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 잃어버렸던 인간병기의 꿈

 

 


 


 


 



 


 


 


1.  인간병기의 꿈


 


무협영화 팬이었던 내게 남다른 소녀시절의 꿈이 있다면 그건 인간병기가 되는 거였다.


 


주윤발처럼 총 두자루를 들고 건물에 들어가 부대 하나를 박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거나, 성룡처럼 맘만 먹으면 백화점 꼭대기에서 장식용 알전구가 매달린 전기줄을 타고 1층까지 내려온다거나, 상대방에게 얼굴을 한방 맞고 뒤로 넘어가는 듯 하다가 다시 허리와 다리의 힘으로 벌쩍 일어나서 방심하는 상대의 뒤통수를 가격한다든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싶었다.


 


여기서 ‘꿈’이라는 건 말 그대로 ‘꿈’이어서 현실에서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환상. ‘꿈 깰’필요 없는 그런 ‘꿈’이었다. 현실의 나는 체력장 4급 이상을 받아본 적이 없고, 100미터는 20초 이하로 뛰어본 적이 없고, 줄넘기를 100회 이상 해 본적이 없고, 쌩쌩이는 평생 해본적이 없고, 농구 골대에 공을 10번 던지면 10번 모두 노골 시키는. 정말 다시 없을 몸치였다.


 


생각해 보니 나는 ‘천재’물도 참 좋아했는데, 천재들이 탁월한 정보 종합수집 능력과 기억력과 판단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새 천재가 되는 상상을 하곤 했다. 현실은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구구단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중학교 때까지 친구들 몰래 발가락을 이용해 덧뺄셈을 하던 천하의 어벙이였지만.


 


그래도 나는 추리소설을 읽으며 포와로, 미스 마플, 홈즈 같은 천재들에 열광했고, 명절마다 중간기말고사가 끝날 때마다 액션 영화 챙겨보고 아무도 없는 뒤켠에서 남 몰래 발차기를 해보기도 했다. 나중에 다 큰 후에, 모든 대한민국의 정규교과과정을 마치고, 회사생활을 10년 가까이 한 후에야 나는 나의 ‘인간병기’의 꿈과 ‘천재’의 꿈이 어디에 닿아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인간병기의 꿈이란 내 신체를 내 의지대로 쓰고 싶은 희망에 다름 아니었으며, 천재의 꿈이란 나의 지적 능력이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데 부족하지를 않기 바라는 희망이었다는 것을.


 


 


 



 


 


 


2. 전설의 주먹



아이들이 태어나고 회사 일이 바빠지고 영화관에 가보지 못한것이 이년째인지 삼년째인지도 모르던 어느 날, 회사에서 단체 영화라는 것을 보러갔다. 단체영화란 본디 중고생의 영화관 출입이 금지되어있던 문화의 결핍시대에 선심처럼 베풀어지던 것이라 알고 있다. 아침 10시 영화관에 모인 회사 사람들도 다 그래보였다. 오랜만에 이 낯선 영화관이라는 공간에 초대된 어색함. 들뜸.


 


그렇게 신입사원, 부장님 차장님 상무님 과장 대리가 순서없이 앉아 본 영화는 “전설의 주먹”이었다. 60년대~70년대생이 대부분인 차부장 이상 급들은 주먹질 하는 자기와 같은 세대의 주인공에게 열광을 했다. 이 뻔한 신파극에 아저씨들은 울고 울었고 나는 그들과는 약간 다를 어떤 감상으로 우울했다. 주먹질의 석연찮음. 그러니까 내가 액션영화를 볼 때의 욕망 ‘내 신체를 내 의지대로 쓰고 싶은 희망’과는 정반대 대척점에 있는 폭력이었던 것이다.


