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소년 가장 히어로 이야기




우연히 케이블을 뒤적거리다 『스파이더맨』을 해주기에 봤습니다. 그걸 보고나니 2편이 보고싶어져서, DVD를 빌려 보았습니다.

물론 “샘 레이미” 감독, 하면 무조건 『이블데드』를 외치실 영화광들이 많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호러영화를 보는 자만이 진정한 영화광이란 식의 삘을 마구 드러내는 분도 있고 슬래셔만이 호러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제게 있어 진정한 호러는 『대부』 시리즈거든요.

하여간에, 그래서 저는 대다수의 『이블데드』 팬들이 매우 혐오(?)하시는 『퀵 앤 데드』를 너무 좋아하고, 각종 ~맨 시리즈를 좋아하는 미국 히어로물의 팬답게 『다크맨』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스파이더맨』 시리즈도, 당연히 좋아하지요.

“토비 맥과이어”의 ‘너무너무 착하고 불쌍한’ 피터 파커가 참 좋아요. 아마 미국 수퍼 히어로들 중에서 가장 착하고 불쌍할걸요. 알바 하느라 뭐 하느라 스트레스 쌓여서 공중에서 추락하는 수퍼 히어로라니! 게다가 저는, 이 소심하고 착하고 약간 너드 과인 이 녀석이 너무나 순진하게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과정도 그저 헤벨레~ 해서 보게 됩니다.

게다가 감독은, 이 아이의 그 갈구를 너무나 충실히 들어주고 있어요. 2편 기차 안에서 기절해버린 피터 파커를 사람들이 잡을 때만 해도 저는 감독이 ‘피에타 장면'(죽은 예수를 땅으로 내리는)을 정말로 연출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답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해버리데요. 으허허 웃으면서 “샘 레이미” 이런 센스쟁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아이는 정말 너무 착하고 순진하면서도 한편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갈구하고, 그래서 거미인간 노릇을 계속하죠. 자기한테 힘이 생긴 이상 남을 돕지 않으면 죄책감에 괴로울 아이예요. 『배트맨』이야 원래 갑부집 자식이고, 『슈퍼맨』이야 일하는지 노는지 모르면서도 월급은 꼬박꼬박 챙겨가는 직업인이고, 『크로우』와 『스폰』이야 이미 이승을 건너버린 자들이니 방세나 연료비나 식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지만 이 아이는 아직 ‘소년’입니다. 한국처럼 대학생 과외로 해외여행 다녀올 만큼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알바’ 수입으로 학비니 생활비니 충당을 해야 하죠.

거기에 뭐 ‘지구를 구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범죄많고 탈많은 뉴욕 시내를 노상 돌아다녀야 하니 바쁘기도 바쁘고 스트레스도 안 받는 게 이상하죠. 프롤레타리아 수퍼히어로라니, 이론상으로야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실제 영화에서 구현된 적은 많지 않잖아요?

이 아이의 서툴고, 미숙하고, 어리숙하고, 순진한 그 성격 자체가 너무 마음에 듭니다. 하긴, 수퍼히어로물이란 언제나 내적인 내러티브로 ‘성장’을 다루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외양까지 정말로 성장영화라고요. 똥폼만 잡으며 세상의 온갖 비극을 다 짊어진 척하는 ‘남자’ 영웅들은 멋있긴 하지만, ‘소년’ 영웅인 이 아이는 멋있는 대신 ‘사랑스럽’죠. 그리고, 그런 아이의 처지를 받아들이며 당당히, 용기있게 고난의 길을 선택한 메리 제인도 참 멋진 아이구요.

끝없이 유사-아버지를 찾다가 죽여야만 하는, 그리고 그러한 살부 의식들을 거쳐 결국 자기 발로 성장하고야 마는 『스파이더맨』의 또다른 이면엔, 아버지의 그림자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자아가 흡수돼 버리고, 파괴되고 마는 해리 오스본이 있습니다. (사실 둘은 거울의 양면인 셈이죠.) 그래서 3편에선 해리 오스본이 본격적으로 악의 그늘을 선택하게 되지 말입니다.

영진공 노바리

“다크 나이트”, 슈퍼 히어로는 필요한 것일까?

 


슈퍼히어로를 보면 나는 언제나 미국을 떠올린다. 안전하고 자유로운 자본주의 자유세계를 위협하는 빨갱이 베트콩이여, 지옥행 특급열차를 타라 일갈하며 그들과 전쟁에 나선 미국.
이런 미국의 영화 속 분신은 의심할 여지없이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슈퍼맨이었다.

