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 잃어버렸던 인간병기의 꿈

 

 


 


 


 



 


 


 


1.  인간병기의 꿈


 


무협영화 팬이었던 내게 남다른 소녀시절의 꿈이 있다면 그건 인간병기가 되는 거였다.


 


주윤발처럼 총 두자루를 들고 건물에 들어가 부대 하나를 박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거나, 성룡처럼 맘만 먹으면 백화점 꼭대기에서 장식용 알전구가 매달린 전기줄을 타고 1층까지 내려온다거나, 상대방에게 얼굴을 한방 맞고 뒤로 넘어가는 듯 하다가 다시 허리와 다리의 힘으로 벌쩍 일어나서 방심하는 상대의 뒤통수를 가격한다든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싶었다.


 


여기서 ‘꿈’이라는 건 말 그대로 ‘꿈’이어서 현실에서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환상. ‘꿈 깰’필요 없는 그런 ‘꿈’이었다. 현실의 나는 체력장 4급 이상을 받아본 적이 없고, 100미터는 20초 이하로 뛰어본 적이 없고, 줄넘기를 100회 이상 해 본적이 없고, 쌩쌩이는 평생 해본적이 없고, 농구 골대에 공을 10번 던지면 10번 모두 노골 시키는. 정말 다시 없을 몸치였다.


 


생각해 보니 나는 ‘천재’물도 참 좋아했는데, 천재들이 탁월한 정보 종합수집 능력과 기억력과 판단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새 천재가 되는 상상을 하곤 했다. 현실은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구구단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중학교 때까지 친구들 몰래 발가락을 이용해 덧뺄셈을 하던 천하의 어벙이였지만.


 


그래도 나는 추리소설을 읽으며 포와로, 미스 마플, 홈즈 같은 천재들에 열광했고, 명절마다 중간기말고사가 끝날 때마다 액션 영화 챙겨보고 아무도 없는 뒤켠에서 남 몰래 발차기를 해보기도 했다. 나중에 다 큰 후에, 모든 대한민국의 정규교과과정을 마치고, 회사생활을 10년 가까이 한 후에야 나는 나의 ‘인간병기’의 꿈과 ‘천재’의 꿈이 어디에 닿아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인간병기의 꿈이란 내 신체를 내 의지대로 쓰고 싶은 희망에 다름 아니었으며, 천재의 꿈이란 나의 지적 능력이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데 부족하지를 않기 바라는 희망이었다는 것을.


 


 


 



 


 


 


2. 전설의 주먹



아이들이 태어나고 회사 일이 바빠지고 영화관에 가보지 못한것이 이년째인지 삼년째인지도 모르던 어느 날, 회사에서 단체 영화라는 것을 보러갔다. 단체영화란 본디 중고생의 영화관 출입이 금지되어있던 문화의 결핍시대에 선심처럼 베풀어지던 것이라 알고 있다. 아침 10시 영화관에 모인 회사 사람들도 다 그래보였다. 오랜만에 이 낯선 영화관이라는 공간에 초대된 어색함. 들뜸.


 


그렇게 신입사원, 부장님 차장님 상무님 과장 대리가 순서없이 앉아 본 영화는 “전설의 주먹”이었다. 60년대~70년대생이 대부분인 차부장 이상 급들은 주먹질 하는 자기와 같은 세대의 주인공에게 열광을 했다. 이 뻔한 신파극에 아저씨들은 울고 울었고 나는 그들과는 약간 다를 어떤 감상으로 우울했다. 주먹질의 석연찮음. 그러니까 내가 액션영화를 볼 때의 욕망 ‘내 신체를 내 의지대로 쓰고 싶은 희망’과는 정반대 대척점에 있는 폭력이었던 것이다.


 


어릴적 열광하던 액션영화에서 그들에게 액션을 강요하는 자들은 없었다. 성룡은 ‘어쩔 수 없는 상황’때문에 3층에서 떨어지며 차양을 붙들고 착륙하는 액션을 하지만 3층에서 성룡을 미는 사람은 없었다. “전설의 주먹”에 자기 몸을 쓰려고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돈을 받고 싸움판의 투계가 되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오락을 위해 맞고 때리는, 시키는 자에 대한 분노. 그러고 보니 ‘내가 원해서 하는 액션, 나의 정의를 위한 폭력’을 본 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마지막으로 본게 옹박이었던가?).



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술자리에서 아저씨들은 ‘자신의 전설’을 설파해댔지만, 나는 ‘강요된 폭력’에 ‘어쩔 수 없었어요’라고 끝까지 변명하는 주인공들이(그리고 내가) 가슴에 걸리며 맘에 안 들었다. 그리고 ‘친구와는 싸우지 않습니다’라는 거부가 너무 소박하고 현실적이어서 유쾌하지 않았다.


