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엠 러브”, 사랑이 나를 존재케 한다.



‘아이 엠 러브’ 2011. 1월 개봉

가끔 나의 일부를 떼어 놓을 때가 있다. 그것도 기꺼이 능동적으로 그렇게 하는데, 시댁에 있을 때 정확히는 시댁 식구들과 함께 있을 때 대체로 그런 편이다. 그땐 일도 고민도 기분도 멀찍이 둔다. 그렇다고 나란 이 자체가 타인으로 변신하는 건 아닐 테지만. 아무도 직언으로 지시하지 않은, 그렇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스스로는 찾지 않을 역할의 자리로 가 해내야 될 일들은 한다. 

‘아이 엠 러브'(감독 루카 구아다그니노) 의 엠마(틸다 스윈튼)에게 옅게나마 ‘나’ 를 비춰보는 건 지나친 이입일까. 엠마는 이탈리아 상류층 재벌가로 시집온 러시아 여자다. 겉으론 화려해 보여도 가족행사를 치밀하게 준비하는 가정 비서에서 세 아이의 다정스런 엄마까지, 엠마에게 주어진 역할은 협소하다.  굳이 ‘너란 존재는 애당초 없었다’ 는 얼음장 같은 남편의 말을 듣지 않아도 고독했을 그녀의 삶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실컷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을, 아예 자신의 이름조차 잊고 살던 그녀에게 사랑이 찾아온 건 그래서 참 다행이다. 더구나 사랑에 빠진 이가 요리사라면 … 부럽기까지 하다. 물론 그들의 ‘영화같은‘ 사랑은 순탄치 않다.

요리사는 아들의 친구이고, 이 관계가 결국 치명적인 슬픔이 돼 엠마를 찌른다. 그렇지만 영화가 비극의 정점을 찍고 맞는 엔딩은 실로 놀랍다. 엠마는 자책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맛본 사랑을 향해 돌진한다. 아들의 옷을 대충 걸치고는 사랑하는 안토니오 곁으로 허겁지겁 달려가는 엠마의 모습이 어찌나 결연한지 불륜 영화의 여주인공이라기 보단, 시대극의 여전사같다. 아이 엠 러브. 나는 사랑이란 걸 비로소 깨달은 까닭이다.

영화는 시선을 사로잡는 독특한 앵글과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배경음악과 이탈리아의 상류사회를 엿보는 재미와 밀라노와 산레모의 하늘 아래 함께 걷는 환상의 착각까지 더하며 시종일관 흥미롭다. 단지 이미지나 이야기로만 소비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성과다. 나와 같이 분리된 삶을 사는 유부녀가 본다면 영화의 기술적 성취보다도 정서적인 이끌림에 크게 동요될지도 모를 일이다.
 


영진공 애플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 너무 어려워진 속편





올리버 스톤 감독의 <월 스트리트>가 1987년 영화였으니 그로부터 23년 만에야 다시 만들어진 속편입니다. 젊은 주인공들이 사용하는 컴퓨터 모니터만 비교해 보아도 세월의 흐름이 쉽게 느껴질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입니다 – 버드 폭스(찰리 쉰)의 증권 거래용 단말이 14인치 CRT 흑백 단말이었던 반면 제이크 무어(샤이아 라보프)는 자신의 아파트 책상 위에만 무려 6개의 컬러 LCD 모니터를 설치해놓고 다양한 금융 정보를 모니터링하면서 삽니다.

그렇게나 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금융 자본을 움직이는 인간의 탐욕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가 보여줍니다. 그 중심에는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라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는 꽤 잘 짜여진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투자 은행의 젊은 분석가 제이크 무어의 복수극과 전편에서 완전히 망했던 고든 게코의 화려한 복귀전이 고든 게코의 딸 위니 게코(캐리 멀리건)를 매개로 얽히게 되는 식입니다.