당시에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니, 당시가 아니라 아직도 많다. 광복절날 시청 앞에서 성조기 흔드는 영감들은 여전히 지구를 지키는 슈퍼 미국을 신념으로 받들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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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말 미국이 슈퍼맨처럼 순수하게 의로운 목적만을 가지고 그 많은 전쟁을 벌였던 것일까? 단지 지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베트콩들은 정말 지구의 평화를 파괴하는 악의 무리고,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아프가니스탄, 후세인과 이라크는 정말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우주 몬스터일까?

그러나 미국이 물리치지 못한 베트남은 여지껏 지구를 정복하려는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악의 무리 이라크는 지구 평화를 파괴한다는 대량살상무기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라크는 배럴당 석유생산비용이 가장 적다는 다이아몬드를 갖고 있었을 뿐이다.

어쩌면 슈퍼맨으로 상징되는 슈퍼히어로 미국은 지구의 평화를 지키려는 순수한 의도 따윈 없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자신의 슈퍼파워를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우주 악당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우주 악당들은 사라졌지만 지구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뉴스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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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 정도까지 와버렸다. 부시 미 대통령의 지지율은 계속 바닥을 치고 있고 사람들은 의심하고 있다. 과연 슈퍼한 히어로라는 존재가 정녕 우리 평범한 시민들의 삶에 필요한 것일까?

그래서 <스파이더맨2>가 나온다. 슈퍼 파워를 지니고 있는 피터는 집세도 못 내고 있다. 슈퍼 파워를 가지고 있으면 뭐하나? 공립학교 지원금은 줄어들고, 복지예산은 삭감되고, 각종 보조금은 폐지되고, 길거리엔 노숙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피터는 그래서 슈퍼 히어로 미국의 내부를 돌아보는 최초의 히어로였다. <스파이더맨3>에 기대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슈퍼 파워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드러나려나? 하지만 피터는 역시 슈퍼 미국의 피를 물려받은 히어로답게 성조기를 휘날리며 악의 무리 샌드맨을 두드려 팼다. 그리고 자신의 고민을 ‘젊은 시절 잠깐 방황이야말로 슈퍼한 인간의 매력이지’라는 뉘앙스로 포장하며 끝내 히어로 본연의 모습으로 리턴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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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무것도 변한 건 없었다. 우리의 질문도 바뀌지 않았다. 과연 슈퍼 히어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

이때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 줄 흑기사를 자처하며 브루스 웨인이 홀연히 나타났다. <다크 나이트>.

어쩌면 고담시와 배트맨으로 상징되는 미국이야말로 현실의 미국과 가장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시민들은 의료보험이 없어서 손가락이 날아가고 있는데, 정부는 최신 무기로 돈지랄 중이다. 그리고 이 시민들을 지켜야 하는 법은 투페이스 번트처럼 자본에 좌지우지되는 ‘두 얼굴의 사나이’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기존 배트맨의 만화 같은 영상을 벗고 고담의 리얼리티를 살려놨다. 현실 같은 고담은 미국의 현실이다.

지구의 평화를 지키려면 물론,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도 있어야 한다. 처음 등장하는 악당은 갱들. 이들의 무기는 돈줄, 바로 현금이다. 배트맨과 경찰은 이 대량살상무기 현금을 찾아내려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량살상무기 현금을 찾아내 없애버리는 사람은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슈퍼 악당 ‘조커’다.

그렇게 조커는 말한다.

“대량살상무기를 가진 악당을 찾아 없애면 지구의 평화가 올 거라고 생각해? 후세인이 사라졌지만 지구에 평화는 오지 않았어. 그루지아와 러시아는 전쟁을 시작했고, 중국은 티베트를 유혈 진압했으며,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아닌 소수민족이 중국에서 테러를 일으켰어. 끊임없이 우주 악당을 만들어내 자신의 슈퍼함을 과시하는 것으로 지구의 권력을 장악한 네가 까먹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지. 우주 악당이 없다 해도 지구는 평화로운 동네가 아니야. 혼란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지. 바로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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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구는 평화로운 동네가 아니다. 슈퍼 악당이 있건 없건 간에 혼란은 있기 마련이다. 조커는 지구 정복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슬프지만 혼란이란 그런 거고 우리 사는 삶이 그런 거다. 그런데도 슈퍼 히어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슈퍼 악당을 찾아내 평화를 지키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혼란을 슈퍼 악당이라고 부추기며 전세계에 전쟁을 일으키는 미국. 그리고 덤으로 배럴당 생산비용이 가장 싼 석유까지 챙겨가는 미국. 그렇다면 과연 누가 슈퍼 히어로고, 누가 슈퍼 악당일까? 과연 슈퍼 히어로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조커는 그래서 배트맨에게 끊임없이 요구한다. 너의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고담시는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다. 미국이 슈퍼 히어로라는 가면 속 정체를 밝히지 않고 슈퍼 악당을 찾는 전쟁을 계속하는 한 지구촌 역시 혼란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그리고 배트맨은 이제 고민해야 한다. 정체를 밝힐 것인가, 말 것인가.

