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과서 수정 논란을 바라보며




타고난 이기주의자이다 보니 대학생이 됐다고 나 이외의 것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그나마 사회과학 모임에 나가게 된 것도 호감 가는 여학생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접하게 된 한국의 현대사는 충격이었다. 그곳에는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역사가 있었다.

그 역사는 전혀 새로웠다. 찬탁은 소련이 한 것이 아니었고, 여순 반란사건은 반란이 아니었고, 4.3은 빨갱이 폭동이 아니었으며, 이승만은 국부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허풍이 심한 편이지만 들은대로라면 이랬다. 4.3 당시 현 제주시 관덕정 자리인 제주 도청 앞으로 어른들은 마음 놓고 지나다니지 못했다. 아이들만 용케 지나다녔고, 제주도청을 가로막은 철조망에는 사람 가죽이 널려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에게 4.3은 그런 기억이었다. 하지만 4.3에 대해 집안 어른 누구도 내놓고 얘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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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4.3은 이랬다. 돈 번다고 제주도 전지역을 싸돌아 다닐 때. 4월과 5월 제주 조천이나 세화 등지로 가면 같은 날, 조그만 마을이 모두 제사다. 그날이 그 동네 사람들에게는 비극의 날이었던 것이다.

고삐리 때부터 친구였던 여자애가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후에 아버지가 물었다.

“가이 아방은 뭐 햄시?”
“경찰 공무원마쉬.”

남녀 사이에 친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아버지는 뭔가 아쉽다는 듯 혼자 되뇌었다.

“게난 순사 딸이여?”

4.3을 겪은 제주 사람들에게 경찰이란 그런 존재였다. 이 사람들에게 지난 50년간의 역사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참여정부 때 노무현이 제주도를 찾아와 4.3에 대한 국가의 잘못을 최초로 인정했다. 같은 날 할아버지와 아버지, 작은 아버지와 사촌형의 제삿밥을 먹으러 돌아 다니는 사람들, 경찰은 순사에 불과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감춰왔던 역사가 사실이었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인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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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몇 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제주도 4.3위원회가 폐지될 위기에 놓이는가 하면, 여당 의원은 ‘4.3은 좌익세력에 의한 폭동’ ‘제주도는 반란이 일어났던 곳’이라고 말한다.

역사 교과서 수정 논란에 결국 출판사가 굴복했다는 뉴스를 들으며 나는 다시 교과서 밖으로 묻혀버리는 역사를 떠올린다. 권력과 자본의 지난 잘못이 드러날 수 있다는 이유로 ‘좌편향’ ‘왜곡’이라고 이름 붙여진 역사들. 

4.3을 겪은 아버지는 ‘경찰’을 보며 일제시대 조선인을 잡아다 고문하는 ‘순사’를 떠올린다. ‘경찰’과 ‘순사’라는 단어 사이, 서로 닿을 수 없는 그 거리는 역설적이게도 역사가 사람들에게 준 상처의 깊이와 닿아 있다. 그 역사들이 다시 교과서 밖으로 묻혀버리는 광경 앞에서 씁쓸한 이유는 ‘역사의 진실’이니 ‘권력의 오만’이니 ‘우경화’니 하는 거창한 이유들 때문이 아니다.

역사를 몸으로 겪으며 버텨 온 사람들, 그 역사 속에서 고통을 견뎌 온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인 배려. 바로 그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진공 철구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는 지금의 한국과 싱크로율이 99.9%



경제학자가 쓴데다가 제목이 “미래를 말하다”여서 경제 관련 내용일 줄 알았건만 오히려 미국 정치 분석에 가깝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그의 연구는 이 책의 내용과는 거의 무관하다.)

크루그먼이 책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의문은 바로 이것이다.

“중산층과 서민에게 아무 도움이 안되는 세금 감면과 복지 혜택 축소를 주장하는 공화당. 그들은 왜 매번 선거에서 이기는가?”  여기서 공화당을 한나라당으로 대체하면 이 질문은 우리에게 싱크로율 99.9%다.

이 의문에 답을 제시하기 위해 크루그먼은 대공황 이전 시절부터 얘기를 시작한다.

