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크레디트, 끝까지 보시나요?

맨 처음 제작사 로고부터 시작해 맨 마지막에 엔딩 크레딧 끝에 카피라이트 로고까지 봐야 영화 한 편을 온전히 봤다고 느끼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은 영화에 대한 꽤 많은 정보를 담고 있지만, 이건 사실 imdb를 뒤지면 대부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들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엄청난 데이터베이스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는 것이 가능해진 지금도 왜 여전히 엔딩자막을 끝까지 보고 있을가요. 사실 자막도 자막이지만, 사운드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자막까지 끝나야 영화가 끝난 거라 생각하고(바꿔 말하면 엔딩 자막이 흐르는 때는 아직 영화가 끝나지 않은 때라고 생각하고), 엔딩자막에 흐르는 음악이나 여타 사운드들을 가만히 듣고있는 걸 굉장히 좋아합니다. 특히나 너무나 가슴벅찬 영화를 봤을 땐, 자막이 올라가는 동안 테마음악을 들으며(보통 그 영화의 가장 중심되는 테마곡이 엔딩 자막 때 나오는 게 일반적입니다.) 마음을 추스리고 감정의 여운을 되새기는 편이지요. 또 어떤 영화들은 감독이 자막 맨 끝에 보너스 화면을 숨겨놓기도 하고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얼마 전 <색, 계>를 봤을 땐, 맨 마지막의 양조위의 표정을 볼 때까지만 해도 그냥 아… 이러고 있다가, 엔딩 자막이 올라가면서 왕치아즈의 테마가 흘러나오는데 바로 그 음악 때문에, 그만 저도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치솟기도 하고, 그렇더군요. (그길로 곧장 <색, 계> OST를 사러 갔습니다.) <아메리칸 갱스터>의 맨 끝에 보너스 화면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덴젤 워싱턴이 화면 앞으로 걸어나와 관객들을 향해 총을 한 방 빵, 쏩니다. 최근 가장 인상적인 엔딩 크레딧의 사운드는 단연 <미스트>였습니다. 자막이 흐르는 동안 흔히 그러듯 음악이 나오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군대의 움직임 소리가 들립니다. 헬리콥터 날아가는 소리, 탱크가 전진하는 소리, 간간이 총을 쏘거나 폭탄이 터지는 소리… 그게, 5.1채널 서라운드 시스템의 스피커에서 들려나오는데 그 공간감, 사운드 효과감이란, 그리고 배가되는 공포란. <미스트>의 엔딩이 강력한 건, 단순히 내용상의 그 ‘설정’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던 내내 나오던 그 사운드 효과들이 그 설정을 더욱 강력한 것으로 증폭시키고 있었습니다.


엔딩 타이틀이 흐르기 시작하자마자 벌떡 일어나 나가버리는 관객들을, 저는 별로 탓하지 않습니다. 그네들이 제 시야를 가리는 건 아주 잠깐일 뿐이고, 대체로 그런 사람들이 제가 사운드를 내내 듣고있는 걸 방해할 정도로 큰 소음을 내거나 하지는 않으니까요. 어두운 곳에 갇혀있었던 셈인데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고요. 아니, 전 그렇게 빨리 나가버리는 사람들이 차라리 고맙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앉거나 서서 계속해서 떠들어대는 사람을 볼 때죠. 며칠 전에 일반상영장도 아닌 ‘기자시사회장’에 심지어 ‘두 살 정도 된 아가를 데리고’ 입장했던 어떤 젊은 부부가 그런 식으로, 그 영화를 보며 그 아름다움과 슬픔 때문에 격정에 빠질 뻔한 저를 짜증과 분노로 이끌며 영화에 대한 감상을 제대로 망가뜨려 주었습니다. 심지어 자막이 다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끝없이 떠들고 계시더군요. 얼마나 그 소리가 컸던지, 제가 바로 옆자리에 있다가 같은 줄의 맨 구석, 통로 저쪽 자리로 옮겨 앉았는데도 다 들릴 정도였습니다. 혹은, 혹시 한동안 엔딩자막 사진으로 찍어 인증샷 올리는 게 유행을 탄 적이 있나요? 타이틀 흐르는데 플래시 터뜨리면서 계속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을 보고 경악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하이퍼텍나다였던 것 같은데…


하지만 제겐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보다가 겪은 아주 아름다운 미담에 대한 기억도 있답니다. 자막이 흐르는 걸 보며 자리에 앉아 눈물을 좀 흘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자막이 끝나자 저처럼 끝까지 앉아있던, 제 옆에옆의 자리에 앉아있던 커플 관객 중 여자분이 제게 휴지를 건네시더군요. 고맙다고 하면서 그 분과 저는 멋적은, 그러나 암묵의 공범자와 같은 미소를 주고 받았습니다. 벌써 5, 6년 전의 일인데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요.


