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윔블던”, 조금은 비겁한 루저 달래기


 


학교 3학년은, 그렇다. 질풍노도의 시기이다. 젊음은 냉혹하고 대가리는 아직 여물기 전이다. 고등학생들이야 눈치껏 담배도 피고 옆학교 누구랑 응응응 했더라는 무용담이 한껏 부풀려져 돌아다니기도 하고 형 학생증으로 술집도 가는 호방함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중학생에게 그런 일탈이야 그리 쉽겠느냐 말이다.


 


더군다나 중학교는 승자와 패자의 경험을 처음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집안 사정 때문에, 성적 때문에, 혹은 어린 나이의 조숙함 때문에 진학의 고민을 최초로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뿔싸, 1등과 60등의 결과가 바로 여기서부터 갈리는구나. 성적이 인생을 가름하는 첫 번째의 도전인 이 시기에 말 그대로의 등수는 얼마나 사람을 민감하게 만들었던가?


 


모의고사 200점 만점에서 150점 커트라인의 전후를 왔다갔다했던 수많은 중간자들의 후달림은 또 얼마나 절절했던가 말이다.

우리반 왕따(당시엔 그런 말이 없었다만) 기석(물론 가명)이는 반등수 7등을 차지했다고 성적표를 받은 그날 자리에 엎드려 성적표를 찢으며 울었다. 기석이 뒤에 주루룩 줄을 서야 하는 53명의 우리들이 갖는 울분은 졸업식의 그날까지 기석이를 놀림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난 어느날 뜬금없는 측은지심에 “넌 친구도 없는데 도대체 학교 끝나면 뭐하고 노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족회의 하고 놀아”를 들음으로서 기석이의 왕따를 공고히 한 죄의식을 아직도 갖고 있다.



 




 


 


 


“윔블던”은 반에서 7등한 기석이의 눈물겨운 좌절극복기에 다름 아니다. 반에서 7등을 한 루저의 아픔이야 영화의 현혹에 감전된 알량한 감수성 건들이기에 좋다. 얼마나 달콤하더냔 말이다. 샤라포바 보다도 이쁜 테니스계의 요정 브래드버리를 꼬시는데 로맨틱 코미디 특유의 치고받는 설정도 없다.


 


오이냉국에 밑간 안한 그 니맛도 내맛도 아닌거 그렇다고 하자. 엥간한 있는 집에 살면서 작업용으로 훌륭한 컨버터블에 안정된 직장까지 보장된 그런 피터 콜트의 외면은 솔직히 그럴듯함이 없다. 그건 “익스트림 OPS”가 재미없는 이유와도 같다. 영화에서 그럴듯함은 실제와는 엄연히 다른 문제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오이냉국에 물말아 놓은 결과가 되어버렸으며 우리의 예지력이 초능력 수준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한껏 고양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야 말았다. 우리나라의 미인상과는 조금 이질적인 “커스틴 던스트”를 졸라 좋아하거나 “폴 베타니”의 매력에 빠져있는 여자들이라면 그럭저럭 좋아 하겠다만 워킹 타이틀의 전작에 광분했던 (“어바웃 어 보이”, “러브 액츄얼리”, “브리짓 존스의 일기”, “파고”, 오오~ 그리고 그리도 감동적이었던 엔딩을 만들어낸 “Shaun of the dead”여!!) 사람들이라면 이 알량한 로맨틱 코미디의 두께에 피식 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감수성에 워킹타이틀만한 레이블이 어디 있겠냐마는 루저를 가장한 거의 성공한 위너를 그린 이번 작품은 좀 비겁했다는 생각이 든다. 비겁한 게 꼭 나쁜 건 아니지만 난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니까, 그저 비겁했다고 말했을 뿐이지. 그나저나 기석이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설마 나보다 이쁜 여자를?


 


 


영진공 그럴껄


 


 


 


 


 


 


 


 


 


 


 


 


 


 


 


 


 


 


 


 


 


 


 


 


 


 


 


 


 

“스파이더맨”, 소년 가장 히어로 이야기




우연히 케이블을 뒤적거리다 『스파이더맨』을 해주기에 봤습니다. 그걸 보고나니 2편이 보고싶어져서, DVD를 빌려 보았습니다.

물론 “샘 레이미” 감독, 하면 무조건 『이블데드』를 외치실 영화광들이 많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호러영화를 보는 자만이 진정한 영화광이란 식의 삘을 마구 드러내는 분도 있고 슬래셔만이 호러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제게 있어 진정한 호러는 『대부』 시리즈거든요.