대공황 시절 이전 미국은 소득 불균형이 심각했다. 대공황이 발생하고 뉴딜을 실시한 이후 미국 경제의 황금기가 찾아온다. 하지만 레이건 출현 이후부터 소득 불균형이 점점 심각해지더니 현재는 아주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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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시절의 미국

뉴딜정책 이후 소득의 재분배가 골고루 이어지는 중산층의 황금기이자 미국 경제의 황금기가 찾아왔었다는 얘긴데, 그 이유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책적 차이가 그리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뉴딜 연합이 그랬고 과도기적 대통령인 공화당 닉슨조차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하려고 했을 정도로 민주당과 공화당은 정책에서 좌우 스펙트럼이 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알다시피 전국민 의료보험은 후에 클린턴이 관철시키고자 했으나 당시 공화당 하원의장인 깅리치에 의해 좌절된다. 현재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이만큼 벌어진 것이다.

이처럼 두 정당의 노선 차이가 벌어진 이유는 70년대 들어서면서 공화당이 다시 세금감면과 복지 축소와 자유 시장을 내세우며 극우화됐기 때문이다. 크루그먼은 그 이유를 미국의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이 공화당을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기도 우리와 싱크로율 99.9%다. 우리도 있다. 뉴라이트.

이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은 사실 민주주의자들인지도 의심스럽다는 게 크루그먼의 얘기다. 그들은 프랑코 정권을 존경한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댔다. 또한 그들은 정부 규제가 없는 자유 시장과 세금 감면을 원하는 기업의 든든한 후원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또한 공화당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그러니까 공화당 당대회에서 “정교일치를 하면 왜 안되느냐”고 연설하는 자들의 지지까지 얻는다. 이 역시 우리와 싱크로율이 높다.

게다가 미국은 원초적인 인종 문제가 결부돼 있다. 복지 혜택을 늘렸을 때 그 이득이 유색인종에게 돌아가는 것을 질색하는 남부 여러 주의 인종적 혐오를 공화당은 교묘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는 거다. 이 또한 우리와 싱크한다. 우리도 있다. ‘흑인’ 대신 ‘빨갱이’. 민주당이 싫은 이유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북한에 퍼주기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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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뉴라이트라 할 수 있는 "Compassionate Conservatism(인정 많은 보수)"를 비꼰 카툰 - 뉴올리언즈의 재해복구에는 예산배정을 안 하고 이스라엘의 군비지원에는 3백억달러를 책정했다는 내용.

이들의 지지를 얻은 골드워터는 하지만 패배한다. 그러나 똑같이 이들의 지지를 받는 레이건은 정권 획득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레이건이 이같은 ‘새로운 보수주의의 정서’를 포장해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레이건은 유세 중 “복지의 여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복지 혜택만으로 여왕처럼 사는 어떤 여성, 그것도 유색 인종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어떤 여성이 있다는 얘기다. 결국 “복지의 여왕”이라는 단어는 유권자들로 하여금 세금을 악용하는 것에 반감을 갖게 만드고, 더불어 높은 세금과 큰 정부를 불신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레이건이 약속하는 세금 감면과 작은 정부에 동조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주의 어떤 여성이 ‘복지의 여왕’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사실 ‘복지의 여왕’은 실제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레이건은 증명할 수도 없는 사실을 가지고 정서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이런 언어는 이명박 대통령도 사용했다. 그 이름도 유명한 톨게이트. 대체 어떤 톨게이트가 하루 200대가 통과하는데 직원이 20명인지 정부조차 찾지 못했다. 그도 그저 큰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갖게 하는 데 존재하지 않는 톨게이트를 갖다 붙였을 뿐이다.

이명박의 출현은 레이건의 출현과 비견된다. 그는 뉴라이트의 지지를 받았고 세금 감면과 민영화를 통한 작은 정부, 자유 시장을 내걸고 있으며 기독교 장로이다. 게다가 한나라당은 아직도 ‘빨갱이’를 대신해 ‘좌파’라는 단어를 공공연히 사용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좌파’라는 단어는 ‘좌파 정책’, ‘좌파 코드’와 같이 대상이 굉장히 모호할 때가 대부분이다. 이성적인 단어가 아니라 감성적인 단어라는 증명이고, 논리가 아닌 감정에 불과하다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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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뉴라이트는 미국의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을 벤치마킹했음이 분명하다. 레이건처럼 이명박이 집권했으니 그들은 장기 집권을 꿈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작업이 수반돼야 한다. 노령화로 자신들의 지지층이 많아진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어린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비우호적이다. 그들에게 투표권이 생기면 그것 역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고쳐야 한다. 무엇을? 교과서를.

