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저링”, 안전하고 가벼운 공포영화(?)

<컨저링>(Conjuring, 2013) 을 거의 개봉 직후 주말 낮에 봤는데, 주변에 ‘아줌마’ 관객들이 많았다는 게 흥미로웠다. 대체로 호러영화 하면 생각나는 관객들은 그 장르 매니아들이나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하는 젊고 풋풋한 연인들이니까.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섭다”라는 카피가(원래 미국에서는 ‘잔인한 장면 없이 무섭다’였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도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영화가 기존 호러 관객뿐 아니라 광범위한 관객층을 공략할 수 있었던 건 이 영화가 가진 안전함과 가벼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는 스포일러가 상당수 포함돼 있으니 이를 피하고 싶은 분들은 이쯤에서 백스페이스를 눌러주시고 …

다분히 낚시성의 포스터 이미지

자, 나는 지금 ‘안전함’과 ‘가벼움’이라는, 언뜻 이 영화에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단어들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컨저링>은 호러영화 중에서도 전형적인 폴터가이스트 혹은 ‘귀신들린 집’ 장르이다. 이사온 날부터 집에서 이상한 현상들이 있고 다섯이나 되는 딸들 중 예민한 아이들은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헛것을 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집에 귀신들만 있느냐. 그렇지 않다. 이 귀신들은 실은 귀신 중에서도 대빵, 무려 ‘세일럼의 마녀’ 배스시바의 귀신에 희생된 이들이다.

세일럼의 마녀는 사타니즘에 심취해 제 아이들을 제물로 바쳤고, 이후 귀신이 되어 집에 거주하면서 이 집에 이사오는 엄마들을 조종해 제 아이를 살해하게 하고, 그렇게 새끼 귀신들을 파생시킨다. 그리하여 귀신을 몰아내기 위해 엑소시즘이 벌어지는데, 여기에서 슬쩍 크리스찬 호러(이른바 <오멘>, <엑소시스트> 등으로 대표되는)의 특징들이 얹힌다.

그런데 이 영화의 첫 시작은, <블레어 위치>나 <파라노말 액티비티>가 취했던 페이크 다큐멘터리 같은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그 에피소드는 또 ‘저주받은 인형’ 이야기다. 이쯤 되면 폴터가이스트에 ‘귀신’과 관련된 거의 모든 호러의 서브장르들이 이것저것 짬뽕됐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신 제임스 완 감독은 슬래셔와 스플래터만은 철저하게 배제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잔인한 장면 없이 무섭다”는, 신체 훼손 장면은 꺼리지만 호러영화에는 호기심을 가진 관객들을 솔깃하게 만드는 카피를 전면에 내걸 수 있었다. 이러한 ‘안전함’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무려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죽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는다는 데서 완성된다.

직캠 공포영화의 원조, “블레어 위치”(1999)

마녀의 조종을 받아 제 아이를 죽일 뻔한 어머니는 엑소시즘 후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을 품에 안는다. 위험한 시험대에 올랐던 모성 역시 결국 악령의 저주를 이겨내고, 이러한 모성의 승리는 페론 가족뿐 아니라 워렌 가족에게도 성취된다. 실존인물인 미국의 유명한 퇴마사 부부 에드와 로레인 워렌 부부가 가장 사악한 케이스라고 밝혔음에도 결국 아무도 죽지 않고 무사히 사건이 해결된다. 더욱이, 이런저런 서브장르의 특징들을 별 고민 없이 마구 가져와 뒤섞음으로써 전혀 웃기거나 가볍지 않음에도 메타-장르적 특성을 띄며 특유의 ‘가벼움’의 특징을 획득한다.

메타-호러로서의 특징 외에, <컨저링>은 일반적으로 호러영화들이 저예산에서 기인하는 ‘무명배우의 기용’이라는 특징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예외적인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베라 파미가는 우리에게 하정우와 함께 출연한 <두 번째 사랑> 외에도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디파티드>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해 익숙한 배우이며, 제임스 완 감독과 <인시디어스>에서 작업한 바 있는 패트릭 윌슨 역시 연극 무대에서부터 실력을 다져 <오페라의 유령>에서 라울, <리틀 칠드런>에서 케이트 윈슬렛과의 공연, <왓치맨>에서의 나이트 아울 역으로 인지도가 있는 배우이다. 무엇보다도 배스시바의 귀신이 빙의된 페론 가족의 엄마 역을 맡은 릴리 테일러는 메리 해런(<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 아벨 페라라(<어딕션>), 로버트 알트먼(<숏 컷>) 등과 함께 작업한 바 있으며 전세계 작가-감독들과 독립영화 감독이 탐을 내는 실력파 배우이다.

