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일리언 2”, 쓸데 없는 짓의 의미


영화를 보다보면 등장인물들이 정말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는 걸 보곤 한다.

예를 들어 영화 “스크림”에서 “웨스 크레이븐”이 하나하나 지적하기도 했지만, 공포영화에서 여자희생자들은 꼭 2층 3층으로 도망친다. 현관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것이 더 안전할 텐데 말이다. 그 높은 곳에서 밖으로 뛰어내릴 것도 아니면서 자꾸 위로 위로 올라간다. 그 결과 그들은 도망칠 곳을 찾지 못해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질질 짜다가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열지 않아도 될 문을 열거나,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물건을 건드려서 일을 그르치는 것도 영화 속에서 종종 벌어지는 쓸데없는 짓이다. 그런 장면을 벌인 당사자는 또 얼마나 민망할까.

예를 들어, 영화 “반지의 제왕” 1편에서 폐허가 된 드워프 왕국에 들어가서는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고는 괜히 해골을 건드려 우물에 빠트리는 바람에 잠들어 있던 오크들을 죄다 깨워버린 피핀을 생각해보라. 그를 지켜보는 내가 대신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 한심이가 3편에서는 멋진 모습도 보여준다 ...

사실 이런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우연히 영화 『에일리언 2』를 다시 봤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리플리(“시고니 위버”)는 리더가 갖추어야 할 미덕이 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범이다.

그녀는 그 잘 훈련된 공수부대원 전부가 패닉에 빠져 있을 때도 냉철하게 상황판단을 하고, 팀원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면서 살 길을 찾아나간다. 그 뿐만 아니라 그녀는 능숙하게 기계를 다룰 줄도 안다. ‘파워로더’를 다루는 그녀를 보라.

57년간 냉동되어 있던 그녀가 어떻게 그 첨단 기계를 조종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0년 전 컴퓨터의 인터페이스와 지금 컴퓨터 인터페이스는 거의 석기시대와 철기시대만큼의 차이가 있는데 건설용 중장비들은 안 그런 모양이다.) 어쨌든 그녀는 훌륭한 리더일 뿐만 아니라 현실에도 밝은 현장요원이다.

게다가 그녀는 용감하고 희생적이기까지 하다. 에일리언에게 납치된 어린아이 ‘뉴트’를 구출하기 위해서 홀홀단신 에일리언의 소굴까지 찾아 들어가는 그녀의 그 강인한 이미지는 이후에 등장하는 여자 영웅 영화의 원형이라 할 만큼 멋졌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그녀조차도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그것도 바로 그녀가 영웅의 모습을 한껏 드러낸 뉴트 구출장면에서 말이다.

그 상황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자. 원자로 냉각기가 손상되어서 몇 분내에 공장시설 전체가 핵폭발을 일으킬 예정이다. 리플리는 천신만고 끝에 뉴트를 찾아냈고, 눈앞에 펼쳐진 에일리언 알 무더기를 볼모로 퀸 에일리언을 협박해서 퇴로를 확보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합리적인 선택은 간단하다. 뉴트를 데리고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시설이 폭발하는 순간 퀸 에일리언도, 나머지 에일리언 떼거리들도, 그 괴물이 낳아놓은 수많은 알들도 모두 한줌 재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쓸데없이 알들에 총질을 하고, 화염방사기를 쏘고, 그것도 모자라서 퀸 에일리언의 알집에 유탄을 쏘아댄다. 그 결과, 쓸데없이 분풀이를 하느라 시간을 낭비한 리플리는 시설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탈출하지 못하는데다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퀸 에일리언까지 들이닥치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연출하고야 만다.

죽음을 예감한 그녀가 어린 뉴트를 끌어않고 ‘눈 감으라’고 중얼거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가 저지른 짓은 정말 아무런 쓸데가 없었다. 그건 에일리언들에 대한 복수도 아니었고, 뉴트를 구출하는 데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그 만용은 결국 아무 죄도 없는 뉴트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이다.

