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설이다”, 현존하는 모든 좀비 이미지의 원류


2007년 개봉 영화 “나는 전설이다 (I am legend)”의 원작은 리처드 매드슨의 동명소설이다. 1954년작인 이 책은 (그냥 일반적인 기대만 갖는다면) 당연히 지루하고 식상하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익숙한 좀비상을 가지고 있고, 이 책은 그 모든 좀비 이미지의 원류이니까.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이 온갖 HR 공식에 익숙해진 현대 관객들에게 식상해 보이듯, 그러나 또다른 의미로 재발견되고 재해석되듯, [나는 전설이다]가 출판 당대에 좀비라는 새로운 존재 – 이물적 존재이면서도 모태는 인간인 – 의 매혹으로 어필하였지만, 현대독자인 나는 이 소설의 엔딩의 혁명성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생존 그 자체를 위해 분투하는 존재임은 수가 얼마 남지 않은 인간이나 새로이 급증하고 있는 좀비나 마찬가지. 여기엔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생존투쟁의 승리만이 유일한 선이 된다. 인간과 좀비 간 전쟁에서 마침내 좀비가 사회를 구성하고 살 방법을 찾기 시작했을 때 최후의 인간 생존자는 죽어서 전설의 영역으로 입장해야 할 운명만이 남는다.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가 그런 방식으로 살아남았을진데, 호모 좀비쿠스 같은 이름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호모 사피엔스를 대체한다한들 ……

그러고 보면 수많은 호러영화들이 당연한 듯 인간의 승리로 막을 내렸던 것은 그 모든 좀비물의 조상인 이 소설에 대한 반역적인 퇴행, 혹은 퇴행적 반역인 건지도 모른다.

많은 인간들이 자본주의적 인간을 중세적 인간보다, 혹은 자본주의적 냉혈인간을 온정주의적/윤리적 인간보다 진화한 것으로 믿고 있는 세상에서, 평균수명을 늘린 대신 면역결핍과 신종질병에 시달리는 현대 인류가 과거 인류보다 진화한 것이라면, 좀비가 인간보다 ‘진화한’ 존재라고 말한들 과연 언어도단이 될까. 아니, 우리들 중 대부분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새에 이미 좀비가 됐는지도 모르는데. (이게 인간 특유의 자기합리화 방식 아니었던가.)

[나는 전설이다]의 엔딩은, 가상역사에서의 미래이자, 우리의 과거이기도 하다. 제우스가 새로운 신의 계보를 시작하며 신중의 신의 자리로 등극한 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가 속한 타이탄 족을 멸망시킨 이후이다.

[나는 전설이다]의 주인공 네빌은 결국 또다른 크로노스(제우스의 아버지, 타이탄족)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운명을 수긍하는 그의 모습은, ‘마지막 인간’으로서 전설의 주인공이 될 존재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영진공 노바리


 

 

 

발꼬락 뜯어먹는데 재밌네? <이웃집 좀비>

개봉을 앞둔 <이웃집 좀비>는 신선한 충격이다.
유독 ‘좀비’ 영화만을 피해온 영화 편식인임에도 이 영화가 좋은 이유는, 영화 안팎으로 포진한 여러 특별함 때문이다.

우선, 2천만원이라는 초저예산으로 완성된 웰메이드라는 점,
홍영두, 장윤정 감독(부부)의 살림집 옥탑방에서 만들어진영리한 ‘하우스무비’라는 점,
충무로 영화현장에서 조감독, 제작팀, 배우, 분장팀으로 만난 네 명의 영화꾼이 의기투합해 이룬 결과물이라는 점이 그렇다.

어느 한국영화에서도 보기 드문 창의적인 제작시스템, 거기에 열정과 우정을 더해 탄생한 이 좀비영화는 좀비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개인적 취향조차도 단숨에 바꿔버렸다.

