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터”, 영웅 아닌 평범한 인물들의 감동 실화


최근 헐리웃 영화의 한 가지 경향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실화”를 극영화로 재연하고 있는 작품들이 자주 눈에 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파이터>는 권투를 소재로 하는 평범한 스포츠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픽션이 아닌 실화이기 때문에 ‘최근의 경향’에 부합하는 작품이다.

이와 유사한 영화로 작년 4월에 국내 개봉했던 <블라인드 사이드>(2009)를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두 작품 모두가 실화이고 스포츠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가족 드라마이기도 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 안에는 수퍼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감동의 메시지를 발굴해내려는 노력이 담겨있는데, 물론 노력의 이유는 최근에 이런 류의 이야기가 그 만큼 잘 팔리기 때문이렷다. 그리고 아마도 비교적 저렴한 예산으로도 꽤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평범한 인물들의 감동 실화’라는 건 전통적인 극장 상영용 영화의 영역이라기 보다 – 물론 보통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가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화는 아니었다 – <오프라 윈프리 쇼>와 같은 TV 프로그램의 영역이란 생각을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아침마당>이나 <인간시대> 같은 프로그램이고, 이런 프로그램들이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실제 인물들의 사연과 그 안의 감동 코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최근에 왜 이런 이야기들을 더욱 부지런히 발굴하고 또 영화화까지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 정말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검증과 함께 – 좀 더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따라서 <파이터>라는 작품이 그 자체로 유난한 영화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다루기에 따라서는 아침 대담 프로에 실제 인물들이 나와서 진행자와 함께 50분 정도 채워주는 정도만으로도 제 역할을 충분할 수도 있을 법한데, 그 중에 <파이터> – 니키 에클런드와 미키 워드 형제와 그 가족들 – 의 이야기가 유독 각별하게 받아들여지고야 마는 이유란 결국 이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의 힘인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을 통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그외 여러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 트로피를 전부 쓸어모으며 만장일치의 지지를 이끌어낸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는 2000년작 <머시니스트>를 통해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만큼의, 기대할 수 있었던 것 이상의 경지를 보여준다.

더군다나 우리는 이 배우가 최근에 다시 만들어져서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수퍼히어로물과 SF 블럭버스터에서도 주연 배우로 활약 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크리스찬 베일과 달리 마크 월버그는 어느 작품에 나오건 똑같은 마크 월버그만 보여주다가 마는 편이지만 – 마크 월버그가 별로인 것이 아니라 크리스찬 베일이 워낙 연기의 지존이라 이런 식으로 비교가 되는 것일 뿐! – 이번 <파이터>에서는 직접 제작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나서면서 평소에 하던 그 이상의 몫을 해냈다고 생각된다.

나탈리 포트먼이 <블랙 스완>(2010)을 위해 1년 전부터 발레 훈련을 해왔다는 대목에서 가점을 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파이터>를 위해 무려 4년 전부터 몸 만들기와 권투 훈련을 했다는 마크 월버그의 열정에 대해서는 – 그러면서도 자신의 출연료는 한푼도 챙기지 않았다는군요. 크리스찬 베일은 전체 제작비의 1% 수준인 25만불을 받았다고 합니다 – 도대체 뭐라고 칭찬을 해줘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다. 마크 월버크도 이제 그만 아이돌 가수 출신 배우라는 딱지를 떼고 뭔가 다른 전기를 마련하고 싶어하는 듯 한데 아쉽게도 그런 전환점이 그리 쉽게 주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디키(크리스찬 베일)와 미키(마크 월버그)의 인터뷰 장면은 각본에 미리 짜여졌던 장면이 아니라 데이비드 O. 러셀 감독과 세 명이서 즉흥적으로 촬영한 것이라고 하는데, 마지막 순간에 크리스찬 베일이 살짝 울컥하려다 마는 연기를 보여준 부분이 참 좋았다.