역사 교과서 개정 논란은 그래서 나오는 것일 게다.

젊은 대학생들도 문제다. 미국의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이 대학 공화당 연합회를 조직했듯이 뉴라이트 또한 대학 학생회를 조직해 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방송. 아마도 방송, 그것도 예능/오락 쪽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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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뉴라이트의 시각

레이건이 집권한 게 1980년. 거의 30년이 지나서야 미국은 오바마를 당선시키며 레이거노믹스를 걷어치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야 이명박을 갖게 됐다. 이것을 걷어치우려면 우리에게도 30년이 필요한 것일까?

끝으로 폴 크루그먼은 유권자들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안되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할 때 한 가지 커다란 전제를 깔고 있다. 그것은 ‘유권자들이 공화당에게 속았다’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공화당은 어떻게 해서 유권자들을 속일 수 있었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면 좀 더 원초적인 의문을 가져보자. 유권자는 왜 속을까?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을 내놓을 뿐 아니라, 국정원을 과거 안기부로 되돌리려고 하고, 언론장악을 획책하고, 검찰과 감사원 심지어 ‘헌재까지 접촉’하고 다니는 정권에게 왜 속으며, 아직도 모든 당 중에 압도적 1등으로 왜 지지할까?

김근태 씨야 정치인이니까 이 말 해놓고 무지 욕먹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정답같다.
국민이 노망났다. 그것도 단단히 노망났다.


영진공 철구

수구 우파의 고민, 반청복명이냐 현실주의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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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좌파나 우파에 대한 정의는 그냥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습니다.

중고등학교 사회시간만 제대로 공부했어도 이런 난장판은 아닐겁니다.

심지어 “좌파는 먹고사는 문제엔 별 관심이 없고 이상이나 정의를 추구하는 집단”이란 오해도 있더군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어디서 왜 시작되었는지를 안다면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좌파의 시작은 바로 먹고사는 문제였습니다. 좌파가 말하는 정의란 “왜 일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굶어야 하느냐?” 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고요.
덧붙여 좌파는 의외로 상황형적 인간관을 가집니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니까요.
사회경제시스템을 바꾸면 인간도 바뀝니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시스템이죠.

그럼 우파의 핵심정신은? “불안을 먹고사는 차별주의“입니다.
극우라 할 수 있는 파시즘의 기본논리는 차별입니다.
왜 차별을 하냐면, 누군가 우리의 안위를 위협하거든요.
그들을 차별하고 몰아내고 심지어는 이 세상에서 죽여없애지 않으면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우리가 위험해지거든요.
(반대로, 세상이 변하고 질서가 바뀌는 이유는 누군가의 모략과 책동 때문이고요)
그럼 누가 그 위협적인 존재인가요? 겉으로봐서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이 무서운거죠. 그들의 본색을 알기 위해서는 과거를 뒤지고 출생신분을 봐야 합니다. 지역을 따지고 인종을 따지고 과거를 따지고 심지어 사돈에 팔촌까지 뒤집니다. 즉, 우파가 보는 인간은 유전형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들의 본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혈통이 운명을 결정하고 어떤 인간은 꼭 죽여야하죠.

그런 의미에서 스탈린이나 모택동은(그리고 김일성과 김정일도) 제가 보기엔 극우 파시스트랑 똑같은 인간입니다. 무지막지한 숙청을 정치라 착각했으니까요. 뭐 사실 매카시즘도 막상막하. 다 똑같은 넘들이죠.

그래서 저는 사람을 볼 때 그의 좌우이념(그런게 제대로 있는 인간도 드물고..)보다는
그가 저 망상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더 따집니다.
문제인간들을 싹쓸이 청소하면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망상…
그것이 인간을 가장 위험하게 만드는 망상이니까요.

이미 생태학자들이 이 망상이 틀렸음을 증명했습니다.
개미들 중에도 탱자탱자 노는 개미들이 있는데 그 개미들을 싹 제거하면
열심히 일하던 개미들 중에서 역시 똑같은 비율로 탱자탱자 개미들이 생겨나죠.
세상이 간단하지가 않다고요. “A이면 B다” 라는 식의 논리는 책상위에서나 가능합니다.

