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디다스”, 아기자기하고 유쾌발랄한 은행강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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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옛날식 서부영화와 아웃로(Outlaw) 영화들의 문법을 흉내내면서도 훨씬 경박하고 경쾌합니다. 각본이 재치 만점입니다. 두 사람의 명확한 성격(및 출신성분)의 대조랄지, “셀마 헤이엑”의 귀여운 공주병이랄지, 두 사람이 은행을 터는 각각의 아기자기한 방식이나 그 와중에 벌이는 티격태격, 또 위기를 벗어나는 방식… 모두, 재치가 흘러넘치면서 자연스럽게 웃음을 끌어냅니다.

극장에서, 진정으로 재미있고 즐거워서 크게 웃음소리를 내는 것도, 다른 관객들이 그런 웃음소리를 내는 걸 듣는 것도 꽤 좋았을만치 옛날 은행강도 영화식의 낭만이 살아있으면서도 현대영화식 경쾌한 개그가 있습니다. 꽤 성공적으로 조합했다고 봐요.

좁은 공간 내에서의 액션씬도 나쁘지 않았어요. 열차 안에서 총격씬이랄지, 은행을 털 때마다 나오는 아이디어들, 그리고 그 시대 CSI 요원이라 할 수 있는 쿠엔틴 쿡(“스티븐 잔”)의 캐릭터도 재미있었습니다. 최첨단 과학을 차용해 수사를 펼치려 하지만, 굉장히 맹한 인물이기도 한 이 남자, “스티븐 잔”에게 정말 적역이었습니다.

성격 급하고 단무지인 마리아 캐릭터가 “페넬로페 크루즈”에게 그렇게 잘 어울릴 줄 몰랐습니다. 이 언니는 너무 고져스한 외모 때문에 항상 여신으로만 나왔잖아요. 총쏘는 폼도 아주 우아하고 멋지던걸요. 반면, 매 영화마다 굉장히 강한 캐릭터로 나오던(이것도 사실 헐리웃의 인종적 편견에 의한 것이지요…) “셀마 헤이엑”이 보여주는 사라 캐릭터의 페미닌한 소녀의 매력도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초반에 둘이 우다다 싸우는 장면들은 확실히 남자관객들을 겨냥한 장면같아요. 여자 둘이 머리 끄댕이 잡고 싸우고 망가지면서 은근히 레즈에로물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거. 근데 그게 그렇게 눈에 거슬리진 않습니다. 꽤 귀엽고 코믹하게 처리가 돼서. 하지만 이렇게 아웅다웅하면서도 후반으로 갈수록 강해지는 우정, 그리고 오바하지 않고 민망하지 않게 나름 찡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도 꽤 즐거웠습니다.

사실 둘은 신분상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지요. 지주의 딸과 소작농의 딸이라는 설정 외에도, 인텔리와 비-인텔리라는 차이점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파트너 및 동료로, 또 친구로 우정을 쌓아갑니다. 사라가 마리아에게 ‘존경한다’고 말하게 되는 것은 사실, ‘민중의 생생한 힘’을 깨닫게 되는 인텔리의 모습이기도 해요.

게다가 정서가 의외로 비-미국적이에요. 사실 이 영화는 미국 자본이 안 들어갔습니다. 굳이 말하면 유럽산이죠. 2차대전 일으키고 전 세계를 상대로 경쟁적으로 땅따먹기 놀이를 했던 유럽의 소위 선진국들이 미국 까는 걸 보는 건 우리같은 제3세계 국가 사람 눈엔 우습기 매한가지이지만, 그래도 미국은 현재 그런 소위 선진국들조차 반감을 드러내는 전세계 악의 축이 아닙니까?

남미 먹으려고 안달하고, 금융자본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중들 삶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게 없었던 일도 아니고, 현재에도 전세계 여러 곳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일인걸요. 사실 그런 현실에 대한 꽤 직설적인 비유이기도 합니다. (너무 직설적이라 ‘비유’라고 하기도 민망하지요.) 그 와중에 이 언니들의 은행강도짓들은 나름의 도덕적 정당성을 얻게 됩니다. 오죽하면 수사관이 동참을 하냔 말이죠.

하긴, 원래 미국에서 그토록 아웃로 영화들이 성행했던 것도 사실은 1930년대 대공황에 대한 기억과 전쟁 때 한몫잡고 대공황 때 위세를 크게 떨친 금융자본들에 대한 반감 때문일테니까요.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워낙 제도교육을 통해 굳어진 머리로는 계속 조마조마한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제 가슴은 은행강도 영화에 그렇게 호감을 느끼는 것이겠죠.

