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 (Spider, 2002)”, 섬세하게 쌓아올린 건축물 같은 작품

프로이드의 주장 대로라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란 모든 남자에게 해당되는 ‘극히 일반적인’ 정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만일 단순한 컴플렉스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실질적인 어떤 행동으로까지 옮겨지게 된다면 그 결과는 ‘매우 특이한’ 사건과 기억이 되어 그의 남은 일생을 지배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패트릭 맥그래스 원작의 <스파이더>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대한 재해석을 기본 골격으로 어느 정신병 환자의 치명적 과거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포스터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창문을 벽돌로 전부 막아버린 건물의 이미지는 세상과 단절된 주인공의 의식 세계를 상징하면서 영화의 도입부를 장식한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자신의 생부를 살해한 신화 속 인물이었지만 <스파이더>의 주인공은 남자로서 갖는 여성성에 대한 상반된 기대 가치, 즉 엄마와 창녀의 이원화된 존재를 실재로 혼동 하는 와중에서 아버지와는 모종의 타협을 하고, 대신 생모에 대한 응징을 선택한다. 이런 사실은 영화 속에서 비교적 나중에 밝혀지는 일종의 반전이자 현실이기는 하지만 영화 중간 즈음부터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도록 느슨하게 연출되었다는 점에서 <스파이더>에서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역점을 둔 것은 관객을 깜짝 놀래키는데 있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스파이더>는 다소 느리고 답답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마치 거미 한 마리가 자신의 둥지를 직조하듯 영화 속 작은 요소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다듬어 쌓아올린 건축물과 같은 작품이다. 이전의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작품들이 구차한 설명을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다소 거친 뒷맛을 남기곤 했던 데에 비해 <스파이더>는 대단히 명쾌한 끝맺음과 앞뒤 아귀 맞음이 조금 생소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그러나 만약 <스파이더>의 최대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장치들의 섬세한 배열이 연출이 아니라 원작과 시나리오(모두 패트릭 맥그래스가 했다)라는 사전 작업 과정에서 이미 나온 것들이었다면 이 영화를 위해 ‘굳이 데이빗 크로넨버그였을 필요가 있었겠는가’하는 의문이 가능할 것이다.

원작과 시나리오가 뛰어났든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색다른 감각이 빛을 발했던 것이든 간에 <스파이더>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이는 너무나 다른 1인 3역의 캐릭터를 기막히게 소화해낸 미란다 리처드슨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랄프 파인스나 가브리엘 번이 다소 밋밋하게만 보였던 것은 이들이 결코 부족한 배우라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미란다 리처드슨의 활약 앞에 가려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영진공 신어지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5) – “좋은 만듬새 … 허전한 뒷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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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최근작 <폭력의 역사>는 우선 제가 본 크로넨버그 영화들 가운데 가장 만듬새가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러나 의도적인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상당히 허전한 뒷마무리를 보여주면서 끝을 맺습니다.

<폭력의 역사>라는 제목만 보면 미셸 푸코의 책 제목 마냥 ‘폭력’의 본질을 다룬 거대 담론 수준의 영화인 것 같습니다만 실제 내용에 비추어보면 ‘한 남자의 매우 폭력적이었던 과거’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폭력의 역사성이나 대물림과 같은 주제로 만들어진 많은 영화들이 있을텐데, 저는 유독 원신연 감독의 <구타유발자들>(2006)이 떠오르는군요. 그에 비하면 <폭력의 역사>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폭력의 의미를 지극히 개인의 수준, 관객에게는 자신과 관련이 없는 스크린 속 타인의 입장으로만 다루는데 그치고 맙니다. 더스틴 호프먼 주연, 샘 페킨파 감독의 <어둠의 표적>(Straw Dogs, 1971)처럼 전개되면서 관객들과 진실 게임을 벌이는 영화를 예상했지만 역시나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관객들과 두뇌 싸움을 즐기는 감독은 아니었습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답게 노출 수위가 꽤 높은 편입니다만 관객을 작정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두번의 정사 장면 가운데 속칭 69라고 불리우는, 대중 영화에서는 거의 금기시되는 체위가 나오고 계단에서의 장면(이럴 땐 계단씬이라고 해야 하나요?)도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선정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습니다. 계단 장면에서는 주인공 부부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서로와의 관계에 대한 절망적인 몸부림인 동시에 정서적인 탈출구로서의 강렬한 느낌을 전달해주는데요,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면에서 <크래쉬>의 주인공들을 떠올린 게 혹시 저 뿐인지 궁금하네요) 그외 크로넨버그가 좋아라하는 신체 훼손 장면들이 몇 차례 여과 없이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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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연기가 누구랄 것 없이 하나 같이 훌륭하다는 점이 <폭력의 역사>를 봐야할 중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순박한 식당 주인과 스티븐 시걸의 모습을 오가는 비고 모텐슨을 중심으로 전반부에는 에드 해리스가, 후반부에는 윌리엄 허트가 주요 상대역으로 등장합니다. 두 명배우의 악역 연기, 이채롭고 정말 좋았습니다. 특히 에드 해리스의 분장과 캐릭터는 왜 저 배우가 여지껏 제대로된 악역을 맡지 않고 있었던 것인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정말 제대로더군요. 하지만 윌리엄 허트에게 주어진 배역은 약간 덜 떨어진 캐릭터로 설정이 되면서 엄청난 비장감이 감돌아야 맞을 것 같은 영화 후반부의 긴장을 오히려 이완시켜버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외의 주요 배역을 꼽으라면 당연히 주인공의 부인으로 등장한 마리아 벨로(<코요테 어글리>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군요)의 열연을 꼽아야 할테구요, 저는 아들 역으로 나온 에쉬톤 홈즈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섬세한 시선 처리를 비롯해서 특출난 데가 있는 타고난 배우더군요. 제작자들 보다는 감독님들이 좋아할만한 타입의 젊은 배우의 탄생입니다. 그리고 인상적인 배우는 영화 초반을 장식하는 낯선 두 남자인데요, 배우 보다는 그 캐릭터가 아주 가관입니다. 나른한 한 여름 아침에 모텔 체크아웃을 하면서 태연한 표정으로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잔인함이라니. 이들은 드라마의 시작점인 동시에 한없이 선량해보이는 주인공의 또 다른 면모를 상상해보게 해주는 거울 같은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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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얘기해야 할 배우는 역시 비고 모텐슨이네요. 제가 갖고 있는 비고 모텐슨의 이미지는 이 배우의 얼굴을 처음 익힌 <퍼펙트 머더>에서의 비열함과 <반지의 제왕> 3부작에서의 영웅, 두 가지입니다. 사실 첫 인상을 좀 오래 남기는 편이라 <반지의 제왕>을 보면서도 별로 믿음이 안가더라구요. 그가 연기한 <폭력의 역사>에서의 톰 스톨과 조이 쿠색이라는 한 인물의 두 가지 면모는 마치 제가 알고 있는 비고 모텐스의 이미지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와의 두번째 영화인 매개봉작 <Eastern Promises>(2007)의 예고편과 스틸컷을 보면 나오미 왓츠를 주인공으로 그 주변을 맴도는 듯한 미스테릭한 악인처럼 나오고 있는데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전반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작 같은 느낌도 주는 웨스턴 풍의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폭력’이라는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로까지는 나아가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역사>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 필견, 비고 모텐슨 좋아하시는 분들도 필견, 그리고 잘 만들어진 영화라면 가리지 않고 봐주시는 분들까지도 충분히 만족하실만한 영화입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