아마 평소에 자막을 끝까지 보지 않던 사람들도, <색, 계> 같은 영화를 보고 나면 자막이 흐르며 음악이 나오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꼼짝도 못한 채 감정을 추스리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감독들이 자막 끝까지 관객들이 앉아있어줬으면 하는 것도, 영화에 대한 예의니 뭐니 말을 하긴 하지만 실은 그런 것, 그러니까 밀려오는 감동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간절히 원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하지만 급하게 나가는 사람들 역시 저마다의 사정이 있을 거예요. 극장 안은 원래 답답하고 공기가 탁하기 마련이기도 하고요. 자막이 다 끝나기 전까지 영화가 아직 안 끝난 거라 생각하지만, 영화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모두 다 정좌를 한 채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영화가 끝나기 전에 나가는 건 그 사람들의 자유이고, 그 사람들에게 오히려 제가 나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듭니다. 심지어 저 한 사람 때문에 극장 입구에 계속 서 있는 직원분께 미안하고 민망한 기분이 들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제가 영화를 끝까지 즐길 권리가 ‘심각한 수준으로’까지 방해받는 건 여전히 속상한 일입니다. 과거엔 극장들이 그 권리를 당연하다는 듯 빼앗아 갔는데, 거의 대부분의 극장들이 그 권리를 존중해주고 있는 지금, 좋은 영화를 봐놓고도 오히려 화가 나서 극장을 나오는 일이 생길 때마다 마음이 안 좋습니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에 관심이 없는 건 각자의 자유이고 취향이지만, 엔딩크레딧을 끝까지 보는 사람들을 심각하게 방해하지는 말아주세요. 제발…


영진공 노바리

[Sugar & Spice – 風味絶佳] – 모든 인연은 스쳐간다.

Sugar & Spice - 風味絶佳 포스터
fk59.mp3

첫사랑이란 무엇일까?

그저 두근두근 설레이던 어린 날의 추억?

가슴 타들어가도록 아쉬웠던 기억을 갖게 한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첫사랑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얘기하지만 글쎄…
대한민국에서는 꽤 많은 남녀가 ‘처음 같이 잔 – 혹은 잘 – 이성’과 결혼을 하고 있다.
굳이 ‘같이 자는 것’을 포함해야 첫사랑이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사랑에 ‘같이 자는 것’을 빼면 그게 사랑이던가?

어느 새 내가 ‘남자’가 되었음을 느낄 때가 있다면 그 중 하나는 ‘다정다감하던 내 모습’을 벗어버렸을 때다.
그저 좋은 사람, 결혼하기 괜찮은 남자. – 물론 이 속에는 소녀의 시각이 숨어있다. –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 것은 ‘다정함’하나로도 족하다.
쓸쓸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누군가의 다정함이 아니던가?
그러나 현재의 사랑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다정함 뿐만이 아니다.
달콤함이 달콤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톡 쏠 수 있는 향신료가 필요하다.

‘풍미절가’는 고상한 맛이 더 없이 훌륭하다는 뜻이다.
내 죽기 전에 몇 번의 사랑을 더 거칠 수 있을까?

매 순간의 사랑에,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터.
Sugar & Spice - 風味絶佳 의 한 장면
영화 ‘Sugar & Spice – 風味絶佳’는 제목만큼이나 깔끔한 맛을 갖고 있다.
언제나 스쳐가는 인연.
그것이 몇 달이 되었든, 몇 년이 되었든, 혹은 몇 십년이 되었든.

모든 인연은 스쳐가는 법.

한 때의 풍미가. 더 없이 훌륭한 기억으로 남는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사랑이 있을 수 있을런가?


영진공 함장

[가사 검열] “가장 위대한 사랑 (The Greatest Love Of All)”

가장 위대한 사랑이 뭘까?

사람마다 그 답이 다르겠지만 오늘 소개하는 이 노래에서는 미래를 준비하는 사랑, 구체적으로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꼽는다.
그리고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요즘 영어가 중요하다고 하도들 떠들어대는데, 영어 이전에 중요한 게 자긍심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Hello everyone. We Koreans have our own language, so we should be proud of ourselves.”라고 가르치겠다는 건가.

제발 우리의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은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지혜와 지혜를 모아 결정하기 바란다.
어른들의 어설픈 행동으로 인해 아이들이 고통받아서야 되겠는가.