 


어릴적 열광하던 액션영화에서 그들에게 액션을 강요하는 자들은 없었다. 성룡은 ‘어쩔 수 없는 상황’때문에 3층에서 떨어지며 차양을 붙들고 착륙하는 액션을 하지만 3층에서 성룡을 미는 사람은 없었다. “전설의 주먹”에 자기 몸을 쓰려고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돈을 받고 싸움판의 투계가 되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오락을 위해 맞고 때리는, 시키는 자에 대한 분노. 그러고 보니 ‘내가 원해서 하는 액션, 나의 정의를 위한 폭력’을 본 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마지막으로 본게 옹박이었던가?).



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술자리에서 아저씨들은 ‘자신의 전설’을 설파해댔지만, 나는 ‘강요된 폭력’에 ‘어쩔 수 없었어요’라고 끝까지 변명하는 주인공들이(그리고 내가) 가슴에 걸리며 맘에 안 들었다. 그리고 ‘친구와는 싸우지 않습니다’라는 거부가 너무 소박하고 현실적이어서 유쾌하지 않았다.


 


 


 



 


 


 


3.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내가 보는 거라곤 일요일 오전에 하는 ‘영화 스포일러’프로그램들 뿐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영화관에서 무슨 영화를 하는지, 요새 무슨 영화가 있는지 조차 몰랐을 것이다. 좀 처럼 영화관에 갈 시간을 내기 힘든 내가 굳이 “화이”를 본 것은 강렬한 예고편의 대사 때문이었다.


 


“아빠들이 다 괴물인데, 너도 괴물이 되어야지.” 바로 강요된 폭력! “우리는 다 하는데 왜 너는 못해? 너는 다른 것 같아”라는 영화 대사는 슬프게도 내가 직장생활, 일상생활 속에서 상사에게 많이 들어온 이야기다.


 


어쩌면 10년 좀 넘어가는 직장생활에서 늘 강요받아온 것.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순응하다보니 망가져가는 내 자신을 보는 것. 괴물이 되어가는 내 모습에 실망하는 것. 그리고 더 흉한 괴물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몸부림을 치다 다시 밟히는 것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화이”가 좋았던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강요된 폭력을 용감히 거부했다는 것.


 


폭력을 강요했던 다섯 아빠를 모두 죽이고(한명은 예의상 사고사 처리), 그 다섯아빠에게 폭력을 강요했던 건설사 사장까지 죽여버린다. 타협은 없다. 괴물은 괴물일 뿐 이해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화이는 징징거리지도 않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킨다.



괴물이 됨으로써 괴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괴물을 죽여야 괴물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실천해버린다. (그래서 괴물이 된 아이가 아니라 괴물을 삼킨 아이인 것 같다.) ‘저를 왜 기르셨나요?’를 의문하긴 하지만 그 질문에 천착하지 않고, 어떻게든 폭력 강요자들을 이해하여 그 강요를 내재화 하려는 노력이 없다는 것이 가장 좋다.



그래서 영화 초입에 멧돼지 머리를 쏘던 화이의 총과 마지막 기타가방에 들어있는 화이의 총은 완전히 다르다.



그게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들일지라도 단호히 총구를 겨누고야 마는 화이 덕분에 나는 다시 인간병기의 꿈을 꾸게 되었다.


 


 


 


영진공 라이


 


 


 


 


 


 


 


 


 


 


 


 


 


 


 


 


 


 


 


 


 


 


 


 


 


 


 


 


 


 


 


 


 


 


 

“괴물”과 “플란다스의 개”, 공통된 세계관의 다른 표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그의 첫 번째 상업영화 『플란다스의 개』와 기본적으로 같은 관점, 같은 구조의 영화다. 단지 첫 번째 영화에서 관점을 고르게 배분했던 것과는 달리 신작에서는 한쪽의 관점만을 드러냈고, 사건이 좀 더 극적이 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첫째, 두 영화는 모두 두 개의 사건으로 구성된다.