영화 중반까지 고든 게코와 제이크 무어의 관계는 마치 <양들의 침묵>에서 감옥 안에 갇힌 한니발 렉터 박사와 클라리스 스탈링 형사처럼 공동의 목표물을 향해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8년의 복역을 마친 후 다시 7년의 시간을 보낸 뒤에 금융 위기를 예견하는 책을 내놓으면서 돌아온 고든 게코의 진짜 노림수는 일종의 반전이 되면서 젊은 주인공들 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뒤통수를 치게 되지요.

그런 와중에도 망가질 대로 망가진 가족 관계를 어느 정도 수습하면서 대중 영화로서의 매듭짓기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입니다. 전편에 비해 속편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가 다소 흥미진진하지 못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선 왠만한 금융 지식이 없이는 좀처럼 이해하기가 힘든 대형 투자은행의 흥망을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2008년의 금융 위기가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부실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이지만 실제로 월 스트리트 내부에서 어떤 내막이 있었던 것인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봐야겠죠.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는 일반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단순화된 사건의 원인을 뉴욕 금융가의 내부에서 재조명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난해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영화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요점은 1만 5천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던 명망있는 투자 은행이 다른 경쟁자 브레튼(조쉬 브롤린)의 음모로 인해 하루아침에 망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CEO 루이스(프랭크 란젤라)가 뉴욕 지하철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함으로써 주인공 제이크에게 복수의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긴 한데 그 과정이 와닿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전편 <월 스트리트> 역시 복잡한 금융가의 이야기이긴 했지만 건전한 기업가 정신을 상징하는 제조업체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악한 금융 자본의 대결 구도로 전개가 되면서 비교적 몰입하기가 좋았던 내러티브 구조였다고 생각됩니다. 마이클 더글라스가 연기했던 고든 게코는 그런 금융 자본의 탐욕스러움과 잔인함을 체화해서 보여준 인물이었던 것이고요.

반면에 속편인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는 전편에서와 같은 대결 구도나 선악의 구분이 생각 만큼 명확하게 드러나지가 않는 편입니다. 조쉬 브롤린이 연기한 브레큰 제임스가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사악한 짓을 한 것인지를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통렬한 쾌감을 얻어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어쨌든 요점은 제이크가 사건의 전말을 폭로하는 기사를 써서 브레튼 제임스에 대한 복수를 해내고야 말았다는 것이고 마침내 브레튼이 심하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관객들도 아 저 사람 망했구나, 라고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전반적으로 대중적인 영화로서는 크게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보기가 어렵겠습니다만 전작인 <월 스트리트>의 후속편으로서는 손색이 없는 편이라 하겠습니다.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답시고 금융 전문가들끼리 서로 총질을 해대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는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작품의 격을 유지하는 데에는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영국 배우인 캐리 멀리건의 미국식 영어 발음 연기도 이만하면 훌륭했던 것 같은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장면이 많았던 것이 캐스팅의 이유였던 것인가 생각하게 되더군요. 개인적으로 예상했던 대로 속편은 통쾌한 권선징악이기 보다는 대마불사에 가까운 결말을 택했는데 고든 게코가 친환경 사업에 익명으로 기부를 하는 것으로 탐욕의 화신도 옥살이를 경험하고 나이가 들면 조금은 철이 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듯 했습니다.

반면 전편의 젊은 주인공 찰리 쉰은 양쪽에 미녀들을 대동하고 나타나 고든 게코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으로 출연했는데 투자 전문가로서 한창 재미를 보고 있는 모습이 제 2의 고든 게코처럼 보이기도 하더군요. 이래저래 밝고 건전하게 살기가 하늘의 별따기 같은 곳의 이야기다 보니 희망적인 모습만을 보여줄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근조] 박완서


박완서(朴婉緖)
1931. 10. 20. ~ 2011. 1. 22.

