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다 죽어야 사는 이상한 신세계

 

 


 


 



 


 


스포일러가 가득하니 아직 영화를 안 보신 분은


즉시 뒷칸으로 돌아가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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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에 대해서 좋다는 얘기, 싫다는 얘기, 뭔 소린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얘기 등을 다 듣고 난 뒤에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이 영화가 최근 몇 년새 본 영화 중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손꼽을만하다고 평가하게 되었다.


 


허나 이런 나의 평가는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감독이 심어놓은 철학에 대한 것이어서, 소위 영화적 완성도라든가 관객과의 소통방식이라든가의 요소에 있어서는 최고가 아니라 지적해도 그닥 반박할 생각은 없다.


 


영화가 좋다고는 평가를 하지만 사실 관객이 왜 이렇게 많이들 보러 오시는지는 아리송하다. 캐릭터가 뜬금없기도 하고 전개의 개연성이 없는 장면도 많고 무엇보다 결론에 대한 모호함이 관객 동원력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리송하든 대단하든 일단 “설국열차”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자.


 


 


 



영화 보신 분들은 이해할 수 있는 ‘나르는 신발짝’


2008년 이라크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에게,


이라크 출신 기자가 저항의 의미로 신발을 집어 던진 적이 있다.


 


 


 


1. 다 죽어야 산다


 


영화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은 다 죽는다. 왜 그래야 했을까?


 


편의상 열차 안에서 업악받고 있는 꼬리칸 쪽을 좋은 편이라고 하고 체제를 장악하여 조정하는 쪽을 나쁜 편이라고 하자. 그런데 나중에 보면 어느 쪽에 있는 누가 좋고 누가 나쁜 건지 무척 헷갈리게 된다. 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인 거다.  결국 중간에 희생당한 사람들만 불쌍한 거다.


 


그리고 좋은 편이 죽어서 더 애틋하다거나 나쁜 편이 죽는다고 해서 통쾌하다거나 하질 않는다. 영웅도 없고 악당도 없다. 그냥 주어진 상황 속에서 죽음에 대한 거창한 명분이나 맥락도 없이 뜸들이지도 않고 그냥 죽임을 당한다.


 


그간 많이 보아온 영화처럼 하자면 … 거대한 악의 세력과 이에 맞서는 정당하지만 나약한 이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무언가 짜릿한 죽음과 숭고한 죽음이 대비되면서 관객이 관람하기 편하게 해 줄 것이다. 그래서 결국엔 좋은 편이 승리하여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든지 아니면 처절하게 패배하면서 관객들에게 의문점과 고민을 안겨주든지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거 없다. 그냥 다 죽는다. 그리고 그게 옳다.


 


영웅이 되어야 할 등장인물이나 악당이 되어야 할 등장인물 모두 다 이미 체제 안에서 순이든 역이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에 주어진 에너지와 윤리 한계치를 다 지나치게 오버하게 된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전개에 적합한 긍정의 힘이 아니라 부정의 힘 퇴행의 힘으로 작용하게 될 뿐이다. 그러니 대단히 수고하셨지만 이제 그만 안녕~


 


 


 



미안하다 … 다 안녕이다 … 한 명만 빼고


 


 


 


커티스가 메이슨을 잡기 위해 에드가를 포기하는 장면을 보자. 아무리 반란의 목적을 위해 절실했다 하여도 커티스는 에드가를 포기해서는 안되는 거다. 그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란의 선봉장으로 다시 날 수 있었던 동기가 바로 에드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커티스는 대의를 위해 사람을 버린 죄를 저지른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라면, 커티스는 에드가를 구하러 달려 갔을 것이다. 그래도 에드가는 죽었을 것이고 그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분노가 오히려 커티스를 더 달구어내 결국엔 어떻게든 메이슨을 잡고 복수의 행보를 가열차게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저런 상황이라면 어떨까. 모두들 커티스에게 전자를 요구할 것이다. 겉으로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메이슨을 잡기를 바랄 것이다. 후에 비인간적이지만 대의를 이끄는 냉철한 지도자로서 어쩔수 없었노라고 합리화 될 터이고.


 


후자의 커티스는 어떨까? 인간적이고 이해할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결국엔 모두의 운명을 짊어져야 할 리더가 될 수는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일 뿐이다.


 


대의를 좇아 사람을 버린 커티스든, 대의를 저버리고 사람의 정을 좇은 커티스든 자신의 역할이 마무리되면 어떻게든 속죄를 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다 사라져야 새 세상이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봉감독의 의도된 메시지인 건지 아니면 나의 오역으로 인한 자뻑인 건지는 중요치 않다. 메시지가 있든 없든 옳든 그르든 그걸 결정하는 건 매우 당연하게도 순전히 관객 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자,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2. 플랜 같은 거 있기? 없기?