후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간신히 탈출한 모선에까지 퀸 에일리언이 쫒아온 덕분에 충직한 사이보그 비숍은 반동강이가 나고, 결국 모선 전체가 위기에 처하고 만다. 물론 어찌어찌 리플리가 파워로더로 퀸 에일리언을 쫓아내면서 일이 마무리된 것 같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음은 『에일리언 3』을 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리플리?

이렇게 정리해보니 리플리가 저지른 그 만용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쓸데없는 짓 Top 10 리스트에 올릴 만큼 엄청난 과오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종종 이런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곤 한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 것일까?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그래야만 영화가 재미있어지기 때문이다.

리플리가 얌전하게 소굴에서 빠져나와 모선으로 탈출했다면 일은 깔끔하게 마무리되었겠지만, 위기일발 탈출도 없었을 것이고 영화사상 가장 멋진 결투로 손꼽히는 퀸에일리언과 파워로더 대결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쓸데없는 짓은 사실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진행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 애한테서 손떼, 이 ㅆㄴ아!!!

파워로더 미니어쳐 ...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있다. 아니, 사실 따져보면 쓸데없는 짓으로 점철된 곳이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쓸데없는 짓 덕분에 세상을 사람을 더 잘 알게된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벌인 덕분에 우리는 깨달음을 얻고 그런 깨달음이 나중에 진짜 중요한 일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자기 할 일도 바쁘니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게 가장 깔끔할 것 같은 사람들끼리 눈이 맞아서 쓸데없이 연애질을 벌인 결과, 자기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냥 얌전히 헤어져도 되는데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고 나면 후회가 든다. 그냥 서로 좋게 헤어져도 되는 거였는데 왜 쓸데없이 원한을 남겼을까 …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고, 그와 다시 마주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마치 쓸데없이 퀸 에일리언을 화나게 한 덕분에 그 괴물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인지를 확실하게 경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재미있으면 다 용서된다니까 ...

어쨌든 이런 쓸데없는 짓거리들 덕분에 우리는 인생을 매끈하게 흘려보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대끼며 고생하지만, 그 결과 우리는 기계처럼 효율적이지만 무미건조한 활동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생명체의 그 변화무쌍함을 체험하며 살수 있게 된다.

요약하면, 영화 속에서 쓸데없는 짓은 영화를 재미있게 하고, 현실에서 벌이는 쓸데없는 짓은 우리에게 진정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뭐 아무리 그렇더라도 결국 중요한 건 결과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쓸데없는 짓을 저질렀는데 그 결과는 그저 한심할 뿐이라면 관객들이 짜증을 낼 것이고, 현실에서 쓸데없는 짓의 결과가 그저 고생뿐이라면 후회만이 남을 뿐 일테니 말이다.

영진공 짱가

망나니 종자기업들이 부른 미래 참극(2), “와인드업 걸” (The Windup Girl, 2009)



이 단칸방 같은 지구에서 지금의 인류가 먹고 살기 위해선 유전자 조작은 어쩌면 불가피한 것일지도 모른다. GMO는 좁은 땅에서 보다 많은 생산을 가능케 하며 농약의 사용도 줄일 수 있어 환경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도 있다. GMO를 옹호하는 이들의 한결같은 주장도 기아를 퇴치하고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 GMO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종자기업들은 인류애의 화신들이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SF소설에나 나올 법한 어처구니 없는 특허법을 비롯하여 교묘하고 치졸한 방법들을 동원하고 있다.







세계대전 당시 화학무기를 생산하던 기업에서 출발한 거대 종자기업들은 농화학 기업, 즉 농약을 생산하는 회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은 주로 종자와 농약을 세트로 판다.