어찌 보면 이 장면은 영화 전체적으로 감동을 강요하거나 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해서 관객들에게 무언가 감정적인 방향성을 잡아주기 위한 부가적인 연출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과하지도 않았고, 이런 정도의 개입은 극영화에서는 오히려 바람직한 편이라 생각한다.

 


영진공 신어지

“러블리 본즈”, 피터 잭슨에게 영화다양성을 허하라


개인적으로 피터 잭슨 감독의 팬이냐고 물으신다면 뭐 꼭 그렇지도 않다는 쪽이다. <반지의 제왕> 보다 <매트릭스>가 더 좋다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개봉했던 3부작 영화들을 꼬박꼬박 보러가기는 했으되 시간 가는 줄을 모를 정도로 영화 속에 흠뻑 빠져들었던 것이 아니라 솔직히 엉덩이가 좀 아파서 아 이젠 그노무 작별 인사 좀 그만 하시지? 뭐 이런 기분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뒤늦게 피터 잭슨 감독 팬덤에 줄을 서서 <고무인간의 최후>(1987)나 <데드 얼라이브>(1992)를 굳이 챙겨보거나 하지는 않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감히 뉴질랜드 영화 산업의 자랑스러운 큰 형님이 되신 감독의 역량을 평가절하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만 해도 누가 감히 <반지의 제왕>을 3부작의 형태로 기획하고 연출할 생각을 했겠는가. 그리고 그처럼 완전한 형태로 대서사시를 만들어낼 수 있었겠는가.

인간의 탐욕이 그러하듯 절대 사라지지 않는 저 반지 ...

차기작이었던 <킹콩>(2005)은 피터 잭슨의 대범한 스케일과 연출 역량이 탁월함을 다시 한번 입증해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 아울러 나오미 왓츠의 캐스팅에 개인적으로 무척 감사할 따름이다. <디스트릭트 9>(2009)도 피터 잭슨의 손을 거쳐 탄생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견을 달기 어려울 만큼 영화를 잘 만드는 것과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은 여전히 별개의 문제다. 피터 잭슨은 한마디로 감히 딴지를 걸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이지만 관객으로서의 내 취향에 아주 딱 맞아떨어지는 영화를 만들어주는 감독도 아닌 부류다.

특정 감독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나 애착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다른 한편으로 그의 새로운 영화들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 과도한 기대나 그에 따른 반대급부로서의 실망도 없이 – 봐줄 수 있다는 뜻이 되지 않나 싶다.

<러블리 본즈>는 분명 우리가 아는 피터 잭슨 감독의 영화들과는 내용이나 스타일면에서 상당히 다른 작품이다. <반지의 제왕> 3부작과 <킹콩>이 피터 잭슨 영화의 전부라고 알고 있는 관객이 그 이름만 보고 선택했다면 우선 내용면에서 재미없어할 가능성이 높고,

그리 많지 않은 감독의 전작들 가운데 <천상의 피조물>(1994)과 같은 영화까지 봐두었던 관객이라면 이 감독이 갖고 있는 취향의 다양성에 관한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그나마 당황하는 일 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러블리 본즈>는 이웃집 남자에게 유괴 살인을 당한 14세 소녀의 사후 세계를 판타지 형태로 펼쳐보이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회성이 강한 – 피터 잭슨이라는 알려진 브랜드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 영화라 할 수 있고 앨리스 시볼드의 2002년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피터 잭슨이 직접 영화화 판권을 매입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한 작품이다.

피터 잭슨이 무슨 생각으로 이와 같은 비상업적인 선택을 했는지는 알기 힘들지만 어찌되었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 – 상업적인 성공이 보장된 것 – 보다 진정 하고 싶거나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바를 실천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크랭크인 사흘 전에 주연급 남자배우가 급히 교체(마크 왈버그의 배역은 원래 라이언 고슬링이 캐스팅되었었다)되는 와중에서도 피터 잭슨은 이 까다롭기 그지 없는 원작 소설의 영화화 프로젝트를 기술적인 완성도에 있어 만큼은 손색이 없는 작품으로 완성해냈다.