배트맨은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굉장히 상식적인 답을 한다. 이제 혼란을 바로잡는 일은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법을 지키는 검사 하비 덴트가 맡아야 된다는 답. 비록 그 법이라는 것이 고담시에서는, 그리고 고담 같은 미국에서는 ‘투페이스 던트’처럼 두 얼굴의 법이지만 그래도 혼란을 바로잡는 일은 슈퍼 파워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법이 맡아야 한다는 상식적인 답. 자신의 슈퍼 파워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게 도울 뿐, 진정한 슈퍼 히어로는 배트맨이 아니라 ‘법’이여야 한다는 답. 상식을 뛰어넘는 슈퍼한 놈들만 판치는 히어로의 세상에서 만나는 상식적인 답이란 그래서 놀라운 것이다.

“슈퍼 히어로는 과연 필요한 것일까?”

결국 우리의 질문에 대한 배트맨의 답은 이런 것이다.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배트맨, 스파이더맨, 슈퍼맨처럼 슈퍼 파워를 가진 히어로가 아니라 일반인의 상식과 일반인의 정서를 담은 이 시대의 법이 바로 슈퍼 히어로가 돼야 한다.”

그래서 <다크나이트>는 슈퍼 히어로 미국을 부정하는 가장 진보한 슈퍼 히어로다.

*

미국은 이처럼 영화가 정치를 앞서간다. 이라크 전이 한창일 때는 남의 집구석 걱정하지 말고 우리 집구석이나 잘 챙기라며 집세를 걱정하는 슈퍼 히어로 <스파이더맨2>가 나오더니, 맥케인과 오바마의 대선을 앞두고는 미국은 슈퍼 히어로가 되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놓고 질문을 던지는 <다크나이트>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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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는 게 있다면 그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이런 것 아닐까? 시대를 앞서 먼저 상상하고 창조하는 이정표의 역할. 게다가 이 영화는 진지하게 각잡고 사색하는 영화가 아니라 남녀노소 단체관람에 무리없는 블록버스터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정치를 앞서는 영화를 만나기 어렵다. 밤 12시까지 보습학원 보내고 입시학원 보낸다고 인간의 창의력이 늘어나진 않는다. 놀란 감독은 7살 때부터 영화를 찍었고, 문학을 전공했다.


영진공 철구

인크레더블 헐크 (The Incredible Hulk), “속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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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튼의 헐크, 잘 어울린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이안 감독의 2003년작 <헐크>의 속편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오프닝 크레딧이 흐를 동안 2003년작 <헐크>의 줄거리를 매우 빠른 컷들을 통해 제시하지만, 이 컷들에서 보이는 브루스 배너와 베티 로스는 에릭 바나와 제니퍼 코넬리가 아닌 에드워드 노튼과 리브 타일러다. 오프닝 크레딧이 끝나고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공간적 배경은 <헐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릭 바나의 브루스 배너가 머물고 있던 곳, 브라질이지만 이후 영화의 성격은 <헐크>와 다른 길을 간다. 분명 <인크레더블 헐크>는 <헐크>가 가지 않았던 길을 향해 가는 블록버스터이다. 그러나 <헐크>가 이전에 쌓아놓았던 성과를 굳이 무시하거나 부정하지 않은 채 심지어 일정 부분을 계승하기까지 한다.


2003년 개봉했을 당시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는 다소 유보적인 평가를 받았고 일각에서는 저주에 가까운 혹평을 들었던 <헐크>에 대한 논의를 되짚어보면, 블록버스터라는 장르(블록버스터를 ‘장르’라 부를 수 있다면)가 새삼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확인할 수 있다. 저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는 말은 참 복잡한 여러 가지 뜻을 전제하고 있다. 다른 지점에서 성취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진지한 평론가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블록버스터에 대해 내용이 없다는 둥 플롯이 단순하다는 둥 의례히 회의적인 태도를 갖기 마련한 사람들도 정작 복잡하고 진지한 내용이 담긴 블록버스터에 대해서는 은근슬쩍 다른 기준을 갖다댄다는 것이다. 블록버스터는 다소 단순하고 쉬우며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식의.