몬산토에서는 대표적인 GMO종자인 라운드업 레디 Roundup Ready(콩 종자)를 라운드업 Roundup(제초제)과 세트로 판다. 라운드업 제초제를 뿌리면 잡초들은 죽지만 라운드업 레디 종자는 살아남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편리함으로 농민들을 끌어들인다. GMO종을 사지 않더라도 농약 사용에 대한 문제 때문에 결국 농부들은 이들 종자회사의 종자를 구매할 수 밖에 없고, 구매시 동의해야 하는 계약서와 특허법을 이용해 결국 농민을 자사에 종속시켜 버린다.




마치 자동차를 살 때 옵션에 따라 가격이 다른 것처럼,
GMO종자에 특성을 더할 때 마다 돈을 지불하게 만들었다.
농민의 부담은 가중될 수 밖에 없다.




종자 회사들은 곡물 유통회사와도 결탁하여 농민들을 압박하였다
. 곡물 유통가공 회사인 카길 cargill은 특정 회사의 종자만 수확할 것을 요구하였다. 거대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는 이런 거대 회사의 요구를 농민은 무시할 수가 없다.

종자회사는 특허법 역시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농민들이 GMO종자를 구매할 때는 그 회사의 특허권에 대해 동의를 해야 하는데 미국의 판례는 식물체 전체를 특허대상으로 하고 있다. 식물의 개별 구성요소, 즉 종자, 세포, DNA배열, 조직배양체 등도 특허대상에 포함된다. 그로 인해 농부는 구매 종자를 단 1회만 재배해야 하고 수확한 종자의 어떠한 재파종도 불허하고 있다. 농부는 매년 농사를 지을 때 마다 종자회사에서 종자를 사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런 특허법이 얼마나 악랄하게 이용되는지는 캐나다에서 벌어졌던 몬산토와 한 농부의 법정싸움에서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몬산토의 GMO종자가 날아와 농부의 밭에서 자라났고 몬산토는 이를 특허권 침해라고 소송을 걸었던 것이다. 10년을 끌었던 이 소송에서 결국 법원은 몬산토의 손을 들어주었다. 농부는 수십 년 간 재배해온 씨앗을 모두 폐기해야 했고 그 해 소득까지 몬산토에 배상해야만 했다.

수십 년 간 종자를 개량해온 농부의 권리보다 종자기업의 이익을 우선해준 판결이었다
. 이 재판이 말해준 것은 고작 전체 밭의 2%만 오염되도 농부는 자신의 종자와 식물에 대한 소유권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 식물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DNA 몇 개를 조작했을 뿐인데,
식물체에
사적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
.

이로인해 종자기업에 종속되어버린 농부는 힘들게 농사를 지어 종자회사에 고스란히 갔다 받치는 21세기판 노예가 되었다. 면화 생산지의 인도의 경우 몬산토의 GMO면화 종자인 BT면화가 들어오면서 10년새 20만명의 농민이 자살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광고와 달리 수확량은 떨어졌고 BT면화로 인해 새로운 병충해가 생겨 농약의 사용은 오히려 더 증가하였다. 게다가 BT면화의 가격은 매년 인상되어 1kg5루피였던 것이 kg3,200루피로 인상되었다. 생산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부채에 시달리던 농부들이 택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죽음 뿐이었다.




이렇게 다국적 종자회사들이 ㅆㅂ스런 법을 만들어 양아치처럼 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국가 권력과 결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 국방장관 도날드 럼스펠트-> 몬산토 자회사인 [SERAL]사의 대표
미 무역대표부 대표 미키 켄터-> 몬산토 이사회장
미 법무장관 존 애쉬크로프트-> 2000년 몬산토 최대 기부금 수혜자
미 대법관 클라렌스 토마스-> 몬산토 수석변호사
미 농무부장관 앤 베네만-> 몬산토가 인수한 [칼진]사의 이사회장
미 환경보호청장 윌리엄 럭켈샤우스-> 몬산토 이사
미 환경보호청 보좌관 린다 피셔-> 몬산토 이사
몬산토 수석변호사 마이클 테일러-> 미 식약청 정책보좌관