 


따지고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무모하고 생각 없는 인물은 주인공 커티스다.


 


그에게는 계획도 없고 정보도 없고 플랜B도 없다. 눈 앞에 보이는 한 가지 장애물 제거에만 온 신경을 쓸 뿐 애시당초 정체모를 소스가 보내주는 쪽지에 모든 상황판단을 의지하고, 물론 길리엄이 부추겼지만, 앞으로 가서 뭘 어떡해야 겠다는 목표도 없다.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 일단 가는 거다. 가서 뭘해야 할지 생각하는 거다. 거기에는 여기보다 나은 무언가가 있을 테니 거기가서 … 아 잠깐만 … 그 다음엔 뭘 해야지? … 그래! 그거야! 윌포드를 처단하고 엔진을 점령하고 그리고 … 그리고 …


 


아예 플랜이 없다. 있다면 그저 길리엄을 지도자로 옹립한다는 거. 그외엔 어디에 가서 무엇을 얻고 그걸 어떻게 활용하고 그리고 일정 지점에서 협상을 시작할지 더 나갈지 판단하고 뭐 이런 거 없는 거다 … 오로지 진격이다 … 나를 따르라!


 


어 그런데 또 잠깐 … 진격을 계속 하려면 앞칸의 체제를 구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보안 전문가의 도움이 없이는 안된다. 그러니 그에게 가자  우르르 … 이게 뭐하자는 건가 지금 ….


 


 


 



여기 송강호씨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 계신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빼앗긴 우리의 것을 찾기 위해 나서서 싸우는 거는 너무도 당연하고 옳다. 그래서 반드시 해야 한다. 여기에는 아무 이견이 없다. 그런데 왜 계획을 안 세우냐고? 최소한의 준비는 왜 안 하는 건데, 분노만 쌓아 올릴뿐 … 뒤를 따르는 많은 이들 모두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거사를 하면서 왜 배수의 진으로 덤비는 건데, 안되면 다 죽자는 거야? 무슨 불사파야?


 


그래, 너무도 힘이 열세이고 전혀 자원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계획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겠냐 하겠지. 그렇다면 단계적으로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도 되지 않을까. 여건의 변화를 유도해내면서 말이야. 한 칸 앞으로 가서 버티고 협상하고 또 한 칸 앞으로 더 나가서 협상하고 이렇게 말이다.


 


뭘 하더라도 사전에 최소한의 마스터플랜과 로드맵은 가지고 가야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 일단 일을 저질렀다 해도 언젠가는 이기고 성공하려면 그 시점에서 주어진 조건을 살펴보고 계획을 세우는 정도는 해야 한다 … 이보시오 커티스씨, 그러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작정 문부터 따기 전에 일단 의견수렴과 대책강구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소 …


 


 


 


3. 세상 만사 다 단계가 있다.


 


윌포드와 길리엄에게는 계획이 있다.


 


균형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이 둘은 열차 내에 주기적으로 축적되는 역기능의 여분을 처리하기 위해 마스터 플랜을 세웠다. 간단하다.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74%에 맞춰 죽여 없애는 것이다.


 


그러려면 꼬리칸이 도발토록 해야 한다. 그리고 도발을 용인할 수 있는 한도와 도발이 닿아서는 안되는 칸을 정하고 이를 단계적으로 조절하기 위한 시나리오가 있어야 한다.


 


자, 이제 거사의 날이 왔다. 덤벼라.


감옥칸, OK … 식량배급칸, 괜찮아 … 윌포드는 이때까지는 실탄이 없는 경찰력으로 대처를 하며 밀리는 척한다.


 


최악의 경우에 용인할 수 있는 한도는 용수칸까지 이다. 그래 용케 여기까지 왔군 … 이제 윌포드는 새로운 폭력을 동원하여 애초의 목적을 실현하려 한다.


 


그건 바로 도끼와 칼을 든 용역깡패의 투입이다. 영혼이 없는 맹목적인 이 놈들은 눈마저 가리워져 있다. 무자비하게 살육을 시작한다. 길리엄과 윌포드의 계획은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런데 의외의 동력이 나타난다. 횃불이다! 꼬리칸에서부터 피워올려진 횃불의 엄청난 포스에 힘입어 커티스는 용수칸을 장악하고 거물급 인물을 포획하게 된다. 물론 커다란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이쯤에서 계획이 틀어지게 된 길리엄은 말린다. 커티스는 가려고 한다. 그러자 길리엄은 뒤로 빠진다. 윌포드를 만나거든 입도 열기 전에 즉시 없애달라고 당부하면서.


 


당황한 윌포드는 밀리기 시작한다. 화원, 과수원, 수족관, 스시집까지 내주고 마침내는 절대 내주지 말아야 할 칸까지 커티스의 진입을 허용하고 만다.


