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밀리 맨”, 제 2의 길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






대니얼 레빈슨의 책 <남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에 의하면,
우리의 인생은 전환기와 안정기의 시소게임이다.

최초의 전환기는 사춘기에 찾아온다.
2차 성징으로 몸이 아이에서 남자 혹은 여자로 바뀌고, 그 결과 매일 보는 거울 속의 내가 어느 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을 보는 관점도 바뀐다. 숨겨진 달의 뒷면을 발견한 천문학자처럼,
이 세상이 내가 예전부터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결국 정체성의 위기가 찾아오면서 모든 것을 재정립하게 된다.
정체성의 정립은 마음을 정리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무슨 직업을 선택하고 누구와 친구관계를 맺고 얼마나 잘 연애를 하는지로 확인받는 일종의 과제다.

청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취직해서 나름 경력도 쌓고, 친구들도 생기고, 연애도 몇 번 해서 결혼을 하기도 한다.

이제 안정기에 접어드는 것이다.



모든 것이 안정되었으니 정체성이 정립된 것 같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딴생각을 하는 것이 인지상정.
그토록 바라던 안정기에 도달했건만, 사람들은 만족하기는커녕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지금 내가 선택한 것이 정말 최선이었을까? 더 좋은 선택은 없었을까?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30여년 남았는데 그 30년을 지금 하는 이 일을 하면서 보내는 게 맞을까? 내가 평생 저 사람과 같이 살 수 있을까? 그동안 목표 달성하느라 버려두었던 자신의 내면에 눈을 돌리며 갑자기 억눌러두었던 내향성이 치솟아 오른다.

의문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공포로 다가온다.
만약 내가 선택한 이 길이 정답이 아니라면, 과거의 어디에서부터 잘못 접어든 것이었단 말인가? 이제 정녕 돌이킬 수는 없단 말인가? 다행히, 현대인들의 건강상태는 매우 좋기 때문에 우리에겐 제2, 제3의 전환기를 감당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혀 새로운 일을 하거나, 결혼해서 아이만 키우던 주부가 어느 날 전문인으로 새로운 경력을 만들어가는 일이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누구는 이 시기에 이혼을 하기도 하고, 바람을 피우기도 한다.
역시 잘 봐주자면 대안의 탐색이다. 이런 위기는 그 사람이 지금 현재 얼마나 잘 나가는지와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온다. 오히려 확실하게 성공한 사람일수록 더욱 더 딴생각을 많이 할 수도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등이 따실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대안을 포기하고 지금 주어진 그 삶을 계속하기로 한다.
약간 불만은 있지만 그건 누구나 겪는 거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질문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좋을까? 그대로 계속 사는 게 나을까, 아니면 바꿀 수 있을 때 바꾸는 것이 더 나을까?

같은 저자가 쓴 '여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도 있습니다

영화 『패밀리맨』은 바로 이런 대안탐색 시기, 인생의 제 2 전환기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잭(“니콜라스 케이지”)은 13년 전에는 뉴욕근교 소도시에서 지냈지만 기회를 잘 잡은 덕분에 지금은 뉴욕의 잘 나가는 투자전문가가 되어 있다. 물론 독신으로서 환락을 만끽하며 흥청망청 잘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우연히 들른 잡화점에서 그는 예사롭지 않은 강도를 만난다. 그리고는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 다음날부터 그는 13년 전에 기회를 잡지 못하고 소도시에 눌러앉아야 했던 제2의 잭으로 살게 된다. 처음에는 하루하루가 당혹과 좌절의 연속이다. 그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는 벌써 둘이나 있고, 장인의 타이어 가계를 이어받아 나름 안정되었지만 꿈이나 희망도 없는 일상 속에서 서랍 속에 숨겨둔 술이나 홀짝대면서 지내고 있었다.

낮에는 사장님의 인정을 받고,

밤에는 미녀들의 환대를 받으며 살던 사람이...

어느날 깨어 보니 옥닥복닥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버렸더란...

그러니까 예쁜 마누라가 다정하게 팔짱을 껴줘도 이렇게 똥 씹은 표정이지...

이렇게 끔찍한 삶이라니… 진저리를 치던 그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기자기한 일상의 가치와 즐거움에 눈을 뜬다. 아내를 아끼는 남편,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의 변신은 처음에 자신을 경계하던 큰 딸의 인증을 받으며 완성된다.




물론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더 알고 싶으면 영화를 보시길 …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제 2의 인생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우화이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은 영화속의 진짜 잭이 아니라 제2의 잭에 더 가까우며, 그들이 꿈꾸는 제2의 인생은 진짜 잭의 인생이라는 점이다(사실, 제2의 잭만 해도 대단한거 아닌가? 작지만 안정된 사업체를 운영하는 경영자에다가 예쁜 마누라에 귀여운 자식들까지 있는 단란한 가정의 가장 아닌가.)

하지만 실상은 그게 이 영화가 존재하는 의미다. 영화는 제2의 평범한 잭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봐. 저렇게 잘나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행복을 모른다고. 만약에 저들이 그걸 알기만 하면 휘황찬란한 자기 삶을 포기하고 우리 같은 삶을 선택할거라니까? 그러니까 딴 생각 하지 말고 지금 주어진 삶에 만족하면서 열심히 살라구.”

굳이 영화의 메시지에 반대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정말 그럴 수도 있으니까.
누구든 남의 떡을 더 크게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평범한 제2의 인생을 부러워할 자격을 갖추려면 휘황찬란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는 역설은 여전히 남는다.

레빈슨의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인생의 제2 전환기에서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주어진 삶을 계속 하는 것이 좋을까?
답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남은 시간이 많고 여력이 많을수록, 다른 길로 과감하게 전환한 사람들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다. 주어진 삶에 집착하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후회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현대사회가 특히 그렇다.