<이웃집 좀비>의 오영두, 홍영근, 류훈, 장윤정 감독

영화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빽 지르다가도 낄낄 웃게 되고, 어느새 코끝이 찡해 오는 걸 참다가 또다시 괴성을 치게 만든다.
이렇게 감정의 흐름을 타는 게 영화 관람의 키 포인트가 되겠다.

기대보다 개봉관 수가 적지만, 워낭소리가 영화의 힘으로7개에서 300여 개관으로 확대 개봉된 전례에 비춰 볼때, 그 숫자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웃집 좀비>는 2월 18일 개봉한다.


[ 요거슨 예고편 … ]

영진공 애플

잠시 정신줄을 놓고 봐야 하는 영화, ‘뮤턴트:다크 에이지 (Mutant Chronicles)’



감독: 사이몬 헌터

출연: 토마스 제인, 론 펄만, 데본 아오키


때는 바야흐로 서기 2707년. 하지만 화면에 펼쳐지는 것은 2차 세계대전 다큐멘터리에서 봤음직한 참호전이다. 전투 중 포격에 맞아 땅 밑에 공구리 쳐놓은 고대봉인이 깨지고 잠들었던 뮤턴트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어지는 피와 살의 향연.


스팀펑크를 표방한 듯 굴뚝에서 검은 연기를 토해내는 비행기와 증기를 뿜어내는 기계들. 똥꼬가 움찔거릴 정도로 무서운 뮤턴트를 잠재우기 위해 어느새(!) 전 세계에서 선발된 8명의 용사들. 그들에게 주어진 무기는 중세 영화를 촬영 중인 옆 셋트장에서 빌려 온 듯한 대검! 아아. 영화의 아스트랄함에 정신마저 혼미해져 온다.


금방이라도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들이닥칠 것 같지만

믿거나 말거나 여긴 서기 2707년!

개봉 당시 나름 화려한 배우진과 얼핏 씬시티를 연상시키는 빛바랜 듯한 비주얼로 인해 큰 기대를 갖고 영화관에 들어갔던 관객들이 피를 토하며 극장 문을 나왔다는 이 ‘괴작 B급 좀비 호러 SF 영화’는 1993년 만들어진 ‘뮤턴트 클로니클’이라는 TRPG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미 여러 스핀오프로 제작되었던 ‘뮤턴트 클로니클’은 2007년 영화화 되어 모습을 드러냈지만 제대로된 투자자를 잡지 못했는지 원작의 세계관이었던 4개의 거대 기업이 지구를 지배한다는 설정말고는 SF적인 요소들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였다. 나름 스팀펑크까지는 좋았지만 좀비스런 뮤턴트들은 너무도 소박했다.


뮤턴트 클로니클은 카드 게임, 비디오 게임, 소설, 만화책 등으로도 만들어진
인기있는 소스였다.

지금은 CMG(피규어 인형으로 하는 보드게임)로도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다.

처음 존 카펜터 감독에게 제작의뢰를 하였다가 거절당했는데 만약 그가 맡았다면  좀 더 제대로 된 SF좀비물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벤트 호라이즌’의 각본을 맏았던 필립 에이스너가 가세했음에도 좀비의 몰골마냥 참담한 작품성은 B급 영화의 숙명인 듯도 싶다.  하지만 사실 B급 영화의 재미는 이런 허무맹랑함이 아니겠는가!!!


“이런 영화를 감상 할 땐 잠시 정신줄을 놓으면 더욱 재밌게 볼 수 있다.”