 


학교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체제의 우월성과 충성심을 주입하고 체제에 거역하면 보복당하고 체제에 순종하면 보상이 주어진다는 걸 가르쳐 체제를 온존케하는 핵심기능을 수행하는 학교인 것이다.


 


 


 



선생님, 이러시면 안됩니다른이름으로 저장 …


 


 


 


윌포드는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위기감에 최후의 보루인 가장 강력한 무력을 투입한다. 군대다. 최후의 저지선을 지키기위해서 학교선생님까지 직접 손에 총을 들고 갈겨댄다.


 


결국 꼬리칸은 속절없이 밀리고 밀려 장악되고 선두는 고립된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지도부는 내쳐 달릴 수 밖에 없다. 이제는 반란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엔진룸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윌포드가 애초에 꾀했던 ‘균형유지’는 실행이 되고 …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의외로 준비가 잘 되어있으며 단계적 플랜이 있다. 그들이 원래 똑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을 내주지 않으려는 절실함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어쩌다 우연히 실수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런 불의한 체제를 고쳐보겠다는 사람들은 그들보다 더 뛰어날 수는 없다고 하여도 적어도 그들의 시나리오와 단계 설정 정도는 카피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 만사 다 단계가 있는 법인데 그걸 점프 한 방으로 다 뛰어 넘으려는게 과연 현명한 접근일까.


 


 


 


4.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순환고리를 …


 


꼬리칸은 버려진, 쓸모없는 잉여 공간이 아니다. 꼬리칸이 필요 없었으면 아예 만들지 않았거나 예전에 벌써 처치해 버렸을 터이다.


 


사실 이 열차 안에서 꼬리칸은 앞칸의 특권층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꼬리칸이 없으면 앞칸은 그들의 속성상 그 안에서 다시 지배와 피지배를 만들어 내게 돼있다. 그렇게 반복이 되면 결국의 그들의 앙상레짐은 자멸하고 말 것이고 그러기에 윌포드는 꼬리칸이 멸망방지장치라는 걸 잘 알고있다.


 


그리고 길리엄도 그걸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둘은 손을 잡게 되는 것이다. 윌포드도 길리엄도 다 이유가 있고 자기 변호가 가능하다.


 


꼬리칸은 원래 가진 게 없어서 무임승차한 사람들이거든, 그렇다면 쾌적한 열차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희생은 해야 하지 않겠어 … 그렇다고 아예 기회가 없지도 않잖아, 재능이 있으면 언제라도 얼마든지 앞칸으로 갈 수가 있어, 그런데 뭔 불만이 그리 많아, 쯧쯧쯧 …


 


앞칸은 가진게 많아서 그걸 다 쓰지도 못하고 죽어, 그런데 절대 남과 나누려고는 하지 않아 … 그게 인간의 본성인가봐, 우리 꼬리칸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 우리는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말고 필요한 만큼만 가지자고 … 저 더러운 권력따위 필요하지 않아 … 팔, 다리가 잘리더라도 숭고하고 의롭게 살면 거기가 나만의 낙원인 거지, 허허허 …


 


 


 



윌포드가 어린 시절 즐겨 읽으며 미래의 꿈을 키웠다는 만화


 


 


 


커티스여도 좋고 커티스가 아니여도 좋다. 엔진룸에 가서 윌포드를 처단하고 나서는 어차피 자신이 그의 자리를 대체하여야 한다. 그리고 정의롭고 자애로운 지도자가 되어보자. 권력을 다 나누어주고 자원을 다 공유하고 뭐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자.


 


그러면 모든 이들이 스스로 현명하게 나누고 절제하며 동참하여 열차를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게 될까.


 


주어진 공간, 한정된 자원에 비추어 분명히 열차는 관리가 필요하다. 집단지도부를 형성하면 그게 될까. 그렇다고해도 역기능의 여분은 어떻게든 조치가 필요하다. 도대체 누가 그걸 정하고 누가 조치되어져야 하나. 제비를 뽑을 수도 없고.


 


결국 다시 이전 체제가 돌아올 것이다. 거기에 속하는 사람은 바뀌겠지만 꼬리칸은 다시 생길 거고 특권층 또한 생겨날 것이다. 그러면 또 제2, 제3의 윌포드와 커티스, 그리고 길리엄이 나오고 반란이 일어나고 실패를 거듭하다 성공하기도 하고 그럴 것이다.