과연 당시 <헐크>에 대한 평을 보면 미국사회에 대한 은유라는 둥, 고전적인 희랍비극의 틀을 가져온다는 등의 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블록버스터들, 특히 슈퍼히어로나 안티히어로의 이야기 중 신화적 요소가 없는 작품이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체로 모든 블록버스터들은 평범한 / 유약하던 주인공이 힘을 갖게 되거나 뜻밖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권위있는’ 악당과 싸우게 되는데, 저 권위있는 악당이란 곧 ‘아버지 세대’ 혹은 기득권의 비유가 아니던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외디푸스의 신화는 변용되기 마련이고, <헐크>는 그걸 좀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뿐이다. 브루스 배너의 적은 자신의 아버지(‘매드 사이언티스트’ 타입)일 뿐만 아니라 베티의 아버지, 즉 썬더볼트 장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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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섬세하고 감성적인 브루스 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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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지적이고 불쌍한 브루스 배너


한 사람 안에 있는 두 가지 극단적 인격이라는 측면에서 보통 ‘지킬과 하이드’ 모티브로 주로 해석되는 헐크의 이야기에, 이안이 강력하게 가미한 것은 ‘미녀와 야수’ 모티브이며, 소위 ‘문명화’라는 과정을 통해 야수성을 억압 혹은 거세당한 현대 남성에 대한 은유이기도 했다. 네바다 사막에서 탱크와 장갑차와 헬기를 장난감처럼 때려부수던 헐크는 베티 로스에게 향하는 먼 길을 돌아오면서 그녀 앞에서 비로소 진정을 찾고 브루스 배너로 돌아온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에서 이안 감독은 DVD 코멘터리를 통해 “누가 뭐래도 이 영화는 사랑 영화죠.”라며 능청을 떤다. 이것이 비극적인 것은 가정으로의 귀환 본능, 혹은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를 브루스 배너가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그는 그녀와(혹은 그 누구와도) 결코 가정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는, 레이건 시대의 강력하고 권위적인 우파 아버지 세대로부터 억압당한 클린턴 시대의 유약한 그러나 더 능력있는 리버럴한 젊은 세대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이안 감독은 그가 헐리웃에서 영화를 만들 때 견지하는 예의 그 태도, 즉 ‘카메라를 든 인류학자’로서 꼼꼼하게 인간과 사회의 본성을 통찰하고 기록하는 태도를 이 영화에서도 드러낸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실은 철저하게 미국 안으로 들어갔던 다른 블록버스터와 달리 이 영화가 오히려 미국 바깥에서 마치 지구인을 관찰하는 화성인 과학자처럼 코믹스 문화와 슈퍼히어로를 대하는 미국 대중들의 관심과 호감을 문화인류학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는 태도가 헐크라는 안티 히어로와 충돌하는 지점을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충돌이 과연 ‘서로 융합되지 못한 채 따로 노는’ 어색함일까? 아니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매우 ‘생산적인 균열’인 것일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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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한 번 하지 않는 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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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를 시도하지만 실패하는 커플


<인크레더블 헐크>가 <헐크>를 계승하는 지점은 역시 미녀와 야수 모티브를 더욱 노골적으로 보여줬다는 것, 그래서 심지어 <킹콩>을 닮은 장면마저 등장한다는 점이다. 억눌린 현대 남성의 폭발이라는 측면은 오히려 <헐크>의 근육질 에릭 바나보다 <인크레더블 헐크>의 비쩍 마른 에드워드 노튼에게 더 잘 어울린다. 안 그래도 얼굴이 날카롭고 턱이 뾰족해 어딘가 불쌍해 보이는 노튼이다. 노튼이 각본을 매만진 <인크레더블 헐크>는 노튼의 이 왜소한 몸매를 이용한 유머가 여러 번 등장한다.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온 뒤 늘어나고 찢어진 바지 허리춤을 붙잡고 다 찢어진 엉덩이와 허벅지를 노출하며 그토록 불쌍한 거지꼴로 시내를 돌아다니는 장면은 <인크레더블 헐크>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브루스가 헐크가 됐을 때 벌이는 파괴는 <헐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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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크와 에밀 블론스키(어보미네이션), 두 번째 대결 (<인크레더블 헐크>)