미국 내 유괴 살인 사건들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은 많았지만 죽음 이후의 이야기를 죽은 피해자의 시각에서 다루는 작품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사회성과 판타지가 공존하는 이런 이야기야 말로 피터 잭슨과 같은 감독이 아니고서는 감히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러블리 본즈>는 사후 세계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스케일을 과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억울하게 생을 마쳐야만 했던 어린 소녀의 안타까움과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이들의 상실감을 성공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사후 세계와 현실 세계의 이벤트들이 절묘하게 결합되는 부분들은 <러블리 본즈> 전반을 아우르는 묘미라고 할 수 있고 피터 잭슨 감독의 연출력을 입증하는 요소라고 하겠다. 여기에 수지(시얼샤 로넌)의 동생(로즈 맥키버)이 물증을 얻기 위해 살인자의 집 안에 침입하는 시퀀스는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서스펜스를 전달하기도 한다.

피터 잭슨의 전작들과는 경향 자체가 다른 작품이기 때문에 기대했던 만큼의 재미가 없었다는 평에 대해서는 이견을 달기 힘들다. 하지만 피터 잭슨이 발로 연출을 했다는 식의 일부 폄하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절대 동의할 수가 없다. 관객의 입맛을 사로잡는 일 역시 연출의 일부분이긴 하지만 연출력과 취향은 분별을 해두는 편이 맞다 – 발연출로 만든 영화를 좋게 보고 온 사람들은 그럼 눈이 삐어서 좋았다는 것이겠는가.

<러블리 본즈>는 아주 재미있는 영화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기술적인 완성도나 영화가 담고 있는 정서적 울림의 수준을 볼 때 시간을 들여 감상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일부 관객들은 의외의 감동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까지 한다. 개인적으로 막내 동생(크리스챤 토마스 애쉬데일)이 죽은 누나를 봤다며 아버지와 서로 위로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을 감추기 어려웠다. 수지의 소녀적 감성에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면 살아남은 자로서 주어진 삶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할 수 있으리라.

일찌감치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에 훌륭한 스릴러 영화로서는 자리매김하기를 포기했던 작품이 되었지만 언제나 감초 같은 조연으로 많은 영화들에 출연해왔던 스탠리 투치가 <러블리 본즈>에서 발군의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스탠리 투치인줄 모르고 피터 스토메이어 닮긴 했는데 좀 다른 것 같다라고 생각만 했을 정도로 분장이나 연기력이 훌륭했다.

수지의 외할머니로 등장하는 수잔 서랜든은 등장 인물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극의 분위기를 이완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수녀나 이상적인 어머니 같은 역할도 좋지만 <19번째 남자>(1988)나 <하얀 궁전>(1990)에서와 같은 캐릭터를 연기할 때 수잔 서랜든은 반짝반짝하곤 한다. 그리고 쇼핑몰 사진관에서 피터 잭슨 감독이 카메오로 등장하기도 한다.

시얼샤 로넌과 감독 피터 잭슨
영진공 신어지

“해프닝 The Happening (2008)”, M. 나이트 샤말란식 멜로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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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버전 포스터. 미국 버전보다 세련되다.
브루스 윌리스같은 스타 배우가 나온다곤 해도 저예산인 데다 심지어 가끔 붐마이크까지 화면에 출연할 정도로 기술적인 미숙함이 드러나는 영화 <식스 센스>는 왜 그토록 매혹적이고 재미있는 영화였는가. 많은 이들이 ‘반전’을 얘기하지만, 반전 그 자체를 말하기보다는 그 반전이 왜 그토록 충격적이고 놀라우며 스릴을 안겨주는가 하는 부분이 진정 <식스 센스>의 매혹을 설명해주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기 전 이미 스포일링을 당해버린 사람들이 실제로 영화를 보며 발견한 것은, 반전을 알고봐도 이 영화는 여전히 충격적이고 놀라우며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슬프고 애잔하기까지. 나 역시 스포일링을 당한 후 이 영화를 봤고, 할리 조엘 오스먼트가 너무 안쓰러워 영화 보며 퍽 많이도 울었더랬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끔찍했을까. 매일 매순간 뒷통수와 가슴에 총구멍이 나서 피범벅이 된 이들, 팔이나 다리 하나가 피투성이로 날아간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게 보이는 삶은. 이미 개봉한지 10년이 다 돼가는 영화인 만큼 이에 대해 그간 많은 설왕설래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언제나 모든 글들은 아하, 싶으면서도 언제나 2%가 부족하기 마련이다.