“The Greatest Love Of All”은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의 삶을 극화한 영화 <The Greatest> (1977년 개봉)에 수록되어있는 곡인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처음 부른 이는 George Benson이고, 나중에 Whitney Houston이 1986년 데뷰앨범에서 다시 부르면서 세계적으로 히트한 곡이다.

그럼 모두들 즐감~ ^.^

The Greatest Love Of All
By George Benson
By Whitney Houston  
 


George Benson Live


I believe the children are our future
Teach them well and let them lead the way
Show them all the beauty they possess inside
Give them a sense of pride to make it easier
Let the children’s laughter remind us of how we used to be

어린이들은 우리의 미래,
그들을 제대로 가르쳐 스스로 앞 길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해,
또 그들이 소유한 내면의 아름다움도 볼 수 있게 해 줘야지,
그러려면 아이들에게 자부심을 심어 줘야 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통해 우리가 예전에 어땠는지 기억해 내야지.


Everybody’s searching for a hero
People need someone to look up to
I never found anyone to fulfill my needs
A lonely place to be
So I learned to depend on me

모든 이가 영웅을 찾고 있어,
사람들은 존경할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난 이제껏 그런 사람을 가져보지 못했네,
그런 현실이 너무 황량해서,
나는 내 자신에게 의지하는 걸 배웠다네,


I decided long ago, never to walk in anyone’s shadow
If I fail, if I succeed
At least I live as I believe
No matter what they take from me
They can’t take away my dignity
Because the greatest love of all
Is happening to me

오래 전 난 결심했지, 절대 누군가의 그림자에 묻히지 않으리라고,
내가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난 적어도 내가 믿는 대로 살아갈 거야,
그들이 내게서 무엇을 뺐어 가든지 간에,
절대 나의 존엄성 만은 가져가지 못하게 할 거야,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사랑이,
바로 내게 있으니,


The greatest love of all
Is easy to achieve
Learning to love yourself
It is the greatest love of all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사랑은,
찾기 쉬워,
너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게 바로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사랑이야.


I believe the children are our future
Teach them well and let them lead the way
Show them all the beauty they possess inside
Give them a sense of pride to make it easier
Let the children’s laughter remind us how we used to be

어린이들은 우리의 미래,
그들을 제대로 가르쳐 스스로 앞 길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해,
또 그들이 소유한 내면의 아름다움도 볼 수 있게 해 줘야지,
그러려면 아이들에게 자부심을 심어 줘야 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통해 우리가 예전에 어땠는지 기억해 내야지.


I decided long ago, never to walk in anyone’s shadow
If I fail, if I succeed
At least I live as I believe
No matter what they take from me
They can’t take away my dignity
Because the greatest love of all
Is happening to me
I found the greatest love of all
Inside of me

오래 전 난 결심했지, 절대 누군가의 그림자에 묻히지 않으리라고,
내가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난 적어도 내가 믿는 대로 살아갈 거야,
그들이 내게서 무엇을 뺐어 가든지 간에,
절대 나의 존엄성 만은 가져가지 못하게 할 거야,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사랑이,
바로 내게 있으니,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사랑을,
바로 내 안에서 찾아 냈으니,


And if by chance that special place
That you’ve been dreaming of
Leads you to a lonely place
Find your strength in love

네가 꿈꾸던,
특별한 바로 그 곳이 어쩌다,
황량하게 변해 버린다면,
사랑 속에서 너의 힘을 찾아 봐.


영진공 이규훈

<미스트>, 프랭크 다라본트 – 직접적인 정치적 해석을 가진 영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안개 속에 숨어있어 더욱 무서운.
스티븐 킹은 내가 미국작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데, 그건 그가 너무나 탁월한 이야기꾼이라 그렇다. 현대소설이라는 게 심리 타령, 부조리 타령, 소외와 고독 타령을 하기 마련인데, 스티븐 킹은 이야기 자체를 너무나 매력적으로 만들어낼 뿐 아니라 그것을 또한 아주 매력적인 필치로 그려내는 매우 희귀한 – 그리고 고전적인 작가 중 한 명이다. 게다가 스티븐 킹의 소설은 겉으로 드러나는 줄거리 자체도 매우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그 안의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인간 본연이 가진 어둡고 격렬한 감정을 매우 탁월하게 표현해낸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이 나오는 족족 영화로 옮겨지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영화 버전도 근사한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은 그닥 당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드문 작품들에 <미스트>가 새로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미스트>가 그려내는 가장 기본적인 공포는 이유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의 공격이지만, 이 영화가 정말로 힘을 받는 장면은 마샤 게이 하든이 연기한 카모디 부인의 종교적 선동과 이로 인해 결집되고 분출되는 인간의 ‘광기’이다. 우리는 데이빗의 눈을 통해 처음으로 괴생명체의 촉수를 보는 장면이나 거대한 곤충들이 마트를 습격하는 장면에서는 박진감과 스릴을 느끼지만,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희생제물로 요구하며 아우성치고 결국 군인을 죽이는 장면에서는 끔찍한 공포를 느낀다. 괴물들 자체는 싸구려 CG와 인형의 냄새가 펄펄 나는데, 이것들의 공격을 묘사하는 다라본트의 카메라는 아주 신이 난 데다가 이 상황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매우 효과적으로 잡아낸다.