그 두 사건 중에서 첫 번째는 나머지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으나, 결국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두 번째 사건이고 첫 번째 사건은 그냥 지워지고 만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첫 번째 사건은 윤주(“이성재”)의 ‘개 유기 및 살해 사건’이다. 이로 인해 이후에 모든 일들이 벌어지지만, 결국 윤주의 이 범행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넘어간다. 『괴물』에서는 미군의관의 ‘포르말린 방류사건’이 여기에 해당한다. 괴물은 이로 인해 탄생하지만 역시 그 사건도 영화에서는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않고 지워지고 만다. (두 번째 사건은 물론 ‘윤주네 개(순이) 납치/도살기도 사건’과 ‘괴물의 출몰사건’이다.)


둘째, 사건이 둘인 만큼 범인도 둘이지만, 이 두 범인에 대한 처분은 극과 극이다.


<플란다스의 개>의 윤주(“이성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교수가 되는 데에 성공하며, 『괴물』의 미군 역시 실질적인 원인제공자이면서도 비난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계기로 생화학전 실험을 하는 기회를 얻는 이득을 본다.

반면에 이들로 인해 발생한 두 번째 사건의 범인은 사람들의 눈에 문제의 핵심으로 부각되고 처벌당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노숙자(“김뢰하”)와 <괴물>에서 괴물이 바로 그 역할이다. 이들은 지극히 단순하고 본능에 충실할 뿐 특별히 악의가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도 매우 비슷하다. 즉, 만약 개고기 맛을 볼 기회나 포르말린으로 인한 유전자 변형이라는 사건만 없었더라면 이들은 그저 멍청한 노숙자로서, 한강의 물고기로서 단순한 삶을 마치고 말았을 존재들이다.

당구대에 비교하자면 이들은 적극적인 플레이어가 아니라 누군가가 친 공에 맞아서 그대로 굴러가는 공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어난 모든 문제의 가해자로 지목받고 처벌당한다. 지나친 처벌인 것이다.


세째, 언제나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자와 문제를 해결하는 자는 따로 있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 유발자는 많이 배우고 사회적 지위가 높으며 권력을 가진 자이고, 문제
를 해결하는 자는 배운 것 없고 지위도 낮고 권력도 없는 자이다.

심리학 박사인 윤주는 자신이 개를 죽여 놓고서 정작 자기 자신의 개를 납치당하는 아이러니에 빠진다. 미군 역시 포르말린을 방류해 괴물을 만들어 놓고서는 그로 인해 애꿎은 사병 하나가 희생당한다. 그리고 그 이후, 윤주와 미군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제 문제는 이 사건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쉽게 말해서 무고한 존재들이 짊어지고 해결하며 그로 인한 피해도 고스란히 그들이 다 뒤집어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로에 대한 어떤 인정도 받지 못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그 무고한 인물은 현남(“배두나”)이고, 『괴물』에서는 강두(“송강호”)네 가족이다. 현남은 납치된 개를 찾아서 윤주에게 돌려주었으나 결국 자신은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그토록 원하던 TV출연 마저 이루지 못한다. 강두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괴물을 처치했지만 큰 희생을 치렀을 뿐, 그로 인한 어떤 공치사도 받지 못한다. 뉴스와 신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일 벌린 넘들은 어디 가고...

덧붙여, 이런 이야기가 유지되기 위해서 영화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자는 언제나 나머지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만 받는다.

현남은 직장 상사로부터 맨날 할 일을 빼먹고 싸돌아다닌다고 비난받으며, 강두네 가족은 위험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로 도주한 위험인물들로 체포 대상이 된다.

고독한 현남을 응원하는 건 상상의 관중들과

현남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 뿐이다


게다가, 그 와중에 규칙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은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


현남이 필사적으로 도망칠 때 비상구에 가득 쌓인 물건들과 닫힘 버튼을 눌러도 닫히지 않는 엘리베이터 문이나, 강두네 가족을 바이러스 보균자로 분류해 끌고와서는 아무 대책없이 다른 환자들과 의사들에게 노출시키는 병원시스템이 바로 그런 규칙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이다.

