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나이트”, 변두리 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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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람은 누구나 칭찬하고 저도 손가락 아프게 칭찬을 해서 더 덧붙일 게 없는 <다크나이트>, 그러나 이 영화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레이첼이 별로 예쁘지 않다’는 둥의 시비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영화 전체의 분위기가 약간 아슬아슬하다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은 전편부터 좀 지나치게 사실성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화 전체에서 배트맨이라는 존재의 괴상함이 갈수록 눈에 띄게 되지요.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에서는 지극히 만화적인 주인공 배트맨과 전혀 만화 같지 않은 상황설정 사이의 긴장이 흐릅니다. 지금까지는 놀란 감독의 놀란 연출력으로 그 부조화가 적절히 통제되어 왔지만 앞으로 영화가 사실적이 되면 될수록 배트맨은 더욱 더 이 세계에 안 어울리게 될 겁니다.

요즘 웹에서는 배트맨의 그 낮게 깔아대는 목소리를 풍자한 동영상이 인기던데, 이것도 그 어색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보시려면 여기로 http://dory.mncast.com/mncHMovie.swf?movieID=10088538620080812161322&skinNum=1)

이번 영화에서도 초반부 배트맨의 등장과 액션을 돌이켜보면 “도대체 쟤는 왜 사서 저런 고생을 한다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 혼자서 그 잔챙이 마약범죄자들과 자경단까지 상대하면서 투닥거려야 할까요. 아무리 힘이 세고 무술을 잘 하고 돈과 기술로 처발랐을지라도 결국 개인에 불과한 배트맨이 그 넓디넓은 고담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잔챙이 악당들도 “고담에서 배트맨을 만날 확률은 로또 당첨확률 수준”이라지 않습니까. 하지만 웨인 군은 굴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들을 최첨단 기술을 이용해서 해결하려고 매달리죠. 홍콩에서의 액션은 그 백미입니다. 웨인 군은 자신의 놀라운 헹글라이딩 기술 + 최첨단 EMP 공격기술 + 냉전시대에 CIA가 개발했던 ‘스카이후크’ 까지 써가며 마피아의 돈세탁 업자를 홍콩에서 납치해 옵니다. 멋지긴 합니다만, 좀 과하다는 생각도 들죠. 그 스카이후크 수송기 복원 및 운용비용이라면 아마 고담시의 마피아 조직 한 두개를 사 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사실 부르스 웨인의 재력이라면 팔코니 조직 전체를 사 버릴 수도 있겠고, 사회보장제도와 인프라를 확충해서 그런 범죄자들의 이익을 빼앗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아마 그런 식으로 마피아를 잡아먹는 것이 도시의 정의 구현에는 오히려 훨씬 효과적이겠죠. 하지만 배트맨은 늘 일인 자경단으로 나서는 고생을 사서 합니다. 왜? 그래야 하니까…


원래 내가 좀 그래…

게다가 이 배트맨의 돈지랄은 마음이 가난한 악당 조커의 등장으로 더욱 더 그 삽질스러움을 노출하고 맙니다. 배트맨과 조커는 말 그대로 대척점에 있습니다. 배트맨에게는 지킬 것만 잔뜩 있는데, 조커는 바로 그것을 모두 파괴하려고 하죠. 배트맨이 믿음에 매달린다면 조커는 불신을 키우려 헌신합니다. 그리고 배트맨이 결국은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하이테크 무기로 전쟁을 벌일 때, 조커는 돈을 불태우며 지극히 로우테크 무기로 달려듭니다.


자~알 놀고 계십니다 …

이 하이테크 돈지랄 vs 로우테크 막장정신 대결의 대표적인 장면이 호송차량을 둘러싼 액션이죠. 배트맨의 수천만 달러짜리 배트모빌 텀블러에 대결하기 위해 조커가 내놓은 무기는 자그마치 RPG입니다. 2차 대전 막판에 막장까지 몰린 독일이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대전차무기, ‘판저파우스트’에 크게 데었던 소련이 이걸 충실히 계승, 발전시켜 만든 로켓발사기죠. 막장무기의 후예답게 값도 싸고, 만들기도 쉽기 때문에 이 RPG는 베트남에서부터 아프리카와 중동의 거의 모든 전쟁터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고, 늘 기대이상의 활약을 했습니다. 멀리는 1970년대 4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 전차부대를 괴멸시켰고, 근래 들어와서는 아프간에서 러시아 기갑부대를 괴롭혔고, 최근에는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블랙호크 헬기를 2대나 격추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며, 지금도 이라크 전쟁터에서 미국과 영국이 자랑하는 신형전차 M1A2 나 챌린저2 들에게 뜻밖의 일격을 가하고 있죠.


제 3세계 게릴라들의 2대 필수요소, RPG와 AK47


이것이 나의 무기라능 …

바로 그 RPG7과 텀블러, 이 대결의 승자는 누구였을까요? 최신형 복합장갑으로 무장한 전차에게도 타격을 입히는 RPG7인데 경장갑 장갑차에 불과한 텀블러가 뭐 어쩌겠습니까. 물론 텀블러 쪽이 좀 더 적극적인 공격을 했다면 승부는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만, 배트맨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는 지키는 쪽이고 조커는 공격하는 쪽이거든요.