 


아, 이를 어째야 하나, 어차피 똑같아질 거 그냥 이대로 살아야 하나, 아니 그럴 순 없지, 좋은 방향으로 바꿔야지, 그렇다면 지도자라는 걸 아예 세우지 말자 … 어 그런데 Occupy Wall Street 도 그렇게 해보려다가 결국 권한을 가진 대표자가 없어서 흐지부지 된 거잖아 …  아 어쩌나 …


 


결국 영화는 아예 체제를 폭파시켜버린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파괴라고나 할까.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감독이 의도한 메시지인 건지 아니면 순전히 나의 지나친 상상력에 의한 오독인 건지는 중요치 않다. 그걸 결정하는 건 또 여전히 관객의 몫이니까.


 


 


 


5. 요나와 백곰


 


열차가 폭파되고나서 살아 남은 이는 요나와 꼬마다.


그리고 바깥 세상에는 놀랍게도 빙하기를 견딘 백곰이 살아 있다.


 


새로운 세상은,


옛 체제를 유지하는데 좋든 싫든 관여한 이들이나 체제의 단물을 빨며 타락에 빠졌던 이들이 만들어 나가면 안된다는 건 당연할 터. 쾌락에 빠져 아무 생각없이 살던 이들도 결국에는 자신의 신분이 변하게되는 체제의 변동에는 본능적으로 저항한다는 건 영화 말미에 표현이 되어 있기도 하고.


 


그렇다면 그나마 순수함을 간직하고 나름 혜안의 단초를 가지고 있는 이와 아직 때묻지 않은 어린이가 새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상징 정도로 해석해보면 어떨까싶다. 


 


 


 



지구온난화로 거주지인 빙산이 위협받고 있는 북극곰


 


 


 


북극곰의 경우는, 지구온난화가 거론될때마다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동물이다. 빙산이 녹아내려 살 곳을 잃어가는 백곰의 모습을 비추며 사태의 심각성과 경각심을 일깨우는 영상이나 이미지가 아주 많다.


 


그래서 그 백곰은 빙하기가 풀리면서 생물이 살 수 있게 되었음을 나타내고 지구가 다시 북극곰이 살아나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상징이라고 보여진다.


 


 


 


6. 마무리


 


간만에 뭐라도 생각할 거리가 있는 우리 영화를 감상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영어로 진행이 돼서 그런지 송강호 특유의 맛깔나는 보이스톤과 대사처리가 묻히면서 존재감이 예전같지 않아서 아쉽다.


 


북미 버전은 20분 가량이 잘려 나간다 한다. 캐릭터 설정과 스토리 전개에서 날린다는데, 126분이 106분으로 준다니 한국에서 영화 본 우리가 원본을 보게 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한 셈이다.


 


 




 


 


영진공 이규훈


 


 


 


 


 


     


 


 


 


 


 


 


 


 


 


 


 


 


 


 


 

 


 


 


 


 


 


 

“괴물”과 “플란다스의 개”, 공통된 세계관의 다른 표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그의 첫 번째 상업영화 『플란다스의 개』와 기본적으로 같은 관점, 같은 구조의 영화다. 단지 첫 번째 영화에서 관점을 고르게 배분했던 것과는 달리 신작에서는 한쪽의 관점만을 드러냈고, 사건이 좀 더 극적이 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첫째, 두 영화는 모두 두 개의 사건으로 구성된다.


그 두 사건 중에서 첫 번째는 나머지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으나, 결국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두 번째 사건이고 첫 번째 사건은 그냥 지워지고 만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첫 번째 사건은 윤주(“이성재”)의 ‘개 유기 및 살해 사건’이다. 이로 인해 이후에 모든 일들이 벌어지지만, 결국 윤주의 이 범행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넘어간다. 『괴물』에서는 미군의관의 ‘포르말린 방류사건’이 여기에 해당한다. 괴물은 이로 인해 탄생하지만 역시 그 사건도 영화에서는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않고 지워지고 만다. (두 번째 사건은 물론 ‘윤주네 개(순이) 납치/도살기도 사건’과 ‘괴물의 출몰사건’이다.)


둘째, 사건이 둘인 만큼 범인도 둘이지만, 이 두 범인에 대한 처분은 극과 극이다.


<플란다스의 개>의 윤주(“이성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교수가 되는 데에 성공하며, 『괴물』의 미군 역시 실질적인 원인제공자이면서도 비난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계기로 생화학전 실험을 하는 기회를 얻는 이득을 본다.

반면에 이들로 인해 발생한 두 번째 사건의 범인은 사람들의 눈에 문제의 핵심으로 부각되고 처벌당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노숙자(“김뢰하”)와 <괴물>에서 괴물이 바로 그 역할이다. 이들은 지극히 단순하고 본능에 충실할 뿐 특별히 악의가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도 매우 비슷하다. 즉, 만약 개고기 맛을 볼 기회나 포르말린으로 인한 유전자 변형이라는 사건만 없었더라면 이들은 그저 멍청한 노숙자로서, 한강의 물고기로서 단순한 삶을 마치고 말았을 존재들이다.