이런 일도 상당히 익숙하다

결국 이 두 영화에서 드러난 감독의 관점은,

이 세상은 사고치는 놈과 해결하는 놈이 따로 있으며, 좀 배우고 권력 있다는 놈 치고 제구실 하는 놈 없고, 오히려 그 빈틈은 못 배우고 권력 없는 민중이 대신 해결해온, 본말전도의 법칙에 따르는 세상이다.


영화 괴물에서 반미의식이 드러난다고 하지만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 그의 관점은 반미라기 보다는 반권력, 반시스템, 반지식인 이다. 윗대가리들만 제대로 하면 벌어지지 않을 사건들로 인해서 무고한 시민들만 죽어나간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관점이 지나치지 않을까? 너무 비관적이고 급진적이지 않을까?
글쎄 … 경제위기, 4대강, 용산참사, 외환위기,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가스폭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등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위기와 참사들을 생각해봐도 이런 관점이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언제나 윗대가리들이 제대로 일을 했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사건이고, 결국 그로 인한 피해는 무고한 민중들이 뒤집어써야 하지 않았던가. 경제위기, 외환위기 때 금융시스템을 비판하고 고치기는 커녕 엉뚱한 정책으로 일관하는 실제 정부의 행태나, 정작 괴물에는 신경쓰지 않고 엉뚱한 바이러스 공포만 퍼트리는 영화속 정부의 행태가 크게 다른가?

어쨌든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같은 정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한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다른 영화는 한국영화사의 신기록을 세웠다는 점이다.



 

영진공 짱가

“7년의 밤”. 독자라서 행복한, 스티븐킹보다 서늘한, 그러나 뜨거운 소설


독자라서 행복한,
독자라서 행복한 소설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라면 상상도 못할 주제, 나라면 상상도 못할 스케일, 나라면 상상도 못할 디테일, 나라면 엄두도 못 낼 전개. 그런 것들을 읽어나가는 기쁨을 선사하는 소설 말이다. 독자에게 최악인 소설이라면 그 반대의 것일 것이다. ‘이런 소설 나도 쓰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 실제로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 사실 여부와는 관련 없이 그 만큼 도무지 신선한 것도 압도적인 것도 없는 소설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스티븐 킹 보다 서늘한,
내 독서량이 일천하기 때문에 아무 소설이이나 함부로 연상하고 색깔을 입히는 것은 안될일이다. 하지만 처음 소설을 잡고부터 이런 저런 소설들에서 스타일이 겹치는 부분이 없는 지를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7년의 밤’을 손에 잡고 정신 없이 읽어 나가다가 문득 생각해 보면 얼른 떠오르는 한국 소설은 없다. 내가 장르 문학을 많이 읽지 않아서인 탓도 있겠지만, 추리, 공포, 범죄 소설의 느낌을 그려내는 본격 문학 주류 작가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여, 일천한 독서력(讀書歷)에 떠올린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와 스티븐 킹이다. 배경에 대한 세밀한 포석, 분/초 단위의 촘촘한 사건관계 구성, 불우한 주인공(?) 등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떠올리게 했으며, 인간 내면에 존재한 불안감과 공포. 그 불안감과 공포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느냐에 따라 그 자신이 괴물이 될수도, 혹은 괴물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음을 그려낸 세세한 내면묘사와, ‘인간 집단’자체가 얼마나 비이성적인 괴물이며 무자비한 폭력을 행하는지를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스티븐 킹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뜨거운 소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와 스키븐 킹의 소설과 다른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7년의 밤’이 뜨겁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은 간혹 ‘따뜻한 것’은 있으되- 내 영혼의 아틸란티스, 사다리의 마지막 칸 등- ‘뜨거운 것’은 없었던 듯 하다. 스티븐 킹 소설에서 따스함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련한 회한이랄까.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다. 7년의 밤에는 ‘현재 진행 중인 것’에 대해 잃지 않으려는 뜨거움이 있다. 무자비한 폭력의 사이에서도 냉소와 허무와 자기 부정으로 상황을 등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따라 붙고 물고 늘어지는 그 뜨거움. 그 어떤 기법적인 장점보다, 그 뜨거움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영진공 라이