이 외에도 정치가 뿐만 아니라 돈에 기생하고 있는 과학자들 역시 종자회사의 GMO식품을 옹호하는 그릇된 논문들을 학술지에 발표하며 그들의 논리를 정당화해주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이 자유무역을 내세워
GMO농산물에 대한 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것도 결국 종자기업의 이익이자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특히 유럽과 한국은 현재까지 GMO농산물의 재배 불허 국가였기 때문에 이들 종자기업에겐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 종자기업이 다음으로 노리고 있는 것은 바로 . 현재 대부분의 종자기업들은 시장성이 큰 벼의 GMO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FTA가 발효되고 종자기업이 GMO벼종자를 들고 국내로 쳐들어오면 우리 농업의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종자기업이 세계식량을 독점함으로서 펼쳐질 위험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 현재 종자기업들은 농부들을 종속시키고 그들이 선택한 몇 개의 종자만을 기르게 압박함으로서 세계적으로 점점 종의 다양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런 생물다양성의 상실은 인류의 생존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 [와인드업 걸]에서 그리고 있는 미래도 이처럼 생물다양성이 사라지고 종자기업에 의해 만들어진 몇 종의 유전자 조작 식물에 전염병이 퍼져 인류가 식량위기에 빠지게 된다는 설정을 취하고 있다.

실제로 세계적 곡창지대인 미 북부의 대평원에는 전세계 콩과 옥수수 소비량의 절반이 생산되지만 여기에 뿌려진 종자는
2~3종 밖에는 되지 않는다. 만약 이 곳에 이들 종에만 걸리는 전염병이 퍼진다면 전세계는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옥수수는 의외로 다양한 곳에 쓰이고 있다.)


몬산토의 BT면화가 정복해버린 인도는 BT면화가 들어오면서
밀리버그라는 왜래종 진딧물이 창궐하게 되었다
. 이 진딧물은 농약에도
잘 죽지 않고 이제는 다른 농작물에까지 번지면서 큰 피해를 주고있다
.
밀리버그는 BT면화가 들어오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해충이다
.




종의 다양성이 파괴될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는 과거를 보면 알 수 있다
. 1847년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감자 대기근은 당시 남미에서 도입한 감자 1종 만을 재배함으로서 감자 잎마름병이 번저 대기근이 발생하였다. 이로인해 100만명이 굶어죽었고 300만명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야만 했다.

국내에서도
1960년대 일본 콩과 교잡하여 모자이크 바이러스에 강한 광교라는 콩 종자를 개발하였다. 이후 전국적으로 이 종자를 보급하였지만 3년 뒤 괴저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광교종자의 콩이 괴멸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광교종자는 의외로 괴저 바이러스에 약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국이 단일종이었기 때문에 바이러스는 아무런 저항없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우리나라는 콩 부족 사태를 겪어야만 했다.

이처럼 현재 종자기업들의 행태는 결코 가벼이 볼 문제가 아니다
. 보다 신중히 접근했다면 식량자원 문제의 좋은 해결책이 될 수도 있었던 GMO는 종자기업들의 탐욕과 만나면서 오히려 인류를 위협하는 심각한 재앙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인류의 탐욕이 문제다. 자원의 고갈, 지구 온난화, 핵무기도 결국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소비하려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괴물이다. [와인드업 걸]에서 종자기업에 맞서 끝까지 버티고 있는 태국을 무너뜨린 것도 다름아닌 권력을 향한 탐욕이 부른 내분이었다.

제목
[와인드업 걸]은 작품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몬산토의 GMO종인 라운드업 레디를 비유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와인드업 걸들은 라운드업 레디처럼 병에 걸리지 않는다. GMO가 그러하듯 선한 의도로 만들어진 와인드업 걸은 그러나 인간들에게 온갖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그릇된 방향으로만 쓰이게 된다. 하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탐욕을 품고 각자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갈등하는 사이에서 와인드업 걸만은 아무런 탐욕 없이 순수한 존재로 그려진다. 작가는 신인류로서 와인드업 걸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어쩌면 유전자 조작이 필요한 것은 콩이나 돼지가 아니라 인류일 지도 모른다
. 우리는 탐욕의 DNA를 제거하지 않는 한 신인류로 나아갈 수 없다. 탐욕 앞에 기다리는 것은 자멸뿐이다.