고인의 약력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진공 일동


 



 

 

“검우강호”, 사랑은 강호의 악연을 넘어





서극 감독의 영화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에서 얻은 실망감은 왠지 한 주 뒤에 개봉한 오우삼 감독의 <검우강호>로 – 엄밀히 말하자면 오우삼 감독은 제작자에 가까웠던 것 같고 실질적인 연출은 대만 출신의 수 차오핑 감독이 도맡은 듯 – 반드시 상쇄시켜줘야 할 것만 같은 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관람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의도했던 대로 결과는 꽤 성공적이네요. 무협 영화에 관해 특별히 축적된 이력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충분히 재미있었고 또 기대했던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부분들 역시 많았습니다. 장르의 특성상 와이어에 의존하게 되는 무협 액션에 특별히 거부감을 느끼거나 광동어로 연기하는 정우성의 모습에 도무지 적응이 안되는 경우만 아니라면 누가 보더라도 크게 흠잡을데 없이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인정할만 합니다.




<적인걸>이 실망스러웠던 이유는 기술적으로 80년대 홍콩 영화의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한 액션과 함께 이제는 보기만 해도 신물이 나오려고 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결합 때문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텐데요, 일단 <검우강호>는 주제와 내용 면에서 최근 중국 블럭버스터들의 트렌드에서 벗어나 있는 점이 마음에 들더군요. 그 대신 고전적인 무협에 멜러적인 요소를 버무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와호장룡>(2000)을 연상케 하기도 했습니다.

너를 산 채로 묻어 저 위의 다리를 지날 때마다 널 생각하겠다는 잔뜩 뒤틀려버린 사랑과 서로 칼을 겨눌 수 밖에 없었던 악연을 끝내 극복해내는 진심어린 사랑을 직접적으로 비교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더군요. 나아가 <검우강호>는 탐욕과 배신,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복수혈전의 연속선상에서 벗어나기 힘든 운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운명을 극복하고 평범한 삶의 행복을 되찾고자 하는 개인들의 소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제 곧 50세의 나이가 되시는 양자경 누님이 <예스 마담>으로 처음 알려진 것이 80년대 중반이었으니 바야흐로 25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멋진 쿵푸 액션을 보여주고 계신 거네요. 이제는 슬슬 예스 마님 역을 해주셔야 할 시기에 우리의 한류 배우 정우성과 부부의 연으로 맺어지는 역할을 맡으셨으니 – 아마도 해외 배급을 위한 선택이었던 듯하고 양자경이 직접 제작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기도 합니다 – 이걸 말이 안된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격려의 박수를 쳐드리고 싶더군요.

재미있는 사실은 <적인걸>과 <검우강호>에는 공통적으로 얼굴 성형이라는 요소가 중요한 설정으로 들어가 있는데요, <적인걸>의 성형이 비과학적인 변신술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검우강호>에서의 성형은 나름대로 고대 의학 기술의 쾌거임을 어느 정도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이 다르더군요. 영화 속에서 양자경은 정우성과 멜러의 합을 맞추는 데에 있어서 물론 분장을 잘하고 나온 덕도 있었겠지만 성형 수술을 통해 한 차례 개조된 얼굴이라는 설정의 덕도 보고 있는 듯 합니다.




<검우강호>에서 정우성은 영화의 절반 이상 어리버리한 연기를 하다가 – 이 역시 설정의 덕을 보고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역시나 고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며 관객들의 쾌감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특히 세우(양자경)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분노하는 부분에서는 뛰어난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배우는 아니지만 필요한 때에는 제대로 터뜨려주곤 하는 정우성의 장점을 확인할 수 있어서 무척 좋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들과 대립각을 이루게 되는 흑석파의 고수들의 면면도 각자의 개성만 넘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허황되지 않는 캐릭터들이어서 보기가 좋더군요. 특히 냉소적인 표정과 자세로 일관하는 여문락의 캐릭터 연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흑석파의 두목으로 출연한 왕학기는 어디에서 낯을 익힌 배우이신가 찾아봤더니 <8인 : 최후의 결사단>(2009)의 마님이셨더군요. 흑석파 두목은 자칫 의도와는 달리 희화화되기 쉬운 캐릭터였는데 왕학기의 연기 내공이 잘 커버해준 것 같습니다.

