각적인 촉각적인 공포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무서운 ‘생에 대한 공포’이다. 문호(이선균)의 감정은 처음에는 약혼녀가 납치되었을지 모른다는 공포에서 시작했다가, 그녀의 이름이 강선영이 아니라는 것, 모든 경력이 허위라는 것에 대한 배신감으로 옮겨간다.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문호와 함께 선영이 과거 아버지의 파산으로 어릴 때 부터 빚에 쫒겨다니다가 어린나이에 결혼과 이혼을 경험하고, 사창가에 팔려가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성매매행위를 하다가 건강이 좋지 않은 아이를 출산하고, 그 아이를 잃기까지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가슴아픔과 연민을 넘어 또 다른 차원의 공포에 이른다.

그 공포에 대한 뿌리는 나도 선영이, 경선이 될 수 있다는 충분한 가능성이다. 카드를 평소와 같이 쓰다가, 어느날 실직이나 불경기로 수입이 달라진다면 카드연체가 된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나는 빚과 신용불량으로 취업할 수 없는 악순환의 도가니.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빠져들 수 있는 그 무서운 수렁. 거기에 상호관계가 존재하지 않고 연대가 없는 이 사회에서 홀로 남아있다는 공포.

김애란의 소설 ‘노크하지 않는 방’에 사는 이들 모두의 공포가 더해지면 산다는 것 자체가 오싹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발견하는 희망이랄것 없는 희망

종근(조성하)이 댓가없는 사건에 그렇게 집착하고 진실을 풀어내려고 하는 이유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종근은 실직 중이고,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제수씨가 불쌍하지도 않냐”라고 말한다. 아내가 가게를 꾸리고, 종근과 아이는 가게 곁방에서 근근히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조그만 가게지만 그 매출이 줄어든다면 당장에 생계형 빚을 지게 될거고, 종근에게 일정한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생활은 더 기구해 질 수 있을 것이다.

한때 형사였던 종근은 옷을 벗으면서 ‘여기가 내 인생 바닥’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선영을/경선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에서 ‘거기가 바닥이 아님’을 확인해 나가기에 멈출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더 나빠질 것이 없는 절망의 무기력 속에서, 더 무기력해지면 더더욱 나빠질 여지는 얼마든지 많음을 확인하고, 그래서 더 나빠지는 것을 막기위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창고지기 일이라도 시작할 동력을 얻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시대의 희망이라니 그 자체가 또 공포스러운 일이고 ……

그러고보니 매달 밀려오는 빚을 다달이 막아내기 위하여(청산이 아니라) 분연히 일어나 일터로 향할 때이다.


영진공 라이


 

“에일리언”, 소통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내 주변에 조류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몇 명 있다.

어떤 사람은 어릴 적에 집에서 닭 잡던 기억, 그 중에서도 목이 반쯤 잘린 닭이 뛰어다니던 모습에 대한 기억 때문에 새를 무서워하게 되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히치콕의 영화 ‘새’를 본 이후로 새 한 마리는 무섭지 않은데 떼로 나오면 무서워진다고 한다.

하지만 조류공포증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설명은 비둘기를 무서워하는 한 친구의 이야기였다. 비둘기를 무서워하는 그녀는 비둘기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때 그녀가 비둘기의 눈동자를 보며 “비둘기에게는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다” 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비둘기가 무서워졌다는 것이다 ……



사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만약 그게 두려움의 이유라면 그녀는 진짜 아무런 생각이 없는 존재인 자동차나 컴퓨터를 더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런 생각이 없다.” 는 말은 실제로 생각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비둘기라고 왜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심리학자들은 ‘생각이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뇌의 활동’ 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날고 걸어다니고 모이를 주워먹고 하는 비둘기의 행동은 결국 그 새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느낌은 왜 생기는 걸까? 그건 새의 사고방식이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진화론적으로 보면 당연하다. 새는 파충류에서 진화한 존재고, 우리는 포유류의 자손이다. 새의 조상은 공룡이나 뱀이고 우리의 조상은 원숭이인 것이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 등장하는 영악한 괴물 벨로시랩터와 새는 동족이다. 실제로 벨로시랩터의 동작을 표현하기 위해서 CG 애니매이터들은 타조나 독수리 같은 조류의 행동방식을 주로 참고했다.