당구대에 비교하자면 이들은 적극적인 플레이어가 아니라 누군가가 친 공에 맞아서 그대로 굴러가는 공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어난 모든 문제의 가해자로 지목받고 처벌당한다. 지나친 처벌인 것이다.


세째, 언제나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자와 문제를 해결하는 자는 따로 있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 유발자는 많이 배우고 사회적 지위가 높으며 권력을 가진 자이고, 문제
를 해결하는 자는 배운 것 없고 지위도 낮고 권력도 없는 자이다.

심리학 박사인 윤주는 자신이 개를 죽여 놓고서 정작 자기 자신의 개를 납치당하는 아이러니에 빠진다. 미군 역시 포르말린을 방류해 괴물을 만들어 놓고서는 그로 인해 애꿎은 사병 하나가 희생당한다. 그리고 그 이후, 윤주와 미군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제 문제는 이 사건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쉽게 말해서 무고한 존재들이 짊어지고 해결하며 그로 인한 피해도 고스란히 그들이 다 뒤집어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로에 대한 어떤 인정도 받지 못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그 무고한 인물은 현남(“배두나”)이고, 『괴물』에서는 강두(“송강호”)네 가족이다. 현남은 납치된 개를 찾아서 윤주에게 돌려주었으나 결국 자신은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그토록 원하던 TV출연 마저 이루지 못한다. 강두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괴물을 처치했지만 큰 희생을 치렀을 뿐, 그로 인한 어떤 공치사도 받지 못한다. 뉴스와 신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일 벌린 넘들은 어디 가고...

덧붙여, 이런 이야기가 유지되기 위해서 영화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자는 언제나 나머지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만 받는다.

현남은 직장 상사로부터 맨날 할 일을 빼먹고 싸돌아다닌다고 비난받으며, 강두네 가족은 위험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로 도주한 위험인물들로 체포 대상이 된다.

고독한 현남을 응원하는 건 상상의 관중들과

현남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 뿐이다


게다가, 그 와중에 규칙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은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


현남이 필사적으로 도망칠 때 비상구에 가득 쌓인 물건들과 닫힘 버튼을 눌러도 닫히지 않는 엘리베이터 문이나, 강두네 가족을 바이러스 보균자로 분류해 끌고와서는 아무 대책없이 다른 환자들과 의사들에게 노출시키는 병원시스템이 바로 그런 규칙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이다.

이런 일도 상당히 익숙하다

결국 이 두 영화에서 드러난 감독의 관점은,

이 세상은 사고치는 놈과 해결하는 놈이 따로 있으며, 좀 배우고 권력 있다는 놈 치고 제구실 하는 놈 없고, 오히려 그 빈틈은 못 배우고 권력 없는 민중이 대신 해결해온, 본말전도의 법칙에 따르는 세상이다.


영화 괴물에서 반미의식이 드러난다고 하지만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 그의 관점은 반미라기 보다는 반권력, 반시스템, 반지식인 이다. 윗대가리들만 제대로 하면 벌어지지 않을 사건들로 인해서 무고한 시민들만 죽어나간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관점이 지나치지 않을까? 너무 비관적이고 급진적이지 않을까?
글쎄 … 경제위기, 4대강, 용산참사, 외환위기,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가스폭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등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위기와 참사들을 생각해봐도 이런 관점이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언제나 윗대가리들이 제대로 일을 했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사건이고, 결국 그로 인한 피해는 무고한 민중들이 뒤집어써야 하지 않았던가. 경제위기, 외환위기 때 금융시스템을 비판하고 고치기는 커녕 엉뚱한 정책으로 일관하는 실제 정부의 행태나, 정작 괴물에는 신경쓰지 않고 엉뚱한 바이러스 공포만 퍼트리는 영화속 정부의 행태가 크게 다른가?

어쨌든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같은 정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한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다른 영화는 한국영화사의 신기록을 세웠다는 점이다.



 

영진공 짱가

강동원 흥행의 법칙과 영화 “전우치”


무조건 예쁘게 나오면 흥행 성공한다 …

… 라고 강동원을 어여삐 여기는 사람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명세 감독의 <형사>는 그래도 컬트팬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반면<M>이 그러지 못한 것은 강동원의 모습에서 대머리 기가 보였기 때문 …
이라고들 하죠.

물론 정말로 그에게서 대머리 기가 보인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 짧은 M자 머리가 보기에 살짝 부담스러웠던
거겠죠. 아직 꽃다운 ‘소년'(잘해봤자 ‘청년’)을 ‘어른 남자’로 그리는 것에 대한 반발감이라 해야 할까. 이 면에 대해선
이명세 감독님이 조금 “성격이 급하셨다”는 게 저의 해석입니다. 몇 년만 참으셔도 됐을 것을, 얜 아직 군대도 안 갔다왔다고요.

