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타운”, 집으로 돌아오라


 

“Welcome Home”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2005년 작 영화 『엘리자베스타운』(Elizabethtown)은 이 말로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 온 걸 환영한다는 얘기인데, 그 반김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딴에는 자신들의 모든 자본과 기술력 그리고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여 전 세계로 뿌린 상품이 참 고약하게도 시장에서 거절 당해 반품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안타깝기도 할 터이다. 그리도 원대한 포부와 그림을 그려가며 떼돈도 벌고 세상에도 도움이 되겠다고 확신에 차 들이밀었던 상품이 차갑고 냉랭한 조롱 속에 몽땅 되돌려 보내졌으니.

이런 상황을 감독은 단순한 “failure(실패)”가 아닌 “말짱 꽝(fiasco)”이라 표현하였다. 겉은 번드르르한데 내용은 텅 빈 참으로 낯 뜨거운 그런 실패라 본 것이다.


여기서 잠깐, fiasco에 대해서 알아보자. 원래 fiasco는 “끼안띠(Chianti, 이탈리아의 고급와인)”을 담는 병을 일컫는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와인의 원산지인 Chianti에 어느 중요한 인물이 방문했었는데, 그 사람을 대접하려고 꺼내오는 fiasco마다 웬일인지 술은 한 방울도 담겨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fiasco라는 말은 “태산명동에 서일필”과 비슷한 뜻으로, 열심히 준비했지만 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 주인공은 오직 이 말만 되뇐다. “난 괜찮아(I am fine).”
전혀 괜찮지 않은 걸 자기가 알고 남도 알고 세상이 다 아는 데도 그저 그 말만 되뇌는 것이다. 그런 주인공을 붙잡고 사장은 말한다.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라 시장이 문제가 있는 거라고. 이런 시장의 흐름은 자신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거라고. 둘 다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된 게다.


그러면서 사장은 또 말한다. 사정이 이러니 환경단체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수 밖에 없다고. 거기에 이런 표현이 따라붙는다.

“우리가 세상을 구할 수도 있었는데 …… (We could saved the world ……)”

이게 바로 감독이 보는 미국이다. 테러를 뿌리 뽑겠다고, 세상의 모든 독재를 종식하겠다고, 그리고 소위 “민주주의”를 전파하겠다며 그들의 꽃다운 젊은이들에게 온갖 최신의 무기와 장비를 들려 이역만리 외국으로 등 떠밀어 내보냈지만, 아무도 진정으로 반기지 않고 심지어 그들을 따라 자국의 병력을 파견한 나라 안에서까지 미국에 대한 적대감만 높아졌을 따름이다.

이쯤 됐으면 이제 상황을 똑바로 봐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많은 노력과 기술을 투자했다 해도 소비자가 싫다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는 법인데, 그래도 만들어서 공급하는 이는 자꾸만 “이거 좋은 물건이니 저렴한 가격에 한 번 써 봐”라고 하며 거의 강매하다시피 매달린다. 그러면서 소비자만 탓하고 “왜 나만 미워하느냐”고 따지려 든다.

실패는 저지르기 보다 인정하기가 더 힘들다. 그리고 실패는 그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걸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실패가 발생하면 깨끗이 인정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뒤 새로 시작하면 되는데, 왜 그런 실패를 저질렀는지 주구장창 따지고만 있거나 아니면 그건 실패가 아니라고 허구한날 우겨대며 계속 그 쪽으로 쭉 나가기만 하면 자꾸 출구에서 멀어지기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실패를 맛보았는지 얘기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꾸해 주는 것이다.
“I don’t care(그건 상관 없어)!”

어서 실패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판단하여 실천에 옮기라고 목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자기가 보는 위대한 미국을 그려낸다. 그에게 있어서 위대한 미국은 중동의 사막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프리카 어느 구석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남미의 밀림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보는 위대한 미국은 바로 그 곳, 미국의 사람들 속에 그냥 있었을 따름인 것이다.

비록 300년도 안 되는 역사지만 그 기간 동안에 지금의 미국을 건설한 그들이 바로 위대한 미국이라는 걸 그냥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남자 주인공이 차를 몰아 달리며 들러보는 미국 역사의 흔적이란 게 어찌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게 다 미국을 만들어 온 것들이며, 게다가 그들에겐 편견과 억압에 맞서 피 흘려 인권을 쟁취해 온 어디에 내세워도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잖은가.