최근에 네오이마주에서 <해프닝>이 왜 공포영화로서 퀄리티가 떨어지는가를 분석하며 <식스 센스>를 라캉식 용어로 풀어내는 글을 봤다. <식스 센스>에 대한 좋은 분석이라 생각한다. <식스 센스>에서 느꼈던 것들 중 일부 막연한 것들, 지금까지도 언어로 제대로 풀리지 않은 것들이 마침내 적절한 언어를 만나 술술 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다만 그 밑에 달았던 리플에서도 보이듯, <해프닝>에 대한 분석에는 거의 동의하지 않는다. (실은 다른 영화에 대한 짧은 코멘트에도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글은 그 글에 대한 반박은 아니고, 그저 그 분의 글에서 힌트를 얻어 <해프닝>에 대한 내 감상을 정리하고자 한다.

<해프닝>은 M.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R등급을 받았다. 아무래도 영화 초반에 자해를 하는 모습에서 샤말란 영화로는 좀 낯선 고어 장면이 표현돼 있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로 기억하고 있다)에서 어느 날 햇볕도 좋은 공원과 인근에서 갑자기 멍한 표정으로 자해를 해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정부에서는 테러리스트의 화학공격을 의심하며 대피령을 내리고, 고등학교 생물교사인 엘리엇(마크 월버그)은 최근 사이가 급속히 나빠진 아내 엘마(주이 디샤넬)를 데리고 동료교사인 줄리언(존 레귀자모), 줄리언의 어린 딸 제스(애쉴린 산체스)와 함께 줄리언의 시골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중간에 기차가 서고, 승객 중 일부가 함께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일행의 숫자는 서서히 줄어들고, 남는 것은 엘리엇과 엘마, 그리고 제스뿐. 엘리엇과 엘마는 제스를 마치 딸처럼 목숨걸고 보호하며 도망치지만, 결국 포기와 절망의 순간에 엘리엇과 엘마는 함께 죽음을 맞기 위해 죽음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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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계 안에 공존하지만 둘은 각자 다른 세계로 단절돼 있다. 그나저나 주이양 너무 이쁘삼.

이들에게 덮친 끔찍한 사건들의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엘리엇의 가설은 식물이 특수 화학성분을 내뿜고 바람이 그것을 옮긴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영화는 그의 가설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과 구름, 풀 등을 유심하게 비춰준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들이 찾아간 외딴 노파의 집에 이르면 그 가설에도 오류가 있는 듯하다. 물론 거기까지 화학물질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을 수 있지만, 밖에 혼자 있던 노파는 결국 집벽을 향해 계속 머리를 부딪혀 자해를 하면서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죽기 위해 그 바람부는 바깥에 섰을 때, 예상과 달리 그들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TV에서 과학자들이 떠들며 논쟁하는 장면들을 보다보면, 그래도 엘리엇의 가설에 부분적으로만 오류가 있엇을 것이라는 믿음도 불확실해지게 된다. 워낙에 음모론과 정부 불신에 익숙한 우리로서야 이 기현상-이자 비극-이 군의 극비리 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도 퍽 그럴 듯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해프닝>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공격하도록 하는 원인은 저 바깥의 세계 혹은 타자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 세계 안이 아닌가. 엘리엇의 가설처럼 꼭 식물의 화학물질과 바람이 정확한 원인은 아니더라도, 아무래도 환경오염에 따른 자연의 자체 정화작용의 일환이라고 보는 건 여러 모로 타당성이 있다. 사실 지구에서 가장 위험하고 해로운 존재는 인간이니까.

