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시 존스와 홍콩무협영화의 관계를 알아보자!

많은 이들에게 좋아하는 홍콩 영화를 꼽으라 물으면 첫 번째로 드는게 “정무문”이다. 그런데 같은 1972년에 개봉했고 제작은 약간 더 빨랐던 영화가 있는데 그게  “철인”(또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다. 둘 사이의 공통점은? … 두 영화는 영화 속에 퀸시 존스 음악을 그냥 가져다 썼다. 저작권 개념이 희박하던 그 시절이라 그랬다고 생각된다. 사실 저작권이라는게 이슈가 된 건 요 몇 년 전이라는 걸 유념하자.

여튼, 이야기의 시작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9월 NBC에서는 “아이언사이드”라는 제목을 단, 꽤 흥미로운 설정의 TV 드라마 시리즈가 시작된다.(2013년에 리메이크 되었다가 바로 망했다.) 샌프란시스코의 20년 베테랑 형사, Robert T. Ironside가 악당이 고용한 스나이퍼의 총에 맞아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악을 처단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수많은 이들의 도움과 불굴의 의지로 악을 처단하는 … 뭐 수많은 미국식 히어로물 영화와 코믹스에서 뻔하게 나오는 얘기이다. 어쨌든 이 드라마는 1975년까지 시리즈가 지속되었으니 상업적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은 작품이다.

이 시리즈의 테마 음악을 거장 퀸시 존스가 맡았다. Quincy Jones는 뭐 설명할 필요도 없는, 아시는 분은 다 아시고도 넘치는 아프리카계 미국음악인의 진정한 큰 형님이라 할 수 있겠다. 1933년 생이신 형님은, 재즈 음악가로 특히 뛰어난 트럼펫터 이기도 하고, 팝 음반 프로듀서 / 작곡가 / 편곡자, 영화음악 작곡가 등등 팔방미인 그 자체다.

“아이언 사이드” 테마뮤직, 영화 “킬빌”에서도 들을 수 있다.

그는 전설적인 비브라폰 연주자인 Lionel Hampton의 밴드에서 19살에 데뷔했고, 23살 무렵부터 Dizzy Gillespie 밴드에서 연주자겸 편곡자로 활약을 시작한다. 1964년부터는 할리우드 영화의 스코어 작곡을 시작했고, Sarah Vaughan, Frank Sinatra, Ella Fitzgerald, Dinah Washington 등의 앨범에서 편곡자로 맹활약 했다. 소울과 훵크를 재빨리 흡수하면서 트랜드 리더로 부상했고, Michael Jackson의 “Off the Wall”, “Thriller”, “Bad”와 ‘We Are the World’의 프로듀서로 더 할 나위 없는 명성을 누린다.

그렇다고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활약이 없었냐면 그것도 아니다. 퓨전 재즈의 한 장을 장식한 The Dude, 재즈 힙합이라는 장르를 연 Back On the Block, Q’s Jook Joint 로 재즈의 한계를 확장하였다. 작곡파트너 Bob Russell과 함께 아카데미 영화 주제가와 스코어 부분에 후보가 되면서 아카데미 영화 음악 관련 최초의 흑인 후보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퀸시는 재즈로 경력을 시작, 훵크와 소울, 팝, 힙합을 아우르는 음악 장르에 라이브 무대와 음반, 스크린을 오가며 매체를 가리지 않고 흑인 음악을 설파해 온 분이다.

중요한 건, 도대체 퀸시 존스 형이 맡은 미국 드라마의 음악이 왜 동시다발적으로 홍콩영화에 차용되었는가하는데 있다. 그 열쇠는 이소룡이라는 존재에게 있다. “그린 호넷”에 1년간 출연하면서 드라마의 인기와 상관없이 Bruce Lee라는 배우는 무술의 대가로 미국인에게 각인되었다. 그런 그가 가라데 선생으로 “Ironside” 1시즌에 게스트로 출연한 것이다. 출연 시간도 3분여뿐이었다. 그런데 부르스 리의 인기는 바다 건너 그의 출신지 홍콩에서 메가톤 급으로 불어갔던 것이다.

이소룡은 미국서 단역 혹은 조연에 머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홍콩으로 돌아가 영화를 찍는데, 바로 “당산대형”이다. 대박인 것은 물론이고, 덤으로 그가 미국서 출연한 작품들도 홍콩을 휩쓴다. 그 중에 “아이언사이드”도 있었다. 일본 무술 선생이긴 하지만, 당시 미국인들에게 쿵푸, 가라데 등등의 무술은 다 그냥 동양 거였다. 그래서 브루스 리는 진지하면서도 쉽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한 무술 사범으로 드라마에 등장한다.