영화 전반적으로도 고전 무협의 상상력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잘 소화해낸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영진공 신어지







 

게임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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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좋은 기술을 과학과 의약품에 낭비할 셈인가?!


확실히, 21세기에 기성세대가 보는 대중문화의 주적은 컴퓨터 게임이다. 거의 모든 청소년문제, 사회문제의 원흉으로 게임이 지목되더니 마침내 정부에서 청소년들의 심야시간 게임이용 규제법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다. 다중사용자온라인게임(MMOG)에 국한된 조치라지만 만약 이 법이 시행된다면 또 하나의 세계 최초를 달성하게 된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는 과정엔 학부모 단체의 압력이나 게임업계의 막연한 대응도 한 몫을 했고, 실제 사회 현상도 큰 역할을 했다. 실제로 많은 사건들에 게임이 이래저래 엮여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죄다 게임 탓이라고 하는 건 부당하다. 컴퓨터게임에는 지금까지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오락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가치들이 담겨있다. 그게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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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갈켜줄께 …

첫째,
컴퓨터 게임은 가장 안전하면서도 가장 짜릿하고 경제적인 놀이다.

컴퓨터 게임처럼 안전한 놀이가 또 있던가? 물론 게임을 너무 오래하면 혈전이 혈관을 막아서 죽음에 이를 가능성이 약간 높아진다. 하지만 그래봤자 여객기의 비즈니스좌석에 오래 앉아 있다가 같은 증상으로 죽을 확률보다 높지 않다.

컴퓨터 게임과 다른 놀이들을 비교해보라. 축구나 농구 같은 구기종목은 공에 맞아서 안경이 부러지거나(내가 두 번 그랬다), 팔꿈치에 맞아 입술을 꿰매거나(버락 오바마가 최근에 그랬다), 발이나 손 부상을 입거나(축구하다 다친 엄지발톱은 두 달째 퍼렇다), 심지어 밖으로 튀어나간 공으로 인해서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몇번 그런 사례가 보도된 적이 있다).

게다가 격렬한 운동 중에 심장이 멎는 경우도 가끔 있다. 자전거나 킥보드 같은 탈것들은 넘어져서 뼈가 부러지거나 교통사고로 죽을 가능성이 꽤 높다. 등산은? 2007년에만 등산 중 사망자가 112명, 부상자는 2923명 이었다. 10대와 20대의 사망원인 1위가 바로 사고사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대개의 사고는 집 밖으로 기어나갔을 때 터진다.


사람잡는 스포츠, 등산 / 애들 잡는 도구, 킥보드


(컴퓨터 게임을 안하고) 농구를 하다가 입술이 찢어져 병원 가는 오바마

하지만 컴퓨터게임은 방안에 틀어박혀서 키보드나 게임패드만 두들긴다. 다칠 일이 없다. 그렇게 안전함에도 불구하고 컴퓨터게임은 무지무지 짜릿하다. 컴퓨터 게임이 아니라면 당신이 언제 루프기동을 하며 적 전투기와 공중전을 펼칠 기회가 있겠나? 브라질 빈민가를 뛰어다니며 총격전을 펼칠 일은? 던전을 탐험하며 거대한 몬스터와 혈투를 벌일 가능성은? 빈사상태에 빠진 동료를 구하고 장엄하게 목숨을 잃을 기회는? (그리고는 언제든 다시 부활할 기회는?) 모두 컴퓨터 게임에서 가능한 일이다.

이런 일은 인류 역사상 최초다. 원래 짜릿함과 위험함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짜릿한 놀이는 그만큼 위험해야 했고, 위험하지 않으면 짜릿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컴퓨터게임은 좋은 것만 쏙 빼다가 당신 앞에 대령한다. 게다가 비용도 가장 적게 든다. 컴퓨터게임에는 축구화도, 공도, 운동복도 필요 없다. 그저 듀얼코어 이상의 PC와 키보드와 마우스와 고속통신망 만 있으면 된다.