‘귀신들린 집’ 장르 특성상 한정된 공간에서 이야기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 대신, 집 내부의 구조를 입체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물론, 좋은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전반적으로 꽉 찬 느낌을 주는 것도 <컨저링>이 가진 강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배우들이 집 안에 숨겨진 비밀통로 등을 통해 수직으로 낙하하거나 굴러떨어질 때의 추락감이, 영화의 중간중간에 불현듯한 속도감을 주며 주위를 환기시키곤 한다.

엑소시즘이 등장한다면 이런 장면이 필수죠!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직후에 일행과 함께 “정말 오랜만에 본, 정통 호러영화였다”며 만족감을 표시했고, 더욱이 죽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스트레스가 덜했다며 웃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메타-호러를 오히려 ‘정통적’이라 느꼈던 것도 재미있지만, 이는 아마도 <블레어 윗치> 시리즈나 <파라노말 액티비티> 시리즈 이후로 조류가 크게 바뀐 듯한 호러영화 씬에서,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옛 장르들의 혼성이 주는 쾌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컨저링>이 주는 폴터가이스트 장르의 공포가, 한국에서 얼마 전 흥행했던 <숨바꼭질>이 주는 공포와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배급운을 잘 탄 예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가장 안전해야 할 보금자리가 가장 위험한 장소가 되고, 아이들의 보호자여야 할 부모(중 한 명)이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설정이 한국에서 크게 인기를 끄는 것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며 근원적인 공포를 느끼는 지금 우리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것 같다.

ps1. 우리나라 극장판 자막에서 ‘배스시바’로 표기한 그 이름은, 서구에서 퍼스트 네임으로 사용되는 예를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성경에서 바로 다윗 왕이 목욕하는 모습에 홀려 원래 남편이던 부하를 사지에 내몰아 죽게 하고 뺏었다는 그 ‘밧세바’이다. 보통 밧세바는 다윗왕과의 이 에피소드로 유명하지만, 다윗왕 말년에 보면 반역 의지가 있었던 넷째 아들을 남편에게 일러바쳐 반역을 막고, 둘째 아들인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본인이 직접 건의하여 넷째를 처형시켰다고 한다. 왕비 – 대비마마의 입장에서는 할 만한 처신이지만 ‘아들을 죽인 어미’인 것도 사실이다.

ps2. ‘세일럼의 마녀’는 ‘마녀사냥’의 비극적인 역사를 가리키는 대명사지만 이 영화에선 세일럼에 진짜 마녀가 있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마녀사냥의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어느 새 마녀의 고향이 돼 버린 세일럼에 애도를 …

ps3. 배스시바 역으로 나오는 이는 이 영화의 음악을 맡은 조셉 비샤라인데, 그는 제임스 완과 함께 한 전작 <인시디어스>에서도 귀신으로 출연한 바 있다.

“스파이더맨”, 소년 가장 히어로 이야기




우연히 케이블을 뒤적거리다 『스파이더맨』을 해주기에 봤습니다. 그걸 보고나니 2편이 보고싶어져서, DVD를 빌려 보았습니다.

물론 “샘 레이미” 감독, 하면 무조건 『이블데드』를 외치실 영화광들이 많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호러영화를 보는 자만이 진정한 영화광이란 식의 삘을 마구 드러내는 분도 있고 슬래셔만이 호러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제게 있어 진정한 호러는 『대부』 시리즈거든요.

하여간에, 그래서 저는 대다수의 『이블데드』 팬들이 매우 혐오(?)하시는 『퀵 앤 데드』를 너무 좋아하고, 각종 ~맨 시리즈를 좋아하는 미국 히어로물의 팬답게 『다크맨』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스파이더맨』 시리즈도, 당연히 좋아하지요.

