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그 노래] 탐 웨이츠(Tom Waits)를 아시나요?

 

 


 


 


탐 웨이츠(Tom Waits),


최후의 비트족이라 불리우는 1949년 생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이 가수의 이름을 들어본 이는 그리 많지 않을테지만, 그의 노래를 어떤 식으로든 들어본 사람은 의외로 많을 듯 하다. 왜냐하면 이 아저씨의 노래는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수 없이 많은 TV 프로그램과 영화에 삽입되었기 때문이다.


<참고: IMDb 사운드트랙 목록>


 


그의 노래가 삽입되어 있는 영화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를 들자면, “파이트 클럽” “12 몽키즈” “슈렉 2” 등이 있다.


 


 



영화 “파이트 클럽” 삽입곡, “Goin’ Out West”

 



 


 





영화 “슈렉 2” 삽입곡, “Little Drop Of Poison”

 


 


그리고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에 종종 출연하기도 하였다.


1984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코튼 클럽”,


1986년 짐 자무쉬의 “다운 바이 로”,


1992년 역시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


1993년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2010년 영화 “일라이”에 출연한 나름 중견연기자이다.


 


가수로서의 그의 경력을 보자면,


1973년 데뷔앨범 “Closing Time”을 시작으로 최근작인 “Bad As Me” (2011)까지 19개의 정규앨범, 3개의 라이브앨범, 2개의 영화사운드트랙 앨범을 발표하였고,


<참고: allmusic.com 디스코그라피>


 


여러 시상식에 후보로 노미네이트 되거나 수상하기도한 매우 성공한 그리고 존경받고 있는 뮤지션 중의 하나이다.


 


 





탐 웨이츠의 곡 “Christmas card from a hooker in Minneapolis”,

Maria Tecce 커버 버전 

 


 


 


사실 그의 음악을 몇 개의 단어로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리 쉬운 건 아닌데,


칙칙하고 우울하고 울컥하고 냉소적이고 빈정대고 사회현상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그의 음악은 우리가 기꺼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런데 그보다 더 우리에게 그의 음악을 낯설어지게 하는 것은 바로 그의 노랫말 때문일 터이다. 풍자, 은유, 비어, 속어, 직설 등 그의 노랫말은 사실 그걸 그대로 우리말로 옮겨 놓기가 거의 불가할 정도로 미국 정서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아저씨는 자신의 곡이 무단으로 쓰여지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한데,


직접 인용 또는 누군가에게 다시 부르게 한 경우까지 저작권 소송 관련 소송을 여러 차례 진행하기도 하여 대부분 승소하였고 합의금은 거의 자선단체에 기부하곤 하였다.


 


 





매니아 층을 형성하기도 했던 미국 드라마 “The Wire” 오프닝 테마,

오리지날은 탐 웨이츠의 노래 Way Down In The Hole”

다시 부른 이들은 The Five Blind Boys of Alabama


 


 


외모로만 보면 제 멋대로 살고 할 말 안 할 말 다하고 다닐 것 같은 이 아저씨,


그런데 은근히 정의감도 있고 제 할 일 착실히 잘 하면서 사는 분이다.


 


이 아저씨 노래 중에 그래도 나름 우리 정서에 슬쩍 걸쳐 볼만한 곡들을 추천하자면,


“Please call me, baby”,


“Tom Traubert’s Blues”,


“Christmas card from a hooker in Minneapolis”,


“The piano has been drinking”,


“Foreign affair” 등이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 들어보시길 권하는 바이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탐 웨이츠의 음악으로 가득한 영화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1982년 개봉하였다가 2003년에 다시 리마스터 되었던 영화, “One From The Heart”.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이 영화가 “마음의 저편”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개봉하였다고는 하는데 긴가민가하다.


 


어쨌든 탐 웨이츠의 탁성과 크리스탈 게일(Crystal Gayle)의 미성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노래들로 가득한 영화이니 한 번 쯤 찾아 감상하셔도 좋을 듯 하다.