현실? 바보들이나 거기서 놀라고 그래!!

둘째,
컴퓨터 게임은 지혜를 알려준다.

게임을 하면 바보가 된다고? 바보가 하면 더 바보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인류는 언제나 놀이를 통해서 학습을 시켜왔다. 학습의 기본은 반복 숙달이고 시행착오다.

“Practice makes perfect!” 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게임 속에서는 그 두 가지가 일상이다. <갤러그>를 생각해보라. 당신은 똥파리들의 이동경로와 그것들이 뿌리는 폭탄의 궤적을 습득하기 위해서 수십, 수백번을 반복 플레이했을 것이다. 지루한 반복 끝에 마침내 당신 머릿속에는 <갤러그>의 구조가 그대로 들어서고 당신은 그 게임을 마스터한다.

사실 노인들의 지혜도 반복에서 나왔다. 농경시대에는 단지 춘하추동의 순환을 한번 더 경험했다는 것이 바로 지혜의 근원이었다. 그런데 실생활에서는 반복 경험의 기회에 한계가 있다. 춘하추동의 반복경험도 많아봤자 100회 이내다. 일부 카사노바를 제외하고는 연애 경험이 100회를 넘기진 않는다. 하지만 컴퓨터게임은 거의 무제한으로 반복이 가능하다. 그것도 안전하게.





가상역사게임, 문명

미군은 요즘 컴퓨터 게임을 신병훈련에 활용한다. 가장 싸고 안전하게 실전에 필요한 훈련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첨단장비 개발업체에서는 게임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장비의 설계를 보완한다. 교육학자들은 인간이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주변 환경을 탐색하고 실험해볼 기회가 많을수록 좋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제 게임 속에서는 가능하다. 게다가 게임 속 세계는 갈수록 세상의 진리를 담아간다.

폭력성으로 유명한 ‘GTA (Grand Theft Auto)’를 해본 나는 그 속에 담긴 범죄사회학적 고찰의 깊이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게임은 한 인간이 어떻게 범죄자가 되어갈 수밖에 없는지를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나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겠더라.

최근 타임머신 게임으로 유명한 <문명>은 인류 문명 발전의 기본 원리를 담고 있다. 왜 독재로는 어느 수준이상 발전할 수 없는지, 왜 교육을 제대로 시키면 시민들이 반항적이 되는지를 깨닫는데 이만한 교보재가 더 있을까.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이 어릴 적에 <심시티>나 <문명>을 좀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마, 가지고 있다.


미군의 모병게임, 아메리카’s 아미



범죄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GTA 시리즈

셋째,
컴퓨터 게임은 사회생활의 훈련장이다.

온라인 게임들을 생각해보라. <스타크래프트>를 잘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마우스 클릭과 단축키를 쓰는 기술 뿐일까? 아니다. 모든 멀티플레이 게임의 기본은 전략적 사고, 상대방의 수 읽기다. 상대방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하고 그보다 한발 앞서는 것이다. 예측과 대응이 정확할수록 당신이 이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데 수 읽기를 하려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조망수용(perspective taking)’이 필요하다. 간단히 말해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단 말이다. 그리고 이 입장 바꿔 생각하기는 모든 사회생활의 근간이다. 매너나 규칙의 가치도 멀티플레이 게임을 해봐야 이해한다. 한 놈이 반칙을 하면 게임 전체가 어그러지니까. 스포츠맨쉽이 그래서 나오는 거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속담도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일’은 혼자서 하는 공부다. 그리고 ‘놀이’는 여럿이 같이 노는 멀티플레이 게임이다.


디지털 세대의 바둑이자 체스, 스타크래프트

고문관이 왜 탄생하나? 멀티플레이 게임을 안했기 때문이다. 그걸 안했으니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치가 없고, 앞뒤가 꽉 막히게 되는 거다. 예전에는 동네 골목이나 공터에서 멀티플레이 게임을 했지만 지금 아이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그것을 배운다. 그러면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원칙들을 배운다.