나는 이안의 <헐크>를 매우 좋아하지만(나중에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DVD를 비싼 값을 주고 샀을 정도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헐크> 식의 장중하고 품위있는 이야기의 무게를 뺀 대신 <헐크>에서 약했던 쾌감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유머와 타격감이다. 우리가 ‘헐크’라는 녹색괴물을 둘러싸고 종종 킬킬대며 주고받는 농담이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아주 유효적절하게 들어가 있다. 아무리 해도 찢어지지 않는 헐크의 바지는 <헐크>에서도 농담거리이긴 했지만, <인크레더블 헐크>에선 좀더 노골적인 농담으로 여러 번 드러난다. 브루스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허리가 늘어나는 바지를 선호하며 심지어 뚱뚱한 아주머니의 널찍한 엉덩이에 바지를 대보기까지 한다. 고무줄 몬뻬 ‘보라색’ 바지에 대한 농담은 또 어떤가. 심지어 헐크를 둘러싸고 차마 대놓고 하지 못했던 성적인 농담마저도 영화에서 유머로 등장한다. 그토록 사랑하지만 베티와 브루스가 섹스할 수 없는 이유를 대놓고 묘사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게다가 타격감. 헐크가 어보미네이션과 싸우는 장면뿐만이 아니라, 그가 경찰차를 둘러 찢어 무기처럼 사용한달지 하는 장면에서 주는 타격감과 파괴감의 쾌감이 아주 크다. 건물을 부수고 도로를 엉망으로 만드는 장면들이 <헐크>에선 다소 만화처럼 가벼운 무게감으로 묘사된 반면, <인크레더블 헐크>에선 육중한 무게감과 둔한 타격감을 자랑하며 파괴의 쾌감이 더 크게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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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면 역시 ‘그림’스럽다. (이안의 <헐크>)


무엇보다도 <인크레더블 헐크>가 <헐크>보다 뒤에 나왔기에 유리한 점은 바로 그 사이에도 눈부시게 발전한 CG의 덕을 톡톡히 봤다는 것. <인크레더블 헐크>에서는 브루스 배너가 헐크로 변하는 그 과정, 혹은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오는 과정의 신체적 변화를 바로 눈앞에서 재현시켜 준다. 이는 스턴스 박사를 찾아간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고소영, 정우성이 주연했던 <구미호>에서 “앞으로 CG 기술이 발전하면 묘사될 수 있는 장면”이라 상상되었던 바로 그 몰핑 기법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근육 하나하나, 힘줄 하나하나가 변화는 그 과정을 보는 건 매우 경이롭다. 대낮의 컬버대학 교정에서 장갑차와 헐크가 싸우는 장면은 어떤가. 비록 피부 표현에서 여전히 CG 티가 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빛의 방향과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명암의 변화가 아주 자신만만하게 눈앞에 표현된다. 정점은 바로 <킹콩>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밤에 번개가 치고 비가 퍼붓는 장면에서의 헐크가 묘사된 것이다. 비록 여기에서 킹콩의 피부는 시종일관 회색으로 표현되어 역시 그림같다는 느낌을 여전히 주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피부결이나 번개가 칠 때마다 근육질이 움직이는 방향이 매우 세심하게 표현된다.


역시 이야기의 깊이라는 측면에서 <인크레더블 헐크>보다 <헐크>에서 좀더 은근하고 깊은 재미를 느끼는 게 사실이지만, <인크레더블 헐크>가 주는 말초적인 감각의 쾌락 역시 쉽게 폄하하지 못할 요소이다. <헐크>와는 다른 노튼 식의 유머 역시 점수를 높게 줄 수 있는 부분. 노튼 옵빠가 블록버스터에서 낭비될까 봐 조마조마했었는데, 브루스 배너에 이 정도의 멋진 숨결과 개성을 불어넣은 건 역시 노튼이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물론 나는 에릭 바나의 브루스 배너 역시 좋아하지만, 역시 노튼의 브루스 배너가 한 수 위였음은 부정할 수가 없겠다. 문제는 역시 연출인 게지. (이안 만세!)


영진공 노바리

ps1. 마지막 장면에서 녹색눈으로 씨익 웃는 노튼 오빠의 압도적인 표정. 꺄악~!

ps2.
팀 로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아저씨가 서른 아홉이란 건 좀 사기…

ps3.
컬버대학 교정에서 싸울 때 헬기에서 박격포를 쏘자 헐크가 자신의 온몸으로 베티를 화염으로부터 막아내는 장면, 이 장면은 두 번째 볼 때도 참 짠하면서 애절하더라.

ps4.
대놓고 레슬링 흉내라니. “Hulk Smashhhhhhh~!!”에서는 정말 눈앞에 만화 말풍선이 튀어나오는 듯했다. 게다가 역시 헐크는 미녀 앞에서 무지하고 순진한 바보 머슬이었… (귀여워!!)

ps5.
마지막에 깜짝 등장하는 토니 스타크는 어쩐지 <아이언맨> 때보다 더 사악한 악당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