“토비 맥과이어”의 ‘너무너무 착하고 불쌍한’ 피터 파커가 참 좋아요. 아마 미국 수퍼 히어로들 중에서 가장 착하고 불쌍할걸요. 알바 하느라 뭐 하느라 스트레스 쌓여서 공중에서 추락하는 수퍼 히어로라니! 게다가 저는, 이 소심하고 착하고 약간 너드 과인 이 녀석이 너무나 순진하게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과정도 그저 헤벨레~ 해서 보게 됩니다.

게다가 감독은, 이 아이의 그 갈구를 너무나 충실히 들어주고 있어요. 2편 기차 안에서 기절해버린 피터 파커를 사람들이 잡을 때만 해도 저는 감독이 ‘피에타 장면'(죽은 예수를 땅으로 내리는)을 정말로 연출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답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해버리데요. 으허허 웃으면서 “샘 레이미” 이런 센스쟁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아이는 정말 너무 착하고 순진하면서도 한편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갈구하고, 그래서 거미인간 노릇을 계속하죠. 자기한테 힘이 생긴 이상 남을 돕지 않으면 죄책감에 괴로울 아이예요. 『배트맨』이야 원래 갑부집 자식이고, 『슈퍼맨』이야 일하는지 노는지 모르면서도 월급은 꼬박꼬박 챙겨가는 직업인이고, 『크로우』와 『스폰』이야 이미 이승을 건너버린 자들이니 방세나 연료비나 식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지만 이 아이는 아직 ‘소년’입니다. 한국처럼 대학생 과외로 해외여행 다녀올 만큼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알바’ 수입으로 학비니 생활비니 충당을 해야 하죠.

거기에 뭐 ‘지구를 구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범죄많고 탈많은 뉴욕 시내를 노상 돌아다녀야 하니 바쁘기도 바쁘고 스트레스도 안 받는 게 이상하죠. 프롤레타리아 수퍼히어로라니, 이론상으로야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실제 영화에서 구현된 적은 많지 않잖아요?

이 아이의 서툴고, 미숙하고, 어리숙하고, 순진한 그 성격 자체가 너무 마음에 듭니다. 하긴, 수퍼히어로물이란 언제나 내적인 내러티브로 ‘성장’을 다루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외양까지 정말로 성장영화라고요. 똥폼만 잡으며 세상의 온갖 비극을 다 짊어진 척하는 ‘남자’ 영웅들은 멋있긴 하지만, ‘소년’ 영웅인 이 아이는 멋있는 대신 ‘사랑스럽’죠. 그리고, 그런 아이의 처지를 받아들이며 당당히, 용기있게 고난의 길을 선택한 메리 제인도 참 멋진 아이구요.

끝없이 유사-아버지를 찾다가 죽여야만 하는, 그리고 그러한 살부 의식들을 거쳐 결국 자기 발로 성장하고야 마는 『스파이더맨』의 또다른 이면엔, 아버지의 그림자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자아가 흡수돼 버리고, 파괴되고 마는 해리 오스본이 있습니다. (사실 둘은 거울의 양면인 셈이죠.) 그래서 3편에선 해리 오스본이 본격적으로 악의 그늘을 선택하게 되지 말입니다.

영진공 노바리

우리가 공포영화를 즐기는 이유


공포영화를 즐기는 이유를 심리적으로 설명하자면

첫 번째,
같은 경험도 반복함에 따라 불쾌감이 쾌감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과정이론(opponent process theory)에 따르면 처음에 불쾌하던 경험들이 반복하면 할수록 오히려 쾌감이 증대된다고 하죠.


중독성 음식들이 대개 처음 먹는 사람들에겐 불쾌감을 주고, 헌혈이나 고공낙하 같은 것도 처음에는 공포와 긴장을 유발하지만
익숙해질수록 오히려 쾌감이나 안도감을 더 많이 줍니다.

공포영화도 그런 경우로 설명이 됩니다.
반복단련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의미라 하겠죠.




두 번째,
공포영화는 미스테리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아주 절박한 미스테리죠.


공포영화의 주인공에겐 왜 이런 일이 벌어졌고, 범인이 누구이며, 나는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것인지를
알아내고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셈입니다.
그걸 제때 알아내면 살고 그러지 못하면 죽죠.

이렇게 절박한 미스테리에서는 관객들도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기 좋습니다.



