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웨이”, 부패와 숙성의 차이





와인의 일생을 생각하곤 해요.

그 포도들이 자라던 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햇볕은 어땠을까…비는 내렸을까…
포도를 가꾼 사람들… 그 포도를 따서 와인을 담근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들 중 몇 명은 이미 이 세상에 없고 와인만 남아있겠죠…

와인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이 좋아요
같은 와인이라도 오늘의 맛은 다른 어느 날의 맛과도 다르죠.
왜냐면 와인은 살아있거든요.
병 속에서 와인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숙성되죠
절정에 도달할 때까지…
그러다가 절정이 지나면,
피할 수 없는 타락이 시작되죠
끝내주는 맛을 남겨주고 말예요.

– “사이드웨이” 중에서 –

두남자


여기 두 남자가 있다.

한 남자는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성인기 초반을 아주 안정된 직장으로 시작했고, 40이 넘어간 지금도 여전히 그 안정된 직장에서 안정된 일을 하고 있다. 몇 년 전 결혼에 실패한 이후 독수공방을 계속하는 그는 조심스럽게 자기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출판을 해보려 하고 있다.

겁쟁이 소심꾼 마일즈


다른 남자는 한때 잘나가던 드라마 배우였다. 하지만 지금은 광고에 목소리 출연이나 하면서 지낸다. 그래도 먹고사는데 지장은 별로 없고, 늘 새로운 여자를 만나 즐기며 살다가 이제 결혼을 해보려 한다.

발랄한 난봉꾼 잭

이 둘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 같다.
교육자와 연예인, 고독한 솔로족과 희희낙락 싱글족, 이혼한 남자와 이제 막 결혼하려는 남자 ……

하지만 이들의 삶은 어떤 면에서 아주 비슷하다. 그것은 이들의 삶이 고여서 썩고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남자에 대해서는 이 말이 맞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여자를 갈아치우는 두 번째 남자에게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느냐고? 그는 그 갈아치우는 패턴을 바꾸지 못한다는 점에서 고여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똑같이 고여서 썩어가지만 전혀 다른 용어가 사용되는 존재도 등장한다.

바로 와인이다. 예전에 내가 아는 누군가가 와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적이 있다.

“와인 그거 뭐 결국 썩은 포도주스 잖아?”

무지막지한 표현이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봐서 부패현상이나 발효현상, 숙성현상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어떤 것은 숙성이라 불리고 어떤 것은 부패라 불린다.

그건 단지 이름의 차이만이 아니다.

어떤 썩은 포도주스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하지만,
다른 것은 오래 썩었다는 이유로 수 십만원에서 수백 수 천만원짜리 물건이 된다.

전자가 풍기는 냄새는 악취고, 후자가 풍기는 냄새는 향기다.

전자는 사람이 먹으면 배탈이 나고 병원신세를 지게 만들지만,
후자는 입맛을 돋워주고 건강에 도움이 되며
심지어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황홀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했다.

변치 않는다는 것이 자랑이 아님을,
늙어가면서 부패가 아니라 숙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 갈림길에서 숙성의 길로 걸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영진공 짱가

미드 속의 한국계 배우들

최근의 미국 드라마(이하 미드)를 보다보면 이전과는 확연히 차이를 느낄 정도로 꽤나 많은 한국계 배우나 한국인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계가 연기력이 더 뛰어나서인 건지, 한국이라는 나라의 인지도(?)가 미국 내에서 이전보다 많이 높아져서인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암튼 몇 년 전까지에 비하면 인기 시리즈의 메인 캐릭터 중에 한국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커진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재미삼아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어서 대략 정리를 해보았다.
일단 조연급 이상 고정출연자 위주로 정리를 하였는데, 혹시 여기에 거론되지 않은 한국계나 한국계로 그려지는 캐릭터들이 더 있다면 댓글로 제보하여 주시기 바란다.

먼저 Usual Suspects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1. 산드라 오 (Sandra Oh)

1971년 7월 20일생 / 캐나다 온타리오 /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남.
現 출연작: “그레이 아나토미 (Grey’s Anatomy)”, 인턴 크리스티나 양 役


영화 “사이드웨이(Sideways)”에서의 분노의 화이바질이 지금도 인상 깊은 그녀는 아마도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배우 중에 가장 성공한 이일 것이다.

캐나다에서 연극과 TV 그리고 영화로 다채로운 배우활동을 펼친 그녀는 캐나다의 아카데미상이라고 할 수 있는 Genie Awards에서 두 차례 (1994년과 1999년) 여우 주연상을 수상하였고, 1996년에는 미국의 TV 시리즈 “Arli$$”에 출연하며 미국 시장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2005년에 영화 “사이드웨이”의 성공으로 미국 관객들에게 더욱 친숙해진 그녀는 그 해에 방영을 시작한 TV 시리즈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에 캐스팅된다.

이후 현재까지 6시즌이 진행되고 있는 이 드라마의 성공가도 질주에 톡톡히 일조를 한 그녀의 연기는 미국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많은 찬사를 받으며 2005년부터 5회 연속 에미상 후보에 올랐고 2006년에는 골든글로브 TV 시리즈 부문 여우 조연상을 수상하였다.