어쨌거나, 냉전시대에는 사실 좌파란 존재 불가능이었습니다.
동서 체제는 각자의 극우로 달려가고 있었고 거기에 반대하면 모두 각자의 좌파로 지목되어 척결대상이었죠.

이제 세상은 새로운 시대가 되었으나
이 나라 사람들의 뇌속은 여전히 냉전이 진행중입니다.
여기저기서 광대 헛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그 이유고요.

그나저나, 이제 우리나라 자칭 우파들은 어떻게 함?
그들이 숭상하는 미국의 대빵이 된 분이 저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지금 상황은 마치 청나라에게 명나라가 잡아먹힌 이후의 조선 사대부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할겁니다. 중국을 숭상하며 유교를 받아들이던 이 나라의 지배계층이 지금은 미국을 숭상하며 기독교를 받들어 모시고 있는데 갑자기 그 미국이 오랑캐!!! 에게 점령당해버린 것이죠.

지금 그들의 고민도 청나라시대 사대부들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 반청복명을 외칠 것인가… 아니면 현실론을 주창할 것인가…

말도 안된다고요?

이 나라의 도성을 옮기지 못한 이유가 6백년 전의 관습헌법 때문이었음을 잊지 마시길…  (참고:  [수도이전] 그래도 변한 것은 없다. )


영진공 짱가

F-15K는 살인 병기가 맞고 활인은 사람이 하는 거다.


1.
내 고등학교 시절 학교 앞 도서 대여점에서 가장 불티나게 인기 있었던 밀리터리 소설은 단연 ‘데프콘’ 시리즈였다. 이 좁디 좁고 외세의 침략만 받아온 나라가 중국과 맞짱뜨고, 일본과 맞짱뜨고. 나중엔 미국 본토까지 진격한다.

김구 선생을 근대의 민족 최고 지도자로 생각하던, ‘민족주의자’이던 내게 그 소설들은 질풍노도 청년의 심장을 4기통 모터바이크 엔진 피스톤 뛰듯 뛰게 만들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데프콘 시리즈를 쓴 사람 중 김경진 氏와 진병관 氏는 ‘동해’라는 잠수함 전투 소설을 써내었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 해군의 ‘저력’이 어디서 나와야 하는지 국민들에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난 보일러도 안 들어오는 자취용 독서실 TV방에서 담요 위에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50년만에 정권 교체를 이루는 역사적 사건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전 정권이 만들어낸 IMF위기 덕분에 더욱 더 추운 겨울을 보내며 고3을 맞이했다.

2.
진로 따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수능 400점 만점을 맞아 국립대를 들어가 4년 장학금을 받는다 하더라도 주거비와 생활비가 감당이 안 된다. 그 IMF 시기에 어디에 담보를 잡히고 어디에 돈을 빌려서 ‘대학 따위’를 간단 말인가.

수능 모의고사 수학을 80점 만점에 평균 45점을 유지하는 실력으로 경찰대 시험을 봤다가 떨어졌다. 1차 시험 통과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거다.

덕분에 내 고3 여름은 얇은 수학 문제집 2권과 낮잠으로 가득 채웠다. 독하게 공부하기엔 허연 여백의 검은 글씨가 너무도 눈을 아프게 하여 감는 것이 좋았다.

그나마 수학의 정석 집합 부분처럼 때만 태우지 않고 2권을 끝까지 잘 푼 덕분에. 수능에서는 67점을 맞는 쾌거를 이룩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높은 점수를 맞고도 담임 선생에게 들은 것은 칭찬도 아니었다.

“사관학교 갈 늠이 점수가 이리 잘 나오면 너보다 낮은 애들이 고생하잖아 임마.”

그렇다. 더군다나 5공화국 시절도 아니니 ‘육사’를 나온다고 좋은 대우 받는 세상도 아니었다.

3.
내가 해군사관학교를 택한 이유는 순전히 위에 언급한 ‘데프콘’ 시리즈와 ‘동해’라는 밀리터리 소설 때문이었다. 물론 IMF가 아니었다면 난 ‘사관학교’를 선택할 이유조차도 없었다.

내가 조국의 미래와 안녕, 끓어오르는 애국심으로 사관학교를 택했다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개그다.