영화로 수다떨기 (4), 반전에 대하여



Q. 금요일 밤에는 뭐하고 보내시나요?

금요일날 … 뭐 영화를 볼 때도 있고, 게임을 할 때도 있는데
요즘은 미국드라마에 빠져서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Q. 음 … 뭔가 박사님 이미지와는 다른 광란의 밤이 있으면, 반전일텐데 별로 그렇지 않군요.

제가 점잖고 차분해보이시나 보죠. 사람들은 이상하게 제가 생각이 깊을거라고 오해를 하더라고요. 사실은 아무 생각이 없거나 햄버거나 순대국밥 사먹을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아… 순대국밥…. 돼지국밥도 좋아함

Q. (먹는 얘기는 그만 닥치고) 오늘 주제는 반전 영화…그 묘미와 강박이에요. 고전 영화가 처음에 만들어질 때요, 마술사들이 감독인 경우도 꽤 있더라구요, 뭔가 속임수를 써서, 색다른 것을 이끌어내는 것, 관객을 속이면서 놀라게 하는 것, 모든 감독들의 꿈 중 하나라고 하던데요?

잘 말씀하셨습니다. 멜리에스라는 프랑스 마술사가 <달세계 여행>이라는 최초의 SF영화를 만들었죠. 자기 마술기법을 사용해서 달나라로 떠나는 우주여행 이야기를 영화로 찍었는데요. 최초의 특수효과가 사용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영화는 마술과 비슷한 면이 많네요. 속이고 놀라게 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다 그렇긴 하지만, 요즘 마술들도 거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되어가고 있죠.


멜리에르가 만든 세계최초의 SF영화 <달세계 여행>,

이 영화에는 에디슨이 엮인 슬픈 전설이 있다는…
그 전설이 알고싶으시면 이 링크를 =>
http://enterfactory.net/206?category=0

Q. 잘 만든 반전 영화, 보고 나면 괜히 입이 간질간질, 그 반전을 말해주고 싶은 경우도 있어요.

네, 물론 그런 행동은 남의 재미를 빼앗는 행동이라 재미를 망쳤다는 뜻으로 스포일러라고 불립니다만, 그래도 남들은 모르고 나만 알고 있는게 있다는 건 간질간질하고 재미있는 일이죠.

Q. 요즘, 특히나 스릴러 영화들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스릴러 영화 속에서 반전 빼놓을 수 없죠. 아카데미가 선택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액션 영화 <밴티지 포인트>, <마이 뉴 파트너> 등이 그러하구요,

뭐 반전 영화 중에 대명사라면 <식스 센스>-‘내 눈에 귀신이 보여요’라든가 <유주얼 서스펙트>-‘절름발이가 범인이다’ … 가 기억나기도 하는데요, 박사님이 기억하시는 반전 영화, 어떤 것이 있나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너무 결말이 너무 황당해서 반전이라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저는 역시 지난 번에 말씀드린 <행복했던 여자>도 인상 깊었고요. 아마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유주얼 서스펙트>하고 <식스센스> 가 최고죠. 근데 두 영화의 반전 포인트가 달라요.

<유주얼서스펙트>는 주인공이 속이는 영화지만, <식스센스>는 주인공이 속는 영화죠. 저는 그래서 첫 번째를 제1종 반전, 두 번째를 제2종 반전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두 번째 유형은 최근에 많아졌어요.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몰랐어. 종류의 영화인데, 아마도 사회가 급변하면서 생긴 가치관의 혼란이 반영된 게 아닐까 싶어요.


