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독자라서 행복한, 스티븐킹보다 서늘한, 그러나 뜨거운 소설


독자라서 행복한,
독자라서 행복한 소설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라면 상상도 못할 주제, 나라면 상상도 못할 스케일, 나라면 상상도 못할 디테일, 나라면 엄두도 못 낼 전개. 그런 것들을 읽어나가는 기쁨을 선사하는 소설 말이다. 독자에게 최악인 소설이라면 그 반대의 것일 것이다. ‘이런 소설 나도 쓰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 실제로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 사실 여부와는 관련 없이 그 만큼 도무지 신선한 것도 압도적인 것도 없는 소설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스티븐 킹 보다 서늘한,
내 독서량이 일천하기 때문에 아무 소설이이나 함부로 연상하고 색깔을 입히는 것은 안될일이다. 하지만 처음 소설을 잡고부터 이런 저런 소설들에서 스타일이 겹치는 부분이 없는 지를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7년의 밤’을 손에 잡고 정신 없이 읽어 나가다가 문득 생각해 보면 얼른 떠오르는 한국 소설은 없다. 내가 장르 문학을 많이 읽지 않아서인 탓도 있겠지만, 추리, 공포, 범죄 소설의 느낌을 그려내는 본격 문학 주류 작가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여, 일천한 독서력(讀書歷)에 떠올린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와 스티븐 킹이다. 배경에 대한 세밀한 포석, 분/초 단위의 촘촘한 사건관계 구성, 불우한 주인공(?) 등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떠올리게 했으며, 인간 내면에 존재한 불안감과 공포. 그 불안감과 공포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느냐에 따라 그 자신이 괴물이 될수도, 혹은 괴물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음을 그려낸 세세한 내면묘사와, ‘인간 집단’자체가 얼마나 비이성적인 괴물이며 무자비한 폭력을 행하는지를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스티븐 킹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뜨거운 소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와 스키븐 킹의 소설과 다른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7년의 밤’이 뜨겁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은 간혹 ‘따뜻한 것’은 있으되- 내 영혼의 아틸란티스, 사다리의 마지막 칸 등- ‘뜨거운 것’은 없었던 듯 하다. 스티븐 킹 소설에서 따스함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련한 회한이랄까.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다. 7년의 밤에는 ‘현재 진행 중인 것’에 대해 잃지 않으려는 뜨거움이 있다. 무자비한 폭력의 사이에서도 냉소와 허무와 자기 부정으로 상황을 등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따라 붙고 물고 늘어지는 그 뜨거움. 그 어떤 기법적인 장점보다, 그 뜨거움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영진공 라이

“샤이닝”, 내 속의 또 다른 나

공부하면서 읽은 발달심리학 책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한 부분의 서두에 인터뷰 기록이 있었는데, 이게 상당히 재미있다. 그것은 “너는 누구니?” 라는 질문에 대해서 4살짜리와 8살짜리, 그리고 13살짜리가 한 대답을 녹취한 글이었다.

4살짜리는 아주 천진난만하다. 내 이름은 아무개이고, 나는 오렌지색 강아지와 아빠 엄마와 누나 둘이랑 같이 살고, 나는 힘도 세고 알파벳도 하고 숫자셈도 할 줄 안다고 자신 있게 자랑한다. 물론 그 아이는 알파벳도 제대로 못하고 숫자셈도 잘 못한다만, 상관없다. 이 나이때는 세상의 중심은 자기자신이니까.

8살짜리는 4살짜리와 약간 다르다. 남이 어떻게 보던 상관없는 나의 모습을 신나게 떠들던 4살짜리와는 달리 이 8살짜리 아이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 아이는 “나는 아주 인기가 있어요”라고 말한다. 인기는 내 능력만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내가 아무리 잘나도 인기를 얻기는커녕 왕따가 될 수도 있다. 독불장군이라는 말처럼,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고, 혼자서는 인기인이 될 수 없다. 남들이 그렇게 봐줘야 하는 거다.

즉, 인기는 내가 보는 나(철학자들은 이것을 주관적 자아라고 말한다)가 아니라 남들이 보는 나(이것은 객관적인 자아이다)의 문제이다. 남이 보는 나를 의식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나는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왜 남들은 내 언니를 더 예쁘다고 하는 걸까 … 나는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산수시험 성적이 나보다 좋은 애가 있을까 … 이 흔들림이 자아를 성장시킨다.