중국인의 도시지만, 영국의 소유였던 홍콩에서 미국 TV에 신비로운 무도인으로 등장한 브루스 리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래서 덕분에 “아이언사이드”도 함께 떴다. 그냥 뜬 정도가 아니라 주제가까지 떴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사이렌 소리를 연상시키는 신디사이저와 관악기와 타악으로 만들어진 박진감 넘치는 곡 전개까지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1981년 일본 부도칸 공연 실황

재즈 뮤지션 시절 퀸시 존스는 브라질 음악에 빠졌었고, 덕분에 다양한 라틴 타악기의 매력을 제대로 이해했다. 동시에 선구적으로 신디사이저를 받아들였던 덕분에 그의 음악에는 기존 클래식 중심의 스코어 작가들이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정무문”에서 긴박감 넘치는 이소룡의 모습이 나올때면 퍼커션을 사용한 ‘Ironside’ 테마 음악의 일부가 수시로 등장한다. 나아가 정창화 감독이 홍콩 쇼브라더스 전속 감독으로 활동하며 만들었던 “죽음의 다섯 손가락 (Five Fingers of Death)”에도 그 음악은 수시로 등장한다. “Five Fingers of Death”는 “King Boxer”라는 제목으로도 상영되었고, 홍콩에서는 “천하제일권”이란 제목으로, 한국에서는 “철인”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이 영화는 쿵푸 영화의 단골 소재 중 하나인 철사장을 다룬다.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최초의 아시아 영화이기도 한 이 작품은 지금 봐도 그냥 재밌다. 다수 잔인한 장면이 있으나, 이 장면은 당시 분장력의 한계로 오히려 재밌기까지 하다. 거칠지만 그래서 힘이 느껴지는 풀샷-클로즈업 샷을 오가는 몽타주 기법은 꽤 박진감 넘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 조지호가 철사장을 시전 할 때, 손가락이 벌개지면 등장하는 음악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 (Kill Bill”에서 우마 서먼이 위험에 맞닥뜨리거나, 중요한 기억이 스칠 때 등장하는 “삐이뾰옹 삐이뾰옹” 하는 음악이 바로 조지호 – 나열이 철사장을 시전하기 시작할 때 등장하는 음악이다. 물론 원곡은 퀸시 존스가 만든 “Ironside’다. 그런데 재밌는 건 영화 “킬빌”에서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 음악을 삽입하며 머리 속에 떠올린 것은 미국 드라마 “아이언사이드”가 아니라 홍콩 영화이자 한국 감독 정창화가 연출한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이었다.

그 이유는 영화 “킬 빌”이 시작할 때, 배급사 로고에 미라맥스 다음으로 신기한 회사 로고가 뜨는 걸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쇼브라더스의 그 유명한 “SHAW SCOPE” 로고가 영화 맨 앞에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쇼브라더스는 “킬 빌”제작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타란티노 감독은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준 쇼브라더스의 1960,70년대 영화에 대한 오마주의 표시로 영화 앞에 쇼브라더스의 로고를 넣은 것이죠. “정무문”은 골든 하베스트,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쇼브라더스 제작 작품입니다. 같은 음악이 “아이언사이드”, “정무문”,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 모두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의 오마주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게로 향합니다. 또 한 가지, 타란티노 감독은 자신이 꼽은 10편의 영화 중 하나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듭니다. 덕분에 이 영화는 2005년 무려 칸 영화제에서 칸 클래식으로 선정되어, 칸 영화제 기간 동안 재상영되었고 정창화 감독의 무대 인사 및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되기도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퀸시 존스는 자신의 곡을 무단으로 퍼간 1972년 작품 두 편 어디로부터도 저작권료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죠.

퀸시횽아는 쿨 가이!