현대인의 예상 평균수명은 85세 이상이라던데, 계산해보자면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정년퇴직까지 한 다음에도 최소한 30여년을 뭔가 하면서 보내야 한다는 얘기다. 이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는 얘기이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텅빈 30년을 견뎌내야 한다는 얘기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삶의 전환도 많이 해본 사람들이 더 잘한다. 그러니 말인데, 『패밀리 맨』 같은 영화나 보면서 위안을 삼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기회가 오면 잡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적어도 당신의 나이가 40 이전이라면 말이다.

“밑져야 본전” 이라는 말을 호기롭게 내뱉을 수 있는 인생의 마지노선이 그쯤일 테니 ……

그나저나 자기만 그러면 되지 왜 잘 나가려는 옛날 여자친구 발목을 잡는거냐?


영진공 짱가

“샤이닝”, 내 속의 또 다른 나

공부하면서 읽은 발달심리학 책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한 부분의 서두에 인터뷰 기록이 있었는데, 이게 상당히 재미있다. 그것은 “너는 누구니?” 라는 질문에 대해서 4살짜리와 8살짜리, 그리고 13살짜리가 한 대답을 녹취한 글이었다.

4살짜리는 아주 천진난만하다. 내 이름은 아무개이고, 나는 오렌지색 강아지와 아빠 엄마와 누나 둘이랑 같이 살고, 나는 힘도 세고 알파벳도 하고 숫자셈도 할 줄 안다고 자신 있게 자랑한다. 물론 그 아이는 알파벳도 제대로 못하고 숫자셈도 잘 못한다만, 상관없다. 이 나이때는 세상의 중심은 자기자신이니까.

8살짜리는 4살짜리와 약간 다르다. 남이 어떻게 보던 상관없는 나의 모습을 신나게 떠들던 4살짜리와는 달리 이 8살짜리 아이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 아이는 “나는 아주 인기가 있어요”라고 말한다. 인기는 내 능력만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내가 아무리 잘나도 인기를 얻기는커녕 왕따가 될 수도 있다. 독불장군이라는 말처럼,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고, 혼자서는 인기인이 될 수 없다. 남들이 그렇게 봐줘야 하는 거다.

즉, 인기는 내가 보는 나(철학자들은 이것을 주관적 자아라고 말한다)가 아니라 남들이 보는 나(이것은 객관적인 자아이다)의 문제이다. 남이 보는 나를 의식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나는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왜 남들은 내 언니를 더 예쁘다고 하는 걸까 … 나는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산수시험 성적이 나보다 좋은 애가 있을까 … 이 흔들림이 자아를 성장시킨다.

13살짜리는 더 달라진다. 그 아이의 인터뷰 첫 마디는 “나도 내가 어떤 애인지 잘 모르겠어요” 로 시작한다. 생각이 깊어지면서 스스로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 얻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다. 인간의 자아는 간단명료하지 않다. 내 속에는 희망과 절망, 선의와 악의, 정직과 위선이 뒤섞여 존재한다. 천사와 악마는 모두 내 속에 존재한다.


multiple personality disorder by ~freys on deviantART

다중성격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어쩌면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실제로 정확히 다중성격장애로 진단된 사람은 거의 없다. 전문가들도 이 장애가 진짜 있는 건지 아니면 영악한 범죄자들의 교묘한 속임수일 뿐인지에 대해서 여전히 논의가 분분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이 증상에 대해서 대단한 호기심을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내 속에 존재하는 다른 나”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듯, 천길 물 속은 알아도 한치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은 바로 우리 각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만약 내 속에 내가 알지 못하는 존재가 숨어있다면, 이거 상당히 무서운 얘기 아닐까?

『수퍼맨』 같은 만화 속 영웅들의 대오각성도 결국 자기 속에 숨어있던 영웅스러움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내가 잘 아는데 결코 영웅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 속에 숨겨진 미지의 존재는 영웅의 반대쪽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만약 자기 속에 숨겨진 게 영웅이 아니라 골룸 같은 비루함이나 짐승 같은 잔인함이라면? 내 마음속의 심연에 그런 괴물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다면? 아마 그 어떤 공포도 여기에 비할 수는 없을 거다.
 
다른 괴물로부터는 도망칠 수 있다. 그 괴물과 맞서 싸워서 운이 좋다면 제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나 자신이라면 나는 도망칠 수도, 싸워 이길 수도 없다. 내가 존재하는 한 괴물도 존재할 것이니까 말이다.

학교에서 교사로 일도 하고 소설도 쓰는 한 남자가 한겨울 콜로라도산 속의 빈 호텔에 들어선다. 그는 널럴한 마음으로 폭설로 도로가 끊겨 5개월 간 휴관하는 이 호텔을 관리나 하면서 소설을 쓸 심산이었다. 그런데 호텔 지배인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 몇 년 전에도 어떤 남자가 이 호텔이 휴관할 때 임시 관리인으로 왔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회까닥 돌아버려서는 자기 가족을 다 죽였다는 거다. 얼마 후, 주인공은 호텔에 존재할 리 없는 사람들을 마주치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그들에게 그 살인사건에 대해서 물어본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한다. “그 살인마가 바로 당신이잖소!” 라고 말이다.


『샤이닝』은 우리의 근원적인 공포를 다룬다.
내 속에 존재하는 살인마에 대해서, 내 마음속 심연에 존재하는 괴물에 대해서, 그것이 눈을 뜨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자기 속의 괴물을 느껴본 사람에게 이 영화는 정말 남의 얘기가 아니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