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언 달러 베이비”, 꿈이 없는 사람은 꿈을 가진 사람을 알아 본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은 이런 말을 한다. “이제 나는 무슨 낙으로 살죠?”
그래, 인생에 낙이 없으면 뭐하고 살지? 각자의 대답이야 다르겠지만 극 중에서 이우진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예전의 “이산가족 상봉”이나 “꼭 한번 만나고 싶다”를 보다 보면 거기 나오는 어르신들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그런 건가? 더 사시면서 행복을 누리고 싶다고 하는 건 너무 욕심인 건가.

“매기(Maggie Fitzgerald)”는 서른 두 살이 되었다. 집안이 넉넉하지도 않고 그다지 뛰어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변변한 일자리도 없이 살아온 그녀이지만 그래도 그녀에겐 꿈이 있다.

그래서 그녀는 손님이 남긴 고기를 몰래 집으로 싸가지고 가 허기를 때우면서라도 자기의 꿈을 위해 돈을 모았고, 아무리 무시를 당해도 자기의 꿈을 이루어주리라 믿는 이를 계속 찾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버스 안에서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참으로 해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에디(Eddie “Scrap-Iron” Dupris)”는 퇴물복서다. 한때는 잘 나갔지만 이제는 복서시절의 상처로 한쪽 눈이 먼 채 체육관 청소를 하면서 산다. 잘 곳도 없고 의지할 데도 없어서 체육관 한 켠에서 생활하면서 그렇게 산다. 그에겐 꿈이 없다, 아니 꿈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에겐 낙이 있고 여한도 있다.

그의 낙은 꿈이 있는 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고, 그들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겐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마지막 경기를 해보고 싶다는,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한이 있다. 그래서 그는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에디”는 “매기”를 알아본다. 자기에겐 없는 꿈을 가지고 있기에 그는 그녀의 존재감을 금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자 애쓴다. 그게 그의 낙이니까.

“매기”는 그저 앞을 향해 뛰어갈 뿐이다. 꿈을 좇아 뛰는 그녀에겐 그 꿈을 이루고 나면 다시 무엇을 좇아야 하는지,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떡해야 하는지 등의 고민은 없다. 꿈을 이루려면 뛰어야 하고 그렇게 뛰는 게 즐거울 따름이니까.

그렇게 “매기”는 꿈을 이룬다. 딱히 그녀가 원했던 모든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자기의 삶에 그만큼이라도 찾아와주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하지만 그 꿈은 대가를 요구했고 그녀는 그걸 치러야 했다.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아니 남으로 하여금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면서 그녀의 꿈보다 더 크고 탐스런 걸 얻는 이도 많지만 “매기”는 그런 건 크게 억울해 하지 않는다. 어차피 나의 꿈은 내 것이고 나는 그걸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거니까.

“에디”는 “매기”가 꿈을 이뤘다는 걸 안다. 대가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꿈을 못 이룬 그이기에 그녀가 이룬 꿈을 알아본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꿈을 이룬 대가로 더 이상은 꿈을 갖지 못하게 되었기에 “에디”는 그런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낙도 없고 여한도 없는 그녀가 어떻게 살아갈지 그는 알아채는 것이다.

지금 당장 누군가가 “당신은 무슨 낙으로 사는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무런 답을 적지 못할 것이다. 언제쯤 그 답을 적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오던 나의 등 뒤에서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정말 재미 없다. 너무 실망이야 …”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 그 분이 부럽기도 하였다. 그 분은 아마도 아직 삶 속에서 쓰라린 아픔이나 꿈의 절실함을 경험해 보지 않았으리라 제멋대로 생각하고 그래서 이 영화가 그닥 감동적이지도 재미있지도 않게 느껴졌으리라 내멋대로 해석해서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부러워하면서 걸어 나오던 내 머리 속에는 내내 “매기”가 버스 안에서 짓던 미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꿈을 바라보며 아무런 꾸밈없이 해맑게 웃는 그 미소가.

영진공 이규훈

영화로 수다떨기 (4), 반전에 대하여



Q. 금요일 밤에는 뭐하고 보내시나요?

금요일날 … 뭐 영화를 볼 때도 있고, 게임을 할 때도 있는데
요즘은 미국드라마에 빠져서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Q. 음 … 뭔가 박사님 이미지와는 다른 광란의 밤이 있으면, 반전일텐데 별로 그렇지 않군요.