상대방이 정말 아무 생각이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건 그가 실제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를 말한다. 상대의 속을 알 수 없는 이유는 그와 나의 사고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고, 이렇게 자기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에 대해서 인간은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있다. 앞서 얘기한 새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도 결국 그 종족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는 느낌이다.

영화 『에일리언』에서 그 에일리언들이 겁나게 무서운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에일리언이 무서운 이유는 그놈들의 힘이 무지막지하게 세기 때문만도 아니고, 그놈들의 피가 황산이기 때문만도 아니며, 입이 이중 삼중이어서도 아니다. 그놈들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긴 것부터 우리와 전혀 다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그놈들에게는 악의가 없다는 점이다.



에일리언은 애초부터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숙주를 찾아 기어 들어가게 되어 있고, 변태를 마치고는 숙주를 죽이고 튀어나오게 되어 있고, 튀어나온 다음에는 주변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잡아죽이게 되어있다. 그들은 특별히 악의가 있어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다. 그냥 살육이 원래 그들의 삶의 방식일 뿐이다. 유전적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는 거다. 고로 그들과 우리는 정말 아무런 소통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행동에 따라서 그들의 행동이 바뀐다면 뭔가 대화나 관계 개선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런 건 전혀 없다. 고로 남은 건 죽느냐 죽이느냐의 문제뿐이다.



『프레데터』도 그렇지 않느냐고? 프레데터도 에일리언과 같은 외계인이고, 인간을 사냥감으로 여긴다는 점은 비슷하다. 하지만 사냥감 중에서도 꽤 괜찮은 실력을 가진 대상은 나름대로 존중해주며 사냥한다. 그리고 무기가 없는 사람이나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은 문명도 있고 나름대로 규범도 있고 도덕도 있는, 우리와 비슷한 존재이다. 사실 프레데터는 인간에 대한 은유라고 보면 된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무지막지한 프레데터, 즉 지구 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포식자는 바로 인간이니까 말이다.

『13일의 금요일』시리즈의 제이슨은? 그놈도 앞뒤 가리지 않는 살인마이긴 하다만, 제이슨이 그렇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단 그놈은 인간 아닌가.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프레디 크루거는? 그놈은 우리의 꿈속에 존재하며, 우리의 생각을 가지고 노는 존재다. 따라서 프레디가 무서운 이유는 에일리언이 무서운 이유와는 정 반대이다. 그가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무서운 게 아니라, 우리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드라큘라들은? 사실 이들은 우리보다 한 수준 높은 존재, 즉 일종의 초월자라는 점에서 다른 괴물들과는 다르다. 드라큘라는 악마의 다른 모습인데, 악마는 땅에 저주 받은 천사이고 천사는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이다.

어떨 때는 인간보다 더 인간답고, 인간에 대해서 훤히 꿰고 있다는 점에서 프레디와 비슷한 이유로 두려운 존재이다. 하지만 블레이드에서처럼 꽤 멋있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불멸 불사의 몸으로 모든 인간의 문명을 경험해왔으니 그 어떤 인간보다도 지적이고 고상할수도 있는 거다.



http://www.fred-katrin.de
에일리언 디자인의 원형을 제시한 H.R.Gigger의 갤러리.
거기에서 가져온 이미지 두 개
 

같은 인간이라도 그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낄때, 소통을 통해 상대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느낄때, 우리는 그를 에일리언처럼 대하게 된다. 히틀러 치하의 나치가 유태인들에게 저지른 행태도 결국 그런 신념(유태인은 악함을 타고난 존재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최종적 해결은 말살밖에 없다는)의 결과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이런 종류의 적대감과 분노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게 아닐까.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