군대 갔다오기 전에 되도록 샤방하고 예쁜 모습을 많이, 라는 게 누나팬들의 공통된 심정이랄까. 그것도 이제 거의 끝난 듯,
어쨌든 공익 가기 전 마지막 작품이 될 <전우치>에선 강동원이 아주 예쁘게 나올 듯하니 다행입니다만.

전우치

아이고 저 표정 봐라, 우째 저래 이쁘노.

강동원이 예뻐서 <늑대의 유혹>도 앉은 자리에서 DVD 코멘터리로 보는 것 포함 두 번 정주행하고 장면
발췌보기로 또 돌려본 저라고는 하지만, 최동훈 감독이 처음에 강동원 데리고 <전우치> 찍겠다고 그랬을 땐 아니
감독님하 뭐 잘못 드셨나요, 라는 게 솔직한 제 심정이었습니다.

모델에서 배우로 전업한 또래들 중에선 그래도 강동원이 의외로
연기자로서 가능성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그녀를 믿지 마세요>같은 영화에선 굉장히 잘 했다고 생각은 하지만, 대작의
주연으로서는 아직 검증 안 된 것도 사실이죠. 거기에, 사실 최동훈 감독의 이전 두 작품도 보면 매우 능숙한 배우들에게 기댄
면이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나, 모두 제자리에서 제 몫 알아서 똑소리나게
해먹는 배우들이 잔뜩 포진하고 있지요.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박신양도 그랬고, 조승우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백윤식 선생이나
김윤석, 이문식, 천호진, 주진모 … 데뷔작인 <범죄의 재구성>에선 너무 잘하시는 백윤식의 연기를 오히려 살짝
눌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오히려 살짝 삑사리가 났다고 생각할 정도인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촬영이 끝난지 한참 지나서도 좀처럼 개봉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기자들 사이에서 영화가 영 안 나왔단 소문이
파다하기 돌았습니다. 물론 CG를 잔뜩 사용하는 영화들은 원래 후반작업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긴 합니다만, 대체로 후반작업이
길어지고 개봉이 늦춰지면 늦춰질수록 ‘본 촬영분이 나빠서 배급사에서 개봉을 미루며 덧손질을 많이 한다’는 소문이 나기
십상입니다. 이건 많은 영화들의 케이스에서 일정부분 사실이라고 증명되기도 했었으니, 100억이 넘게 들어갔다는
<전우치>에 대해 무성한 뒷말이 많았던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긴 합니다.

제가 기대를 갖게 된 건 지난 번 제작발표회에 다녀와서(새 창으로 열기)
니다. 맛뵈기 동영상 속에서 강동원의 전우치는 매우 이쁠 뿐 아니라 발랄하고 유쾌했고, 임수정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예뻤으며,
염정아는 얄팍해서 웃기지만 밉지는 않은, 오히려 귀여운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연기하고 있었습니다. 김윤석의 카리스마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감독이나 배우들의 자신감도 꽤 있어보였습니다. 최동훈 감독의 자신감은 봉준호 감독과는 또 다른 면에서 굉장히
매력적인 게 사실이에요. 봉오빠가 등장할 때 제가 같이 들떴던 게 “드디어 한국에서도 ‘영화를 갖고 노는’ 감독이 나타났다”는
거였는데, 최오빠 역시 그렇습니다. 상영된 메이킹 장면들에서, 물론 힘들고 고민하거나 심지어 험악한 때도 많았겠고 그건 모두
잘라냈겠습니다만, 그래도 영화 만들면서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의 표정이 많이 보였습니다.

다만 조금 걱정되는 건
CG인데요. 맛뵈기 동영상에선 얼마 보이지 않았지만, 얼핏얼핏 보이는 CG의 수준이 약간 조잡해 보였습니다. 아마도 본편에서
색보정과 기타 다른 보정을 거치면 달라지겠으나, 예고편에서 드러나는 밤의 추격씬 화질도 다소 조악했고요. 물론 그런 거 보정하는
것도 후반작업 중 일부이고 제작발표 할 때에도 한참 CG 작업중이라고 했었으니, 본편에선 보다 나은 화면을 볼 수 있겠지요.