영진공 self_fish

“해프닝 The Happening (2008)”, M. 나이트 샤말란식 멜로드라마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독일 버전 포스터. 미국 버전보다 세련되다.
브루스 윌리스같은 스타 배우가 나온다곤 해도 저예산인 데다 심지어 가끔 붐마이크까지 화면에 출연할 정도로 기술적인 미숙함이 드러나는 영화 <식스 센스>는 왜 그토록 매혹적이고 재미있는 영화였는가. 많은 이들이 ‘반전’을 얘기하지만, 반전 그 자체를 말하기보다는 그 반전이 왜 그토록 충격적이고 놀라우며 스릴을 안겨주는가 하는 부분이 진정 <식스 센스>의 매혹을 설명해주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기 전 이미 스포일링을 당해버린 사람들이 실제로 영화를 보며 발견한 것은, 반전을 알고봐도 이 영화는 여전히 충격적이고 놀라우며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슬프고 애잔하기까지. 나 역시 스포일링을 당한 후 이 영화를 봤고, 할리 조엘 오스먼트가 너무 안쓰러워 영화 보며 퍽 많이도 울었더랬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끔찍했을까. 매일 매순간 뒷통수와 가슴에 총구멍이 나서 피범벅이 된 이들, 팔이나 다리 하나가 피투성이로 날아간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게 보이는 삶은. 이미 개봉한지 10년이 다 돼가는 영화인 만큼 이에 대해 그간 많은 설왕설래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언제나 모든 글들은 아하, 싶으면서도 언제나 2%가 부족하기 마련이다.

최근에 네오이마주에서 <해프닝>이 왜 공포영화로서 퀄리티가 떨어지는가를 분석하며 <식스 센스>를 라캉식 용어로 풀어내는 글을 봤다. <식스 센스>에 대한 좋은 분석이라 생각한다. <식스 센스>에서 느꼈던 것들 중 일부 막연한 것들, 지금까지도 언어로 제대로 풀리지 않은 것들이 마침내 적절한 언어를 만나 술술 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다만 그 밑에 달았던 리플에서도 보이듯, <해프닝>에 대한 분석에는 거의 동의하지 않는다. (실은 다른 영화에 대한 짧은 코멘트에도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글은 그 글에 대한 반박은 아니고, 그저 그 분의 글에서 힌트를 얻어 <해프닝>에 대한 내 감상을 정리하고자 한다.

<해프닝>은 M.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R등급을 받았다. 아무래도 영화 초반에 자해를 하는 모습에서 샤말란 영화로는 좀 낯선 고어 장면이 표현돼 있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로 기억하고 있다)에서 어느 날 햇볕도 좋은 공원과 인근에서 갑자기 멍한 표정으로 자해를 해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정부에서는 테러리스트의 화학공격을 의심하며 대피령을 내리고, 고등학교 생물교사인 엘리엇(마크 월버그)은 최근 사이가 급속히 나빠진 아내 엘마(주이 디샤넬)를 데리고 동료교사인 줄리언(존 레귀자모), 줄리언의 어린 딸 제스(애쉴린 산체스)와 함께 줄리언의 시골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중간에 기차가 서고, 승객 중 일부가 함께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일행의 숫자는 서서히 줄어들고, 남는 것은 엘리엇과 엘마, 그리고 제스뿐. 엘리엇과 엘마는 제스를 마치 딸처럼 목숨걸고 보호하며 도망치지만, 결국 포기와 절망의 순간에 엘리엇과 엘마는 함께 죽음을 맞기 위해 죽음 앞에 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 세계 안에 공존하지만 둘은 각자 다른 세계로 단절돼 있다. 그나저나 주이양 너무 이쁘삼.

이들에게 덮친 끔찍한 사건들의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엘리엇의 가설은 식물이 특수 화학성분을 내뿜고 바람이 그것을 옮긴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영화는 그의 가설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과 구름, 풀 등을 유심하게 비춰준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들이 찾아간 외딴 노파의 집에 이르면 그 가설에도 오류가 있는 듯하다. 물론 거기까지 화학물질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을 수 있지만, 밖에 혼자 있던 노파는 결국 집벽을 향해 계속 머리를 부딪혀 자해를 하면서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죽기 위해 그 바람부는 바깥에 섰을 때, 예상과 달리 그들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TV에서 과학자들이 떠들며 논쟁하는 장면들을 보다보면, 그래도 엘리엇의 가설에 부분적으로만 오류가 있엇을 것이라는 믿음도 불확실해지게 된다. 워낙에 음모론과 정부 불신에 익숙한 우리로서야 이 기현상-이자 비극-이 군의 극비리 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도 퍽 그럴 듯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해프닝>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공격하도록 하는 원인은 저 바깥의 세계 혹은 타자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 세계 안이 아닌가. 엘리엇의 가설처럼 꼭 식물의 화학물질과 바람이 정확한 원인은 아니더라도, 아무래도 환경오염에 따른 자연의 자체 정화작용의 일환이라고 보는 건 여러 모로 타당성이 있다. 사실 지구에서 가장 위험하고 해로운 존재는 인간이니까.