<해프닝>이 유발하는 공포는, 아무래도 우리가 좀비영화, 혹은 뱀파이어영화에서 느끼는 공포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사실 어느 순간 멍한 표정으로 제몸에 치명적인 상처를 내는 인간들의 모습은 좀비를 꽤 닮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내가 뱀파이어영화를 그토록 무서워했던 건 일단 내가 저 존재가 되고 나면 나 역시 다른 존재들을 공격하는, 그러면서 아무런 의식이 없는 존재가 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뱀파이어가 되면 에미애비도 몰라보게 되는 그것이. 좀더 ‘있어보이는’ 말들로 표현하자면, 겉모습은 여전히 인간과 닮았을지 몰라도 그 안의 정신과 이성은 더이상 인간일 수 없는, 인간으로서 기존의 윤리와 생활양식과 그 모두를 불시에 버린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 내 존재가 인간으로 가정된 주체에게 있어 스스로 타자의 세계에 속한 타인이 되는 것을 봐야 한다는 것. 나는 <해프닝>에 깔려있는 공포도 실은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아가 이것이 표현되는 양식은, ‘신체 훼손’이 주는 불쾌감을, 더욱이 제 신체를 제가 훼손하는 모습으로 보여줌으로써 더욱 불쾌감을 높이는 방식이다. 이 영화에게 R등급 및 19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선사하게 만든 고어 장면들이 실은 이 영화의 핵심인 셈이다. “나는 저 꼴을 나에게/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의식. 그런데 이 의식이 좀 기만적인 건, 실제로 그 존재가 되고 나면 그 꼴을 내가 스스로 볼 수도 인식할 수도 없고, 남에게 보이는 것이 더이상 중요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 종류의 호러영화들이 드러내는 공포는, 인간이 인간 아닌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을, 혹은 인간에게 ‘요구하는’ 시선을 폭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내가 유독 인상깊게 봤던 씬은, 엘리엇 일행이 저 외딴 노파의 집에 고립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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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집에 갇힌 일행. 이들은 원치않게 ‘결과적으로’ 도움을 준 집의 탈취자가 돼버린다.