실은 두 작품 모두 퀸시 존스가 드라마 “아이언 사이드”에 넣었던 스코어 트랙을 그대로 쓴 것은 아닙니다. 당시로선 그 음원을 구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겠죠. 그래서 홍콩에서 재녹음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리지널보다 훨씬 더 화끈한 음악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퀸시 존스는 특유의 완벽주의 때문에 절대로 한 곡에서도 내지르기만 하지 않거든요. “Ironside”도 초장에 사이렌 소리를 필두로 냅다 내지른 후, 바로 전자 피아노와 플루겔 혼, 스네어로 숨을 고른 후에 다시 관악이 터지며 완급을 조절합니다. 그런데, 이 곡을 연주하는 홍콩 연주자들은 다릅니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 오프닝 시퀀스 1분이 모두 퀸시 존스의 곡을 그대로 가져온 건데요, 처음부터 관악과 심벌 소리로 끝까지 내지릅니다. 사실 1970년대 류복성 아저씨의 “류복성과 신호등”을 포함해서 몇 장 없는 한국 재즈 음반을 들어봐도 비슷한 현상이 보입니다. 미국 재즈의 스탠더드를 연주하고 있는데, 원곡에서 들을 수 있던 풍부한 소리는 다 사라지고,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음악이 되는거죠. 이건 연주자와 편곡자가 달라서이기도 하고, 녹음 기술의 한계로 보이기도 합니다.

향숙이의 추억!

“죽음의 다섯 손가락”의 경우에도 원곡이 가진 풍부한 전자악기와 베이스 사운드를 살리기에는 홍콩의 녹음 기술이 그닥 뛰어나지 못했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덕분에 좀 더 화끈한 음악이 된 장점이 있었다고 봐야죠.  퀸시 존스는 훗날,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 오마주를 바친 타란티노 덕분에 “Kill Bill”의 OST에 “Ironside”를 실으며 저작권료를 챙길 수 있었답니다. ^^

그러니까 세줄로 요약하자면,

  1. 퀸시 존스는 전혀 의도치 않게 홍콩무협영화에 자신의 음악을  증정(?)
  2. 그 결과 이소룡이라는 시대의 맹주가 보여주는 멋진 액션을 음악으로 뒷받침하고,
  3.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라는, 아시아 영화 최초 미국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한 쿵푸 액션 영화의 뒷배를 확실히 봐준 셈이 되었다.

끝.

홍콩무협영화, 그 화려했던 역사의 겉을 핥아보자 [1부]


 

 


 


 



 


 



70년대를 기점으로 90년대를 가로지르면서 한국은 경제적 대격변기였고 폭발적 성장기였다. 88올릭픽과 OECD 가입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성장은 소위 “경이로운”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뒤안길에는 누구나 인정하는 저임금 노동과 열악한 노동환경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구조속에서 우리 아버지,어머니, 형님, 언니들에게 필요했던건 실현 불가능한 커다란 보상이 아니라 오히려 작은 위로가 되는 즐길거리가 아니었을까.




명절을 맞아 어렵사리 마련한 선물 꾸러미를 들고 시골집에 가면 어린 조카들이 삼촌과 이모에게 들러 붙었고, 명절 차례 후에는 그놈들을 몰고 읍내 영화관을 찾곤 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알현할 수 있었던 짜짱면 한 그릇과 식후의 사이다 한 잔은 어찌나 맛이 있던지.


 


먹고 살기 바빠 이번에는 못 내려간다고 전화통에 대고 울먹이던 작은 형들도 명절 오후에는 삼삼오오 모여 단성사 대한극장을 향하곤 했다. 대지나 화양극장도 좋았고, 부산의 태화극장도 좋았다.



 


그 시절의 명절에는 특히나 홍콩영화가 대세 중 대세였다. 그리고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국의 명절을 관통한 홍콩영화의 역사에서 정수리에 우뚝 선 영화는 역시 “취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취권”을 통한 성룡의 출현은 이소룡이라는 전설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이소룡 역시 50 ~ 60년대 쇼브라더스의 무협영웅들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외팔이”시리즈의 왕우, “금영자”의 정패패, “돌아온 외팔이”와 “13인의 무사”의 적룡 등의 역사를 이야기 하자면 몇날 몇밤이 지나도 모자랄터이니 언젠가 기회가 되면 시간을 내어 그들의 진면목을 찬찬히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시간에는 그저 그 시절의 작품들을 한 번 훑어, 아니 핥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나름 핵심이랄 수 있는 무협무비를 골라보도록 하자.


 


 


 



 



 


 



70-90년대를 관통하는 대명사는 역시 성룡이다. “성룡이영화”라는 말로 대별되는 홍콩 영화의 최대 번성기는 그 이전 쇼브라더스시대의 왕우,정패패,강대위,적룡에서 시작되어 이소룡으로 이어진다.