세 번째,
공포영화의 사회적 의미도 있습니다.
공포영화를 보는 순간 극장안의 모든 사람은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모두가 공포라는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 거죠.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그걸 같이 보는 사람도 아주 뚜렷하고 단순한 감정으로 하나 될 수 있다는 건

상당히 매력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죠. 사회적인 욕구가 반영된 셈입니다.

네 번째,
공포영화는 원초적 감정의 해방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공포영화에서는 필연적으로 죽음이나 분노, (원초적)죄의식, 원한 같은 원초적인 감정을 다룹니다.
그 감정들은 누구나 경험한 것이지만 평소에는 쉽게 표출하기 어려운 것들이죠. 공포영화라는 장르에서만 해방시킬 수 있는 감정인 셈입니다.



물론 공포영화를 즐기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생래적 기질과 후천적인 경험으로 설명해야겠죠.

 

우선 생래적으로 자극추구성향이 강한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이 나뉩니다. 자극추구성향이 강한 사람들일수록 더 짜릿하고 위험한 경험을 찾습니다. 이들에게 일상생활은 지루함으로 가득차있죠.


차를 몰아도 더 빨리, 더 위험한 길로 운전하고,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해도 사고나기 쉬운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입니다. 형사
, 격투사, 특수부대원, 좋지 않은 경우에는 범죄자가 되기 쉬운 사람들이죠.


하지만 대개의 사회에서는 지나친 자극추구를 막습니다. 고로 이들은 평소에 약간 좌절된 상태인데, 공포영화는 그런 사람들에게 대안이 되죠.


반면 자극추구성향이 낮은 사람들은 일상생활 만으로도 충분한 자극을 받습니다. 지나친 자극에는 거의 토할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되죠. 공포영화는 이들에겐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고문이 됩니다.




후천적으로는 공포영화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개인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있겠죠. 특히 우리나라 공포영화들의 배경은 가족이나 이웃공동체의 관계와 연관이 많습니다. 영화를 보며 예전에 겪었던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되면 그냥 영화가 아니라 좀더 깊숙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게 반드시 불쾌한 경험이 되는 건 아니죠.
아시아 공포영화가 그런 식인 이유는 아시아 관객들이 모두 그런 경험 맥락을 공유하기 때문이니까요.


어쨌든 첫 공포영화의 경험이 심한 불쾌감이 되면 알러지와 비슷하게 다음 번 경험은 더 나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건 처음 말한 반대과정이론과는 다른 경로인데 둘의 차이는 경험 초기가 아니라 경험이 끝난 다음에 있습니다.


반대과정 이론이 성립하려면 첫 경험이 처음에는 불쾌했어도 끝난 뒤에는 평소보다는 덜 불쾌한 상태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만약 그 첫 경험이 처음부터 끝까지 불쾌감으로만 가득하다면 반대과정이 작동할 여지가 사라지니까요.


영진공 짱가

“고백”, 오히려 현실은 이 영화보다 더 무섭지 않을까?



서울의 모초등학교에 다니는 3학년 여학생C는 공부를 잘하는 얌전한 소녀다. 그녀는 초딩때부터 피해갈 수 없는, ‘한국학교’라는 공부지옥에서도 최상위권 학생이다. 다재다능을 요구하는 한국의 우수학생답게 다방면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고 그중에 초딩들의 필수항목, 독서골든벨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학기에 한번 있는 전교 독서골든벨 결전의 날, 벼르고 벼르던 C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교실에 들어섰고, 초반부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의 실력을 모르는 다른 반 선생님이 그 교실의 감독관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시험감독의 공정성을 위해, 각 반의 감독은 다른 반 선생님들이 했던 것이다.

드디어 각반의 대표를 뽑는 마지막 문제까지 몇 문제 안 남았던 순간, C가 순간의 착각으로 썼던 답을 지우고 다시 쓰기 시작한 순간 … 분명 자세나 행동이 어색했다. 그런 경우가 없다보니 더더욱 본인도 당황해서, 눈치도 보고, 지우고 다시 쓰는 행동도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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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그녀의 진가를 모르는 타 반 선생님은 커닝을 의심했다. 선생님은 그녀를 지적하고 탈락을 선고했다. 이제 겨우 초딩 3학년의 어리고 여린 소녀는 울먹이면서도 순순히 자리에 일어나서 탈락자 자리로 옮겼다. 그 아이의 실력을 아는 아이들은 놀랐고 무언가 조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상황은 결론났고, 모든 것은 그대로 진행됐다.