제가 점잖고 차분해보이시나 보죠. 사람들은 이상하게 제가 생각이 깊을거라고 오해를 하더라고요. 사실은 아무 생각이 없거나 햄버거나 순대국밥 사먹을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아… 순대국밥…. 돼지국밥도 좋아함

Q. (먹는 얘기는 그만 닥치고) 오늘 주제는 반전 영화…그 묘미와 강박이에요. 고전 영화가 처음에 만들어질 때요, 마술사들이 감독인 경우도 꽤 있더라구요, 뭔가 속임수를 써서, 색다른 것을 이끌어내는 것, 관객을 속이면서 놀라게 하는 것, 모든 감독들의 꿈 중 하나라고 하던데요?

잘 말씀하셨습니다. 멜리에스라는 프랑스 마술사가 <달세계 여행>이라는 최초의 SF영화를 만들었죠. 자기 마술기법을 사용해서 달나라로 떠나는 우주여행 이야기를 영화로 찍었는데요. 최초의 특수효과가 사용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영화는 마술과 비슷한 면이 많네요. 속이고 놀라게 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다 그렇긴 하지만, 요즘 마술들도 거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되어가고 있죠.


멜리에르가 만든 세계최초의 SF영화 <달세계 여행>,

이 영화에는 에디슨이 엮인 슬픈 전설이 있다는…
그 전설이 알고싶으시면 이 링크를 =>
http://enterfactory.net/206?category=0

Q. 잘 만든 반전 영화, 보고 나면 괜히 입이 간질간질, 그 반전을 말해주고 싶은 경우도 있어요.

네, 물론 그런 행동은 남의 재미를 빼앗는 행동이라 재미를 망쳤다는 뜻으로 스포일러라고 불립니다만, 그래도 남들은 모르고 나만 알고 있는게 있다는 건 간질간질하고 재미있는 일이죠.

Q. 요즘, 특히나 스릴러 영화들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스릴러 영화 속에서 반전 빼놓을 수 없죠. 아카데미가 선택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액션 영화 <밴티지 포인트>, <마이 뉴 파트너> 등이 그러하구요,

뭐 반전 영화 중에 대명사라면 <식스 센스>-‘내 눈에 귀신이 보여요’라든가 <유주얼 서스펙트>-‘절름발이가 범인이다’ … 가 기억나기도 하는데요, 박사님이 기억하시는 반전 영화, 어떤 것이 있나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너무 결말이 너무 황당해서 반전이라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저는 역시 지난 번에 말씀드린 <행복했던 여자>도 인상 깊었고요. 아마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유주얼 서스펙트>하고 <식스센스> 가 최고죠. 근데 두 영화의 반전 포인트가 달라요.

<유주얼서스펙트>는 주인공이 속이는 영화지만, <식스센스>는 주인공이 속는 영화죠. 저는 그래서 첫 번째를 제1종 반전, 두 번째를 제2종 반전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두 번째 유형은 최근에 많아졌어요.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몰랐어. 종류의 영화인데, 아마도 사회가 급변하면서 생긴 가치관의 혼란이 반영된 게 아닐까 싶어요.


<유주얼 서스펙트> 반전 영화의 유행을 만들다



새로운 유형의 반전 영화 붐을 연 <식스센스>

Q. 보면, 어느 정도 반전 영화의 공식이나 소재가 있어요. <아이덴티티>의 다중인격이라든가, <싸인>의 범인이 외계인이라든가, <식스센스><디 아더스>의 귀신, <범죄의 재구성>의 쌍둥이, <오픈 유어 아이즈>나 <바닐라 스카이>의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올드 보이>나 의 최면 등, 소재가 점점 다양해져요.

반전이란 게 결국은 관객들에게 예상밖의 경험을 제공하는 게임입니다. 관객이 어떤 것을 예상하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어야 그 예상을 벗어나는 결말을 만들 수 있는거죠. 그런데 갈수록 많은 기법들이 사용되니까 그만큼 새로운 것 낯선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더 다양한 소재들이 사용되는 거죠.

이렇게 그 결말로 이끌어가는 경로는 다양하지만 결국 반전의 내용은 결국 둘 중에 하나에요. 알고 보니 주인공이 거짓말한 거였다. 아니면 주인공 자신도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었다.

Q. 관객들도 점점 영화를 보는 눈이 높아져서, 다양한 소재와 공식이 있어도 제대로 반전의 재미를 주기란 어려울텐데요….

반전영화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반드시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복선이예요. 결말을 어떻게든 암시하는 내용이죠. 이런 게 영화 중간에 들어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관객과 공평한 게임이 되거든요.