변두리 산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플래툰이라는 잡지에서 읽은 건데 직접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싸구려 구식 라이플이나 구식 권총도 최신식 소총과 마찬가지로 당신을 확실히 쓰러뜨릴 수 있다.”
아무리 구식이고 낡은 총이라도 발사만 될 수 있다면 인명을 살상할 수 있다는 얘기죠.
그 상대가 수백만원짜리 무기로 무장했다고 할지라도 결국 총에 맞으면 누구나 죽거든요.
로우테크면 어떻습니까? 장갑차를 부실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데요.


작동 불량인 리모컨이라도 결국 폭탄 터트리면 되는 거 아니냐능 …

이 영화에서 조커와 배트맨의 대결은 언제나 이런 식입니다.
변두리 산술 + 막장 정신으로 무장한 조커가 장비나 기술이나 정보력 모두 우위에 서 있는 배트맨을 계속 골탕 먹입니다. 조커는 더 이상 빼앗길 것도 망가질 것도 없는 존재이고 배트맨은 모든 것이 손실의 대상이거든요. 세상이 원래 그렇습니다. 많이 가진 자일수록 빼앗길 것이 많아 약점이 늘어나고, 가진 것이 없을수록 더 잃을 것도 없기에 오히려 약점이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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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패라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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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테면 쳐봐!!!


참고로 이때 들고 나온 총은 S&W에서 만든 M76이라는 싸구려 기관총인듯 …

지금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일도 결국 조커와 배트맨의 대결과 비슷한 양상입니다.
(배트맨처럼)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미군들이 (조커의 드럼통 폭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원격조종폭발물에 끊임없이 죽거나 불구가 되고 있습니다. 침략자를 죽이기 위해 내가 죽는 것은 전혀 두렵지 않은(오히려 그렇게 죽으면 저승에 가서 신이 내리는 큰 상을 얻는다고 믿는) 그들 앞에 미군은 약점투성이의 배트맨일 뿐입니다. 작금의 사태를 유발한 911 테러부터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 경악스런 테러를 실현하기 위해 테러범들에게 필요했던 장비는 커터칼 몇 자루 뿐이었죠. 나머지 테러 장비는 미국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로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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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와 원격조종급조폭발물에 당한 미군의 비싼 탱크와 장갑차들 …


이건 아무래도 911 테러를 연상시키는 …

우석훈 박사의 <88만원 세대>를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럽의 그 선진적인 사회보장제도나 소수자를 배려한 정치제도가 완성된 시기가 대부분 우파 정부 시절이었다는 겁니다. 사실 우파정부는 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원칙인데 그들이 왜 좌파 정부가 할 법한 일을 했을까요. 그게 바로 부자들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죠. 가진 것이 많을수록 약점이 늘어나고, 인생 막장에 몰린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자신들이 위험해지거든요. 그래서 부자들이, 권력자들이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에게 신경을 써야 하는겁니다.


니 랑보르기니나, 내가 탈취해 타는 경찰차나 산쾌하기는 마찬가지고 …
속은 내가 더 편하다능 …


영진공 짱가

추신: 요즘 꼴을 보아하니 우리나라 부자들은 별로 그럴 생각이 없더군요.
자기들이 먼저 막장테크를 타거나 아예 우리나라를 떠버리는 쪽을 선택하데요.
참 잘 하는 짓입니다.


마지막으로, 조커 패러디 광고 … 근데 나는 버거킹이 더 좋다능 …

[영진공 61호]우석훈 –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산업인력관리공단
2006년 10월 18일

대학 신입생이 되었던 9X년의 봄, 선배들이 쌀개방 반대 시위를 나가자고 했다. 당시만 해도 레드 콤플렉스가 만만찮았던 나, 쌀개방 반대라니 나가긴 나가는데 우루과이 라운드니 뭐니, 당최 못 알아먹을 말들뿐. 하여간 영문도 자세한 내막도 모른 채 그저 동원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거부감 팍팍 느껴지는 시위에서 쭈뼛거리면서 거부감 팍팍 느껴지는 방식으로 구호 따라 외치고 하다가 막간에 데모 나가자던 그 선배에게 좀 쉬운 말로 설명해 달라고 했다. 설명을 듣고 내가 물었다.

– 그러니까 우리가 데모하는 건 결국 쌀개방을 막을 순 없지만 좀더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하라는 압력인 셈이네요?
– (졸라 떨떠름하게) 그, 그, 그렇지…
– 그럼 애초부터 그렇게 설명하면서 데모 나가자고 하면 좋았잖아요. 농민들 다 죽는다 어쩐다, 절대 하면 안 될 것처럼 전단도 써놓고, 사실은 쌀시장은 결국 개방될 거라면서요.