하여간에, 그래서 저는 대다수의 『이블데드』 팬들이 매우 혐오(?)하시는 『퀵 앤 데드』를 너무 좋아하고, 각종 ~맨 시리즈를 좋아하는 미국 히어로물의 팬답게 『다크맨』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스파이더맨』 시리즈도, 당연히 좋아하지요.

“토비 맥과이어”의 ‘너무너무 착하고 불쌍한’ 피터 파커가 참 좋아요. 아마 미국 수퍼 히어로들 중에서 가장 착하고 불쌍할걸요. 알바 하느라 뭐 하느라 스트레스 쌓여서 공중에서 추락하는 수퍼 히어로라니! 게다가 저는, 이 소심하고 착하고 약간 너드 과인 이 녀석이 너무나 순진하게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과정도 그저 헤벨레~ 해서 보게 됩니다.

게다가 감독은, 이 아이의 그 갈구를 너무나 충실히 들어주고 있어요. 2편 기차 안에서 기절해버린 피터 파커를 사람들이 잡을 때만 해도 저는 감독이 ‘피에타 장면'(죽은 예수를 땅으로 내리는)을 정말로 연출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답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해버리데요. 으허허 웃으면서 “샘 레이미” 이런 센스쟁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아이는 정말 너무 착하고 순진하면서도 한편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갈구하고, 그래서 거미인간 노릇을 계속하죠. 자기한테 힘이 생긴 이상 남을 돕지 않으면 죄책감에 괴로울 아이예요. 『배트맨』이야 원래 갑부집 자식이고, 『슈퍼맨』이야 일하는지 노는지 모르면서도 월급은 꼬박꼬박 챙겨가는 직업인이고, 『크로우』와 『스폰』이야 이미 이승을 건너버린 자들이니 방세나 연료비나 식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지만 이 아이는 아직 ‘소년’입니다. 한국처럼 대학생 과외로 해외여행 다녀올 만큼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알바’ 수입으로 학비니 생활비니 충당을 해야 하죠.

거기에 뭐 ‘지구를 구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범죄많고 탈많은 뉴욕 시내를 노상 돌아다녀야 하니 바쁘기도 바쁘고 스트레스도 안 받는 게 이상하죠. 프롤레타리아 수퍼히어로라니, 이론상으로야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실제 영화에서 구현된 적은 많지 않잖아요?

이 아이의 서툴고, 미숙하고, 어리숙하고, 순진한 그 성격 자체가 너무 마음에 듭니다. 하긴, 수퍼히어로물이란 언제나 내적인 내러티브로 ‘성장’을 다루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외양까지 정말로 성장영화라고요. 똥폼만 잡으며 세상의 온갖 비극을 다 짊어진 척하는 ‘남자’ 영웅들은 멋있긴 하지만, ‘소년’ 영웅인 이 아이는 멋있는 대신 ‘사랑스럽’죠. 그리고, 그런 아이의 처지를 받아들이며 당당히, 용기있게 고난의 길을 선택한 메리 제인도 참 멋진 아이구요.

끝없이 유사-아버지를 찾다가 죽여야만 하는, 그리고 그러한 살부 의식들을 거쳐 결국 자기 발로 성장하고야 마는 『스파이더맨』의 또다른 이면엔, 아버지의 그림자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자아가 흡수돼 버리고, 파괴되고 마는 해리 오스본이 있습니다. (사실 둘은 거울의 양면인 셈이죠.) 그래서 3편에선 해리 오스본이 본격적으로 악의 그늘을 선택하게 되지 말입니다.

영진공 노바리

“이터널 선샤인” (2004), 네가 내 곁에 있든 없든 난 괜찮아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은 사랑과, 그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만류인력의 법칙에 따라 땅껍질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이라면 예외없이 한번이 되었든 수십번이 되었든 어떤 모양이든지간에 사랑을 하고 만들고, 그 기억을 가슴 한켠에 붙박이장처럼 붙여 들여놓고 살기 마련이다.