만약 담임이라면 다른 아이들이 그녀를 커닝하면 했지 그녀가 다른 아이를 커닝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을거다.하지만 늘 사건은 그렇게 이어가는 거 아니겠는가.

처음 다소 울먹이던 아이는 그칠줄 모르는 눈물에 어지러웠고, 돌아온 담임은 깜짝 놀랐다. 탈락과 울먹임 모두에. 그러나 누구에게 항변할 상황이 아니였다. 나름 공정했고, 그 학교에서 늘상 있는 수많은 시험중 하나였을 뿐이다. 정말 대수롭지 않은 것이였다. 아이는 하루종일 울먹였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놀랐고, 사정이야길 듣고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아이가 말했다.
’그 선생님 죽이고 싶어.’ ….
엄마는 C가 너무도 가여웠다 ….

그 뒤에 조금 시끄러웠던 이야기는 그만두겠다.

난 그냥 그 아이의 무서운 생각과 말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엄마에게 집중했다. 그 뒤 사건은 그냥 사건이다.

같은 또래의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이 이야기는 전율이었다. 쇼크로 잠시 멍할 정도였다. 왜냐? 현실이니까. 무서운 이야기인가? 10살짜리의 ‘殺意’에 대해 엄마는 별다른 가르침을 주지못하고, 그저 가엽고 불쌍해서 같이 분노했다. 세상과 엄마는 그 열 살 총명한 아이에게 진정으로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그 엄마역시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걸 누가 욕하랴. 요즘같은 세상에서 어느것이 진짜 가르침인지 누가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금 세상은 그렇게 모두를 경쟁으로 몰아가고있고, 남을 짓밟아 이겨냄으로 승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닥달하고, 분노를 참지 말라고 타이르고있다. 변해버린 세상에서, 그녀는 욕할 수 없는 엄마고, 또 그런식으로 살아남도록 훈련받은 아이다. 우리의 왕따와 일본의 이지메는 그렇게 훈련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결과일 뿐이다.


영화 “고백”을 보았다. 혹여 이 영화가 오버스럽다고 느낀 분이 계시다면, 난 역시’다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오는 오해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세상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넓고 크고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의 현실을 세련되게 그리고 있다.

자신의 사랑스런 어린 딸을 살해한 두 명의 제자에게 가하는 복수는 좀 ‘오버’지만, 이해못 할 바가 아니다. 나역시 그랬을것이다. 아니 좀 더 잔인한 방법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이쯤되면 오버가 아니다. (일본 ‘실사영화’의 오버스러움은 아마도 우리와 다름이지, 틀렸음이 아닐것이다. 생각하려한다.)

범인B군의 어머니는 죽은 선생님의 딸이 아니라 자기 자식B가 가엽다. 친절하고 착한 아이가 이렇게 험한 일을 겪었다는 게(?저질렀다는게) 너무도 가슴아프다. 아마도 범죄는 맨 처음 그렇게 시작됐을 것이다. A군의 엄마가 A를 버린 것 역시 마찬가지다. A와 B가 선생님의 딸이 아닌 다른 이를 살해했다면, 혹시 남편이나 심지어 선생님의 부모를 살해했어도, 선생님은 이런 복수를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모든 엄마가 가해자가 되고, 모든 아이가 희생자다. 가슴아픈 현실이 됐다.

“고백”은 여러 사람의 생각을 이야기하지만, 그 여러 사람이 바라보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각각의 입장에 따른 차이가 없다. 흔히들 취하는 방식의 ‘시각 차’내지 ‘입장 차’가 없다. 얼음같이 차가운 이야기가, 후반부의 (한국인이 보기에) 다소 오버스러움을 제외한다면 그대로 얼음같이 흘러간다.

스타일리쉬한 비주얼은 볼만하다. 소재는 나름 자극적이지만 적나라하게 풀어가진 않는다. 작가의 감각도 인정할만하고 절제력도 적절하다 하겠다. ‘고백’은 사랑하는 사람들 관계와 그 단절을 이렇게 잔인하게 그렸다. 가족의 이야기를 이렇게 부담스럽게 묘사하는 그 잔인한 상상력(어쩌면 현실감)에 경탄한다.