사실 애들이 보고 배울까 무서운 세상은 게임이 아니라 게임 밖의 우리 사회다. 나는 국회에서 이종격투기를 벌이는 국회의원이나, 수 조 원을 탈세하고 사면받아 나온 주제에 국민들에게 뭘 고쳐야 한다고 주절대는 인간을 보느니 차라리 게임을 하는 게 더 낫다는 입장이다. 컴퓨터 게임 속에서는 최소한 모두에게 공평하게 규칙이 적용되니까.

넷째,
컴퓨터 게임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첨단 IT 기술이다.

컴퓨터의 발전은 이미 불필요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 글을 쓰는 워드프로세서는 셀러론 컴퓨터에서도 충분히 작동한다. 파워포인트도 웹서핑도 그 정도로 충분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듀얼코어나 쿼드코어 PC를 원한다. 최첨단 게임을 하기 위해서이다. 컴퓨터 게임이야말로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상용화된 최첨단 기술의 결정체다.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컴퓨터 게임을 잘 할 수 있다면, 그보다 수준 낮은 다른 기술은 더 쉽게 배울 수 있다는 뜻이니까. 초딩이나 중딩들이 어떻게 컴퓨터를 그리도 잘 쓰는지 아직도 모르시겠나? 걔네들은 게임을 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배우고, 게임을 통해서 IT를 마스터한다.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이 알아서 배우는 거의 유일한 기술이 바로 컴퓨터와 인터넷이다.

사실 이 사이버 공간의 근본 정신은 컴퓨터 게임을 통해서 구현된다. 반면에 어른들은 게임을 모르니 컴퓨터와 인터넷이 어렵기만 한거다. 기껏해야 XX양 비디오를 보기 위해서 인터넷에 달려드는 수준의 인간들이 게임을 어찌 이해하겠나.


다시 한번, 첨단기술을 게임에 쓰지않으면 어디에 쓰겠나?

마지막으로,
세상은 점점 컴퓨터 게임과 구분할 수 없게 되어간다.

스마트폰의 증강현실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어디까지가 사이버공간이고 어디까지가 현실공간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게임도 마찬가지다. 임요환을 보라. 게임속의 황제는 실제로도 영웅이 된다. 게임을 통해서 배운 원리는 실제로도 적용가능하다. 그러니 게임만 하다가 실생활에 적응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갈수록 무의미해진다.

영화 <소셜네트워크>를 보라. 주인공은 실생활에서는 젬병이다. 이 친구는 자기 애인을 마치 게임의 스탯찍듯 대하다가 찌질이 취급만 당한다. 그런데 그 찌질이가 세계최대의 SNS를 만들어서 억만장자가 된다. 그가 성공한 비결은 실제 세상을 게임처럼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컴퓨터 게임은 수량화할 수 있으며 몇몇 조건을 바꿔서 조작이 가능하다. 이런 게임의 논리를 대인관계에 적용하기, SNS의 기본이 그것 아닌가.


현실세계는 게임과 다르다고? 그럼 난 뭐야?

요약하면,
컴퓨터 게임은 지금 현재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술과 예술과 지식의 종합체이다.

장담하건대, 앞으로 5년 내에 자기 자녀가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걱정이 아니라 게임을 하지 않아서 걱정인 부모가 등장할 거다. 게임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것이고, 세상은 점점 게임을 닮아가게 될 테니까. 게임을 안한다는 건 미래에 적응하기를 포기하는 행동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게임만 잘하면 된다는 건 아니다. 게임 중독에 빠지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에겐 게임 말고는 다른 중요한 것이 없다는 점이다. 삶의 균형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할 것이고, 뭐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진리도 변함없을 것이다.

올해에는 새 컴퓨터를 구입해서 <문명>과 <콜옵: 블랙옵스>를 최고해상도로 즐길 꿈에 부푼 인간이 하는 말이니 분명히 편파적인 해석이 담겨있겠으나, 적어도 모든 주장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아주시기 바란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