아름다우십니다, 언니들... >.<

이 언니들이 그저 ‘소박한’ 동기에서 은행강도로 활약하다 사형대로 잡혀가는 길에 마을 사람들에게서 구조받고서 (엉겁결에,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 외치게 되는 “멕시코 만세!”도 (그 민망함에도 불구하고) 꽤 찡하죠.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나, 적어도 억압받는 시절에서는 저항하는 이들을 묶어주고 단결시켜주는(그리고 나의 한계를 벗어나 다른 이를 생각하게 해주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니까요.

아주 즐거운 영화입니다. 삶의 피로와 더위가 주는 피곤에 지치신 분들께 당장 구해서 감상해 보시라 권하고 싶군요. ^^

영진공 노바리

“프리다”, 그러나 내가 알던 프리다 칼로가 아니다

어떤 영화는 기특하게도 문장을 수정하는 일도 별로 없이 짧은 시간 내에 주루룩  리뷰를 잘도 쓰게 만든다. 그리고 어떤 영화는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함에 뭔가 주절주절 쓰고 싶은 생각을 아예 거둬가 버리기도 한다. 또 어떤 영화는 너무 많은 자극을 주는 바람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차마 짧은 끄적거림으론 감당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프리다”는 이도저도 아니게 영화를 본 당일은 글을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가 다시 지우면서 몇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엔 몇 가지 아이디어 마저 다 지워버리게 만드는 제 3의 경우, 가장 안좋은 경우다. 예전에 스티븐 달드리의 “디 아워스”를 보고도 비슷한 난처함에 빠졌었는데 결국 무리를 해서 당일에 간단한 메모만 적어놓고 본편은 시작할 생각도 못하고 지나가 버린 기억이 있다. (아… 또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려니 또 같은 증상이 반복된다. 그래서 한바퀴만 더 돌아가기로 하겠다.)

프리다 칼로의 생을 다룬 이 전기영화는 근현대 미술 작품들에 관한 본격적인 관심을 쏟았던 내 대학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까미유 끌로델”이나 “바스키아”, 그리고 최근의 “폴락”과 같은 빼어난 전기영화들을 기억하게 만든다. 또한 실존했던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들을 다룬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선사하는 부가적인 만족감에 관해 다소 시니컬한 목소리로, 물론 그런 영화들을 열심히 쫓아다니는 나 자신의 속물 근성에 대한 자기 고백과 함께, 한차례 언급하고 싶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가뜩이나 미국내 대중문화 시장에서 차지하는 히스패닉계의 위상이 만만치가 않은데 “프리다”라는 한 편의 영화를 통해 그 상위 시장에까지 세력을 뻗쳐보려는 수많은 멕시코 출신 영화인들의 노력에 관해 비교적 너그러운 시선으로 몇마디 해주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아이디어들 가운데 어떠한 것도 “프리다”에 관한 나의 정확한 느낌을 전달하는 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사실 영화 “프리다”를 통해 본 프리다 칼로는 이전부터 내가 알던 프리다 칼로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르다. 그녀의 작품과 일화들에서 느껴지는, 저 심연의 밑바닥에서부터 울리는 고독과 아픔을 “프리다”는 너무 밝은 색조로만 채색해 버렸다는 생각이다. 샐마 헤이액의 한계가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위대한 제 3세계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한 여인의 생을 영화화하는 데에 너무 많은 스타들이 참여한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프리다 칼로를 모르던 이들에겐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는 좋은 참고 자료로서, 그리고 멕시코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를 전세계에 소개하는 데에 “프리다”는 매우 성공적일 수 밖에 없는 방향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적어도 처음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을 보고 받았던 그 충격적인 생경함과 두려움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영화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본 프리다 칼로의 전기영화에는 프리다 칼로가 보이지 않았다고.

역설적이게도 나는 “프리다”를 두시간 동안 재미있게 보았다. 참 잘 만든 영화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애쉴리 저드, 에드워드 노튼, 제프리 러쉬, 그리고 알프레드 몰리나까지 너무 반가웠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에 대한 내 오랜 기억이 이 영화에 대해 알듯 모를듯한 이상한 표정을 삐쭉거린다. 따라서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불평일 뿐이지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참고하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듯도 싶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