일단 모든 호러영화들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안온한 우리 세계를 침범하는 타인 혹은 우리 세계와 타인의 세계의 폭력적인 충돌을 다루기 마련이다. 다른 계급의 인간이든 이 계급의 일반적인 –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 윤리를 수용하고 있지 않은 인간이든, 귀신 혹은 좀비, 야생동물 혹은 외계인과 같은 비-인간 생명체든. 샤말란의 영화들 역시 그렇게 또렷이 구분되는 우리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 사이에서의 틈입(<식스센스>), 혹은 폭력적인 충돌(<언브레이커블>, <싸인>) 등을 다루었고 때로는 타인의 폭력적인 침입(<싸인>, <빌리지>)을 얘기하거나 좀더 후반으로 가서는 한 영화 안에 (서로 단절된) 두 세계의 병존(<빌리지>)을 동시에 얘기하기도 했다. (<레이디 인 더 워터>는 안 봤으므로 건너뛴다.) 그런데 <해프닝>에서는, 만약 인간을 공격한 것이 ‘환경’이 맞다면, 이것은 인간에게 타자의 존재이면서도 인간이 함께 병존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온, 혹은 인간을 자기 안으로 포함하고 있는 그런 세계가 인간을 공격한 것이 된다. 그렇기에 그 공격이 ‘드러나는’ 방식은 타인이 인간의 몸을 취하거나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제 스스로 자신의 몸에 위해를 가하는 형태가 되는 게 당연해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환경을 해치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라는 환경론자들의 경구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레이디 인 더 워터>는 논외로 하고) 이제까지의 샤말란의 영화가 다루었던 이야기와는 방향이 다소 다르다. 말하자면, 외부의 공격을 주로 다루었던 샤말란의 눈이 내부를 향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이것 역시 포스트-9.11의 여파이거나, 갈수록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있는 현 대통령을 둘러싼 사회적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 외딴 집 장면은, 엘리엇이 노파를 내쫓았다거나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던 것이 아님에도, 마치 밖으로 쫓겨난 노파가 집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엘리엇이 막기라도 하듯 노파가 집 사방의 외벽을 돌아가면서 머리를 찍어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노파의 입장에서 보면 친절을 베풀어줬더니 그들은 집에서 살고 나는 죽는구나, 의 입장이 되는 것인데, 주인공인 피해자들이 도시인과는 다른 형태의 삶을 영위해온 다른 인간들에게 일종의 침입자이자 가해가 되는, 일종의 관계 역전, 혹은 ‘우리 세계’ 안의 분열을 그리는 듯하여 매우 흥미롭다. 나는 이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싸인>의 한 장면, 그러니까 외계인의 공격에 맞서 집의 문을 모두 봉하고 지하실에 숨어있던 멜 깁슨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싸인>에서 외계인의 끔찍한 공격을 피하기 위해 ‘가장 안전한 곳’인 집, 그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숨으면서 밖으로의 공격을 철저히 차단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동시에 흡사 스스로를 집안에 가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해프닝>에서 이 장면은 고립된 삶을 살고있던 노파가 집밖에서 변을 당한다. 우리의 주인공들이 변을 피하기 위해 집에 들어와 한 일이라고는 (그저 바람을 피하면서 바람에 문이 열리지 않도록) 문을 닫고 잠그는 정도였을 뿐. 게다가 이 외딴 집은 집과 헛간의 두 공간으로 분열되어 있고 엘리엇은 엘마 및 제스와 서로 분리된 공간에서 ‘관’을 두고 대화를 나누게 된다. 가까이 있으나 서로 단절돼 있으며, 같은 세계를 살아가나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입장은,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요 공포와도 닮아 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죽음을 함께 맞기로 한 순간, 그러니까 한 세계 안에 서로 분리된 채 존재했던 두 세계가 서로 만나고 겹쳐지는 순간 죽음의 행렬이 멈췄던 것이 아닐까. 결국 <해프닝>은 서로 단절돼 있던 두 세계가 신뢰와 소통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붕괴될 뻔한 가정이 하나의 단단한 가정으로 뭉치는 것(이것은 샤말란 영화의 일관된 주제이기도 하다)에 대한 멜러드라마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샤말란의 영화는 언제나 외향상 공포의 틀을 취한다 한들 언제나 강한 드라마, 특히 멜로드라마였다. 심지어 <언브레이커블>도 그렇다. 처절하게 자신의 반쪽을 찾아헤매는 남자의 이야기가 아닌가. 그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 영화가 결국 엘리엇과 엘마가 화해하고 사랑과 신뢰를 되찾으며 제스를 수양딸 삼아,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까지 해서 다시 단단한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엔딩을 맺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기현상의 원인이 정확히 뭐였건 간에.


영진공 노바리

ps. 엘마 역을 맡은 주이 디샤넬은 알다시피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출연한 배우. 그의 부모가 워낙 J.D. 샐린저를 좋아해서 그의 소설 [프래니와 주이]에서 이름을 따와 붙여줬다고 한다. (나도 [호밀밭의 파수꾼]보다는 저 글라스 가에 대한 장단편 쪽을 더 좋아한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타입으로 생긴 아가씨. 그런데… 80년생이라면서 갑자기 웬 주름살이 그리 늘었단 말이냐!!! 넌 아직 새파란 20대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