◎  종자기업에 관한 내용은 2011년 2월 27일에 방영된,  KBS 1TV 스페셜
   ‘종자 세계를 지배하다’를 정리한 것입니다.


영진공 self_fish

망나니 종자기업들이 부른 미래 참극(1), “와인드업 걸” (The Windup Girl, 2009)


* 저자: 파올로 바치갈루피
* 역자: 이원경
* 펴냄: 다른

지금 세계가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노라면 미래는 응당 암울하게 그려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SF계의 우등상을 줄줄이 수상하며 영미권에서 높은 판매고를 올렸던 [와인드업 걸]역시 현재의 골치덩어리들을 모아 가카의 얼굴짝 만큼이나 암울하게 변해버린 세계상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여타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SF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색다른 소재가 눈에 띤다. 작가는 우선 개연성 있는 세계상을 묘사하기 위해 현재 문제가 되는 화석연료의 고갈, 자원전쟁, 지구온난화, 신종 전염병 등으로 디스토피아로 변해버린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런 것들이야 다른 SF작품들에서도 흔히 차용하는 소재들이다. [와인드업 걸]은 여기에 세계 식량을 독점하고 있는 다국적 종자기업을 우리 미래를 똥칠할 요소의 하나로 추가하고 있다.

작품에서 그려지는 미래세계는 재앙의 종합선물세트로 인해 넝마가 되고 인류는 제한된 지역 안에서 안주하는 수축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 절대적으로 희소해진 화석연료로 인해 인류문명은 근대 이전의 기술사회로 되돌아가 다시 운동 에너지에 의존한다. 동물을 이용해 스프링을 감아 운동에너지를 저장해 새로운 동력원으로 사용하고 컴퓨터의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열심히 페달을 밟는다. 그러기 위해선 칼로리가 필요하다. 즉 음식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수축시대를 지나 다시 팽창 시대로 나아가려는 움직임 속에서 이전 시대에 이미 세계 식량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다국적 종자기업들은 자사의 GMO종자에 전염병이 퍼져 세계를 위험에 빠트린 원인 중 하나였지만 이렇게 칼로리가 중요해진 시대 분위기로 인해 계속해서 그 권력을 잃지 않고 다시 세계 위에 군림한다.

이야기는 이런 다국적 기업에 맞서 쇄국정책을 취하며 철저하게 자국의 종자를 지켜내려는 태국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다국적 기업들은 산업 스파이를 사업가로 위장시켜 종자를 수집하고, 한편으론 태국 내 권력다툼을 배후조정하며 어떻게든 태국을 집어삼키려 한다. 태국정부와 종자기업 간의 암투, 태국 내 권력 다툼, 인종문제와 유전자 조작으로 발생한 이름모를 전염병들 속에서 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과연 그렇다면 현실에서의 다국적 종자기업은 무슨 헛짓꺼리를 하고 다니길래 이렇게 당당히 세계를 망치는 주인공으로 SF작품에 출연하게 된 것일까?

[와인드업 걸]에서 칼로리 회사라고 일컫는 다국적 기업들은 유전자 조작 식물로 식량을 독점하며 거대 권력을 쥐고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태국정부를 압박한다. 이는 지금 세계를 무대로 양아치 짓을 일삼고 있는 다국적 종자기업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이 세계를 망치는 주인공으로 이 작품에 낙점된 것은 너무나도 적절한 캐스팅이었다.

현재 몬산토를 위시한 이런 거대 다국적 종자기업들은 그들이 개발한 GMO종자를 앞세워 세계의 종자시장을 집어삼키고 있다. 대부분 미국기업인 이들 종자기업들이 빠르게 GMO종자를 개발해 세계시장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현재 전세계 GMO종자의 87%를 몬산토에서 개발하였다.

