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그대”, 홍상수 영화와 닮은 우디 앨런 영화





우디 앨런 감독의 신작 <환상의 그대>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참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준다. 이제껏 오랫동안 두 감독의 영화를 봐왔지만 이번처럼 비슷하게 느껴졌던 경우는 처음인지라 내심 놀랍다는 생각도 들고, 이게 이번 작품에서만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예전부터 두 감독의 영화가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인데 지금까지 눈에 띄게 드러나지를 않았던 것인지를 판가름해보게 된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와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처음부터 닮아있었다고 보는 건 아무래도 어렵다는 결론이다. 특히 우디 앨런 감독의 작품들이 내용과 스타일 면에서 훨씬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되며 – 단순히 더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 그런 와중에 이번 <환상의 그대>를 통해서 우연찮게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무척 닮아있는 모습들을 보여주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환상의 그대>가 유난히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생각나게 만드는 이유는 등장 인물 가운데 어느 누구도 기분 좋은 결말을 – 영화가 끝난 이후의 더 나은 미래를 – 맞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가 언제부터 이토록 삶에 대해 시니컬한 입장을 취했었던가 싶기도 하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라고 해서 항상 암담한 결말만을 그렸던 것도 아닐진데, 이를 통해 두 감독의 영화가 접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 그렇게 느껴졌다는 사실이 – 무척 흥미롭게만 느껴진다.

<환상의 그대>는 전지적 나레이션을 활용해서 – 홍상수 감독 역시 종종 나레이션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던가 – 씨퀀스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설하고 있는 편인데, 그 중 영화의 시작과 함께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경구, “인생은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차 있지만 결국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대주제가 되고 만다.




등장 인물들이 자기 삶의 현주소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 다른 곳에서 탈출구를 찾고 있다는 점에서 – 그리고 그런 허영과 욕망의 추구가 하나 같이 낭패를 불러오고 만다는 점에서 – <환상의 그대>는 기존의 우디 앨런 영화와는 상당히 차별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극중에서 유일하게 해피엔딩을 맞는 인물은 남편 알피(안소니 홉킨스)에게서 버림을 받은 후 사이비 심령술사에게 푹 빠져 주변 사람들을 전부 열 받게 만들어버리던 헬레나(젬마 존스)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혼자서 외롭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모면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과연 잘 된 일이라고 해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문이다.

이토록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차 있으면서 결국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에서 그나마 답이 되어줄 수 있는 건 헬레나가 의존했던 바와 같은 맹목적인 믿음 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 식의 결론은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다.




영화의 원제목 You will meet a tall dark stranger는 우리가 삶에 대해 확실하게 예견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란 “(누구나 언젠가는) 저승사자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 로이(조쉬 브롤린)의 대사였지만, 이 말의 의미가 영화 초반에 언급된 셰익스피어의 냉소적인 경구와 맞물리면서 결국엔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적인 기조를 이루게 된다. 노년의 알피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젊은 창녀(루시 펀치)와 재혼까지 하지만 물질적인 능력에 의해 유지되던 알피의 허영은 결국 좌초를 하게 된다.

알피의 딸 샐리(나오미 왓츠)의 남편인 작가 로이는 건너편 아파트의 창문을 통해 흠모하던 “환상의 그대” 디아(프리다 핀토)의 마음을 얻는 데에 성공은 하지만 작가로서 자신의 무덤을 파는 짓을 하게 되면서 그 역시 인생의 바닥으로 완전히 침몰을 하고 만다. 큐레이터인 샐리 역시 갤러리의 사장 그렉(안토리오 반데라스)과의 연애에 헛물을 켠 데다가 어머니 헬레나가 예언을 핑계로 창업 자금 제공을 거부하자 몹시 분노를 하게 된다.



