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그러나 내가 알던 프리다 칼로가 아니다

어떤 영화는 기특하게도 문장을 수정하는 일도 별로 없이 짧은 시간 내에 주루룩  리뷰를 잘도 쓰게 만든다. 그리고 어떤 영화는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함에 뭔가 주절주절 쓰고 싶은 생각을 아예 거둬가 버리기도 한다. 또 어떤 영화는 너무 많은 자극을 주는 바람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차마 짧은 끄적거림으론 감당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프리다”는 이도저도 아니게 영화를 본 당일은 글을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가 다시 지우면서 몇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엔 몇 가지 아이디어 마저 다 지워버리게 만드는 제 3의 경우, 가장 안좋은 경우다. 예전에 스티븐 달드리의 “디 아워스”를 보고도 비슷한 난처함에 빠졌었는데 결국 무리를 해서 당일에 간단한 메모만 적어놓고 본편은 시작할 생각도 못하고 지나가 버린 기억이 있다. (아… 또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려니 또 같은 증상이 반복된다. 그래서 한바퀴만 더 돌아가기로 하겠다.)

프리다 칼로의 생을 다룬 이 전기영화는 근현대 미술 작품들에 관한 본격적인 관심을 쏟았던 내 대학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까미유 끌로델”이나 “바스키아”, 그리고 최근의 “폴락”과 같은 빼어난 전기영화들을 기억하게 만든다. 또한 실존했던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들을 다룬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선사하는 부가적인 만족감에 관해 다소 시니컬한 목소리로, 물론 그런 영화들을 열심히 쫓아다니는 나 자신의 속물 근성에 대한 자기 고백과 함께, 한차례 언급하고 싶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가뜩이나 미국내 대중문화 시장에서 차지하는 히스패닉계의 위상이 만만치가 않은데 “프리다”라는 한 편의 영화를 통해 그 상위 시장에까지 세력을 뻗쳐보려는 수많은 멕시코 출신 영화인들의 노력에 관해 비교적 너그러운 시선으로 몇마디 해주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아이디어들 가운데 어떠한 것도 “프리다”에 관한 나의 정확한 느낌을 전달하는 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사실 영화 “프리다”를 통해 본 프리다 칼로는 이전부터 내가 알던 프리다 칼로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르다. 그녀의 작품과 일화들에서 느껴지는, 저 심연의 밑바닥에서부터 울리는 고독과 아픔을 “프리다”는 너무 밝은 색조로만 채색해 버렸다는 생각이다. 샐마 헤이액의 한계가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위대한 제 3세계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한 여인의 생을 영화화하는 데에 너무 많은 스타들이 참여한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프리다 칼로를 모르던 이들에겐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는 좋은 참고 자료로서, 그리고 멕시코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를 전세계에 소개하는 데에 “프리다”는 매우 성공적일 수 밖에 없는 방향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적어도 처음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을 보고 받았던 그 충격적인 생경함과 두려움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영화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본 프리다 칼로의 전기영화에는 프리다 칼로가 보이지 않았다고.

역설적이게도 나는 “프리다”를 두시간 동안 재미있게 보았다. 참 잘 만든 영화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애쉴리 저드, 에드워드 노튼, 제프리 러쉬, 그리고 알프레드 몰리나까지 너무 반가웠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에 대한 내 오랜 기억이 이 영화에 대해 알듯 모를듯한 이상한 표정을 삐쭉거린다. 따라서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불평일 뿐이지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참고하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듯도 싶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