 


그럼 즐감~ ^^


 


 



“마음의 저편” (One From The Heart) 2003년 판 예고편


 


 


영진공 이규훈


 


 


 


 


 


 


 


 


 


 


 


 


 


 


 


 


 


 


 


 


 


 


 


 


 


 


 


 

“검우강호”, 사랑은 강호의 악연을 넘어





서극 감독의 영화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에서 얻은 실망감은 왠지 한 주 뒤에 개봉한 오우삼 감독의 <검우강호>로 – 엄밀히 말하자면 오우삼 감독은 제작자에 가까웠던 것 같고 실질적인 연출은 대만 출신의 수 차오핑 감독이 도맡은 듯 – 반드시 상쇄시켜줘야 할 것만 같은 강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관람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의도했던 대로 결과는 꽤 성공적이네요. 무협 영화에 관해 특별히 축적된 이력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충분히 재미있었고 또 기대했던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부분들 역시 많았습니다. 장르의 특성상 와이어에 의존하게 되는 무협 액션에 특별히 거부감을 느끼거나 광동어로 연기하는 정우성의 모습에 도무지 적응이 안되는 경우만 아니라면 누가 보더라도 크게 흠잡을데 없이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인정할만 합니다.




<적인걸>이 실망스러웠던 이유는 기술적으로 80년대 홍콩 영화의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한 액션과 함께 이제는 보기만 해도 신물이 나오려고 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결합 때문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텐데요, 일단 <검우강호>는 주제와 내용 면에서 최근 중국 블럭버스터들의 트렌드에서 벗어나 있는 점이 마음에 들더군요. 그 대신 고전적인 무협에 멜러적인 요소를 버무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와호장룡>(2000)을 연상케 하기도 했습니다.

너를 산 채로 묻어 저 위의 다리를 지날 때마다 널 생각하겠다는 잔뜩 뒤틀려버린 사랑과 서로 칼을 겨눌 수 밖에 없었던 악연을 끝내 극복해내는 진심어린 사랑을 직접적으로 비교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더군요. 나아가 <검우강호>는 탐욕과 배신,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복수혈전의 연속선상에서 벗어나기 힘든 운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운명을 극복하고 평범한 삶의 행복을 되찾고자 하는 개인들의 소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제 곧 50세의 나이가 되시는 양자경 누님이 <예스 마담>으로 처음 알려진 것이 80년대 중반이었으니 바야흐로 25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멋진 쿵푸 액션을 보여주고 계신 거네요. 이제는 슬슬 예스 마님 역을 해주셔야 할 시기에 우리의 한류 배우 정우성과 부부의 연으로 맺어지는 역할을 맡으셨으니 – 아마도 해외 배급을 위한 선택이었던 듯하고 양자경이 직접 제작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기도 합니다 – 이걸 말이 안된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격려의 박수를 쳐드리고 싶더군요.

재미있는 사실은 <적인걸>과 <검우강호>에는 공통적으로 얼굴 성형이라는 요소가 중요한 설정으로 들어가 있는데요, <적인걸>의 성형이 비과학적인 변신술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검우강호>에서의 성형은 나름대로 고대 의학 기술의 쾌거임을 어느 정도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이 다르더군요. 영화 속에서 양자경은 정우성과 멜러의 합을 맞추는 데에 있어서 물론 분장을 잘하고 나온 덕도 있었겠지만 성형 수술을 통해 한 차례 개조된 얼굴이라는 설정의 덕도 보고 있는 듯 합니다.




<검우강호>에서 정우성은 영화의 절반 이상 어리버리한 연기를 하다가 – 이 역시 설정의 덕을 보고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역시나 고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며 관객들의 쾌감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특히 세우(양자경)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분노하는 부분에서는 뛰어난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배우는 아니지만 필요한 때에는 제대로 터뜨려주곤 하는 정우성의 장점을 확인할 수 있어서 무척 좋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들과 대립각을 이루게 되는 흑석파의 고수들의 면면도 각자의 개성만 넘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허황되지 않는 캐릭터들이어서 보기가 좋더군요. 특히 냉소적인 표정과 자세로 일관하는 여문락의 캐릭터 연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흑석파의 두목으로 출연한 왕학기는 어디에서 낯을 익힌 배우이신가 찾아봤더니 <8인 : 최후의 결사단>(2009)의 마님이셨더군요. 흑석파 두목은 자칫 의도와는 달리 희화화되기 쉬운 캐릭터였는데 왕학기의 연기 내공이 잘 커버해준 것 같습니다.