결점투성이인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나누고 보듬는 일 또한 실수와 오발의 연속이며 유치한 이기심과 알량한 속셈의 퍼레이드다. 누구라고 그 혐의에서 벗어날수 있을까. 동화같은 사랑이야기는 사람들이 원해서 만들어 지는 것. 화면 안의 해피엔딩-영원히 행복했답니다-은 악성 변비환자의 내일 아침 쾌변처럼 이상향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눈꺼풀에 씌워져있던 얇디 얇던 콩깍지는 햇빛에 직격당한 흡혈귀의 피부처럼 재가 되 버려 바람에 날려 흩어지기 마련이고 진실을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라만 봐도 밤잠을 설치고 심박수를 무한대로 끌어올리던 사람의 사소한 단점들이 100원짜리 망치게임의 두더지 대가리처럼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는 순간 꿈같던 사랑은 구질구질한 현실로 돌변하고 대부분의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은 그렇게 끝나버린다.

전혀 남남이던 사람을 순식간에 내 반쪽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얄팍한 감정의 반대편은 이렇게 냉정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기억을 조작한다. 유치한 짓거리지만 인간은 그렇게 한다. 내가 쪽팔렸던 부분, 내가 싫었던 부분을 싸그리 들어내 봉투 속에 꼭꼭 눌러담아 폐기 처분하고 좋은 기억, 아름다운 기억들만 붙박이 장속에 예쁘게 정리해 넣어 두고 가장 사랑스럽게 나온 사진을 커다랗게 찍어내 철퍼덕 붙여 자기를 속이고 남들을 속인다. 내 사랑은 아름다웠네, 내 사랑은 달콤하고 짜릿했네라고.

니체가 말한 망각의 축복은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폐기 처분하는 편리한 능력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들은 “정말 그랬던 것”으로 바뀌고 아예 그것이 진실이라고 스스로 믿어버림으로서, 애틋하고 아름다운 한편의 [추억 : 사랑편]은 완성된다.
사랑은 어쩌면, 뿌연 생크림이 잔뜩 얹어진 커피처럼 망각으로 덮인 기억 속에서만 달콤한 것일지도.



조엘도 언젠가 자신만의 기억을 만들어냈을 거다.
 

기억을 제거하는 따위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그녀가 남긴 필름들을 잘라내고 이어붙여 가슴떨리게 만들던 그녀의 모습과 귓가에 속삭이던 설레이는 단어들과 예쁜 기억들만으로 만든 추억편을 완성했을 거다.

너무 많은 조각들을 가지고 있었고 미처 정리를 못했을 뿐. 그는 혼자 힘으로 꾸역꾸역 지근지근 정리하고 골라내고 지워내서 예쁜 이야기책을 완성했을 거다.

깔끔하게 만들어진 이야기책을 혼자 몇번이고 반복해 읽다보면 또, 그는 예정된 실패는 까맣게 잊게 되었을 것이고(잊기를 원했으므로) 스스로 골라내 꼭꼭 담아 버린 것들을 완전히 잊어먹었을 때, 사랑했던 시간보다 몇배의 아픔을 견뎌내던 시간들을 완전히 망각했을 때.

그는 클레멘타인을 생각나게 하는 또다른 누군가(기억이 전부 지워지지 않았다면 다시 클레멘타인이 되지는 않았을거다)에게 더듬거리며 손을 내밀었을 것이고 비슷한 지점의 그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았을 것이고

“당신 … 내가 다시 지겨워지게 될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을 거에요. 아마도.”

그렇게 막연한 희망으로 또 가슴이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유치해도 인간은 그렇게 한다.

영진공 거의없다

 

“엘리자베스타운”, 집으로 돌아오라


 

“Welcome Home”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2005년 작 영화 『엘리자베스타운』(Elizabethtown)은 이 말로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 온 걸 환영한다는 얘기인데, 그 반김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딴에는 자신들의 모든 자본과 기술력 그리고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여 전 세계로 뿌린 상품이 참 고약하게도 시장에서 거절 당해 반품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안타깝기도 할 터이다. 그리도 원대한 포부와 그림을 그려가며 떼돈도 벌고 세상에도 도움이 되겠다고 확신에 차 들이밀었던 상품이 차갑고 냉랭한 조롱 속에 몽땅 되돌려 보내졌으니.

이런 상황을 감독은 단순한 “failure(실패)”가 아닌 “말짱 꽝(fiasco)”이라 표현하였다. 겉은 번드르르한데 내용은 텅 빈 참으로 낯 뜨거운 그런 실패라 본 것이다.