이소룡의 역사적 출현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을 광란과 흥분의 도가니탕으로 몰아넣었고, 심지어 인종적 자부심마저 심어주기도 했다 -.-


 


1971년, 영국의 식민지 홍콩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가 아직 서양제국의 힘에 눌려 제대로 기도 못 펴고 살 때, 삼국지의 관우나 조자룡에 비유할 수 있을 진짜 영웅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이소룡”이었다.



용쟁호투의 첫장면에서 이소룡에 쥐어 터지는 대련 상대자로 나온 홍금보나 단역 엑스트라로 출연해 나가 떨어지던 성룡에게 이소룡은 거대한 영웅이었고 이상향이었다. 그는 패배를 몰랐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그의 기세를 꺽을 수는 없었다.


 


촌동네의 허름한 공장을 배경으로 당산출신의 이 멋진 형님이 악당들을 모두 제압해 버리는 장면을 통해 그를 처음 만난 관객들에게 이소룡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인간의 몸에서 어떻게 저런 동작이 나오고 어찌 저리도 아름답게 힘과 에너지를 표현낼 수 있는지, 보는 이들 모두에게 그건 황홀경이였고 예술이었다.


 


단역이나 tv시리즈를 제외한다면 그가 남긴 단 4편의 전설적 작품 중에서 딱 한 작품만 뽑으라고 한다면 그건 단연 “정무문”이어야 할 것이다. 화면 땟깔 좋고, 스토리텔링의 완성도 높고, 액션 촬영이 튀지않고 안정적인 편이라 액션을 못 따라가는 분들에게도
보기좋을 뿐더러 무엇보다 그 비장미 …… 영화 말미의 그, 영화 역사상 최강의 비장미. 그래서 이 72년도 작품을 우선 강추하는 바이다.


 


73년 이소룡 사망후 홍콩영화계는 아노미와 패닉 그 자체를 보인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영화판은 이소룡의 후계자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서 거룡, 당룡,소룡, 대룡 등등 용용용브라더스를 쏟아낸다.


 


 


 



 


 


 


허나 무수히 나섰던 그의 후배들과 아류작들은 그의 그림자조차 흉내내지 못하고 맴돌기만 하였다. 그런 시절이 어언 지나고 70년대 말이 되었을 때 하나의 서광이 비추기 시작한다. 비어진채로 주인을 기다리던 왕좌에 다가섰던 건 바로 78년 “취권”과 “사형도수”의 성룡이었다.


 


79년 추석 서울바닥을 비롯한 전국은 코 큰 중국청년에게 홀랑 빠져든다. 영화 “취권”은 당시 아시아 전체 모든 흥행기록을 다 깼고 그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92만 명 정도의 흥행을 기록했는데 당시의 단일 개봉관 체제에서 한 극장에서만 90여만 명을 동원했던 것이니 이건 그냥 계산상으로봐도 6개월이 넘게 내리 매일 매진행진을 벌인 것이리라. 게다가 지방극장의 기록은 남아있지도 않으니 그 흥행의 역사만으로도 그냥 전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록상으로는 “사형도수” 또는 “사형조수”가 먼저 홍콩현지에서 개봉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쨌든 78년에 제작된 두 영화는 상호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성장드라마란 점, 코믹한 설정과 액션을 감미했다는 점, 그리고 두 작품의 내용적 규모가 기존의 비장미 가득한 그런 대의명분보다는 작은 정의, 한사람으로서의 바른 삶 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아마도 제작과정상 서로 보완하고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사형도수”의 경우, 그 나름의 진지한 의미는 바로 강자의 영화가 아니라, 가난한 자, 약자, 서민의 영화라는 거다. 주인공 자체가 그런 배경과 계급을 가지고 수모도 받고 서러움도 받는데, 기존의 강인한 무협 주인공들에 비해 성룡은 그런 연기를 소화해 낼 수 있엇따. 따지고보면 취권에 비해서도 사형도수는 그런 의미에서 더 높은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하여간 그래도 성룡 대역사의 시작은 취권으로 봐야하고, 그래서 이 작품을 두번째로 강추하는 바이다.