그렇게 좋고 훈훈한 내 집(Home)이 거기 있는데 왜 반겨주지도 않는 바깥에서 생 고생들을 하는지 생각해 보자는 거다.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이웃들과 웃고 울고 일하고 즐기고 애태우고 보람을 느끼고 그러면서 위대한 미국을 건설하면 되지, 왜 굳이 미국이 위대하다는 걸 바깥에다가 완력으로 과시하고 억지로라도 인정 받으려 하느냔 말이다.

그렇게 안 해도 세계 자본주의와 그 시장은 이미 미국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예전과 달리 미국이 외부에 행사하는 완력이 오히려 미국의 이익을 깎아내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전에 뉴올리언즈에 휘몰아친 태풍이 그랬고 요즘의 티파티(Tea Party)가 들춰 내 보여줬다시피 미국 내의 갈등과 양극화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

집으로 돌아가자. 거기서 다시 시작하자. 그렇다고 아주 가는 게 아니다. 스스로의 기꺼움으로 진정 위대함을 느낄 수 있도록 그 곳에서부터 힘쓰라는 거다. 그래야 “Welcome Home”을 말하는 입김 속에 담긴 씁쓸함이 차츰차츰 자연스럽게 반가움과 자랑스러움으로 바뀔 수 있을테니.

영진공 이규훈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 너무 어려워진 속편





올리버 스톤 감독의 <월 스트리트>가 1987년 영화였으니 그로부터 23년 만에야 다시 만들어진 속편입니다. 젊은 주인공들이 사용하는 컴퓨터 모니터만 비교해 보아도 세월의 흐름이 쉽게 느껴질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입니다 – 버드 폭스(찰리 쉰)의 증권 거래용 단말이 14인치 CRT 흑백 단말이었던 반면 제이크 무어(샤이아 라보프)는 자신의 아파트 책상 위에만 무려 6개의 컬러 LCD 모니터를 설치해놓고 다양한 금융 정보를 모니터링하면서 삽니다.

그렇게나 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금융 자본을 움직이는 인간의 탐욕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가 보여줍니다. 그 중심에는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라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는 꽤 잘 짜여진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투자 은행의 젊은 분석가 제이크 무어의 복수극과 전편에서 완전히 망했던 고든 게코의 화려한 복귀전이 고든 게코의 딸 위니 게코(캐리 멀리건)를 매개로 얽히게 되는 식입니다.

영화 중반까지 고든 게코와 제이크 무어의 관계는 마치 <양들의 침묵>에서 감옥 안에 갇힌 한니발 렉터 박사와 클라리스 스탈링 형사처럼 공동의 목표물을 향해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8년의 복역을 마친 후 다시 7년의 시간을 보낸 뒤에 금융 위기를 예견하는 책을 내놓으면서 돌아온 고든 게코의 진짜 노림수는 일종의 반전이 되면서 젊은 주인공들 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뒤통수를 치게 되지요.

그런 와중에도 망가질 대로 망가진 가족 관계를 어느 정도 수습하면서 대중 영화로서의 매듭짓기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입니다. 전편에 비해 속편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가 다소 흥미진진하지 못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선 왠만한 금융 지식이 없이는 좀처럼 이해하기가 힘든 대형 투자은행의 흥망을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2008년의 금융 위기가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부실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이지만 실제로 월 스트리트 내부에서 어떤 내막이 있었던 것인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봐야겠죠.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는 일반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단순화된 사건의 원인을 뉴욕 금융가의 내부에서 재조명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난해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영화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요점은 1만 5천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던 명망있는 투자 은행이 다른 경쟁자 브레튼(조쉬 브롤린)의 음모로 인해 하루아침에 망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CEO 루이스(프랭크 란젤라)가 뉴욕 지하철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함으로써 주인공 제이크에게 복수의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긴 한데 그 과정이 와닿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전편 <월 스트리트> 역시 복잡한 금융가의 이야기이긴 했지만 건전한 기업가 정신을 상징하는 제조업체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악한 금융 자본의 대결 구도로 전개가 되면서 비교적 몰입하기가 좋았던 내러티브 구조였다고 생각됩니다. 마이클 더글라스가 연기했던 고든 게코는 그런 금융 자본의 탐욕스러움과 잔인함을 체화해서 보여준 인물이었던 것이고요.