영화 <전우치>의 촬영현장

기사를 쓰기 위해 찾아본 전우치와 서화담의 기록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전우치가 실존인물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기정사실인 것
같군요. 생몰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당대 여러 기록에서 전우치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고, 장난기와 유머가 가득한 선행의 기록도
있지만 치기와 악동의 기록도 꽤 됩니다. 남 골려주고 소소하게 복수해주고 상사병 걸린 친구 돕겠다며 정절 지키고 있던 과부
보쌈하는 행태까지 …

전우치가 “발라버리겠다”고 자신만만 찾아갔으나 오히려 된통 깨지고 스승으로 모셨다는 서화담이, 우리가
황진이와의 에피소드로 알고 있는 그 화담 서경덕 선생이 맞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지요. ‘리’는 개무시하고 철저한 주기론을
펼쳤다는 이 양반이 한편으론 노장사상에도 관심이 많았고 토정 이지함의 스승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신비술이나 동양적인 은비학,
도술에 관심이 컸다는 얘기가 그럴싸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랬던 양반이 영화 <전우치>에선 악당으로 나온다니 기분이
좀 묘하기도 하네요.

어쨌거나 <전우치>가, <타짜>때 쩍 벌렸던 제 입을 두 배로 더 쩍 벌리게 해주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최동훈 화이팅!

영진공 노바리

“미쓰 홍당무”는 인간소외에 관한 고찰이다.



    


1. 미쓰 … 홍당무???

어린이 전집류나 학교 도서실에서 책 좀 빌려 본 사람은 아마 읽어봤을 것이다. 쥘 르나르(Jules Renard)의 홍당무. 신경질적인 엄마와 가부장적인 아버지, 약자를 괴롭히는 못된 심성으로 막내를 대하는 형제자매들 사이의 막내. 그가 홍당무다. 미스 홍당무의 홍당무는 그 홍당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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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스포일러가 무지하니 출물하니 요주의!!!!!

2. 캐릭터 뒤비기

양미숙씨
집이 없어 고시원도 아닌 심지어 교무실에서 몰래 살고 있다. 학교에 귀신이 산다는 소문이 있다면 아마 양미숙 선생일터. 양미숙의 팍팍한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러시아어가 인기가 없어져 중학교 영어선생으로 내려간 양미숙선생. 영어선생이 영어학원 다닌다고 엄청 욕을 먹는다.  나는 영문과 출신이고, 고로 학교 영어선생하는 친구들이 쫌 있다. 얘네 요새 다 엄청 스트레스 받는다. 시험문제 하나 내는데도 오류 있을까봐 바들바들 떨린다고 한다.  근데 양미숙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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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나고 괴로울 땐 닭발이 쵝오 >.<

완전히 쫒겨난 노동자는 아니지만, 원치않는 비숙련 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자로써의 삶과, 자본 제로의 상황에 눈이 많이 간다. 그런데 심지어 생긴 것도 별루다. 자본도 없고 생긴 것도 없는 이에게 호감을 갖는 이는 없다. 양미숙의 원피스 패션을 보라. 과연 소외당한 자 답고, 소외 당할만한 자 답다. ‘고아’라는 거짓말. 소외를 많이 겪는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호감을 얻기 위해 잘 하는 거짓말이다. (양미숙의 현실로 봐서 실제 고아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고아에 가까운 듯 하다) 아무도 호감을 주는 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10년 전 담임선생님이었던 서선생의 호의를 호감으로 받아들인다. 그녀의 삶이 너무도 바쁘고, 그녀는 하루종일 너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도 참 가슴 짠하다. 상징적으로 자기 노력이 삽질인지 아닌지 알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왜?’ 그런 노력을 하는 지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양미숙은 ‘참 살기 팍팍한 세상에서 되도 않는 노력을 왜인지도 모르고 하는 우리’모습이다.

이유리양

이유리도 양미숙만큼 짠하다. 모순덩어리 이유리선생을 나는 이해한다. 사람에 따라 시차는 있겠지만 대한민국여성에게 20대 초반은 성과 사랑, 연애에 대해서 참 아무것도 모르고, 그 스스로도 모순에 둘러싸여있다. 나는 이유리선생을 내숭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변태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스스로 성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성욕이라 인정하지 못하고, 섹스를 해보고 싶지만 섹스를 할 수는 없는거라고 생각하는 20대 초반 여느 여성들의 모습과 꼭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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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쒸~

검정T팬티를 입고 성적 공상에 골몰해 있지만 ‘어머! 저는 결혼전 까지 참지 못하는 남자와는 끝낼거에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내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메신저로 변태적인 메세지를 받았을 때 이유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너무 튕겨서 남자와 헤어지는 걸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순진한 그녀는 그런 고민 때문에 카마수트라에 줄쳐가면서 신음소리를 연습한 것일테고, 그런 고민 때문에 ‘자쥐 깔꽈?’ 퍼포먼스까지 해 버린 것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남자의 마음을 잡는 지 모르는 무지상태. 무슨 짓이라도 불사하려는 그녀의 삽질또한 참 공감이 간다. 예쁜 그녀에게도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은 것.
Another version of 왕따. (그녀의 결론은 꽤 괜찮아서 다행. 앞으로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르지만)