일본여행 중, 다가서는 여러 사람의 친절함에 감동감탄하면서 여러 곳을 다녔다. 이렇게 깨끗하고 살기좋은 곳이 있을까? … 그리고 우연히 들어가게 된 전철 화장실에서, 벽에 붙어있던 실종 여학생의 전단지를 본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어쩌면 그건 그 순간 이전까지 환상이었을거다. 그건 뉴스로, TV로, 영화로만 보던 일본, 바로 상상속의 일본이다. 그러나 그게 진실이다. 한국의 상황이 그 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거짓말은 그만하자. 제발.

“고백”은 영화가 보편적으로 가졌으면 … 하는 덕목을 대단히 훌륭히 갖추고 있다. 그래서 모두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다만 그 영화가 주는 교훈 역시 재미 못지않게 대단하지만 그 교훈을 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딱 꼬집어 얘기하기도 쉽지 않다. 그게 아쉽다.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은 가족의 문제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문제고, 더불어 사회가 가지는 책임의 문제다. 소재는 낯설지 않지만 이야기는 독특하고, 이야기는 독특하지만 이해가 된다. 이해가 되서 무섭다.

ps. 우린 오래전부터 자식이 ‘부모’의 원수를 갚는 영화들을 봐왔다. 참 오랬동안 많이 그랬다. 이제 자식의 원수를 갚는 영화에 감정적으로 더 공감한다. 그렇게 많은 영화들이 나오고 있고, 그렇게 또 세상은 변해있나 보다.



영진공 버디



“나는 전설이다”, 현존하는 모든 좀비 이미지의 원류


2007년 개봉 영화 “나는 전설이다 (I am legend)”의 원작은 리처드 매드슨의 동명소설이다. 1954년작인 이 책은 (그냥 일반적인 기대만 갖는다면) 당연히 지루하고 식상하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익숙한 좀비상을 가지고 있고, 이 책은 그 모든 좀비 이미지의 원류이니까.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이 온갖 HR 공식에 익숙해진 현대 관객들에게 식상해 보이듯, 그러나 또다른 의미로 재발견되고 재해석되듯, [나는 전설이다]가 출판 당대에 좀비라는 새로운 존재 – 이물적 존재이면서도 모태는 인간인 – 의 매혹으로 어필하였지만, 현대독자인 나는 이 소설의 엔딩의 혁명성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생존 그 자체를 위해 분투하는 존재임은 수가 얼마 남지 않은 인간이나 새로이 급증하고 있는 좀비나 마찬가지. 여기엔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생존투쟁의 승리만이 유일한 선이 된다. 인간과 좀비 간 전쟁에서 마침내 좀비가 사회를 구성하고 살 방법을 찾기 시작했을 때 최후의 인간 생존자는 죽어서 전설의 영역으로 입장해야 할 운명만이 남는다.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가 그런 방식으로 살아남았을진데, 호모 좀비쿠스 같은 이름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호모 사피엔스를 대체한다한들 ……

그러고 보면 수많은 호러영화들이 당연한 듯 인간의 승리로 막을 내렸던 것은 그 모든 좀비물의 조상인 이 소설에 대한 반역적인 퇴행, 혹은 퇴행적 반역인 건지도 모른다.

많은 인간들이 자본주의적 인간을 중세적 인간보다, 혹은 자본주의적 냉혈인간을 온정주의적/윤리적 인간보다 진화한 것으로 믿고 있는 세상에서, 평균수명을 늘린 대신 면역결핍과 신종질병에 시달리는 현대 인류가 과거 인류보다 진화한 것이라면, 좀비가 인간보다 ‘진화한’ 존재라고 말한들 과연 언어도단이 될까. 아니, 우리들 중 대부분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새에 이미 좀비가 됐는지도 모르는데. (이게 인간 특유의 자기합리화 방식 아니었던가.)

[나는 전설이다]의 엔딩은, 가상역사에서의 미래이자, 우리의 과거이기도 하다. 제우스가 새로운 신의 계보를 시작하며 신중의 신의 자리로 등극한 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가 속한 타이탄 족을 멸망시킨 이후이다.

[나는 전설이다]의 주인공 네빌은 결국 또다른 크로노스(제우스의 아버지, 타이탄족)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운명을 수긍하는 그의 모습은, ‘마지막 인간’으로서 전설의 주인공이 될 존재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