애초부터 토착종이 부족했던 미국은 미래의 식량 확보를 위해 20세기 초부터 세계 각지의 종자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동아시아 지역에도 1929년에 식물학자를 파견하여 4500여종의 종자를 수집해 가기도 하였다. 그 결과 현재 미국이 보유한 식물종자원은 65만종, 세계 1위의 식물종자원 보유국이 되었다. 이렇게 수집한 종자를 미국은 민간 종자회사의 연구에 지원하였고 풍부한 종자 샘플을 이용하여 미국의 종자회사들은 현재의 GMO종자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의 식량확보를 위해
세계각지의 종자를 수집하도록 지시하였다
.









영진공 self_fish

“마지막 행성”(The Last Colony, 2007), 인류의 존망을 건 은하 농촌대전의 흥미진진한 결말


 

⊙ 저자: 존 스컬지
역자: 이수현
펴냄: 샘터

올해 들어서야 뒤늦게 접하게 된 존 스컬지의 두 작품 [노인의 전쟁][유령여단]을 읽고서 아직 출간되지 않은 마지막 권을 춘향이의 마음으로 기다리기를 3개월. 드디어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마지막 행성]이 택배 아저씨의 손에서 내게로 건네지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3부 [마지막 행성]은 앞선 [유령여단]에서 뿌려놓은 떡밥에서 예상하듯 콘클라베라는 범우주적인 외계인 동맹집단과 우주개척연맹의 한판 승부가 펼쳐진다. 상대의 규모가 규모이니 만큼 이야기는 그야말로 전 우주를 배경으로 한 폭풍같이 몰아치는 우주대전의 양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과 함께 그 정도의 스케일을 어떻게 한 권 분량으로 끝낼지에 대한 우려스러움이 있었다.

하지만 존 스컬지는 이런 나의 개밥에 도토리 같은 우려를 블랙홀로 던져버리고선 범우주적 스케일의 이야기를 작은 농촌행성의 전원일기스런 스케일로 축소시켜 놓는다.

이는 전 우주를 미친년 널뛰기 하듯 뛰어다니므로 해서 물을 너무 많이 탄 라면국물 마냥 싱거워졌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작은 개척행성에 알토란 같이 집중시킴으로 해서 진한 곰탕국물과 같은 구수한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덕분에 마지막 권은 그 거창한 이야기에도 삼천포로 빠지지 않고 한 권의 분량에 맞게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으면서 작가를 따라 우주 변두리까지 따라와준 독자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 권에서 잠깐 자제했던 작가의 유머 본능은 마지막을 앞두고 찬란히 폭발하는 초신성처럼 이번 작품 곳곳에서 뻥뻥 터트리고 있다. 특히 주인공 존 페리와 그의 수양딸 조이가 주고받는 냉소 섞인 만담은 [은하영웅전설]에서의 양 웬리와 양아들 율리안의 만담을 떠오르게 한다.

게다가 대체 암내 나는 행성에서 벌어지는 인류의 운명을 건 싸움이라니. 주인공들을 암내 지옥으로 던져놓은 존 스컬지의 악취미에 경의를~


신을 엔진삼아 우주선을 움직이는 독특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데 …


훌륭한 작품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준 존 스컬지의 새로운 작품들을 이후에도 국내에서 보았으면 하는 기대와 함께 이야기의 외전 격인 [조이의 이야기Zoe’s Tale]와 더불어 개인적으로는 2009년작 [신의 엔진The God Engines]을 출간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제발~

영진공 self_fish

“영원한 전쟁”, 지금 필요한 건 한 권의 반전소설이다


영원한 전쟁 The Forever War

◎ 지음_조 홀드먼
◎ 옮김-김상훈
◎ 펴냄_행복한 책읽기

밀덕후가 밀덕질을 그만두는 계기는 군입대라는 말이 있듯 전쟁의 비참함을 직접 겪었던 작가 조 홀드먼이 쓸 수 있는 전쟁소설이란 결국 반전소설이었을 것이다. 직접 배트남에 참전하여 백여 발의 파편이 박히는 큰 부상을 입고 재대한 홀드먼은 전쟁을 통해 느꼈던 생각들을 하드SF소설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한다.