영화 전반적으로도 고전 무협의 상상력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잘 소화해낸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영진공 신어지







 

“크레이지 하트”, 절주를 결심하게 하다




Crazy Heart, 2010 



토마스 콥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크레이지 하트’는 술에 절어 사는 늙은 컨트리 가수 배드 블레이크(제프 브리지스)의 모습을 담담한 시선으로 조명한다. 영화의 주인공이라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인 모습의 배드는, 지난 사랑에 변명하지 않고, 차갑게 대하는 아들에게조차 자신의 이야길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단념한 듯 인생의 마지막 근처의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신문기자 진(매기 질렌할)의 등장은 특별하다.

언제나처럼 난, 순진한 관객이 되어 영화같은 사랑의 해피엔딩이라든지 아들과의 훈훈한 재회 같은 걸 바라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감상적인 기대에 흔들리지 않고, 애초 벗어둔 연민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제 갈 길을 걷는다. 남녀의 만남이 사랑 말고도 내면의 변화를 일으킬 긍정적인 힘을 지녔음을 고요히 전하며. 

영화를 오롯이 ‘감상’토록 이끄는 힘은 배우에게 있는데, 제프 브리지스는 마치 배드 블레이크인양 열연을 펼쳤다. 남은 감상을 관객의 몫으로 남긴 크레이지 하트는 좋은 영화다.

극적 반전도, 운명의 장난도 등장하지 않지만 감정을 드러내고 설명하기보다 되레 한발 물러나 인물의 ‘그대로’를 쫓는 이 영화가 좋다. 스스로를 객관화하곤 자신을 들여다보며 제 마음의 정리정돈을 잘 하는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 하듯이.

또 하나, 배드 블레이크의 거친 숨소리와 빈번한 토악질, 대충 풀려진 허리춤을 보노라면 진심으로 절주를 결심하게 된다. 그런면에서도 … 이 영화 참 괜찮다.


영화의 주제곡 “Weary Kind” by Ryan Bingham
 


영진공 애플

 

“슈퍼 사이즈 미”, 햄버거가 뭔 죄냐, 자본이 죄지!


‘한 달간 김치찌게와 밥만 먹을 때에도 우리 몸의 염분농도는 엄청나게 올라갈 것이다. 골고루 먹지 않는 음식이야말로 최대의 독약인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라는 생각을 보호막으로 삼고 하루 한갑의 거북선과 반통의 하루방(국내산 파이프 담배)을 피워대시던 할아버님이 82세까지 사셨던 사실을 상기하며, 마지막으로 마라톤 연습을 하시던 중 돌아가신 막내 사촌형님에 대한 사망원인을 “결국 우리 유전자는 운동을 하면 안돼….더군다나 조선일보 기자였으니 우리 유전자에서는 조선일보와 운동은 극약이야”라는 말도 안되는 유권해석으로 얼버무린 희대의 자기몸 사기꾼 나의 관람 전 마음가짐은 저토록 장황했었다.

요컨대 나는 일주일에 3회 이상을 삼겹살+소주(2~3병)로 마시며 2회 이상을 집에서 소주(1~2병)+(골뱅이, 참치, 꽁치찌게 등)을 마시며 1주에 1회 이상 기타주류(맥주, 양주, 막걸리, 와인)로 소화해대니 나의 편협한 식습관은 벌써 10여년이 훌쩍 넘어간 상태였다. (내가 저 다큐의 주연이었다면 산송장 취급받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

일주일에 6회 이상의 음주 습관을 가진 이 땅의 수많은 샐러리맨, 학생, 백수, 자영업자를 대표해서 난 『슈퍼 사이즈 미』의 비판꺼리를 찾을 양으로 눈알 뒤집어가며 보고 있었더랬다.

30일간의 맥도날드 다이어트는 25파운드의 체중증가, 간경화 조짐, 간조직 손상, 동맥경화증 조짐 등의 화려한 병력 예상 증후군을 남발하며 끝났다. 역시 문제는 자본주의의 최대 관건인 이익이며 곧 돈이다.