종희
소설 ‘홍당무’를 생각해 보면, 종희야 말로 진짜 홍당무. 부모는 둘다 서종희를 사랑하긴한다.  일상에 찌든, 너무 일찍 결혼한 삼십대 중반의 가장 서종철은 즐기지 못한 20대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 인터넷 방송에 힘쓰고, 멀끔한 외모를 밑천 삼아 젊은 여선생과 히히덕거리고 있고, 너무 어린 남편을 둔 성은교는 몸매를 가꾸며 (커리어에 몰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쪽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전교 왕따지만, 엄마아빠는 그런 고민은 전혀 모른 채 자기들의 고민에만 빠져있다. 그 사이에서 참 엉뚱한 방향으로 영악해 지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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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메와까!!!!!

서은교님
다른 사람보다 분량이 적긴 하지만. 참… 뭐 말할필요없이 공감 많이 가는 캐릭터다. 어학실에서 차분하게 판사인 듯 대단한 침착성과 노련함을 보이더니 어학실을 나와 남편과 함께 걸어가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서종철군
그닥 나쁜 놈도 아니고, 전체적인 사실관계를 영화가 보여주는대로만 봤을 때는, 이쁘장한 나이어린 여후배와 몇번 데이트 하며 시시덕거렸는데, 걔가 너무 순진해서 목숨걸고 나오니까 좀 당황하고. 선생으로써 기본이 된 놈이라 왕따 당하는 양미숙을 좀 챙겨준 것 뿐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이상하게 짝사랑과 스토킹의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딸과 아내에게 상처를 주고 마는. 이 놈도 인생의 무게 무거울 그런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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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뜨기라능 ...

그려서 캐릭터 뒤비기의 결론은, 다 이상한 캐릭터들인데 … 거기에 다 내 모습이 있고, 공감이 간다는 얘기다.

3. 이 영화 법정물이었던 거냐???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일까. 어학실 장면이 꼭 법정장면 같아서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가를 생각해봤다.

가만보면 서종철(가해자) vs. 이유리, 성은교, 서종희(피해자) 양미숙(가해자) vs. 서종철(피해자) 이런 구도로 보인다.  서종철은 이유리에겐 ‘심심풀이 데이트상대’라는 상처를, 성은교와 서종희에게는 ‘가장의 부정’이라는 가해를 했으나 실상 양미숙에게는 ‘왕따학생에 대한 수학여행에서의 배려’, ‘한때 제자였던 동료에 대한 친절(교무회의시간에 졸지말라는)’, 혹은 사회가 금지하는 ‘왕따에게 친절 베풀기’라는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다.

영화 보면서 ‘다 저 놈 때문이야’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곱씹어 생각할 수록 서종철이라는 놈이 참… 나쁜 놈의 범주를 은근슬쩍 잘 비켜간다. (얄미운 놈) 그래서 저 위에서 말한 가해자 피해자 구도도 사실은 모호하다. 다들 상처를 받았는데 막상 왜 상처를 받았는지, 왜 상처를 줬는지는 모르는 상태다.

4. 이 영화는 비극이다???

그리스비극(오이디푸스, 아가멤논 같은거)과 셰익스피어비극은 비극의 원인이 본인의 캐릭터에게 있다(Personality is destiny).

그리고 현실주의, 자연주의 연극으로 오면 개인에게 비극의 원인이 있지 않고 사회에 비극의 원인이 있다. (Riders to the Sea같은 작품)

그러다가 40년대 중반으로 와서 Arther Miller나 Tenesse Williams의 ‘세일즈맨의 죽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유리동물원’ 같은 작품을 보면 경제공황같은 사회적 원인과 캐릭터 본인이 가진 성격적 결함이 복합적으로 비극의 원인이 된다.

미스홍당무는 그런 점에서 밀러나 윌리암스의 비극과 비슷한 점이 있다. 양미숙, 이유리, 서종희의 비극에는 인간소외라는 사회적 측면 이외에 ‘모자란 개인’이라는 원인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밀러나 윌리암스의 비극과 다른 점이 있다. 밀러나 윌리암스의 비극은 ‘가족의 붕괴’로 끝나고, 그것이 비극 그 자체라는 것. 그러나 미스홍당무의 비극은 ‘붕괴된 가족’위에서 시작되고, 그것은 비극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5. 결론

그리하여 이 영화는 왕따들에 대한 각각의 고찰을 통해 인간의 소외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사람이 비 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거에요.  설마.  그 사람도 사람인데 …”

양미숙의 말에 공감과 조소를 동시에 날리며 집에 돌아오니 … 묻지마 범죄, 고시원 방화사건 뉴스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 미숙아 … 힘들더라도 꿋꿋이 살아보자꾸나 …

끗.


영진공® 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