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트>, 프랭크 다라본트 – 직접적인 정치적 해석을 가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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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 숨어있어 더욱 무서운.
스티븐 킹은 내가 미국작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데, 그건 그가 너무나 탁월한 이야기꾼이라 그렇다. 현대소설이라는 게 심리 타령, 부조리 타령, 소외와 고독 타령을 하기 마련인데, 스티븐 킹은 이야기 자체를 너무나 매력적으로 만들어낼 뿐 아니라 그것을 또한 아주 매력적인 필치로 그려내는 매우 희귀한 – 그리고 고전적인 작가 중 한 명이다. 게다가 스티븐 킹의 소설은 겉으로 드러나는 줄거리 자체도 매우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그 안의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인간 본연이 가진 어둡고 격렬한 감정을 매우 탁월하게 표현해낸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이 나오는 족족 영화로 옮겨지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영화 버전도 근사한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은 그닥 당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드문 작품들에 <미스트>가 새로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미스트>가 그려내는 가장 기본적인 공포는 이유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의 공격이지만, 이 영화가 정말로 힘을 받는 장면은 마샤 게이 하든이 연기한 카모디 부인의 종교적 선동과 이로 인해 결집되고 분출되는 인간의 ‘광기’이다. 우리는 데이빗의 눈을 통해 처음으로 괴생명체의 촉수를 보는 장면이나 거대한 곤충들이 마트를 습격하는 장면에서는 박진감과 스릴을 느끼지만,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희생제물로 요구하며 아우성치고 결국 군인을 죽이는 장면에서는 끔찍한 공포를 느낀다. 괴물들 자체는 싸구려 CG와 인형의 냄새가 펄펄 나는데, 이것들의 공격을 묘사하는 다라본트의 카메라는 아주 신이 난 데다가 이 상황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매우 효과적으로 잡아낸다.


괴물들의 공격을 요한계시록과 엮은 것은 너무나 탁월한 아이디어(이는 아마도 원작자인 스티븐 킹의 공일 것이다). 거기에 다라본트는 마샤 게이 하든의 카모디 부인을 매우 성실하고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데이빗이 마트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그에게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장면에서부터 해서, 점차 그의 과민 신경증을 찬찬히 드러내고, 더불어 이 여인의 존재감은 점점 강력해진다. 보기엔 별 볼품없는 나이든 중년여인이었던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한 카리스마를 얻으며 좌중을 압도한다. 그러나 그녀의 연기는 매우 세심하게 계산돼 있어서, 영화 속에서는 사람들을 충분히 홀리는 데에 성공하지만 스크린 밖 관객들에겐 정말 *어마어마한*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스크린 바깥에 있는 우리는 다라본트의 묘사와 마샤 게이 하든의 연기에서, 그녀의 선동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너무나 명확히 인지를 받기 때문에 오히려 공포가 높아진다. 만약 우리가 영화 속 인물이었다면 그녀의 선동에 넘어가고도 남아 아무에게나 칼을 휘두르는 저 광기의 대중 중 하나가 충분히 되고도 남을 것이라는 공포, 말이다. 이 공포는 심지어 괴물들의 습격이 가져다주는 공포를 훨씬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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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던 아줌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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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다.


원작소설에서는 데이빗 일행이 마트를 벗어나는 것으로 끝난다고 하는데, 다라본트가 덧붙인 엔딩은 가히 충격적이다. 영화들 중 수많은 비극적인 엔딩 중에 이 영화만큼 잔인하고 비극적인 엔딩이 또 있을까? 그 장면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영화에서라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구했을 과단성과 행동력이 오히려 비극을 초래했다’고 말하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다라본트 감독이 굳이 그런 엔딩을 설정한 것은, 주인공 데이빗의 행동력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다만 “타이밍이 어긋난 것”이 문제라는 것, 즉 인간이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어떤 행동을 선택하고 행동에 옮긴다 하더라도,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있는 비극적 운명의 힘이라는 것이 있어 (우리는 이것을 때로 ‘운’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것이 그 무수한 노력과 최선의 선택을 최악의 결과로 되돌려놓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겐 공포가 될 수밖에 없음을 강변하는 듯하다. 당연히 죽을 것이라 믿었던 여인은 자식들과 함께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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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지켜주겠다던 아들과의 약속. 과연 지킬 수 있을까?



결국 이 영화의 공포의 흐름은


외부 존재의 직접적, 물리적 공격 < 인간 본성에 내재한 광기와 폭력 << 넘사벽 << 인간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힘

이 된다는 것. 애초에 괴생명체가 출현한 것 역시 다른 차원의 문을 함부로 열면서 인간의 통제가 실패했기 때문이었으니, 데이빗이 그런 엔딩을 맞게 된 것도 영화 내적으로 크게 논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은 엄한 놈(조직)이 저질러놓고 그 피해를 오롯이 엄한 다른 개인이 지게 된 게 마음이 아프달까. 이제껏 국내에 소개된 수많은 미국산 ‘포스트-9.11’ 영화들 중 가장 직접적이고도 탁월한 정치적 해석을 가진 영화로 보아도 무방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


ps1. 주연을 맡은 토마스 제인의 연기는 역시 부족했다는 생각. 역시 엔딩장면에서 그 엄청난 비극을 표현해 내는 데에는 많이 부족했다는.


ps2. 영화 속 상황과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그토록 맞아떨어진다면, ‘그러므로 요한계시록대로 다른 예언도 실행될 것이다’가 아니라 ‘과거에도 이런 일이 발생한 적이 있다’로 해석하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요한계시록이 아무리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은유적 / 신화적) 기록이 아니라 요한이 본 환상을 서술한 것이라 해도, 어쩌면 그것은 인류가 잊어버린 고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상의) 기억을 요한이 떠올린 것일수도 있다. 물론 더 합리적이고 더 쉬운 해석들이 존재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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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핑백: 휴스토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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