<유주얼 서스펙트> 반전 영화의 유행을 만들다



새로운 유형의 반전 영화 붐을 연 <식스센스>

Q. 보면, 어느 정도 반전 영화의 공식이나 소재가 있어요. <아이덴티티>의 다중인격이라든가, <싸인>의 범인이 외계인이라든가, <식스센스><디 아더스>의 귀신, <범죄의 재구성>의 쌍둥이, <오픈 유어 아이즈>나 <바닐라 스카이>의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올드 보이>나 의 최면 등, 소재가 점점 다양해져요.

반전이란 게 결국은 관객들에게 예상밖의 경험을 제공하는 게임입니다. 관객이 어떤 것을 예상하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어야 그 예상을 벗어나는 결말을 만들 수 있는거죠. 그런데 갈수록 많은 기법들이 사용되니까 그만큼 새로운 것 낯선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더 다양한 소재들이 사용되는 거죠.

이렇게 그 결말로 이끌어가는 경로는 다양하지만 결국 반전의 내용은 결국 둘 중에 하나에요. 알고 보니 주인공이 거짓말한 거였다. 아니면 주인공 자신도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었다.

Q. 관객들도 점점 영화를 보는 눈이 높아져서, 다양한 소재와 공식이 있어도 제대로 반전의 재미를 주기란 어려울텐데요….

반전영화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반드시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복선이예요. 결말을 어떻게든 암시하는 내용이죠. 이런 게 영화 중간에 들어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관객과 공평한 게임이 되거든요.

두 번째는 당연하지만 관객의 예상을 벗어난 결말입니다. 이 둘이 다 있어야 성공한 반전영화가 되요. 만약 복선없이 관객의 예상을 벗어난 결말만 제공하면 영화 전체가 황당해져버립니다. 이게 뭐야. 이런 상태가 되는거죠. 그리고 물론 복선을 너무 충실하게 주는 바람에 관객들이 이미 결말을 다 예상해버리면 영화는 그냥 시시한 영화가 되고 말죠. 니가 뭔 얘기 하려는지 이미 다 알지롱. 고작 그거야? 뭐 이렇게 되는거죠.


왜 저 아일랜드 아저씨 이름이 뜬금없이 ‘고바야시’ 지? 이것이 알고보면 복선 …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이건 복선이랄 건 없는데,

배역에 어울리지 않게 지명도 높은 배우가 출연하면 대개 그 인간이 범인

Q. 박사님! 강박증은 어떤 심리일까요? 현대인들 누구나 하나쯤의 강박증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을까…하는데요, 특히,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반전 강박증에 시달리기도 할 것 같아요.

강박증이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심리입니다. 정상적이고 위생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약간의 강박증이 필요해요. 예를 들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다음이나 외출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반드시 손을 씻는다는 것 같은 행동도 강박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하면 병에 잘 안걸리거든요. 사실 제가 예전에는 잘 안씻었는데, 몇 년 전부터 손 씻는 습관을 들였거든요. 그러니까 정말 감기에 안걸리더라구요.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반전 강박에 빠지는 것도 똑같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야 관객이 재미있어하고 그래야 영화가 흥행될거라고 믿으니까요.


그는 빈틈을 참지못하는 강박증 환자였다 …

 



Q. 그렇다보니, 실패한 반전 영화들도 꽤 많이 나와요. 반전이 한 번에 제대로 충격적으로 이루어져야지 꽤 성공한건데, 반전의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라든가, 마구잡이로 풀어놓은 반전 암시용 인물들이나 사건을 해결하지 않고, 그대로 끝내버리는 영화라든가요…

아까 손씻는것에 비유하자면, 적당히 위생을 유지할 만큼 손을 자주 씻는건 좋은 일이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손을 안 씻으면 불안해서 참지를 못해요. 이렇게 불안감 때문에 억지로 손을 계속 씻으면 위생에도 도움이 안되고 생활하는데 오히려 큰 불편이 생기죠. 그게 강박증이거든요. 반전도 강박증으로만 만들면 진짜 중요한 알맹이는 빠지고 반전만 남는 영화가 되겠죠.