 


 


 



 


 


 


3.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내가 보는 거라곤 일요일 오전에 하는 ‘영화 스포일러’프로그램들 뿐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영화관에서 무슨 영화를 하는지, 요새 무슨 영화가 있는지 조차 몰랐을 것이다. 좀 처럼 영화관에 갈 시간을 내기 힘든 내가 굳이 “화이”를 본 것은 강렬한 예고편의 대사 때문이었다.


 


“아빠들이 다 괴물인데, 너도 괴물이 되어야지.” 바로 강요된 폭력! “우리는 다 하는데 왜 너는 못해? 너는 다른 것 같아”라는 영화 대사는 슬프게도 내가 직장생활, 일상생활 속에서 상사에게 많이 들어온 이야기다.


 


어쩌면 10년 좀 넘어가는 직장생활에서 늘 강요받아온 것.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순응하다보니 망가져가는 내 자신을 보는 것. 괴물이 되어가는 내 모습에 실망하는 것. 그리고 더 흉한 괴물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몸부림을 치다 다시 밟히는 것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화이”가 좋았던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강요된 폭력을 용감히 거부했다는 것.


 


폭력을 강요했던 다섯 아빠를 모두 죽이고(한명은 예의상 사고사 처리), 그 다섯아빠에게 폭력을 강요했던 건설사 사장까지 죽여버린다. 타협은 없다. 괴물은 괴물일 뿐 이해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화이는 징징거리지도 않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킨다.



괴물이 됨으로써 괴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괴물을 죽여야 괴물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실천해버린다. (그래서 괴물이 된 아이가 아니라 괴물을 삼킨 아이인 것 같다.) ‘저를 왜 기르셨나요?’를 의문하긴 하지만 그 질문에 천착하지 않고, 어떻게든 폭력 강요자들을 이해하여 그 강요를 내재화 하려는 노력이 없다는 것이 가장 좋다.



그래서 영화 초입에 멧돼지 머리를 쏘던 화이의 총과 마지막 기타가방에 들어있는 화이의 총은 완전히 다르다.



그게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들일지라도 단호히 총구를 겨누고야 마는 화이 덕분에 나는 다시 인간병기의 꿈을 꾸게 되었다.


 


 


 


영진공 라이


 


 


 


 


 


 


 


 


 


 


 


 


 


 


 


 


 


 


 


 


 


 


 


 


 


 


 


 


 


 


 


 


 


 


 

“셜록 홈즈”, 죄송합니다만 동명이인이십니다.

<셜록 홈즈>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요소가 많았던 프로젝트였습니다. <셜록 홈즈>에 관한 키워드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코난 도일의 원작 캐릭터인 명탐정 셜록 홈즈의 영화화, 돌아온 악동 배우를 넘어서 요즘 이보다 더 좋은 활약을 보여줄 순 없다 싶을 정도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그리고 마돈나 남편의 지위를 졸업(?)하고 돌아온 가이 리치 감독의 복귀작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에 왓슨 박사 역으로 참여한 주드 로나 셜록 홈즈의 연인이자 팜므 파탈로 출연하고 있는 레이첼 맥아담스의 매력에 관해 조금 곁들이면 되었을 작품이죠. 하지만 그 결과물이 기대했던 것 만큼 재미있지가 못하니 영화와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 거리들이 쑥 들어가 버리는군요.

오래 전부터 사전 공개되었던 한 장의 스틸컷(위 사진)은 <셜록 홈즈>가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기 보다는 가이 리치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 의한 캐릭터의 변형 또는 재창조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습니다.

감독의 전작 <스내치>(2002) 를 연상시키는 도박 싸움판에 셜록 홈즈로 분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웃통을 벗고 서 있는 이 사진은 명석한 두뇌로 사건의 열쇠를 찾아내는 학구적인 이미지의 셜록 홈즈는 완전히 잊어버리라는 선언문과도 같았죠. 남은 것은 추리와 액션의 배합 비율 정도였다고 할까요.

역시나 <셜록 홈즈>를 통해 재탄생한 셜록 홈즈의 모습은 지금까지 알려졌던 영국 신사의 이미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 새로운 셜록 홈즈는 사건이 없으면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도 않는 히키코모리 성향에 엉뚱한 실험과 검증에 열을 올리며 이웃들에게 민폐를 끼치기도 하고 – 그런 사실에 대해 아랑곳하지도 않죠 – 또한 거의 유일한 친구이자 동료이며 룸메이트이기도 한 왓슨 박사의 약혼을 훼방하는 집착증을 보이기까지 합니다.