이후 나는 데모에 나가지 않았지 않았고, 그 선배도 다른 선배도 내겐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선배나 나나 얼마나 웃긴지. 나는 스스로 알아보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채 그저 운동권 선배들만 탓하고 있었다. 그 선배는 NL 특유의 살뜰히 후배 챙기는 척하며 꼬시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동원하고 있었다. 그저, 내가 어느 자리에 왜 서 있는지 스스로 알아야 한다는 알량한 자존심만 있었을 뿐, 호기심과 그를 채우기 위한 노력같은 걸 할 생각을 못하는 전형적인 ‘게으른 구경꾼’이었다.

링크

경제에 대해선 기본조차 없는 ‘교양없는 인간’이라 한미 FTA, 한-칠레 협정, 우루과이 라운드, WTO 등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다. 그냥 이제껏 속편하고 극단적으로 단순한 내 입장은 이거였다. “자유무역 안 하고 살 순 없지만 선진국과 ‘형식만 동등한’ 조건이라면 실질적으론 이쪽이 심하게 밑지는 장사다. 그리고 그 피해는 오롯이 여기 농민들, 하층 임노동자들이 질 것이다.” 스크린쿼타를 유지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이런 기본원칙과 반세계화에 대한 책 몇 페이지에서 주워들은 지식을 짬뽕해서 이해했다. 너무 단순하긴 하지만 기본적인 입장에선 틀리지 않는다 생각한다. 게다가 미국이야말로 보호무역 비율이 만만치 않게 높다는 소린 어디서 또 들었단 말이지. 미국 섬유산업이 관세가 30%라지, 아마?

여러 블로그에서 ‘쉽고 알차게’ 한미 FTA의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고 극찬을 해서 이 책을 찍어두었다가, 저자의 블로그 글들에 (새삼) 반해버려서 신뢰를 갖고 이 책을 사서 읽었다. 결론. 한미 FTA에 대해 알고싶은 경제치들을 위한 최고의 책이다. 항간의 ‘쉽다’는 얘기는, 다른 어렵고 심도높은 책들에 비해 쉽다는 것이지, 담고있는 내용 자체가 경제치들이 손사래를 칠만한 대상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결코 쉽지도 만만하지도 않다. 다만, 꼭 알아두어야 하는 실질적인 내용들을 저자가 최대한 쉽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풀어썼다는 점에서, 쉽게 읽히고 쉽게 책장이 넘어간다. 게다가 이 책은 현재 진행중인 한미 FTA의 문제점에 대해 파악하는 것뿐 아니라 현재 가장 기본적인 경제학적 툴의 모습, 경제학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에 관해 명료하고도 간결한 예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같은 경제치들에게 필독서로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예를 들면 각 선진국이 택하고 있는 경제발전 모형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들, 한국의 미래가 이제껏 어떤 길을 걸어왔으며 지금의 한미 FTA의 어떤 문제점 때문에 어떤 문제를 안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경제치들이 대강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쉽고 간결한 근거들 위에 설명되어 있다. “무조건 개방은 안 된다”도 아니고, 디립다 협박만 늘어놓는 방식도 아니다. 지금의 이 협상방식에서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정확히 어떤 점이 어떻게 위험한지, 중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찬찬히 쉽고 친근한 어조로 아주 실용적이고 일상생활에서 시작하는 조근조근한 논리와 함께 펼치고 있어서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경제학이 어려운 학문이라는 건 여전해 보이지만, 그 경제학도 실은 사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논리 위에 서 있다는 걸 발견한 건 과외의 수확. [맨큐의 경제학]을 보다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진 전력이 있는 “심한 경제치”인 나로서는, 이 책이 여러 모로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책장도 어찌나 쉽고 빨리빨리 넘어가는지, 스스로가 신기했을 정도. 앞으로 이 책을 두 번 정도만 더 읽으면, 좀더 어려운 다른 책들도 좀 쉽게 읽게 될 수 있으리란 자신감도 조금 생겼다.

미국과 특수한 관계를 맺고있고, 수출, 그 중에서도 대미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한국이란 곳에서, 이런 식의 큰 협상은 내가 경제에 관심을 갖고있건 아니건, 물적 토대를 뿌리부터 뒤흔들며 나의 가장 사적이고 개인적인 삶에까지 어느 순간 영향력을 끼치게 돼 있다. 안타까운 점은 요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경제니 정치니 하는 게 “겁나먼 왕국”에서 일어나는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는 것, 뭐 좀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기웃거려 봐도 이 무식하고 게으른 인간이 아무래도 쌩기초도 없는지라 도무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사실, 참 미안스러운 만큼 고마운 책이다. 아무래도 내가 무식한 건 결국 게을러서인데, 그런 게으름뱅이조차 이렇게 쉽게 뭐가 문제고 뭐가 중요한지 관심을 가지게 해줄 만큼 쉬운 책을 써준다는 것. 이건 사실 밥상을 차려놓는 것도 모자라 아예 밥을 끓여 죽을 만들어서 입 앞에 떠준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걸 삼키느냐 거부하느냐는 각자가 선택할 몫이지만, 아직은 ‘무식한 주제에 게으르기까지 한’ 나같은 사람들을 위해 이런 분들이 쉽고 재미있는 책들을 계속 좀 써주셨으면 한다.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