사실 반전으로 유명한 영화들이 성공한 이유는 반전 때문만은 아니거든요. <유주얼 서스펙트>는 이야기 자체가 꽤나 쿨하고 재미있어요. <식스센스>같은 경우는 반전에 놀라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고요. 저는 그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아이하고 엄마하고 차안에 앉아 대화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늘 코끝이 찡해요.

Q. 또 이 반전이요, 억지스럽지는 않지만, 너무 고난이도면 관객이 논란이 많이 이는 것 같아요. 똑똑해야하는데, 적당히 똑똑한 반전, 참 반전 영화 제작은 어렵고, 그래서 매력적인 것 같은데요? 사람들이 반전 영화에 끊임 없이 매료되는 이유, 무엇일까요?

아마도 우리 세상과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실제로 세상이 좀 반전 스럽쟎아요.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더라. 믿는 도끼가 발등을 찍고 … 진실은 저 너머에 있고 … 그게 또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세상의 모습이기도 해요.

예를 들어. <혈의 누>하고 <박수칠 때 떠나라>는 시대는 다른데 이야기 내용이 비슷해요. 둘다 차승원이 주연을 맡았다는 공통점도 있지만, 그 차승원의 역할이 뒤늦게 숨겨진 진실을 알았는데 미처 제대로 밝혀내지도 못하고 박수칠 때 떠나는 역할이거든요.



차승원 주연의 두 반전영화

Q. 앎에 대한 강한 욕구, 때로는 그것이 정말 뒷통수를 제대로 맞는 수가 있는 반전인데도 사람들은 진실을 알려고 해요. 그런데, 또 요즘 세상은 진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사람도 많은데, 모르는 게 약, 모르는 척 하는 게 상책이라면서도 사람들의 이런 욕구나 심리, 어떻게 해석하고 계시나요?

아는 게 힘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 서로 다른 세상에서 통하는 원칙이죠.
학습된 무기력이라는게 있습니다. 내가 뭔 짓을 해도 세상은 변치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우리는 무기력을 학습하게 되죠. 이런 세상에서는 모르는게 약이예요.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알기만 하면 복장만 터질테니까요.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면 아는게 힘이 되겠죠. 뭘 알아야 어떻게 할지를 판단할 수 있으니까요.


요즘은 특히, 너무 알려고 하면 다친다는 …

Q. 네, 오늘 이런저런 영화 속 심리학, 반전의 묘미와 반전의 강박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많이 되었네요. 반전이 사람의 심리를 가지고 노는 것이기 때문에, 박사님이 보기에 이런 반전, 요즘 먹힐 것이다 … 싶은 반전이 있다면요?

글쎄요.. 그런 게 있으면 지금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텐데 …

최근 우리나라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전문가들이 바보짓을 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그걸 막는 이야기예요. 요즘 세상이 정말 그렇기 때문이겠죠. 이런 이야기와 반전을 섞으면 뭐가 나올 것 같긴 한데 잘은 모르겠어요.


사실 <괴물>이 이미 그 얘기를 했고 … 요즘 우리나라가 뭐 영화 자체고 …

Q. 급변하는 세상도 반전이면 반전이죠?

네. 인생 자체가 반전의 연속이죠. 그래서 사는 재미도 있는거고요.
모든 게 예측대로 되어가는 인생처럼 재미없는 인생도 아마 없을겁니다.

Q. 네,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구요, 다음에는 어떤 내용으로 만나볼까요?

다중인격이 어떨까요? 영화에서 종종 사용된 소재이기도 하고,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


영진공 짱가


“마더” vs “셔터 아일랜드”, 진실을 대하는 두 가지 방법

천안함 전사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차마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 진실이 놀랍거나 거대하거나 처참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내가 당연하게 여기고 의지하던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식스센스>의 주인공이 직면했던 진실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스스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현실을 왜곡해왔던,
자신의 모습이 그 진실 속에 담겨있었다.