내 학창시절의 애국심을 일깨워주는 것은 ‘애국조회’도 아니었거니와,
오히려 성조기를 앞세워 ‘미국 만세’를 외치는 헐리우드 영화에 내 조국을 투영시켜 얻어낸 ‘만들어진 애국심’이었다.

경찰대 입시에 떨어지자 3개 사관학교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공군은 시력 때문에 제외.  육군과 해군 중에 해군을 선택하게 만든 것이 고작 두 종류의 ‘밀리터리 소설’이었다.

[고작이란 표현을 썼음에도 난 여전히 ‘데프콘’과 ‘동해’, ‘남해’를 쓴 진병관 氏와 김경진 氏의 팬이다. 아마 내가 TV 드라마를 만든다면 이우혁 氏의 ‘퇴마록’과 함께 위의 소설들을 원작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니까.]

4.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군대’를 갈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
긴 시간 동안 사회와 단절되어야 하며, 남들이 무언가 ‘발전’하고 있을 때 자신이 동떨어진 사회에서 기존에 살아오던 사회의 시스템에 ‘정체’되어야 한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 그 얼마나 두려웠던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첫 취업’을 할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
아무 데나 공채 자리가 날 때마다 되는 대로 꾸역 꾸역 자기소개서와 원서를 써 넣진 않았던가? 그러면서 막상 자신이 ‘찝찝해 하던’ 직장에서 덜컥 합격 고지가 들어오고 그리 내키지 않는 직장에서 첫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앞으로 ‘이 바닥’에서 살아야하는 그 숨막히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사관학교란 곳은 그 두가지를 동시에 체험하는 곳이다.
채 고등학교 졸업식도 하기 전에 ‘가입교’를 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입교와 동시에 4학년의 소위 임관식에 내려올 ‘국가 원수’를 맞이하려고 분열 연습만 하다보면 어느 새 일상 생활은 군인이며, 꽃피는 봄이 와서 학과 수업이 시작 되더라도 취미 생활 수준이 되기 쉽다.

육군은 ‘육사’, ‘3사’, ‘학사장교(OCS)’, ‘ROTC’까지, 임관 경로가 많다보니 육사 졸업 후 의무 복무 기간 후에 잘릴 것을 대비해서 3학년 정도 되면 다른 자격증 공부하는 애들도 많았었다.

공사야 ‘Pilot’이 되면 취업 걱정은 안 한다고 봤을 정도였으니 당연히 농땡이도 많았겠지만. 내부야 어쨌든 외부인의 시각으로 ‘날라리’라고 폄하하기도 했으나 그건 그만큼 개방적인 동네라는 표현으로 보아야겠다.

해사는 말 그대로 군대였다. 육사나 공사는 아예 자체 캠퍼스였지만 해사는 출입구 자체도 행정학교와 **전대를 같이 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해사출신 90%이상이 20년 이상 근속을 하는 곳이 바로 해군이었다.

사관학교에 들어서는 ‘아이들’은 대한민국의 ‘주입식 교육체제’ 속에서 살다가 어느 새 갑자기, 막 성년이 된 나이에 덜컥 크게 룰을 어기지만 않으면 평생 직장이 될 법한 자리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5.
현재 군대를 갔다 온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 취업 연령은 27~29세가 될 것이다. 이 중에 미래에 대한 고민, 자기 설계 등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믿고 싶다. 나도 이제 어렴풋이 그 속에 들어갈 수 있으려나 속으로 자문할 정도니까.

하지만 사관생도들은 이미 20대 초반에 자신의 미래 직종과 직장이 결정되어 버린다. 물론 그 속에서도 병과가 있고 자신이 원하는 걸 지원할 수는 있지만.

나는 늘 살아가면서 ‘계속 변하기’를 원한다.

어떤 사람들은 ‘초심’을 잃지 말자고 얘기하는 데 나에게 있어서 ‘초심’은 늘 ‘깨어있는 채로 변하고 또 변하자’로 표현된다.  그러니까 ‘늘 처음처럼 나를 지켜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 같다.

당장에 나를 보면 그렇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민족주의자’던이 내가 현재는 ‘민족주의자’들을 혐오하고, 심지어 ‘국가주의자’들까지도 혐오한다. 그러나 나는 ‘애국자’다. 내가 가진 경제력으로 이 나라를 벗어나서 이러한 삶을 누리기란 어렵기 때문에 나는 이 나라가 ‘건전한 방향’으로 잘 되길 바라므로, 나는 애국자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옳다거나 내가 믿는 바가 절대적이라는 생각 자체가 글러먹은 거다. 얼마나 인간의 ‘이성’에 합치하는가라는 ‘원칙’조차 없는 맹신은 썩을대로 썩은 종교와 무엇이 다르던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대부분 아집이다.

