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사이즈 미”, 햄버거가 뭔 죄냐, 자본이 죄지!


‘한 달간 김치찌게와 밥만 먹을 때에도 우리 몸의 염분농도는 엄청나게 올라갈 것이다. 골고루 먹지 않는 음식이야말로 최대의 독약인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라는 생각을 보호막으로 삼고 하루 한갑의 거북선과 반통의 하루방(국내산 파이프 담배)을 피워대시던 할아버님이 82세까지 사셨던 사실을 상기하며, 마지막으로 마라톤 연습을 하시던 중 돌아가신 막내 사촌형님에 대한 사망원인을 “결국 우리 유전자는 운동을 하면 안돼….더군다나 조선일보 기자였으니 우리 유전자에서는 조선일보와 운동은 극약이야”라는 말도 안되는 유권해석으로 얼버무린 희대의 자기몸 사기꾼 나의 관람 전 마음가짐은 저토록 장황했었다.

요컨대 나는 일주일에 3회 이상을 삼겹살+소주(2~3병)로 마시며 2회 이상을 집에서 소주(1~2병)+(골뱅이, 참치, 꽁치찌게 등)을 마시며 1주에 1회 이상 기타주류(맥주, 양주, 막걸리, 와인)로 소화해대니 나의 편협한 식습관은 벌써 10여년이 훌쩍 넘어간 상태였다. (내가 저 다큐의 주연이었다면 산송장 취급받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

일주일에 6회 이상의 음주 습관을 가진 이 땅의 수많은 샐러리맨, 학생, 백수, 자영업자를 대표해서 난 『슈퍼 사이즈 미』의 비판꺼리를 찾을 양으로 눈알 뒤집어가며 보고 있었더랬다.

30일간의 맥도날드 다이어트는 25파운드의 체중증가, 간경화 조짐, 간조직 손상, 동맥경화증 조짐 등의 화려한 병력 예상 증후군을 남발하며 끝났다. 역시 문제는 자본주의의 최대 관건인 이익이며 곧 돈이다.

“모건스퍼록”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자본주의의 폐해였다만 솔직히 그 방법은 적절하지 못했다. 기업은 이익을 목적으로 하고 이익을 위해선 로비스트가 있어야 하며 로비스트는 구축된 막강한 자금력으로 정책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 이익의 수혜자인 서민은 동시에 이익의 희생자이며 소수의 자본권력의 배는 서민의 늘어나는 뱃살만큼이나 급격하게 늘어날 뿐이다. “모건 스퍼록”은 이 이야기를 자기희생을 통해 풀어나가지만 이는 또다른 ‘희생제의’에 다름 아니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도 한 식품의 편중된 섭취는 불가결하게 신체의 이상증후를 나타낼 것이며 그것은 아침점심저녁으로 산삼만 쳐먹어도 당연히 나타나는 결과일 것 아닌가? 고로, 난 감독의 『슈퍼 사이즈 미』프로젝트가 사회의 이슈를 만들어내고 시선을 잡으며 희생제의의 어린양이 되는 아픔을 감수한 것에 박수를 보내지만 자본주의가 서민을 제압하는 악순환의 방식을 고발하는 측면에서는 좀 비겁한 방법이었다고 말하겠다.


끝이냐고?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영화를 지지한다. 굳이 함무라비 법전까지는 안가더라도 자본의 저열한 속성을 조금 비겁한 방법으로 약올렸다고 해서 『슈퍼 사이즈 미』가 비난 받아서는 안된다. 설사 그 방법이 조금 비겁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각성을 깨워주는 영화를 만든 “모건 스퍼록”에 무척 감사하는 바다.

영진공 그럴껄

“맨 온 와이어”, 올곧은 다큐멘터리 한 편

9.11 테러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뉴욕의 쌍둥이 빌딩, WTC(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 외줄타기를 했던 한 남자에 관한 다큐멘터리입니다. <더 킹>(2005)의 제임스 마쉬 감독 작품으로 2009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비롯해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린 바 있습니다. <맨 온 와이어>가 이러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크게 두 가지 정도가 되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프랑스 출신의 곡예사 필리페 쁘띠(Philippe Petit, 1949 ~)가 1974년 WTC에서의 외줄타기에 성공한 사건 자체가 불가능을 가능의 영역으로 바꿔가며 발전해온 위대한 인류 역사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을 꿔보기는 – 욕망해보기는 – 커녕 감히 상상해본 적도 없는 무모한 도전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바로 이들의 도전을 통해 인류가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관점입니다.

높은 빌딩 사이에서 외줄을 타는 일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일을 꿈꾸고 도전해서 성공해내는 과정은 다른 이들이 금속 활자를 만들거나 비행기와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필리페 쁘띠의 외줄타기는 산업적인 목적이나 이윤 때문이 아니라 그야말로 개인적인 욕망과 예술적인 동기에 의한 행위였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맨 온 와이어>에서 필리페 쁘띠가 1974년에 해낸 퍼포먼스를 다루는 태도가 다큐멘터리 영화로서 가져야 할 가치 중립성에 충실했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맨 온 와이어>는 필리페 쁘띠를 비롯한 당시의 사건에 관련된 많은 인물들의 인터뷰와 보관 상태가 양호한 당시의 기록 영상물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재연해낸 장면들까지 편집해 넣으면서 만든 작품입니다. 그러면서도 필리페 쁘띠의 외줄타기가 갖는 상징적, 역사적 함의를 굳이 해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감정적 소구 포인트도 잡아놓고 있지 않다는 점이 바로 <맨 온 와이어>가 다큐멘터리로서의 미덕을 발휘하고 있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불편한 진실>(2006)이나 <존 레넌 컨피덴셜>(2006)과 같은 다분히 선동적인 다큐멘터리도 좋아하고 <꿈꾸는 카메라>(2004)처럼 드라마 보다 더 감동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좋아합니다. 다큐멘터리가 객관적이거나 가치 중립적일 수 있다고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무엇보다 재미있고 감동도 받을 수 있는 작품이라면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때로는 마이클 무어의 ‘살짝 손을 댄’ 다큐멘터리도 개의치 않고 좋아라 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가끔씩 <맨 온 와이어>와 같이 원인이나 의미에 대한 해설이나 특정한 메시지 전달을 자제하는 작품을 만나면 아 역시 다큐멘터리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게 됩니다.

<맨 온 와이어>에서 가장 극적인 것은 자신의 경험담을 회고하는 현재의 필리페 쁘띠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임스 마쉬의 카메라는 이것을 지지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관객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고 있습니다. 제가 본 다큐멘터리 영화들 가운데 이런 고지식한 태도를 견지했던 작가는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 <어떤 나라>(2004)와 < 푸른 눈의 평양 시민>(2006)을 찍은 다니엘 고든 정도가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고 보면 다니엘 고든이나 제임스 마쉬는 모두 영국 출신이네요.

기대했던 것 만큼 아주 재미있거나 알기 쉽게 해설하거나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작품도 아니었습니다만 다큐멘터리 영화로서 가장 바람직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작품에 대해 감히 뭐라고 딴지를 걸 엄두를 내지 못하겠군요. 재미와 감동을 연출하지 않고 관객 스스로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야 말로 극영화와 다른 다큐멘터리만의 고유한 정체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필리페 쁘띠가 WTC 외줄타기에 성공하기까지의 과정 보다 그 이후의 이야기,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절친들과의 절교 등이 좀 더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만 <맨 온 와이어>에서는 매우 짤막하게 다루고 말더군요. 그런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건 극영화에서나 할 일이지 다큐멘터리인 이 영화의 영역은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매몰차게 막을 내려버리는 듯이 보였습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