걔네들은 지가 보고 싶은 것만 봐요

내가 그리 잘못 알았던 것이 누군가에게 속은 탓이라면,
나를 속인 그를 비난하면 된다.

하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그 거짓말을 받아들여왔다면,
그래서 내 삶을 지금까지 그 거짓말에 기초해서 쌓아올렸다면,
그 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 존재 자체를 뭉개야 한다.

결국 진실이냐 내 존재냐의 갈림길에 서는 것이다.

<셔터 아일랜드>와 <마더>,
전자는 2차 대전과 매카시즘을 배경삼은 미국 영화고,
후자는 피끓는 모정을 소재로 한 우리나라 영화다.
하지만 두 영화는 여러 가지로 비슷한 면이 있다.

일단 두 영화의 주인공은 필사적으로 진실을 찾는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가,
바로 그 진실에 숨겨져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도달한 진실은 탈출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끔찍한 절망과 죄책감의 구렁텅이로 들어가는 입구였을 뿐이다.


진실을 찾아내겠어!! 정의를 구현하겠어!!!


이게 진실이라니…


 

 



우리 애 그런 애 아니거등? 내가 진실을 찾아내 보여주게써!!!


아, 이게 진실이라니 … -_-

거기서 두 주인공은 진실이냐 아니면 내 존재냐의 갈림길에 마주친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한다.

<셔터 아일랜드>의 테디는 ‘괴물로 살기보다는 결백하게 죽기’를 선택한다.
영원히 죄책감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인간으로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지우기로 한다.
죄책감이 자신을 먹어치우기 전에 스스로 자신을 지우기로 한 것이다.


그래, 이게 차라리 낫지 …

하지만 <마더>의 엄마는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는 자신과 자식을 위해서 진실을 지우기로 한다.
망각의 침 한 뜸과 묻지마 관광버스의 음률에 모든 것을 흘려보내기로 한다.

비록 자신의 내면은 죄책감으로 조금씩 썩어가겠지만,
겉보기의 삶은 평온할 것이며 모두가 만족할 것이라고 스스로 안위하며 …
이는 ‘결백하게 죽기보다는 괴물로 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


침맞고 묻지마 관광 가자!!!

<마더>의 결말을 보던 당시에는 그저 그녀가 안쓰러웠다.
과연 그녀의 삶이 그 소망대로 이루어질까.
그의 삶이 과연 평온할까. 아들은 그녀를 이제 어떻게 대할까?
그녀는 예전처럼 자신있게 아들을 변호할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른 뒤, 그녀의 삶에 진실이라곤 뭐가 남아있을까?
괴물로 산다는 것은 이미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다 부질없는 걱정이었고,
그저 복에 겨운 한때의 주제넘은 참견이었다.

봉준호는 알고 있었던 거다.
이 나라가 바로 그런 수많은 마더들의 나라라는 것을.
괴물도 한 둘 일 때야 이상하지만 허구헌날 괴물들만 출몰하는 곳에선,
오히려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테디, 너는 셔터 아일랜드에서 치료받을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좀 살아봐야 했다.
그랬더라면 “괴물로 오래 사느니 순수하게 죽을래” 따위의 헛소리는 애저녁에 치워버리고 똘망똘망 괴물로 천수를 누리며 잘 살다가 죽었을 거다.


테디, 너 그 딴 마음가짐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일년도 못버틸거야 …


서해에서 또 수많은 젊음이 스러졌는데
온갖 ‘라면’ 을 팔고 주접을 떨어대며
진실을 눈물, 아니 콧물로 덮으려는 누군가의 면상에서
괴물로 살기의 한 경지에 이른 초고수 괴물의 악취를 느끼며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