 



 





 


 



“성룡영화”가 새롭게 기초해내고 그래서 수많은 영화들이 다시 모방한 스토리 라인과 특징들은 철없지만 선량한 주인공, 그에게 무술을 전수하는 노숙자풍의 신비로운 사부, 그리고 그런 주인공이 실현해내는 작은 정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룡의 작품들은 편안한 분위기를 제공하였다. 이전의 홍콩영화 작품들이 엄청난 대의명분과 역사적 승부, 부모님의 복수등 무거운 소재들을 다루었지만 성룡의 영화들은 다소 가벼웠고 내용도 코믹하고 액션도 전통적인 무술들이 아니라 변형되고 가볍고 코믹한 것들이다.


 


사실 무협 액션들은 당연하게도 폭력이 미화되고, 심지어 공공의 동의 없이 자력구제로 악당을 처단한다. 이건 모두 불법이고 이런 면에서 거의 모든 무협물들은 환타지다. 그래서 무협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은 이 환타지를 현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룡의 무협과 액션은 전통적인 무협의 강하고 빠른 액션보다 기기묘묘하고 신기한 동작과 자세들을 선보였고, 혹자는 아크로바틱 쿵후라고도 부르는 그런 가볍고 경쾌한 무술들은 오히려 나름 신체단련과 자기방어라는 무술 본연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해도 성룡 본인이 그런 무술경향을 체계화할 욕심을 보이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당시 이런 무술과 무술영화는 일대의 혁신이었는데 사실 성룡이란 불세출의 천재가 아니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룡은 이어서 79년에 “소권괴초”, 1980년에 “사제출마”들을 줄줄이 발표하며 계속 이전 기록들을 갈아치우는 대히트를 연속시킨다. 그리고 그 무렵 미국에서 “배틀 크리크”, “캐논볼”에 출연하였다.



특히 “배틀 크리크”는 미국식 제작시스템을 통해서도 상당히 완성도 높고 재밌는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국관객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액션도 훨씬 쉽고 간단하지만 선이 분명하게 짜여져 세계를 무대로 하는 액션배우로서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줬다. 여담이지만 “배틀 크리크”의 극 중 주인공은 1930년대 미국에 온 한국인으로 설정되어있기도 하다. 특히 종반부에 칼잽이 상대역과의 대결장면은 서양액션배우들과의 합을 어떻게 보여줄 지에 대한 완성된 답이라고 평가하고싶다.


 


 


 





배틀 크리크



* 2부에서 계속됩니다 *

 


 



영진공 버디


 


 


 


 


 


 


 


 


 


 


 


 


 


 


 


 


 


 


 


 


 


 


 


 


 


 


 


 


 


 


 

“짝패”, 류승완의 성공적인 자기 고백극






영화를 보는 내내 들던, 그 익숙한 느낌. 익숙한 장면. 자신의 정체성을 액션키드로 상정했던 류승완 감독답게, 『짝패』는 그가 이제껏 보면서 좋아하고 열광했을 영화들의 흔적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정필호(이범수)를 호위하는 네 명은 보스를 호위하는 주먹이 아니라 주군을 호위하는 검객이며, (아마도 『킬빌』을 보고 시도할 용기를 냈을) 정필호가 자주 접대하던 공간이자 마지막에서 액션이 벌어지는 장소는 바로 그냥 룸싸롱이나 그저 비싸기만 한 고급식당이 아니라, 호화 ‘객잔’이다.온성 시내 한복판에서 인라인 패거리 – 힙합 패거리 – 야구부 – 하키부 – 여고생 무리 등등 온갖 잡것들과 뒤엉켜 싸우던 씬의 이석환(류승완)과 정태수(정두홍)의 버디액션은, 특히 간판과 철골구조물, 옆건물 내 소화기 등 온갖 주변 소품들을 이용한다.

손기술은 별로 없이 발차기, 그 중에서도 특히 돌려차기와 돌려서 내려찍기로 주로 구성된 액션씬의 동작은, “이소룡”이 “장철” 영화들을 보며 “발을 쓰란 말야, 발을!”이라고 외쳤다는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한다. 아무리 지방이라 해도, 아니 지방이기에 더욱 카지노 및 관광특구 개발과 이에 연관된 지방 조폭조직이라면 밀매한 러시아제 권총 같은 게 나올 법도 한데, 이 영화는 우직하게도 복고적인 액션영화 스타일을 밀어부친다. 고작해야 사시미 칼이 나오나. 그러나 핵심적인 액션씬들은 모두 전통적인 액션영화의 동작과 무기를 구사한다.