13살짜리는 더 달라진다. 그 아이의 인터뷰 첫 마디는 “나도 내가 어떤 애인지 잘 모르겠어요” 로 시작한다. 생각이 깊어지면서 스스로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 얻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다. 인간의 자아는 간단명료하지 않다. 내 속에는 희망과 절망, 선의와 악의, 정직과 위선이 뒤섞여 존재한다. 천사와 악마는 모두 내 속에 존재한다.


multiple personality disorder by ~freys on deviantART

다중성격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어쩌면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실제로 정확히 다중성격장애로 진단된 사람은 거의 없다. 전문가들도 이 장애가 진짜 있는 건지 아니면 영악한 범죄자들의 교묘한 속임수일 뿐인지에 대해서 여전히 논의가 분분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이 증상에 대해서 대단한 호기심을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내 속에 존재하는 다른 나”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듯, 천길 물 속은 알아도 한치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은 바로 우리 각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만약 내 속에 내가 알지 못하는 존재가 숨어있다면, 이거 상당히 무서운 얘기 아닐까?

『수퍼맨』 같은 만화 속 영웅들의 대오각성도 결국 자기 속에 숨어있던 영웅스러움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내가 잘 아는데 결코 영웅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 속에 숨겨진 미지의 존재는 영웅의 반대쪽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만약 자기 속에 숨겨진 게 영웅이 아니라 골룸 같은 비루함이나 짐승 같은 잔인함이라면? 내 마음속의 심연에 그런 괴물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다면? 아마 그 어떤 공포도 여기에 비할 수는 없을 거다.
 
다른 괴물로부터는 도망칠 수 있다. 그 괴물과 맞서 싸워서 운이 좋다면 제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나 자신이라면 나는 도망칠 수도, 싸워 이길 수도 없다. 내가 존재하는 한 괴물도 존재할 것이니까 말이다.

학교에서 교사로 일도 하고 소설도 쓰는 한 남자가 한겨울 콜로라도산 속의 빈 호텔에 들어선다. 그는 널럴한 마음으로 폭설로 도로가 끊겨 5개월 간 휴관하는 이 호텔을 관리나 하면서 소설을 쓸 심산이었다. 그런데 호텔 지배인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 몇 년 전에도 어떤 남자가 이 호텔이 휴관할 때 임시 관리인으로 왔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회까닥 돌아버려서는 자기 가족을 다 죽였다는 거다. 얼마 후, 주인공은 호텔에 존재할 리 없는 사람들을 마주치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그들에게 그 살인사건에 대해서 물어본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한다. “그 살인마가 바로 당신이잖소!” 라고 말이다.


『샤이닝』은 우리의 근원적인 공포를 다룬다.
내 속에 존재하는 살인마에 대해서, 내 마음속 심연에 존재하는 괴물에 대해서, 그것이 눈을 뜨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자기 속의 괴물을 느껴본 사람에게 이 영화는 정말 남의 얘기가 아니다.

영진공 짱가

<미스트>, 프랭크 다라본트 – 직접적인 정치적 해석을 가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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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 숨어있어 더욱 무서운.
스티븐 킹은 내가 미국작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데, 그건 그가 너무나 탁월한 이야기꾼이라 그렇다. 현대소설이라는 게 심리 타령, 부조리 타령, 소외와 고독 타령을 하기 마련인데, 스티븐 킹은 이야기 자체를 너무나 매력적으로 만들어낼 뿐 아니라 그것을 또한 아주 매력적인 필치로 그려내는 매우 희귀한 – 그리고 고전적인 작가 중 한 명이다. 게다가 스티븐 킹의 소설은 겉으로 드러나는 줄거리 자체도 매우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그 안의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인간 본연이 가진 어둡고 격렬한 감정을 매우 탁월하게 표현해낸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이 나오는 족족 영화로 옮겨지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영화 버전도 근사한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은 그닥 당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드문 작품들에 <미스트>가 새로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미스트>가 그려내는 가장 기본적인 공포는 이유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의 공격이지만, 이 영화가 정말로 힘을 받는 장면은 마샤 게이 하든이 연기한 카모디 부인의 종교적 선동과 이로 인해 결집되고 분출되는 인간의 ‘광기’이다. 우리는 데이빗의 눈을 통해 처음으로 괴생명체의 촉수를 보는 장면이나 거대한 곤충들이 마트를 습격하는 장면에서는 박진감과 스릴을 느끼지만,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희생제물로 요구하며 아우성치고 결국 군인을 죽이는 장면에서는 끔찍한 공포를 느낀다. 괴물들 자체는 싸구려 CG와 인형의 냄새가 펄펄 나는데, 이것들의 공격을 묘사하는 다라본트의 카메라는 아주 신이 난 데다가 이 상황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매우 효과적으로 잡아낸다.