6.
고작  몇 년의 시간 동안 나는 국가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인간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뭔지 고민하는 인간에 이르렀다. 그리고 난 아직 20대다.

내가 해사를 떠날 때 중대 훈육관님이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어쩌면 사관학교를 나와 줄곧 군에만 있던 자신이야말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고.

어느 해사 동기생의 결혼식 날 만났던 동기는 내가 사관학교를 때려칠 때 같이 때려쳤어야 했다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반면에 어떤 동기생은 오늘도 국가의 안녕을 위해 늘 ‘패기에 찬 이정재’처럼 열심히 살고 있다.

우린 모두 스무 살에 그토록 함께 뒹굴며, 전우애를 외치며 이 나라의 ‘A few good men’이 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엔 스스로가 가진 직장에 대해 만족하거나 괴로워하는 ‘똑같은 많은 사람 중’ 하나가 되어 있다.

7.
조선일보에서 2004년에 언급되고 그 뒤에 동아일보에서 근래에 ‘재탕’을 해먹은 ‘2004년 육사 가입교 생도 34%가 미국을 주적으로 생각한다’는 칼럼은 역겨울 따름이다.

그 가입 생도들이 현재의 4학년일텐데, 이들이 저 생각을 사관학교 4년의 커리큘럼을 통해 바꾸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는 저 질문에서 ‘잘린 부분’이 ‘미래의 주적’이든 ‘현재의 주적’이든 간에 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가장 안도할 수 있는 부분이다.

더군다나 나랑 내기해도 좋은데 저 생도들이 저 질문에 저렇게 답한 이유는 ‘전교조’ 교사는 커녕 내가 위에 언급한 ‘데프콘’ 때문이라는 게 더 설득력 있다.

[참고로 ‘데프콘’의 저자이자 ‘동해’, ‘남해’의 저자인 진병관 氏와 김경진 氏는 해군의 초대로 내 동기들 4학년 원양 실습 때 함께 동행 취재가 허락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8.
모든 건 교육과 사회의 시스템 문제다. 현재의 초등교육과 중등교육 과정에서 아이들이 얼마나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건지. 이 아이들이 ‘대학’을 갈지, 아니면 성인이 되면서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지 고민할 수 있는 여건이 없다.

그 뿐인가? 학력 인플레가 만든 ‘대학=취업학원’ 시스템은 이 사회 전체를 갉아 먹으며 대한민국호를 침몰시키고 있다.

그나마 재수에, 삼수, 거기에 해외 어학 연수, 군대, 졸업하면 서른인 대학생이 늘어가는 데도 이 나라의 취업 문제는 해결의 기미가 안 보인다. 경제 인구에 편입되는 것이 늦어질수록 나라는 약체로 굳어져만 간다.

그런 여건에서. 공사 4학년이면 고작 스물 셋, 재수에 삼수를 했다 해도 스물 다섯.

그 나이에 군대와 같은 커리큘럼에서, F-15K가 살인 기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에서 희망을 보는 건 나 뿐인가?  오히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똥인지 된장인지 뭣도 모르고 진보와 보수조차 구분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청년들이 더욱 늘어가는 세상에서.

엉뚱한 데서 튀어나온 희망이 더 우울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 뿐인가?

* 관련기사

출처: Joins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10&Total_ID=3134814)

F-15K가 전쟁을 억제하여 ‘활인’을 하는 게 아니다.
평화에 대한 의지를 가진 ‘진정한 정치력’이 ‘활인’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 진정한 정치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건 ‘깨어있는 시민’만이 할 수 있다.

저런 생도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더욱 더 키우지 못 하고 퇴출시킨 꼰대들을 보니 앞으로도 갈 길은 멀다.

영진공 함장

다크나이트 = 이명박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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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다크나이트>에 대해 특별히 더 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향한 수많은 칭찬들에 대해 대부분 동의하기 때문이죠. 특히 이 영화에서 히스레저가 연기한 조커는 만화 속의 인물을 “실사화” 한다는 말의 의미를 한 수준 높여놓았습니다. 앞으로 만화원작 영화 주인공을 맡는 배우들, 모두 고민 좀 할 겁니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히스 레저가 조커로 이루어낸 것은 대단합니다.