괴물들의 공격을 요한계시록과 엮은 것은 너무나 탁월한 아이디어(이는 아마도 원작자인 스티븐 킹의 공일 것이다). 거기에 다라본트는 마샤 게이 하든의 카모디 부인을 매우 성실하고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데이빗이 마트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그에게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장면에서부터 해서, 점차 그의 과민 신경증을 찬찬히 드러내고, 더불어 이 여인의 존재감은 점점 강력해진다. 보기엔 별 볼품없는 나이든 중년여인이었던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한 카리스마를 얻으며 좌중을 압도한다. 그러나 그녀의 연기는 매우 세심하게 계산돼 있어서, 영화 속에서는 사람들을 충분히 홀리는 데에 성공하지만 스크린 밖 관객들에겐 정말 *어마어마한*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스크린 바깥에 있는 우리는 다라본트의 묘사와 마샤 게이 하든의 연기에서, 그녀의 선동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너무나 명확히 인지를 받기 때문에 오히려 공포가 높아진다. 만약 우리가 영화 속 인물이었다면 그녀의 선동에 넘어가고도 남아 아무에게나 칼을 휘두르는 저 광기의 대중 중 하나가 충분히 되고도 남을 것이라는 공포, 말이다. 이 공포는 심지어 괴물들의 습격이 가져다주는 공포를 훨씬 넘어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랬던 아줌마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렇게 된다.


원작소설에서는 데이빗 일행이 마트를 벗어나는 것으로 끝난다고 하는데, 다라본트가 덧붙인 엔딩은 가히 충격적이다. 영화들 중 수많은 비극적인 엔딩 중에 이 영화만큼 잔인하고 비극적인 엔딩이 또 있을까? 그 장면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영화에서라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구했을 과단성과 행동력이 오히려 비극을 초래했다’고 말하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다라본트 감독이 굳이 그런 엔딩을 설정한 것은, 주인공 데이빗의 행동력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다만 “타이밍이 어긋난 것”이 문제라는 것, 즉 인간이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어떤 행동을 선택하고 행동에 옮긴다 하더라도,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있는 비극적 운명의 힘이라는 것이 있어 (우리는 이것을 때로 ‘운’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것이 그 무수한 노력과 최선의 선택을 최악의 결과로 되돌려놓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겐 공포가 될 수밖에 없음을 강변하는 듯하다. 당연히 죽을 것이라 믿었던 여인은 자식들과 함께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꼭 지켜주겠다던 아들과의 약속. 과연 지킬 수 있을까?



결국 이 영화의 공포의 흐름은


외부 존재의 직접적, 물리적 공격 < 인간 본성에 내재한 광기와 폭력 << 넘사벽 << 인간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힘

이 된다는 것. 애초에 괴생명체가 출현한 것 역시 다른 차원의 문을 함부로 열면서 인간의 통제가 실패했기 때문이었으니, 데이빗이 그런 엔딩을 맞게 된 것도 영화 내적으로 크게 논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은 엄한 놈(조직)이 저질러놓고 그 피해를 오롯이 엄한 다른 개인이 지게 된 게 마음이 아프달까. 이제껏 국내에 소개된 수많은 미국산 ‘포스트-9.11’ 영화들 중 가장 직접적이고도 탁월한 정치적 해석을 가진 영화로 보아도 무방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


ps1. 주연을 맡은 토마스 제인의 연기는 역시 부족했다는 생각. 역시 엔딩장면에서 그 엄청난 비극을 표현해 내는 데에는 많이 부족했다는.


ps2. 영화 속 상황과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그토록 맞아떨어진다면, ‘그러므로 요한계시록대로 다른 예언도 실행될 것이다’가 아니라 ‘과거에도 이런 일이 발생한 적이 있다’로 해석하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요한계시록이 아무리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은유적 / 신화적) 기록이 아니라 요한이 본 환상을 서술한 것이라 해도, 어쩌면 그것은 인류가 잊어버린 고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상의) 기억을 요한이 떠올린 것일수도 있다. 물론 더 합리적이고 더 쉬운 해석들이 존재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