여기서 잠깐, fiasco에 대해서 알아보자. 원래 fiasco는 “끼안띠(Chianti, 이탈리아의 고급와인)”을 담는 병을 일컫는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와인의 원산지인 Chianti에 어느 중요한 인물이 방문했었는데, 그 사람을 대접하려고 꺼내오는 fiasco마다 웬일인지 술은 한 방울도 담겨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fiasco라는 말은 “태산명동에 서일필”과 비슷한 뜻으로, 열심히 준비했지만 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 주인공은 오직 이 말만 되뇐다. “난 괜찮아(I am fine).”
전혀 괜찮지 않은 걸 자기가 알고 남도 알고 세상이 다 아는 데도 그저 그 말만 되뇌는 것이다. 그런 주인공을 붙잡고 사장은 말한다.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라 시장이 문제가 있는 거라고. 이런 시장의 흐름은 자신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거라고. 둘 다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된 게다.


그러면서 사장은 또 말한다. 사정이 이러니 환경단체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수 밖에 없다고. 거기에 이런 표현이 따라붙는다.

“우리가 세상을 구할 수도 있었는데 …… (We could saved the world ……)”

이게 바로 감독이 보는 미국이다. 테러를 뿌리 뽑겠다고, 세상의 모든 독재를 종식하겠다고, 그리고 소위 “민주주의”를 전파하겠다며 그들의 꽃다운 젊은이들에게 온갖 최신의 무기와 장비를 들려 이역만리 외국으로 등 떠밀어 내보냈지만, 아무도 진정으로 반기지 않고 심지어 그들을 따라 자국의 병력을 파견한 나라 안에서까지 미국에 대한 적대감만 높아졌을 따름이다.

이쯤 됐으면 이제 상황을 똑바로 봐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많은 노력과 기술을 투자했다 해도 소비자가 싫다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는 법인데, 그래도 만들어서 공급하는 이는 자꾸만 “이거 좋은 물건이니 저렴한 가격에 한 번 써 봐”라고 하며 거의 강매하다시피 매달린다. 그러면서 소비자만 탓하고 “왜 나만 미워하느냐”고 따지려 든다.

실패는 저지르기 보다 인정하기가 더 힘들다. 그리고 실패는 그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걸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실패가 발생하면 깨끗이 인정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뒤 새로 시작하면 되는데, 왜 그런 실패를 저질렀는지 주구장창 따지고만 있거나 아니면 그건 실패가 아니라고 허구한날 우겨대며 계속 그 쪽으로 쭉 나가기만 하면 자꾸 출구에서 멀어지기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실패를 맛보았는지 얘기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꾸해 주는 것이다.
“I don’t care(그건 상관 없어)!”

어서 실패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판단하여 실천에 옮기라고 목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자기가 보는 위대한 미국을 그려낸다. 그에게 있어서 위대한 미국은 중동의 사막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프리카 어느 구석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남미의 밀림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보는 위대한 미국은 바로 그 곳, 미국의 사람들 속에 그냥 있었을 따름인 것이다.

비록 300년도 안 되는 역사지만 그 기간 동안에 지금의 미국을 건설한 그들이 바로 위대한 미국이라는 걸 그냥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남자 주인공이 차를 몰아 달리며 들러보는 미국 역사의 흔적이란 게 어찌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게 다 미국을 만들어 온 것들이며, 게다가 그들에겐 편견과 억압에 맞서 피 흘려 인권을 쟁취해 온 어디에 내세워도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잖은가.



그렇게 좋고 훈훈한 내 집(Home)이 거기 있는데 왜 반겨주지도 않는 바깥에서 생 고생들을 하는지 생각해 보자는 거다.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이웃들과 웃고 울고 일하고 즐기고 애태우고 보람을 느끼고 그러면서 위대한 미국을 건설하면 되지, 왜 굳이 미국이 위대하다는 걸 바깥에다가 완력으로 과시하고 억지로라도 인정 받으려 하느냔 말이다.

그렇게 안 해도 세계 자본주의와 그 시장은 이미 미국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예전과 달리 미국이 외부에 행사하는 완력이 오히려 미국의 이익을 깎아내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전에 뉴올리언즈에 휘몰아친 태풍이 그랬고 요즘의 티파티(Tea Party)가 들춰 내 보여줬다시피 미국 내의 갈등과 양극화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

집으로 돌아가자. 거기서 다시 시작하자. 그렇다고 아주 가는 게 아니다. 스스로의 기꺼움으로 진정 위대함을 느낄 수 있도록 그 곳에서부터 힘쓰라는 거다. 그래야 “Welcome Home”을 말하는 입김 속에 담긴 씁쓸함이 차츰차츰 자연스럽게 반가움과 자랑스러움으로 바뀔 수 있을테니.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