<해프닝>이 유발하는 공포는, 아무래도 우리가 좀비영화, 혹은 뱀파이어영화에서 느끼는 공포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사실 어느 순간 멍한 표정으로 제몸에 치명적인 상처를 내는 인간들의 모습은 좀비를 꽤 닮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내가 뱀파이어영화를 그토록 무서워했던 건 일단 내가 저 존재가 되고 나면 나 역시 다른 존재들을 공격하는, 그러면서 아무런 의식이 없는 존재가 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뱀파이어가 되면 에미애비도 몰라보게 되는 그것이. 좀더 ‘있어보이는’ 말들로 표현하자면, 겉모습은 여전히 인간과 닮았을지 몰라도 그 안의 정신과 이성은 더이상 인간일 수 없는, 인간으로서 기존의 윤리와 생활양식과 그 모두를 불시에 버린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 내 존재가 인간으로 가정된 주체에게 있어 스스로 타자의 세계에 속한 타인이 되는 것을 봐야 한다는 것. 나는 <해프닝>에 깔려있는 공포도 실은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아가 이것이 표현되는 양식은, ‘신체 훼손’이 주는 불쾌감을, 더욱이 제 신체를 제가 훼손하는 모습으로 보여줌으로써 더욱 불쾌감을 높이는 방식이다. 이 영화에게 R등급 및 19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선사하게 만든 고어 장면들이 실은 이 영화의 핵심인 셈이다. “나는 저 꼴을 나에게/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의식. 그런데 이 의식이 좀 기만적인 건, 실제로 그 존재가 되고 나면 그 꼴을 내가 스스로 볼 수도 인식할 수도 없고, 남에게 보이는 것이 더이상 중요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 종류의 호러영화들이 드러내는 공포는, 인간이 인간 아닌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을, 혹은 인간에게 ‘요구하는’ 시선을 폭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내가 유독 인상깊게 봤던 씬은, 엘리엇 일행이 저 외딴 노파의 집에 고립되는 장면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외딴집에 갇힌 일행. 이들은 원치않게 ‘결과적으로’ 도움을 준 집의 탈취자가 돼버린다.