여기서는 히스레저의 연기를 제외하고, 이 영화에서 조커가 차지하는 의미를 한번 살펴볼 까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조커가 지나친 능력자라고 비판을 합니다. 그렇죠. 조커는 단 한번도 실수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상대방이 어떤 수를 내 놓을지 예측하고 거기에 한방 뒤통수를 때리는 멋진 수를 준비해놓습니다. 조커의 예상대로 되지 않은 일은 그 2척의 페리보트 건 정도에 불과하죠. 게다가 조커의 부하들조차 모두 대단해서 조커의 의도를 언제나 100% 실현합니다. 그러니 이거 비판할 만하지 않습니까?


리모콘이 잠깐 작동 안되기도 …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것은, 비록 <다크나이트>가 상당한 사실성을 추구하고 있긴 하지만 이 영화는 절대로 리얼리즘 영화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조커만 실수가 없나요? 배트맨도 그렇죠. 아무리 돈과 첨단기술로 처발랐다고 해도 매일같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데 무고한 희생자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혼자서 뛰 댕기다가 한번이라도 범죄자나 경찰들에게 꼬리를 잡히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하비덴트는 또 어떻습니까? 얼굴반쪽이 그 꼴이 되어서도 돌아다닌다는 건 말이 되나요? 그렇게 피부가 없으면 금새 감염되어 골로 갈텐데 말이죠. 이 영화가 사실적이라는 건 이 영화를 이루는 요소들 각각이 워낙 압도적이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일 뿐입니다. 이 영화도 역시 수퍼히어로물 맞습니다.

이 영화에는 애초부터 실수란 없어요. 즉 영화에는 진정한 의미의 의외성이 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누군가의 의도와 계획이 깔려 있어요. 원래 모든 게 계획대로 되는 이야기는 그게 현실이든 영화든 재미가 없기 마련입니다. 의외성이 없으면 긴장도 없고, 긴장이 없으면 재미도 없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재미와 긴장으로 가득하죠. 도대체 어떻게? 한 캐릭터가 의외성의 역할을 해주고 있거든요. 그게 바로 조커입니다.


그래, 바로 나!!!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영화의 조커야 말로 진정 ‘조커’의 존재의미에 충실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커는 애초부터 의외성의 화신이었으니까요. 실제로 의외성은 트럼프 게임에서 조커 카드가 맡은 역할이기도 하죠. 조커 카드가 등장하면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트럼프 게임의 규칙이 일시적으로 뒤흔들립니다. 즉 조커로 인해 게임의 규칙에 의외성이 추가되는거죠. 게다가 이 의외성은 재미와도 직결됩니다. 어떤 이야기가 관객의 기대대로만 흘러갈 때 그 이야기는 “뻔한 이야기”가 됩니다만, 관객의 기대와는 다른 의외의 결말일 때 관객들은 놀라고 비로소 재미를 느낄 준비가 됩니다. 그 역할을 하는 게 조커죠. 그렇게 보면 이 영화의 조커는 <마스크>의 짐캐리가 맡은 역할과 결국 같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마스크>에서 악당들에게 마스크를 쓴 짐캐리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자기들이 공들여 준비한 은행털이를 순식간에 파토 내버리고, 총을 아무리 쏴도 안 죽는 괴물 아닙니까. 단지 차이가 있다면, <마스크>에서는 악당이 당하니까 관객들은 편하게 웃으며 그걸 즐겼지만,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관객들이 감정이입해놓은 이 영화의 주인공을 대상으로 그 짓을 하기 때문에 강 건너 불구경하듯 즐기지 못하고 관객들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느낀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내가 바로 조커라고 …

한 가지 더 생각해볼 일은, 이 영화속 세계관이 현실과는 엄청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모든 일이 누군가의 계획이나 의도로 이루어지는 이 영화에서는 덕분에 일어난 모든 나쁜 일은 전부 조커 탓이 되어버립니다. 네, 이 영화에서는 이게 다 조커 때문입니다. 조커만 없었더라면, 배트맨은 마침내 범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조커만 없었더라면, 애꿎은 희생자들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조커만 없었더라면, 하비덴트는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조커만 없었더라면 배트맨은 정의의 수호자로 계속 남아있었을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리 아닙니까?