두 번째는 당연하지만 관객의 예상을 벗어난 결말입니다. 이 둘이 다 있어야 성공한 반전영화가 되요. 만약 복선없이 관객의 예상을 벗어난 결말만 제공하면 영화 전체가 황당해져버립니다. 이게 뭐야. 이런 상태가 되는거죠. 그리고 물론 복선을 너무 충실하게 주는 바람에 관객들이 이미 결말을 다 예상해버리면 영화는 그냥 시시한 영화가 되고 말죠. 니가 뭔 얘기 하려는지 이미 다 알지롱. 고작 그거야? 뭐 이렇게 되는거죠.


왜 저 아일랜드 아저씨 이름이 뜬금없이 ‘고바야시’ 지? 이것이 알고보면 복선 …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이건 복선이랄 건 없는데,

배역에 어울리지 않게 지명도 높은 배우가 출연하면 대개 그 인간이 범인

Q. 박사님! 강박증은 어떤 심리일까요? 현대인들 누구나 하나쯤의 강박증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을까…하는데요, 특히,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반전 강박증에 시달리기도 할 것 같아요.

강박증이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심리입니다. 정상적이고 위생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약간의 강박증이 필요해요. 예를 들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다음이나 외출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반드시 손을 씻는다는 것 같은 행동도 강박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하면 병에 잘 안걸리거든요. 사실 제가 예전에는 잘 안씻었는데, 몇 년 전부터 손 씻는 습관을 들였거든요. 그러니까 정말 감기에 안걸리더라구요.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반전 강박에 빠지는 것도 똑같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야 관객이 재미있어하고 그래야 영화가 흥행될거라고 믿으니까요.


그는 빈틈을 참지못하는 강박증 환자였다 …

 



Q. 그렇다보니, 실패한 반전 영화들도 꽤 많이 나와요. 반전이 한 번에 제대로 충격적으로 이루어져야지 꽤 성공한건데, 반전의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라든가, 마구잡이로 풀어놓은 반전 암시용 인물들이나 사건을 해결하지 않고, 그대로 끝내버리는 영화라든가요…

아까 손씻는것에 비유하자면, 적당히 위생을 유지할 만큼 손을 자주 씻는건 좋은 일이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손을 안 씻으면 불안해서 참지를 못해요. 이렇게 불안감 때문에 억지로 손을 계속 씻으면 위생에도 도움이 안되고 생활하는데 오히려 큰 불편이 생기죠. 그게 강박증이거든요. 반전도 강박증으로만 만들면 진짜 중요한 알맹이는 빠지고 반전만 남는 영화가 되겠죠.

사실 반전으로 유명한 영화들이 성공한 이유는 반전 때문만은 아니거든요. <유주얼 서스펙트>는 이야기 자체가 꽤나 쿨하고 재미있어요. <식스센스>같은 경우는 반전에 놀라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고요. 저는 그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아이하고 엄마하고 차안에 앉아 대화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늘 코끝이 찡해요.

Q. 또 이 반전이요, 억지스럽지는 않지만, 너무 고난이도면 관객이 논란이 많이 이는 것 같아요. 똑똑해야하는데, 적당히 똑똑한 반전, 참 반전 영화 제작은 어렵고, 그래서 매력적인 것 같은데요? 사람들이 반전 영화에 끊임 없이 매료되는 이유, 무엇일까요?

아마도 우리 세상과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실제로 세상이 좀 반전 스럽쟎아요.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더라.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고 … 진실은 저 너머에 있고 … 그게 또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세상의 모습이기도 해요.

예를 들어. <혈의 누>하고 <박수칠 때 떠나라>는 시대는 다른데 이야기 내용이 비슷해요. 둘다 차승원이 주연을 맡았다는 공통점도 있지만, 그 차승원의 역할이 뒤늦게 숨겨진 진실을 알았는데 미처 제대로 밝혀내지도 못하고 박수칠 때 떠나는 역할이거든요.



차승원 주연의 두 반전영화

Q. 앎에 대한 강한 욕구, 때로는 그것이 정말 뒷통수를 제대로 맞는 수가 있는 반전인데도 사람들은 진실을 알려고 해요. 그런데, 또 요즘 세상은 진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사람도 많은데, 모르는 게 약, 모르는 척 하는 게 상책이라면서도 사람들의 이런 욕구나 심리, 어떻게 해석하고 계시나요?