콜랩서라는 축퇴성(일종의 블랙홀)을 이용해 초고속 항법을 발견하며 인류는 우주시대를 맞이하지만 곧 토오란이라는 외계종족과 조우하게 된다. 인류와 토오란은 전쟁에 돌입하게 되고 수백 세기에 걸친 전쟁을 만델라라는 사나이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전쟁의 비극을 더해주는 것은 수백 세기에 걸친 전쟁이라는 점이다. 흔히 이런 무지막지한 시간적 배경을 다룰 때는 평생을 사는 종족이라던가 생체공학이나 로봇이 등장하기 마련이지만 홀드먼은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일수록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인용한다.

초광속 이동으로 인한 시간팽창효과로 인해 몇 세기의 시간이 흘러도 우주선 내의 병사들은 몇 살 밖에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로 인해 제대 후 지구로 돌아가도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수십 세기가 지나버린 지구다.

나를 알던 이들은 모두 죽고 내가 알던 모든 것들이 변해버린 곳에서 그들이 돌아갈 곳은 없었다. 결국 제대했던 병사들은 다시 전쟁터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객관적인 시간으로 수백 세기에 걸쳐 전쟁을 하는 비극에 놓이게 된다.

비록 반전이라는 거창한 주제를 다루지만 SF라는 장르적 재미를 놓치고 있지 않다. 흥미로운 토오란과 전투, 수십 세기가 지난 세대들 간의 컬쳐쇼크, 디스토피아적인 지구. 특히 책의 초반부에는 지구에서 병사들이 토오란과의 전투에 대비해 훈련하는 모습은 다른 의미에서 실소를 자아낸다. 본문글을 발췌해 보자면, 


‘내한 훈련 따위는 실제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전형적인 군대식의 엉터리 논리이다. 우리가 이제 가려는 곳이 춥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그 추위는 얼음이나 눈 따위에서 느끼는 추위가 아니었다. 발착 행성의 온도는 거의 예외없이 절대 영도의 1, 2도 안팎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콜랩서는 빛을 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추위를 느꼈다면 당신은 이미 죽어 있다는 얘기가 된다.’


‘미주리 중부의 눈과 진흙탕 속을 엘리트답게 철벅거리며 나아가는 우리들이. 액체라고는 이따금 나타나는 액체 헬륨 연못밖에는 없는 세계에서, 다리를 놓는 기술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의아해 하면서.’

군생활을 해 본 이라면 이런 ‘군대식 엉터리 논리’가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눈물이 흐른다. 지금도 신교대나 예비군 훈련에서 자행하고 있는 누워서 비행기를 향해 소총을 쏘는 훈련은 이런 대표적인 군대식  엉터리 논리 중 하나이다. 적 비행기가 떴을 때 하늘을 향해 총질을 하는 것은 자살의 또 다른 한 방법일 뿐이기 때문이다.



요즘 우린 북한과의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여있다. 지금 당장 미사일이 휴전선을 오고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현실이다. 정치인들과 언론들은 자극적인 말들로 복수를 부추기고 있으며 많은 이들 또한 덩달아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전쟁은 답이 될 수 없다.

전쟁의 승리자는 우리가 아닌 결국 이런 상황을 이용해먹는 권력자들과 정치인들일 것이며 전쟁의 피해는 북한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어린이나 노약자, 여성, 가난한 이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그 짙은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을 부르짖는 늙은 정치인들의 수보다 수백 배 많은 수의 아름다운 청춘들이 전쟁터에서 죽고 다치고 불구가 될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반전소설들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려 보자.
전쟁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