연회장에 쳐들어가는 두 사람이 준비한 무기는 고작해야 각목인데, 각목의 모양새부터 이들이 이 각목을 사용하는 동작은, 현대물에선 아무래도 자주 등장시키기 어려웠을(그래도 결국 막판에 결정적으로 등장한다, 아마도 이때를 위해 일부러 아껴둔 것이리라.) 장검 무술의 동작과 비슷하다. 연회장에서 저 이범수의 호위 무사들은 심지어, 차이나 칼라의 중국식 옷을 입고 있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들을 돌이켜 보노라면 그는 사실 스타일에 대한 욕심이 대단히 크고, 공들인 양식적 아름다움과 자신만의 영화적 스타일 확립을 위한 시도를 영화마다 해왔다. 『짝패』에선 유독 그러한 시도가 눈에 확 띄는데, 카메라가 상당히 느린 속도로 인물들을 따라가 사운드와 그림자만으로 난투극을 ‘들려주’는 오프닝부터가 꽤 인상깊다.

영화 중반까지 장면전환에 쓰이는 각종 기법들, 예컨대 팬을 이용한 시간대 전환과 심지어 화면 분할을 이용한 장면 전환 등은 영화의 흐름을 대단히 긴박하고 빠르게 만들어준다. 게다가 각 액션씬들의 그 각각의 특징들이란. 많은 액션씬들이 주로 발차기에 집중된 것은 사실이지만, 각 액션씬들은 저마다 성격을 다르게 놓고 그 각자 다른 분위기를 훌륭하게 이끌어가고 있다.

가령 위에서도 언급한 사거리에서 집단 싸움씬은 주위의 도구들과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는 성룡영화의 영향을 보는 것같은 반면, 연회장에 두 사람이 쳐들어가서 싸우는 시퀀스의 경우 마당에서는 전통적인 무협영화의 야외 검투씬을 보는 듯하다. 좁고 긴 골목방에서는 무협영화보다는 짧은 칼과 주먹으로 싸우는 장철영화를 보는 듯하고, 마침내 도달한 연회장 홀에서의 장면은 권법영화를 보는 듯.


사실 액션씬은 공간을 한정시켜 놓고 그 안에서 카메라를 싸우는 인물들 가까이에서 잡는 게 거의 정석이긴 하지만, 그가 묘사하는 액션씬들은 유독 협소하고 제한된 공간 내에서 이루어지곤 한다. 그것이 투견장이었건, 무도장이었건, 사각의 링 안이었건. 『짝패』에서의 액션씬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언급한 사거리 액션씬은 야외씬이긴 해도 좁디좁은 사거리이며, 마지막 연회장은 마당에서 시작하여 마치 문으로 파티션이 된 듯한, 길고 좁은 골목과도 같은 방들을 통과해야 한다. 미장센과 양식적 아름다움에서 스타일을 찾고자 하는 류승완의 야심은 확실히 이 씬들에서 시도만큼이나 빛을 발한다. 문이 촤라락 열리는, 이 씬 초반에서 그 깊은 공간감은 영화 문외한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 분명하고. 사실 ‘양복 입고 사시미 든’ 조폭 이미지를 싫어하는 편인데, 이 장면에서 사시미를 든 사내들 및 이들과 싸우는 두 사람의 씬은 굉장히 공들여 연출된 액션의 양식미가 느껴져 좋았다.

이건 사실, 위에서 “장철”영화를 보는 듯하다고는 했지만, 권법영화와 주먹싸움과 장검을 쓰는 무협영화의 영향 모두가 마구 짬뽕되어 있다. 적의 손목을 잡고 적의 칼을 이용해 다른 적을 베는 것도 그러하며, 반면 이들의 칼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인물과 인물간 사이 공간도 더 가깝다. 싸움의 시작에서 이들은 상을 이용해 칼을 막기도 하고.

어느 평론가는 “짝패”를 ‘류승완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라고 평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싸구려고 예술이고 온갖 액션, 무협영화를 가리지 않고 섭렵해온 영화광 출신의 감독이 만드는 영화가 만들어낼 수 있는, 온갖 갈래의 액션 및 무협영화의 특징들이 고스란히 한데 모여 있는 이런 영화는, 사실 타란티노라 해도 만들 수 없다.

단순히 공간의 소품 배치와 카메라 앵글뿐만 아니라, 인물의 움직임까지 모두 포함하여, 간만에 시각적 즐거움을 한껏 안겨준 영화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이 전의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류승완’은 누구인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