괴물들의 공격을 요한계시록과 엮은 것은 너무나 탁월한 아이디어(이는 아마도 원작자인 스티븐 킹의 공일 것이다). 거기에 다라본트는 마샤 게이 하든의 카모디 부인을 매우 성실하고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데이빗이 마트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그에게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장면에서부터 해서, 점차 그의 과민 신경증을 찬찬히 드러내고, 더불어 이 여인의 존재감은 점점 강력해진다. 보기엔 별 볼품없는 나이든 중년여인이었던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한 카리스마를 얻으며 좌중을 압도한다. 그러나 그녀의 연기는 매우 세심하게 계산돼 있어서, 영화 속에서는 사람들을 충분히 홀리는 데에 성공하지만 스크린 밖 관객들에겐 정말 *어마어마한*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스크린 바깥에 있는 우리는 다라본트의 묘사와 마샤 게이 하든의 연기에서, 그녀의 선동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너무나 명확히 인지를 받기 때문에 오히려 공포가 높아진다. 만약 우리가 영화 속 인물이었다면 그녀의 선동에 넘어가고도 남아 아무에게나 칼을 휘두르는 저 광기의 대중 중 하나가 충분히 되고도 남을 것이라는 공포, 말이다. 이 공포는 심지어 괴물들의 습격이 가져다주는 공포를 훨씬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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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던 아줌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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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다.


원작소설에서는 데이빗 일행이 마트를 벗어나는 것으로 끝난다고 하는데, 다라본트가 덧붙인 엔딩은 가히 충격적이다. 영화들 중 수많은 비극적인 엔딩 중에 이 영화만큼 잔인하고 비극적인 엔딩이 또 있을까? 그 장면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영화에서라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구했을 과단성과 행동력이 오히려 비극을 초래했다’고 말하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다라본트 감독이 굳이 그런 엔딩을 설정한 것은, 주인공 데이빗의 행동력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다만 “타이밍이 어긋난 것”이 문제라는 것, 즉 인간이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어떤 행동을 선택하고 행동에 옮긴다 하더라도,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있는 비극적 운명의 힘이라는 것이 있어 (우리는 이것을 때로 ‘운’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것이 그 무수한 노력과 최선의 선택을 최악의 결과로 되돌려놓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겐 공포가 될 수밖에 없음을 강변하는 듯하다. 당연히 죽을 것이라 믿었던 여인은 자식들과 함께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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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지켜주겠다던 아들과의 약속. 과연 지킬 수 있을까?



결국 이 영화의 공포의 흐름은


외부 존재의 직접적, 물리적 공격 < 인간 본성에 내재한 광기와 폭력 << 넘사벽 << 인간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힘

이 된다는 것. 애초에 괴생명체가 출현한 것 역시 다른 차원의 문을 함부로 열면서 인간의 통제가 실패했기 때문이었으니, 데이빗이 그런 엔딩을 맞게 된 것도 영화 내적으로 크게 논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은 엄한 놈(조직)이 저질러놓고 그 피해를 오롯이 엄한 다른 개인이 지게 된 게 마음이 아프달까. 이제껏 국내에 소개된 수많은 미국산 ‘포스트-9.11’ 영화들 중 가장 직접적이고도 탁월한 정치적 해석을 가진 영화로 보아도 무방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


ps1. 주연을 맡은 토마스 제인의 연기는 역시 부족했다는 생각. 역시 엔딩장면에서 그 엄청난 비극을 표현해 내는 데에는 많이 부족했다는.


ps2. 영화 속 상황과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그토록 맞아떨어진다면, ‘그러므로 요한계시록대로 다른 예언도 실행될 것이다’가 아니라 ‘과거에도 이런 일이 발생한 적이 있다’로 해석하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요한계시록이 아무리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은유적 / 신화적) 기록이 아니라 요한이 본 환상을 서술한 것이라 해도, 어쩌면 그것은 인류가 잊어버린 고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상의) 기억을 요한이 떠올린 것일수도 있다. 물론 더 합리적이고 더 쉬운 해석들이 존재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