반면에 속편인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는 전편에서와 같은 대결 구도나 선악의 구분이 생각 만큼 명확하게 드러나지가 않는 편입니다. 조쉬 브롤린이 연기한 브레큰 제임스가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사악한 짓을 한 것인지를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통렬한 쾌감을 얻어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어쨌든 요점은 제이크가 사건의 전말을 폭로하는 기사를 써서 브레튼 제임스에 대한 복수를 해내고야 말았다는 것이고 마침내 브레튼이 심하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관객들도 아 저 사람 망했구나, 라고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전반적으로 대중적인 영화로서는 크게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보기가 어렵겠습니다만 전작인 <월 스트리트>의 후속편으로서는 손색이 없는 편이라 하겠습니다.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답시고 금융 전문가들끼리 서로 총질을 해대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는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작품의 격을 유지하는 데에는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영국 배우인 캐리 멀리건의 미국식 영어 발음 연기도 이만하면 훌륭했던 것 같은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장면이 많았던 것이 캐스팅의 이유였던 것인가 생각하게 되더군요. 개인적으로 예상했던 대로 속편은 통쾌한 권선징악이기 보다는 대마불사에 가까운 결말을 택했는데 고든 게코가 친환경 사업에 익명으로 기부를 하는 것으로 탐욕의 화신도 옥살이를 경험하고 나이가 들면 조금은 철이 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듯 했습니다.

반면 전편의 젊은 주인공 찰리 쉰은 양쪽에 미녀들을 대동하고 나타나 고든 게코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으로 출연했는데 투자 전문가로서 한창 재미를 보고 있는 모습이 제 2의 고든 게코처럼 보이기도 하더군요. 이래저래 밝고 건전하게 살기가 하늘의 별따기 같은 곳의 이야기다 보니 희망적인 모습만을 보여줄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러블리 본즈”, 피터 잭슨에게 영화다양성을 허하라


개인적으로 피터 잭슨 감독의 팬이냐고 물으신다면 뭐 꼭 그렇지도 않다는 쪽이다. <반지의 제왕> 보다 <매트릭스>가 더 좋다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개봉했던 3부작 영화들을 꼬박꼬박 보러가기는 했으되 시간 가는 줄을 모를 정도로 영화 속에 흠뻑 빠져들었던 것이 아니라 솔직히 엉덩이가 좀 아파서 아 이젠 그노무 작별 인사 좀 그만 하시지? 뭐 이런 기분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뒤늦게 피터 잭슨 감독 팬덤에 줄을 서서 <고무인간의 최후>(1987)나 <데드 얼라이브>(1992)를 굳이 챙겨보거나 하지는 않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감히 뉴질랜드 영화 산업의 자랑스러운 큰 형님이 되신 감독의 역량을 평가절하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만 해도 누가 감히 <반지의 제왕>을 3부작의 형태로 기획하고 연출할 생각을 했겠는가. 그리고 그처럼 완전한 형태로 대서사시를 만들어낼 수 있었겠는가.

인간의 탐욕이 그러하듯 절대 사라지지 않는 저 반지 ...

차기작이었던 <킹콩>(2005)은 피터 잭슨의 대범한 스케일과 연출 역량이 탁월함을 다시 한번 입증해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 아울러 나오미 왓츠의 캐스팅에 개인적으로 무척 감사할 따름이다. <디스트릭트 9>(2009)도 피터 잭슨의 손을 거쳐 탄생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견을 달기 어려울 만큼 영화를 잘 만드는 것과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은 여전히 별개의 문제다. 피터 잭슨은 한마디로 감히 딴지를 걸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이지만 관객으로서의 내 취향에 아주 딱 맞아떨어지는 영화를 만들어주는 감독도 아닌 부류다.

특정 감독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나 애착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다른 한편으로 그의 새로운 영화들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 과도한 기대나 그에 따른 반대급부로서의 실망도 없이 – 봐줄 수 있다는 뜻이 되지 않나 싶다.