아는 게 힘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 서로 다른 세상에서 통하는 원칙이죠.
학습된 무기력이라는게 있습니다. 내가 뭔 짓을 해도 세상은 변치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우리는 무기력을 학습하게 되죠. 이런 세상에서는 모르는게 약이예요.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알기만 하면 복장만 터질테니까요.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면 아는게 힘이 되겠죠. 뭘 알아야 어떻게 할지를 판단할 수 있으니까요.


요즘은 특히, 너무 알려고 하면 다친다는 …

Q. 네, 오늘 이런저런 영화 속 심리학, 반전의 묘미와 반전의 강박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많이 되었네요. 반전이 사람의 심리를 가지고 노는 것이기 때문에, 박사님이 보기에 이런 반전, 요즘 먹힐 것이다 … 싶은 반전이 있다면요?

글쎄요.. 그런 게 있으면 지금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텐데 …

최근 우리나라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전문가들이 바보짓을 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그걸 막는 이야기예요. 요즘 세상이 정말 그렇기 때문이겠죠. 이런 이야기와 반전을 섞으면 뭐가 나올 것 같긴 한데 잘은 모르겠어요.


사실 <괴물>이 이미 그 얘기를 했고 … 요즘 우리나라가 뭐 영화 자체고 …

Q. 급변하는 세상도 반전이면 반전이죠?

네. 인생 자체가 반전의 연속이죠. 그래서 사는 재미도 있는거고요.
모든 게 예측대로 되어가는 인생처럼 재미없는 인생도 아마 없을겁니다.

Q. 네,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구요, 다음에는 어떤 내용으로 만나볼까요?

다중인격이 어떨까요? 영화에서 종종 사용된 소재이기도 하고,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


영진공 짱가


친절한 금자씨 또는 속죄는 나의 것

박찬욱 감독의 복수 연작 세번째 작품(복수 3부작은 잘못된 표현이고 어디까지나 마케팅을 위해 동원된 수사일 뿐이다. 애초부터 3부작으로 기획된 시리즈가 아니다)인 “친절한 금자씨”.  요즘 영화 속 금자라는 인물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영화를 보았을 때 스크린을 가득 메우던 이영애의 얼굴 뒤에 가려졌던 실제 금자의 모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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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금자는, 많은 관객이 기대했던, 복수의 화신이라기 보다는 속죄의 강박에 사로잡힌 단죄의 화신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멀리 돌아갈 필요도 없이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에 등장한 ‘진정한’ 복수의 화신들과 금자의 차이를 비교해보면 이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두 개의 대립각을 이루는 류(신하균)과 동진(송강호)는 모두 자신의 피붙이, 하나는 하나 밖에 없는 누나를, 또 하나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잃는다. 자신의 생명이나 다름 없는 절대적 가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으로 빼앗겼을 때, 류는 장기매매단의 콩팥을 소금에 찍어먹을 수 있었고 동진은 집요한 추적 끝에 류의 혈맥을 끊어놓을 수 있었다.

“올드 보이”도 마찬가지다. “올드 보이”에서 복수의 화신은 오대수(최민식)이 아니라 오대수의 세치 혀 놀림에 누나를 잃어야 했던 이우진(유지태)이다. 물론 15년간 사설 감방에 갇혀 그 만큼의 인생과 가족을 잃어야 했던 오대수에게도 복수의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마침내 풀려난 데에서 오는 해방감과 더불어 자신이 왜 갇혀야만 했었는지에 대한 의문의 답을 찾는 일이 우선이다. 반면 이우진은, 그러니까 영화의 말미에야 밝혀지는 이우진의 지독한 복수의 이유는 “복수는 나의 것”의 인물들의 사연에 비하면 약간은 신화화된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역시나 다시 한번, 자신의 생명이나 다름 없는 절대적 가치의 상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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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라는 게 무엇인가. 아니, 복수라는 행위가 갖춰야 할 감정적 상태의 가장 순도 높은 형태는 어떤 것인가. 어느 정도의 원한과 증오가 가슴 속에 터지고 피멍이 들었을 때 복수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로까지 내몰리게 되는가.