<환상의 그대>는 분명 우디 앨런의 최고작이랄 것까지는 아니지만 이 솜씨 좋고 지칠 줄도 모르는 시네아스트의 현재를 확인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세태 풍자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우스꽝스러운 해학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텐데,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혹시나 자신의 삶에도 그와 같이 허탈하고도 몹시 짜증스러운 일이 실제로 닥치지나 않을까 싶어 맘 놓고 웃지도 못하는 애매한 감정에 휩쌓이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희비극을 넘나드는 거장의 행보는 이처럼 현재진행형이다.



영진공 신어지








 

“프리다”, 그러나 내가 알던 프리다 칼로가 아니다

어떤 영화는 기특하게도 문장을 수정하는 일도 별로 없이 짧은 시간 내에 주루룩  리뷰를 잘도 쓰게 만든다. 그리고 어떤 영화는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함에 뭔가 주절주절 쓰고 싶은 생각을 아예 거둬가 버리기도 한다. 또 어떤 영화는 너무 많은 자극을 주는 바람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차마 짧은 끄적거림으론 감당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프리다”는 이도저도 아니게 영화를 본 당일은 글을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가 다시 지우면서 몇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엔 몇 가지 아이디어 마저 다 지워버리게 만드는 제 3의 경우, 가장 안좋은 경우다. 예전에 스티븐 달드리의 “디 아워스”를 보고도 비슷한 난처함에 빠졌었는데 결국 무리를 해서 당일에 간단한 메모만 적어놓고 본편은 시작할 생각도 못하고 지나가 버린 기억이 있다. (아… 또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려니 또 같은 증상이 반복된다. 그래서 한바퀴만 더 돌아가기로 하겠다.)

프리다 칼로의 생을 다룬 이 전기영화는 근현대 미술 작품들에 관한 본격적인 관심을 쏟았던 내 대학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까미유 끌로델”이나 “바스키아”, 그리고 최근의 “폴락”과 같은 빼어난 전기영화들을 기억하게 만든다. 또한 실존했던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들을 다룬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선사하는 부가적인 만족감에 관해 다소 시니컬한 목소리로, 물론 그런 영화들을 열심히 쫓아다니는 나 자신의 속물 근성에 대한 자기 고백과 함께, 한차례 언급하고 싶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가뜩이나 미국내 대중문화 시장에서 차지하는 히스패닉계의 위상이 만만치가 않은데 “프리다”라는 한 편의 영화를 통해 그 상위 시장에까지 세력을 뻗쳐보려는 수많은 멕시코 출신 영화인들의 노력에 관해 비교적 너그러운 시선으로 몇마디 해주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아이디어들 가운데 어떠한 것도 “프리다”에 관한 나의 정확한 느낌을 전달하는 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사실 영화 “프리다”를 통해 본 프리다 칼로는 이전부터 내가 알던 프리다 칼로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르다. 그녀의 작품과 일화들에서 느껴지는, 저 심연의 밑바닥에서부터 울리는 고독과 아픔을 “프리다”는 너무 밝은 색조로만 채색해 버렸다는 생각이다. 샐마 헤이액의 한계가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위대한 제 3세계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한 여인의 생을 영화화하는 데에 너무 많은 스타들이 참여한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프리다 칼로를 모르던 이들에겐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는 좋은 참고 자료로서, 그리고 멕시코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를 전세계에 소개하는 데에 “프리다”는 매우 성공적일 수 밖에 없는 방향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적어도 처음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을 보고 받았던 그 충격적인 생경함과 두려움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영화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본 프리다 칼로의 전기영화에는 프리다 칼로가 보이지 않았다고.

역설적이게도 나는 “프리다”를 두시간 동안 재미있게 보았다. 참 잘 만든 영화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애쉴리 저드, 에드워드 노튼, 제프리 러쉬, 그리고 알프레드 몰리나까지 너무 반가웠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에 대한 내 오랜 기억이 이 영화에 대해 알듯 모를듯한 이상한 표정을 삐쭉거린다. 따라서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불평일 뿐이지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참고하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듯도 싶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