누군가 그러더군요. 순수한 사람들을 좌파 빨갱이들이 오염시킨다고요. 원래 촛불집회는 순수했을지 모르지만 그 뒤에서 배후조종하는 좌파 탓에 결국 과격해졌다고요. 지금 이 나라가 이 꼴이 된 것도 결국 10년간 곳곳에 뿌리내린 좌파들 탓이고 말이죠. 말 그대로 “이 모든 것이 좌파 탓”이라는 주장. 많이 들어본 이야기죠. 며칠 전에는 심지어 5개 공중파 방송국이 모두 이와 같은 내용을 방송 하던데, 잘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이 나라가 정말 빨갱이 나라인 줄 알았을 겁니다. 그 사람들의 논리는 <다크나이트>의 세계관과 딱 맞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조커는 바로 좌파이고 빨갱이들입니다.

이 세계관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런 세계관은 현실을 왜곡하고 원인과 결과를 착각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배트맨이 진정한 현실세계에서 비슷한 짓을 했다면, 조커가 없었더라도 결국 사고를 쳤을 겁니다. 그 무식한 텀블러로 길거리를 폭주하거나, 심지어는 기관포로 주차된 차들을 박살내며 달리는데 사람이 안 다칠 수 있겠어요? 하비덴트도 그래요. 아무리 청렴 강직한 검사도 고담 같은 동네에서 살면서 권력에 심취하다 보면 언젠가는 타락했을 겁니다. 현실의 ‘모래시계 검사’가 그런 것 처럼요. 꽤나 경력을 쌓은 형사라도 병원에 입원한 자기 어머니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수준의 복지시스템 밖에 없는 동네라면 경찰이 타락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요. 무엇보다도 범죄조직이라는 게 그렇게 발본색원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죠. 팔코니 조직을 죽이면 다른 조직이 등장했겠죠. 결국 배트맨의 전쟁은 끝없이 반복되었을 겁니다. 그 와중에 배트맨은 민폐를 끼치다가 공적이 되는 건 거의 당연한 수순이겠죠. 다시 말해 의외성은 조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자체의 특성이라고요. 즉, 현실에서는 이 세상 그 자체가 바로 조커입니다.


미안해, 하비 …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세계관을 믿는 자들에게는 공포와 억압에의 욕구가 생겨난다는 겁니다. <다크나이트>의 세상에서는 배트맨은 바로 자기 곁에 있는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경찰청장(청수?), 자기 형제와도 같은 집사(똥과니? 아니면 상드기?), 그리고 경제와 기술 시스템을 담당하는 또 다른 집사(만수? 이거 써놓고 보니 정말 비슷하다는…) 이렇게 믿을 놈이 적다 보니 배트맨의 일들은 애초에 밀실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지요. 게다가 요소요소에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심어 놓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당연히 가능하다면 모든 인사는 낙하산 시스템이 되겠죠. 배트맨은 시민을 위해 노력하지만 절대 고독에 빠져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민들 속에 바로 그가 싸워야 하는 조커의 하수인들이 암약하고 있거든요. 온순한 시민들은 믿어도 됩니다. 하지만 그 시민이 나에게 반항하는 순간, 배트맨은 의심에 빠집니다. 저 인간이 진정 자기의지로 나를 공격하는 거냐, 아니면 조커의 부하라 나를 공격하는 거냐… 의심스러우면 일단 때려잡고 볼 일입니다. 그리고 시스템을 보호하고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능하다면 모두의 뒷조사를 아주 철저하게 해야 하고 사상검증까지 해야겠죠. 이러다 보면 ‘5호 담당제’ 같은 시스템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시스템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건 순식간입니다. 권력자 스스로 만들어낸 공포와 불신이 타인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마지막 선은 … 차마 .. 그을 수 없었다능 …

그나마 <다크나이트>의 배트맨은 선을 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씁니다.
부르스 웨인 뿐만 아니라 그 동료들도 모두 원칙과 상식의 선이 뚜렷하기 때문에 서로를 규제하고 선을 지키죠. 하지만, 스크린 밖의 세상에서는 그런 이상주의가 지켜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보는 우리의 마음이 더욱 다크해지는 것이고요.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