말 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다혈질이라기 보다는 살짝 궁상맞기까지 한 괴짜 캐릭터라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영국 남자들의 속살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새로운 셜록 홈즈에 대한 캐릭터 묘사는 썩 재미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좋은 배우들의 연기와 어우러지면서 빠른 적응을 돕고 있습니다.

가이 리치 감독이 원작에 충실한 셜록 홈즈 영화를 만들 것이라 기대했던 경우가 아니라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주드 로의 새로운 셜록 홈즈와 왓슨 박사는 만족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여기에 가세하고 있는 레이첼 맥아담스와의 러브 라인은 내러티브 전개에 밀접하게 연계가 되면서 생뚱맞은 느낌이 없이 작품 전체를 꽤 풍성하게 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각본의 구성부터 가이 리치에게 맡겨서 완전히 새로운 영국 산업혁명기의 코믹 탐정물로 만들어버렸다면 어땠을까 싶기는 합니다. 그야말로 이름만 셜록 홈즈인 막돼먹은 깡패 탐정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좀 더 확실한 재미와 볼거리를 제공해줄 수 있었지 않았겠냐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셜록 홈즈>가 상당히 지루하고 재미없는 영화가 되어버린 건 이 새로운 셜록 홈즈가 감당해야 하는 범죄의 성격과 이야기를 풀어가는 고리타분한 전개 방식입니다. 블럭버스터 영화들은 왜 하나 같이 블럭버스터급의 음모를 상대해야만 하는 것인지, 그리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믿거나 말거나 막판 뒷풀이 설명은 왜 꼭 집어넣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내러티브에 비해 비주얼은 상당히 공을 많이 들인 편인데 문제는 관객 입장에서 그닥 대단한 볼거리로 인식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당시 건설 중이었던 타워브릿지와 템즈강 주변의 런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것 외에도 ‘KBS에 단 한 대 밖에 없다는 초고속 카메라’를 빌려다 세 장면 정도의 슬로우 모션 장면을 넣었는데 나름대로 가이 리치 감독 영화의 인증 마크가 되어주고는 있습니다만 역시나 작품 전체와 밀접하지는 않은 보너스 컷에 불과합니다 – 그 중 세 명의 템즈강변의 폭파 장면은 그나마 괜찮았어요.

<셜록 홈즈>는 처음부터 영국이 낳은 최고 명탐정의 이야기를 21세기 액션 영웅 버전으로 리뉴얼하면서 최소한 두 편 이상의 시리즈물로 이어가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가이 리치 감독이 연출자로 결정되고 좋은 배우들까지 가세하면서 많은 기대감 속에 프로젝트의 몸집을 크게 불릴 수 있었던 모양이예요. 하지만 그 결과물을 보면 속편에 대한 기대감에 잠 못 이룰 일은 없을 것이 확실해서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확인 결과 2011년 예정으로 가이 리치 감독이 속편을 만들 예정인 것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만들어진 영화만 놓고 봤을 때에는 이것의 속편이 과연 만들어질 수는 있을런지, 그리고 가이 리치 감독이 계속 연출을 맡을 수 있을런지도 알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이 리치 감독은 좀 더 분방한 작품에서 장점이 드러나는 편이라 생각되는데 이 셜록 홈즈 리뉴얼 및 프렌차이즈 프로젝트와는 그다지 잘 어울리는 것 같지가 않아요.

가운데 인물이 감독 Guy Ritchie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셜록 홈즈를 연기한다는 것은 영국식 액센트로 대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아주 인상적인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그 정도면 무난했다는 평을 해줄 수 있을 듯 합니다. 사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연기 천재에 가까운 배우이고 최근 <트로픽 썬더>(2008)에서도 자신이 아니면 다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놀라운 경지를 보여준 바가 있었죠. 올해 드디어 속편이 개봉되는 <아이언 맨>(2008) 역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기에 매력적인 캐릭터가 될 수 있었던 작품들 가운데 하나였고요.

하지만 <셜록 홈즈>는 아무래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작품 전체가 좋았더라면 모두의 바램대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전성 시대를 이어가는 또 하나의 축이 될 수 있었을텐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연기에 특별한 문제가 없었음에도 그다지 매력적인 인상을 남겨주지는 못하는 이상한 나라의 셜록 홈즈가 되고 말았다는 생각입니다.

영진공 신어지

“아이언 맨”이 돌아온다!!!