<러블리 본즈>는 분명 우리가 아는 피터 잭슨 감독의 영화들과는 내용이나 스타일면에서 상당히 다른 작품이다. <반지의 제왕> 3부작과 <킹콩>이 피터 잭슨 영화의 전부라고 알고 있는 관객이 그 이름만 보고 선택했다면 우선 내용면에서 재미없어할 가능성이 높고,

그리 많지 않은 감독의 전작들 가운데 <천상의 피조물>(1994)과 같은 영화까지 봐두었던 관객이라면 이 감독이 갖고 있는 취향의 다양성에 관한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그나마 당황하는 일 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러블리 본즈>는 이웃집 남자에게 유괴 살인을 당한 14세 소녀의 사후 세계를 판타지 형태로 펼쳐보이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회성이 강한 – 피터 잭슨이라는 알려진 브랜드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 영화라 할 수 있고 앨리스 시볼드의 2002년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피터 잭슨이 직접 영화화 판권을 매입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한 작품이다.

피터 잭슨이 무슨 생각으로 이와 같은 비상업적인 선택을 했는지는 알기 힘들지만 어찌되었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 – 상업적인 성공이 보장된 것 – 보다 진정 하고 싶거나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바를 실천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크랭크인 사흘 전에 주연급 남자배우가 급히 교체(마크 왈버그의 배역은 원래 라이언 고슬링이 캐스팅되었었다)되는 와중에서도 피터 잭슨은 이 까다롭기 그지 없는 원작 소설의 영화화 프로젝트를 기술적인 완성도에 있어 만큼은 손색이 없는 작품으로 완성해냈다.

미국 내 유괴 살인 사건들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은 많았지만 죽음 이후의 이야기를 죽은 피해자의 시각에서 다루는 작품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사회성과 판타지가 공존하는 이런 이야기야 말로 피터 잭슨과 같은 감독이 아니고서는 감히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러블리 본즈>는 사후 세계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스케일을 과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억울하게 생을 마쳐야만 했던 어린 소녀의 안타까움과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이들의 상실감을 성공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사후 세계와 현실 세계의 이벤트들이 절묘하게 결합되는 부분들은 <러블리 본즈> 전반을 아우르는 묘미라고 할 수 있고 피터 잭슨 감독의 연출력을 입증하는 요소라고 하겠다. 여기에 수지(시얼샤 로넌)의 동생(로즈 맥키버)이 물증을 얻기 위해 살인자의 집 안에 침입하는 시퀀스는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서스펜스를 전달하기도 한다.

피터 잭슨의 전작들과는 경향 자체가 다른 작품이기 때문에 기대했던 만큼의 재미가 없었다는 평에 대해서는 이견을 달기 힘들다. 하지만 피터 잭슨이 발로 연출을 했다는 식의 일부 폄하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절대 동의할 수가 없다. 관객의 입맛을 사로잡는 일 역시 연출의 일부분이긴 하지만 연출력과 취향은 분별을 해두는 편이 맞다 – 발연출로 만든 영화를 좋게 보고 온 사람들은 그럼 눈이 삐어서 좋았다는 것이겠는가.

<러블리 본즈>는 아주 재미있는 영화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기술적인 완성도나 영화가 담고 있는 정서적 울림의 수준을 볼 때 시간을 들여 감상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일부 관객들은 의외의 감동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까지 한다. 개인적으로 막내 동생(크리스챤 토마스 애쉬데일)이 죽은 누나를 봤다며 아버지와 서로 위로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을 감추기 어려웠다. 수지의 소녀적 감성에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면 살아남은 자로서 주어진 삶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할 수 있으리라.

일찌감치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에 훌륭한 스릴러 영화로서는 자리매김하기를 포기했던 작품이 되었지만 언제나 감초 같은 조연으로 많은 영화들에 출연해왔던 스탠리 투치가 <러블리 본즈>에서 발군의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스탠리 투치인줄 모르고 피터 스토메이어 닮긴 했는데 좀 다른 것 같다라고 생각만 했을 정도로 분장이나 연기력이 훌륭했다.

수지의 외할머니로 등장하는 수잔 서랜든은 등장 인물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극의 분위기를 이완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수녀나 이상적인 어머니 같은 역할도 좋지만 <19번째 남자>(1988)나 <하얀 궁전>(1990)에서와 같은 캐릭터를 연기할 때 수잔 서랜든은 반짝반짝하곤 한다. 그리고 쇼핑몰 사진관에서 피터 잭슨 감독이 카메오로 등장하기도 한다.

시얼샤 로넌과 감독 피터 잭슨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