일단 모든 호러영화들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안온한 우리 세계를 침범하는 타인 혹은 우리 세계와 타인의 세계의 폭력적인 충돌을 다루기 마련이다. 다른 계급의 인간이든 이 계급의 일반적인 –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 윤리를 수용하고 있지 않은 인간이든, 귀신 혹은 좀비, 야생동물 혹은 외계인과 같은 비-인간 생명체든. 샤말란의 영화들 역시 그렇게 또렷이 구분되는 우리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 사이에서의 틈입(<식스센스>), 혹은 폭력적인 충돌(<언브레이커블>, <싸인>) 등을 다루었고 때로는 타인의 폭력적인 침입(<싸인>, <빌리지>)을 얘기하거나 좀더 후반으로 가서는 한 영화 안에 (서로 단절된) 두 세계의 병존(<빌리지>)을 동시에 얘기하기도 했다. (<레이디 인 더 워터>는 안 봤으므로 건너뛴다.) 그런데 <해프닝>에서는, 만약 인간을 공격한 것이 ‘환경’이 맞다면, 이것은 인간에게 타자의 존재이면서도 인간이 함께 병존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온, 혹은 인간을 자기 안으로 포함하고 있는 그런 세계가 인간을 공격한 것이 된다. 그렇기에 그 공격이 ‘드러나는’ 방식은 타인이 인간의 몸을 취하거나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제 스스로 자신의 몸에 위해를 가하는 형태가 되는 게 당연해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환경을 해치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라는 환경론자들의 경구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레이디 인 더 워터>는 논외로 하고) 이제까지의 샤말란의 영화가 다루었던 이야기와는 방향이 다소 다르다. 말하자면, 외부의 공격을 주로 다루었던 샤말란의 눈이 내부를 향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이것 역시 포스트-9.11의 여파이거나, 갈수록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있는 현 대통령을 둘러싼 사회적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 외딴 집 장면은, 엘리엇이 노파를 내쫓았다거나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던 것이 아님에도, 마치 밖으로 쫓겨난 노파가 집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엘리엇이 막기라도 하듯 노파가 집 사방의 외벽을 돌아가면서 머리를 찍어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노파의 입장에서 보면 친절을 베풀어줬더니 그들은 집에서 살고 나는 죽는구나, 의 입장이 되는 것인데, 주인공인 피해자들이 도시인과는 다른 형태의 삶을 영위해온 다른 인간들에게 일종의 침입자이자 가해가 되는, 일종의 관계 역전, 혹은 ‘우리 세계’ 안의 분열을 그리는 듯하여 매우 흥미롭다. 나는 이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싸인>의 한 장면, 그러니까 외계인의 공격에 맞서 집의 문을 모두 봉하고 지하실에 숨어있던 멜 깁슨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싸인>에서 외계인의 끔찍한 공격을 피하기 위해 ‘가장 안전한 곳’인 집, 그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숨으면서 밖으로의 공격을 철저히 차단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동시에 흡사 스스로를 집안에 가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해프닝>에서 이 장면은 고립된 삶을 살고있던 노파가 집밖에서 변을 당한다. 우리의 주인공들이 변을 피하기 위해 집에 들어와 한 일이라고는 (그저 바람을 피하면서 바람에 문이 열리지 않도록) 문을 닫고 잠그는 정도였을 뿐. 게다가 이 외딴 집은 집과 헛간의 두 공간으로 분열되어 있고 엘리엇은 엘마 및 제스와 서로 분리된 공간에서 ‘관’을 두고 대화를 나누게 된다. 가까이 있으나 서로 단절돼 있으며, 같은 세계를 살아가나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입장은,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요 공포와도 닮아 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죽음을 함께 맞기로 한 순간, 그러니까 한 세계 안에 서로 분리된 채 존재했던 두 세계가 서로 만나고 겹쳐지는 순간 죽음의 행렬이 멈췄던 것이 아닐까. 결국 <해프닝>은 서로 단절돼 있던 두 세계가 신뢰와 소통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붕괴될 뻔한 가정이 하나의 단단한 가정으로 뭉치는 것(이것은 샤말란 영화의 일관된 주제이기도 하다)에 대한 멜러드라마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샤말란의 영화는 언제나 외향상 공포의 틀을 취한다 한들 언제나 강한 드라마, 특히 멜로드라마였다. 심지어 <언브레이커블>도 그렇다. 처절하게 자신의 반쪽을 찾아헤매는 남자의 이야기가 아닌가. 그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 영화가 결국 엘리엇과 엘마가 화해하고 사랑과 신뢰를 되찾으며 제스를 수양딸 삼아,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까지 해서 다시 단단한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엔딩을 맺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기현상의 원인이 정확히 뭐였건 간에.


영진공 노바리

ps. 엘마 역을 맡은 주이 디샤넬은 알다시피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출연한 배우. 그의 부모가 워낙 J.D. 샐린저를 좋아해서 그의 소설 [프래니와 주이]에서 이름을 따와 붙여줬다고 한다. (나도 [호밀밭의 파수꾼]보다는 저 글라스 가에 대한 장단편 쪽을 더 좋아한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타입으로 생긴 아가씨. 그런데… 80년생이라면서 갑자기 웬 주름살이 그리 늘었단 말이냐!!! 넌 아직 새파란 20대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