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다말고 희경씨를 잠시 생각하다


최근 새로운 화상통신 서비스를 집중적으로 광고하고 있는 모 이동통신사의 CF 중에 여자 친구 어머니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녀의 언니시냐고 물으며 당사자의 지극히 아줌마스러운 웃음소리를 이끌어내는 버전이 있다. TV를 거의 안보는 사정 상 주로 영화 시작 전에 쏟아지는 여러 광고들 틈에서 이 장면을 반복해서 보곤 했는데 정윤철 감독의 영화 <좋지 아니한가>(2007)에서 심씨 집안 어머니 역으로 출연했던 문희경씨가 그 주인공이었다는 것은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87년 대학강변가요제에서 ‘그리움을 빗물처럼’이란 곡으로 데뷔한 이후 뮤지컬 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다가 실명과 같은 ‘희경’이라는 이름으로 영화에 첫 나들이를 한 그녀는 이동통신 CF에서 무척 실감나는 연기를 보여준다. 다림질을 하다가 무심코 받은 딸내미의 핸드폰에서 젊은 남자로부터 ‘언니’ 소리를 듣고는 남편 와이셔츠를 태워먹으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주책 없는 아줌마상을 보여준다.

얼마 전 집에서 가족들과 식사를 하다가 밥 공기를 유심히 쳐다보게된 일이 있었다. 갑자기 밥 먹는 일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좋지 아니한가>에서 밥을 하고 먹는 일이 인생의 전부였다가 어느날 문득 커피의 세계에 빠져드는 희경씨를 생각하게 됐다. <좋지 아니한가>의 흥행 실패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문희경씨가 너무 현실적으로 우울해 보였던 탓도 있으리란 생각을 한다. 한국영화의 주 관객층들이 절대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미래의 공포가 희경씨와 같은 삶 아니겠는가. <추격자>의 지영민은 그런 놈을 만날까봐 무섭지만 <좋지 아니한가>의 희경은 내 자신이 그런 모습으로 늙어갈까봐 무섭지 아니한가. 어쨌든 그 표정 하나로 이미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희경은 황새 쫓던 잡새 마냥 독서실에 안가고 노래방에서 땡땡이를 치던 여고생 딸내미를 쫓아가다가 다리를 다쳐 갑작스런 병원 신세를 지게 되지만 변변한 병문안 한번 못받아 보던 중에 급기야 일탈을 결심하게 된다. 꽃미남 노래방 총각(이기우)의 접근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길을 떠나지만 다시 찾아온 듯한 생의 환희는 저 멀리 춤추는 오렌지색 티셔츠와 같은 허상이었던 거다. 미숙이 그 잘난 년은 동생 약혼자까지 뺏어서 잘도 달아나더니만. 결국 집으로 돌아온 희경에게 남겨진 것은 MP3 플레이어 기능까지 탑재된 수 백 만원짜리 최첨단 커피메이커. 여전히 남편 허리띠로 뚜껑을 고정시켜줘야 하는 대따 큰 밥통으로 밥을 지어먹을 지언정 이제사 알게 된 커피향의 의미는 그냥 포기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 된다.

당장 내동댕이 치고 싶은 비루한 일상이란 영화 속에서 흔히 채용되는 생활 공감형 출발점이 되곤 한다.(생활 공감이라는 말이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미래 공포형이라고 하자) 그런데 매일 먹던 밥에서 비린내가 느껴진다면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가. 내가 성장해온 삶의 터전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유일하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피난처이긴 하지만 더이상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 된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좋지 아니한가>는 비교적 너그러운 판타지를 보여준 편이다. 희경씨의 대모험은 처음 뜻했던 바와는 크게 어긋나고 말았지만 결국 일상을 다시 견디고 그런대로 살아갈 만하게 만들어주는 새로운 무언가를 남겨주었으니 말이다. 커피도 매일 마시다보면 어느덧 밥이나 마찬가지가 될 수도 있으니 무엇이 생활이고 무엇이 꽃단장인지는 곰곰히 따지고 명확하게 구분해가며 살아야 할 일이다. 밥 먹는 일 외에도 다른 즐길 만한 거리가 많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한다면 어느날 문득 찾아드는 밥 비린내도 너끈히 다스릴 수 있을런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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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희경씨에게는 <문스트럭>(1987)의 로레타(셰어)와 같은
젊은 남자와의 멜러가 허락되지 않는 건가. 희경씨를 그렇게
쓸쓸하게 내동댕이 쳤으니 영화가 쫄딱 망하는 건 당연지사다.

영진공 신어지

<좋지 아니한가>, 뭐 그리 썩 좋지만도 아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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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데뷔작 <말아톤>(2004)으로 첫 타석 홈런을 때린 정윤철 감독의 두번째 작품입니다. 다시 한번 “지금 아니면 못해볼 영화였기 때문”이라고 <복수는 나의 것>(2001) 의 제작 동기를 밝힌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 내용을 떠올리게 만드는군요. 그러나 박찬욱 감독이 정말 망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복수는 나의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에 어느 영화감독이 관객들로부터 외면받을 생각을 미리 하면서 영화를 찍겠습니까. 영화를 만들 때에는 누구나 최소한 ‘예상 밖의 큰 호응’을 기대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세번째 장편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를 개봉한 정윤철 감독도 <좋지 아니한가>를 만들 때 “자신이 슈퍼맨이라고 생각했다”더군요. 데뷔작을 통해 얻은 성공으로 영화 감독으로서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천했었고 그리하여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말 하고 싶은 방식으로 만들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작년 3월에 개봉했던 이 영화를 2007년의 베스트로 꼽으신 분들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영화는 좋으면 “열라 좋다”는 식으로 해야지 “좋지 아니한가?” 하는 애매한 표현으로 제목을 잡으면 안된다고 어떤 분이 농담삼아 얘기하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좋지 아니한가>라는 제목은 “이 얼마나 좋으냐”라는 뜻의 질문형 제목인 거죠. <좋지 아니한가>는 제목 만큼이나 두리뭉실하는 간접 화법으로 초지일관하는 작품입니다. 상식적인 의미에서는 전혀 좋지 아니한 가족 구성원들이지만 그럼에도 그런 가족이 있다는 건 역시 좋은 일이 아니냐고 묻는 영화입니다. 달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비밀에 관한 은유처럼 진실은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 숨겨져 우리의 삶을 떠받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다수 관객들에겐 이런 은유나 간접 화법이 영 어색했던 모양입니다.

전반적으로 흠잡을 데 없이 잘된 연출이긴 합니다만 영화 전체적으로는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영화 속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아버지(천호진)와 하은(정유미) 간의 원조교제 스캔들을 그대로 뭉개버린 채 끝내고 있다는 점과 다른 영화평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가족 구성원들 간의 유대를 다른 이들과의 패싸움으로 퉁 쳐서 봉합하고 있는 모양새가 그리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매우 기발한 상징과 예상을 깨는 유머 감각이 전편에 깔려 있습니다만 전체적인 내러티브가 후련하지 않은 관계로 전부 그 빛을 잃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만족스럽지가 않으니 캐스팅과 그에 따른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 구성에서도 허술했다는 인상 마저 남기고 마는 작품이 <좋지 아니한가>입니다. 한국영화 중에 이런 영화 하나쯤 있어도 좋지 아니한가, 맞는 말입니다만 사실 이런 정도의 한국영화는 80, 90년대에도 적지 아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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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