그러나, “올드 보이”에 이은 “올드 레이디”의 새로운 주인공이 되었어야 했을 금자는(쉽게 바꿔 말하자면, “올드 보이”에서 이우진의 여자 버전인 이금자로서 그녀의 깊은 상처와 치밀한 복수의 과정을 풀 스토리로 보여주는 영화가 되기를 많은 이들이 바랬던, 그리하여 “올드 보이”의 변주곡이 되어야 했을 “친절한 금자씨”는) 대부분 관객들의 바램과 달리 순도 높은 원한과 증오의 여건부터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복수의 화신이라기 보다는 속죄의 강박에 휩싸인 단죄의 대리인으로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오대수의 15년 만큼은 아니지만, 금자에게도 13년의 잃어버린 인생이 있었고 무엇보다 행방을 알 수 없는 딸과의 잃어버린 시간이 있었으므로 충분한 복수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딸은 살아있었고 자신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금자의 사연은 류나 동진이나, 이우진의 경우라기 보다는 오대수에 가깝다. 그럼에도 금자는 백 선생에 대한 응징을 실천한다. 더군다나, 13년만에 되찾은 딸에게서 스스로 엄마라고 불리우기 조차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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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자는 남들 보다 죄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딸을 죽이겠다고 백 선생이 협박을 했다지만 그녀가 유괴 살인의 죄를 뒤집어 쓴 데에는 어찌하든 딸을 살리겠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자기 스스로가 유괴 살인의 공범 노릇을 했다는 자괴감도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백 선생에 대한 복수심이 13년의 감방 생활 동안 철저한 이중 인격으로 살게 했지만 13년 동안 그녀가 동료 복역수들에게 그토록 친절할 수 있었던 이유도 유괴 살인에 동조한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감방에서 나오자 마자 유가족 앞으로 달려가 자신의 손가락부터 끊는 행위는 백 선생에 대한 복수 보다 스스로에 대한 속죄의 심정과 노력이 훨씬 더 앞서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관객 앞에 전시되는 금자의 복수 퍼포먼스는 관객들이 가슴으로 동참하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적 폭발이라기 보다는, 마치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심판자의 모습을 띄게 된다. 복수라기 보다는 정의의 심판에 가까운, 백 선생에 대한 금자의 단죄는 그리하여 결국 관객들에게 아무런 감정 이입이나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상당히 부담스러운, 또 다른 그 무엇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싶다.

여기서 “친절한 금자씨”가 대부분 관객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려고 했다면 그건 아마도, 악독한 백 선생과 그의 청부업자들의 손에 의해 금자의 딸이 죽고 짧았던 금자와 딸의 불완전한 행복은 그나마도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과거의 것이 되면서 백 선생의 생살을 전부 씹어먹어도 충분치 않을 금자의 ‘마녀로의 변신’ 정도가 이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처음엔 몰랐던 백 선생의 더 많은 죄가 밝혀지면서 어느 관객도 기대했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튀어가 버린다.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는 관객의 만족 보다는 박찬욱 감독의 작가적 명성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작품, 또는 관객들에게는 불친절하고도 매우 모호한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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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금자는 왜 이미 죽어버린 백 선생의 얼굴에 총질을 했을까?

이것 역시 금자가 가진 속죄와 단죄의 강박으로 해명할 수 밖에 없다. 백 선생에 대한 금자의 단죄는 무려 13년 동안 한순간도 꺼지지 않았던 불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백 선생에 대한 순도 높은 복수의 감정이라기 보다는 단죄의 사명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금자는 스스로가 그랬던 것 이상으로 백 선생 자신도 스스로의 죄를 우선 깨닫기를 원했고 그래서 피해 아동의 부모들이 백 선생에 대한 살해 모의를 하는 내용을 전부 경청할 수 있도록까지 한다. (백 선생이 죽기 전에 공포감을 느끼도록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가 어디 그런 인물이던가? 소 귀에 경 읽기라 하더라도 죄인을 죽이기 전에 죄목부터 낱낱이 열거하는 것이 심판의 대리인들이 취하는 습관이다.)

금자의 총질은 죄인에 대한 심판이 완료된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금자의 총질에는 아무런 감정적 폭발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죄의식 강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일종의 자기 계획에 대한 완벽주의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13년 동안 고이 품어왔고 사제 총에 은장식까지 해넣기까지 준비해온 그 일의 마지막을, 때로는 본래의 목적이 더이상 의미 없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에 조차 고집하곤 하는 그런 습성. 또는 강박.

“친절한 금자씨”가 세번째 복수의 드라마가 아닌, 속죄와 구원에 대한 아리송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이유가 결국 금자씨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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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