“모건스퍼록”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자본주의의 폐해였다만 솔직히 그 방법은 적절하지 못했다. 기업은 이익을 목적으로 하고 이익을 위해선 로비스트가 있어야 하며 로비스트는 구축된 막강한 자금력으로 정책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 이익의 수혜자인 서민은 동시에 이익의 희생자이며 소수의 자본권력의 배는 서민의 늘어나는 뱃살만큼이나 급격하게 늘어날 뿐이다. “모건 스퍼록”은 이 이야기를 자기희생을 통해 풀어나가지만 이는 또다른 ‘희생제의’에 다름 아니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도 한 식품의 편중된 섭취는 불가결하게 신체의 이상증후를 나타낼 것이며 그것은 아침점심저녁으로 산삼만 쳐먹어도 당연히 나타나는 결과일 것 아닌가? 고로, 난 감독의 『슈퍼 사이즈 미』프로젝트가 사회의 이슈를 만들어내고 시선을 잡으며 희생제의의 어린양이 되는 아픔을 감수한 것에 박수를 보내지만 자본주의가 서민을 제압하는 악순환의 방식을 고발하는 측면에서는 좀 비겁한 방법이었다고 말하겠다.


끝이냐고?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영화를 지지한다. 굳이 함무라비 법전까지는 안가더라도 자본의 저열한 속성을 조금 비겁한 방법으로 약올렸다고 해서 『슈퍼 사이즈 미』가 비난 받아서는 안된다. 설사 그 방법이 조금 비겁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각성을 깨워주는 영화를 만든 “모건 스퍼록”에 무척 감사하는 바다.

영진공 그럴껄

친절한 금자씨 또는 속죄는 나의 것

박찬욱 감독의 복수 연작 세번째 작품(복수 3부작은 잘못된 표현이고 어디까지나 마케팅을 위해 동원된 수사일 뿐이다. 애초부터 3부작으로 기획된 시리즈가 아니다)인 “친절한 금자씨”.  요즘 영화 속 금자라는 인물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영화를 보았을 때 스크린을 가득 메우던 이영애의 얼굴 뒤에 가려졌던 실제 금자의 모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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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금자는, 많은 관객이 기대했던, 복수의 화신이라기 보다는 속죄의 강박에 사로잡힌 단죄의 화신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멀리 돌아갈 필요도 없이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에 등장한 ‘진정한’ 복수의 화신들과 금자의 차이를 비교해보면 이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두 개의 대립각을 이루는 류(신하균)과 동진(송강호)는 모두 자신의 피붙이, 하나는 하나 밖에 없는 누나를, 또 하나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잃는다. 자신의 생명이나 다름 없는 절대적 가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으로 빼앗겼을 때, 류는 장기매매단의 콩팥을 소금에 찍어먹을 수 있었고 동진은 집요한 추적 끝에 류의 혈맥을 끊어놓을 수 있었다.

“올드 보이”도 마찬가지다. “올드 보이”에서 복수의 화신은 오대수(최민식)이 아니라 오대수의 세치 혀 놀림에 누나를 잃어야 했던 이우진(유지태)이다. 물론 15년간 사설 감방에 갇혀 그 만큼의 인생과 가족을 잃어야 했던 오대수에게도 복수의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마침내 풀려난 데에서 오는 해방감과 더불어 자신이 왜 갇혀야만 했었는지에 대한 의문의 답을 찾는 일이 우선이다. 반면 이우진은, 그러니까 영화의 말미에야 밝혀지는 이우진의 지독한 복수의 이유는 “복수는 나의 것”의 인물들의 사연에 비하면 약간은 신화화된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역시나 다시 한번, 자신의 생명이나 다름 없는 절대적 가치의 상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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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라는 게 무엇인가. 아니, 복수라는 행위가 갖춰야 할 감정적 상태의 가장 순도 높은 형태는 어떤 것인가. 어느 정도의 원한과 증오가 가슴 속에 터지고 피멍이 들었을 때 복수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로까지 내몰리게 되는가.