Iron Man 2

‘아이언맨 2’의 티저포스터

좀 안정됐나 하면 또 마약으로 잡혀 들어가고 하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일명 RDJ)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더니만 이렇게 즐거운 눈요기거리를 계속 던져주고 있습니다. 전 이 사람의 출세작인 <채플린>(… 그 전에 출연했던 청춘물들은 잠시 제껴놉시다. 아직 ‘배우’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보여주진 못했으니까)은 아직까지도 못 봤지만, 안토니오니 감독의 <구름 저 편에>의 한 에피소드에서 이렌느 야곱과 나왔을 때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우연히 처음 본 여자한테 작업을 거는 거리의 소매치기인 그는 너무나 맑은 눈에 순정과 진심을 가득 담고 있으면서 쉬이 상처받을 연약함을 내비치곤 했습니다.

하지만 경력을 좀 쌓아나간다 싶으면 마약, 나와서 좀 정신차리고 다시 경력 쌓나 하면 또 마약, 해서 어느새 관심 밖으로 밀쳐놨었지요. 지금 다시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이런, 전 RDJ와 헤더 그레이엄을 보겠다고 <인 드림즈>나 <투 가이즈 앤 어 걸> 같은 영화도 찾아본 주제에 <숏컷>이나 <사랑의 동반자>, <내츄럴 본 킬러>, <원 나잇 스탠드>, <진저브레드맨> 출연 때의 모습은 기억이 안 나는군요. 그나마 인상깊었다면 <원더보이스> 때 정도.

<회색도시>는 케이블서 방영할 때 녹화도 떠놓고는 안보고 테입도 잃어버린 듯해요. 그 안타까움이 극에 달했던 건 아마도 TV시리즈 <앨리 맥빌> 때였을 겁니다. 시즌이 거듭될수록 시리즈 자체가 불안불안해진 가운데 갑자기 나타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그 시리즈를 구원하는 듯했지만, 웬걸, 또 마약으로 들어가더군요. 이쯤되면 거의 포기하라는 거죠.

그런데 그는 기적적으로 회생합니다. 단편영화 주연이나 장편의 조연으로 조금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고 <퍼>와 <조디악>, <찰리 바틀렛> 같은 영화에 출연을 하죠. 특히나 <찰리 바틀렛>에는 마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의 맥스처럼 어린애 주제에 어른처럼 굴려는 찰리 바틀렛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도 본인은 알콜중독으로 몸을 휘청대는 교장선생님 역을 하면서, 마약으로 휘청대던 젊은날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해 보여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실 그는 지금도 자신의 불행했던 시절을 소재로 멋진 유머로 소화해내는 재미있는 사람이기도 하죠. 그리고 <아이언맨>으로 ‘스타’의 자리를 찾습니다.

사실 <아이언맨>에서 RDJ의 모습을 제대로 처음 본 젊은 관객들에게야 RDJ가 ‘새로운 발견’으로 보였겠으나, 저같은 사람들에겐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기적의 한 장면’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더우기 폭풍같은 시기를 지내고 나이가 든 그는 여전히 선하고 순수한 눈에 ‘그윽한 깊이’를 함께 담고 있었지요. 혹자들은 <아이언맨>이 역시나 팍스아메리카나를 외친다며 고까와했지만, 저는 아이언맨을 연기하던 RDJ의 연기톤이 매우 특수한 ‘냉소’와 ‘자조’를 띄고 있던 걸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젊은 날을 스스로 개그의 소재로 삼듯, <아이언맨>에서의 RDJ는 자신의 캐릭터를 스스로 놀려먹는 듯한 뉘앙스를 띄면서도 그 캐릭터를 더없이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듦으로써, 진부한 팍스아메리카나 히어로에 미묘하게 다른 옷을 입히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트로픽 썬더>에서의 연기는, 아… 정말 말이 필요없지요.

올 4월에 RDJ는 아이언맨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지금은 한창 셜록홈즈로 활약 중인데, 주먹질을 일삼고 자기과시와 허영기가 있으며 실수를 연발하고 왓슨의 수습에 의존하는 셜록 홈즈라니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지만, 그걸 RDJ가 하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아마 셜록 홈즈를 광적으로 사랑하는 다수의 셜로키안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겠지만, RDJ라면 그런 셜로키안들조차 잠잠하게 만들 멋진 셜록 홈즈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쨌든 <아이언 맨 2>는 속편답게 규모나 물량도 커지겠지만, 스칼렛 요한슨이 등장해 귀네스 펠트로와 신경전을 벌인다니 그것도 무척 기대됩니다. 그나저나 미국개봉은 5월 7일이라면서 국내개봉은 4월이라니, 전세계 혹은 한미 동시개봉은 봤어도 이런 대작을 국내에서 먼저 개봉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도 궁금하네요 …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