그러나, “올드 보이”에 이은 “올드 레이디”의 새로운 주인공이 되었어야 했을 금자는(쉽게 바꿔 말하자면, “올드 보이”에서 이우진의 여자 버전인 이금자로서 그녀의 깊은 상처와 치밀한 복수의 과정을 풀 스토리로 보여주는 영화가 되기를 많은 이들이 바랬던, 그리하여 “올드 보이”의 변주곡이 되어야 했을 “친절한 금자씨”는) 대부분 관객들의 바램과 달리 순도 높은 원한과 증오의 여건부터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복수의 화신이라기 보다는 속죄의 강박에 휩싸인 단죄의 대리인으로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오대수의 15년 만큼은 아니지만, 금자에게도 13년의 잃어버린 인생이 있었고 무엇보다 행방을 알 수 없는 딸과의 잃어버린 시간이 있었으므로 충분한 복수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딸은 살아있었고 자신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금자의 사연은 류나 동진이나, 이우진의 경우라기 보다는 오대수에 가깝다. 그럼에도 금자는 백 선생에 대한 응징을 실천한다. 더군다나, 13년만에 되찾은 딸에게서 스스로 엄마라고 불리우기 조차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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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자는 남들 보다 죄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딸을 죽이겠다고 백 선생이 협박을 했다지만 그녀가 유괴 살인의 죄를 뒤집어 쓴 데에는 어찌하든 딸을 살리겠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자기 스스로가 유괴 살인의 공범 노릇을 했다는 자괴감도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백 선생에 대한 복수심이 13년의 감방 생활 동안 철저한 이중 인격으로 살게 했지만 13년 동안 그녀가 동료 복역수들에게 그토록 친절할 수 있었던 이유도 유괴 살인에 동조한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감방에서 나오자 마자 유가족 앞으로 달려가 자신의 손가락부터 끊는 행위는 백 선생에 대한 복수 보다 스스로에 대한 속죄의 심정과 노력이 훨씬 더 앞서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관객 앞에 전시되는 금자의 복수 퍼포먼스는 관객들이 가슴으로 동참하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적 폭발이라기 보다는, 마치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심판자의 모습을 띄게 된다. 복수라기 보다는 정의의 심판에 가까운, 백 선생에 대한 금자의 단죄는 그리하여 결국 관객들에게 아무런 감정 이입이나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상당히 부담스러운, 또 다른 그 무엇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싶다.

여기서 “친절한 금자씨”가 대부분 관객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려고 했다면 그건 아마도, 악독한 백 선생과 그의 청부업자들의 손에 의해 금자의 딸이 죽고 짧았던 금자와 딸의 불완전한 행복은 그나마도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과거의 것이 되면서 백 선생의 생살을 전부 씹어먹어도 충분치 않을 금자의 ‘마녀로의 변신’ 정도가 이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처음엔 몰랐던 백 선생의 더 많은 죄가 밝혀지면서 어느 관객도 기대했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튀어가 버린다.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는 관객의 만족 보다는 박찬욱 감독의 작가적 명성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작품, 또는 관객들에게는 불친절하고도 매우 모호한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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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금자는 왜 이미 죽어버린 백 선생의 얼굴에 총질을 했을까?

이것 역시 금자가 가진 속죄와 단죄의 강박으로 해명할 수 밖에 없다. 백 선생에 대한 금자의 단죄는 무려 13년 동안 한순간도 꺼지지 않았던 불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백 선생에 대한 순도 높은 복수의 감정이라기 보다는 단죄의 사명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금자는 스스로가 그랬던 것 이상으로 백 선생 자신도 스스로의 죄를 우선 깨닫기를 원했고 그래서 피해 아동의 부모들이 백 선생에 대한 살해 모의를 하는 내용을 전부 경청할 수 있도록까지 한다. (백 선생이 죽기 전에 공포감을 느끼도록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가 어디 그런 인물이던가? 소 귀에 경 읽기라 하더라도 죄인을 죽이기 전에 죄목부터 낱낱이 열거하는 것이 심판의 대리인들이 취하는 습관이다.)

금자의 총질은 죄인에 대한 심판이 완료된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금자의 총질에는 아무런 감정적 폭발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죄의식 강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일종의 자기 계획에 대한 완벽주의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13년 동안 고이 품어왔고 사제 총에 은장식까지 해넣기까지 준비해온 그 일의 마지막을, 때로는 본래의 목적이 더이상 의미 없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에 조차 고집하곤 하는 그런 습성. 또는 강박.

“친절한 금자씨”가 세번째 복수의 드라마가 아닌, 속죄와 구원에 대한 아리송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이유가 결국 금자씨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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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