* 원래는 레지던트 베일리 역을 제안 받았다는데, 본인이 크리스티나 역할을 강력히 요구하였다나 어쨌다나~

** “사이드웨이”의 감독인 알렉산더 페인과 2003년 결혼하였으나 2006년에 이별.

  

[미국의 토크쇼 “지미 키멀쇼”에 출연한 산드라 오.  영상 중간에 부모님들 모습도 보임.]

2. 마가렛 조 (Margaret Cho, 한국이름 조 모란)

1968년 7월 20일생 /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남.
現 출연작: “드롭 데드 디바 (Drop Dead Diva)”, 비서 테리 리 役

그녀의 경력과 삶이 조금만 덜 굴곡졌더라면 아마도 마가렛 조는 미국내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계 배우겸 코미디언으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했을 것이다.

스탠드업 코미디언(무대에 홀로 서서 신랄한 풍자와 독설로 주로 자신의 가치관에 반하는 모든 사회현상을 조롱하는 걸 장기로 삼는다.)으로 경력을 시작한 그녀는 1994년에 American Comedy Awards에서 최고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언상을 수상하는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그녀가 주인공인 TV 시리즈 “All American Girl”이 1994년에 ABC를 통해 방송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리즈로 인해 그녀의 삶과 경력은 굴곡지게 되었다.  아시아인을 지나치게 비하한다는 비난과 너무 미국적이라는 비난이 동시에 쏟아졌고, 제작사는 그녀가 너무 뚱뚱하고 얼굴이 지나치게 펑퍼짐하다고 압박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 여파로 다이어트에 중독된 그녀는 시리즈가 1시즌으로 종결돼버리는 수난을 겪으며 약물과 알콜중독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1999년에 재기한 그녀는 본업인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다시 나섰고 진보적인 정치성향을 가진 그녀의 독설은 더욱 날카롭게 톤을 높였다.  그리고 최근까지 “데일리 쇼” “섹스 앤드 시티” “더 뷰” 등 다수의 인기 TV 프로그램과 “페이스 오프” 등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2009년에 13편으로 시즌 1을 마무리하고 현재 시즌 2가 제작 중인 “드롭 데드 디바 (Drop Dead Diva)”를 통해 안방극장의 메인 캐릭터로 컴백한 그녀의 활약을 기대해보자.
 
* 어머니의 한국 액센트를 흉내내며 웃음의 소재로 삼기도 하고 게이의 권리쟁취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의 모습에 재미한국인들 사이에서는 그녀에 대해 곱지않은 시선이 꽤 많이 존재한다.

** 그녀는 미국 사회에서 매우 적극적인 反 부시 인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의 토크쇼 “더 뷰 (The View)”에 출연한 마가렛 조.

그녀의 거침없는 발언은 여기에서도 여전하다.

3. 존 조 (John Cho, 한국이름 조 요한)

1972년 6월 16일생 / 서울 / 여섯 살 때 미국으로 이민
現 출연작: “플래시포워드 (Flashforward)”, FBI 요원 드미트리 노 役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LA로 이민을 온 존 조는 1996년에 UC버클리를 졸업하고 잠깐 영어 선생님을 하기도 했다 한다.

광고전단의 모델로 연기경력을 시작한 그는 1999년 영화 “아메리칸 파이 (American Pie)”에 출연하여 MILF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등 연기자로서 주목을 받게 된다. (저 단어의 뜻은 각자 알아서 파악해 보시라 …)

이어 “아메리칸 뷰티” “아메리칸 파이 2” 등에 출연하던 그는 2004년의 영화 “해롤드와 쿠마 (Harold and Kumar Go to White Castle)”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연기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진다.

그 후 TV쪽으로도 활동영역이 대폭 넓어진 그는 “키친 컨피덴셜” “어글리 베티” 등의 TV 시리즈와 2009년 영화 “스타트렉 (Star Trek)”에도 출연하였다.

그리고 현재 인기가 점점 올라가고 있는 TV 시리즈 “플래시포워드”에서 한국계 FBI 요원으로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 “해롤드와 쿠마” 3편은 당분간 보기 힘들듯 하다.  왜냐하면 쿠마(Kal Penn)가 오바마 행정부의 관직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라능~

** 역시 배우인 케리 히구치와 결혼하여 1남을 둔 그는 캘리포니아 주의 동성결혼금지법에 대한 반대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미국의 코미디쇼 “매드 TV”에 출연한 존 조.  함께 나오는 이는 레귤러 멤버인 바비 리.]

여기서 잠깐,
위 동영상에 등장하는 바비 리(Bobby Lee)에 대해서 알아보자.

4. 바비 리 (Bobby Lee)

이 친구의 신상정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972년 9월 17일에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출생하였고 한국계이며 본명이 Robert Lee Jr. 라는 정도.

스탠드 업 코미디언으로 경력을 시작한 바비 리가 미국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Fox방송을 통해 14년 동안 방영되다 2009년에 종영한 “매드 TV(MADtv)”에 진출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여기에서 2001년부터 2009년까지 고정출연진으로 맹활약하였는데, 초기에는 아시아인을 희화하는 보조역할로 시작하여 최근에는 주요 멤버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매드 TV”는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진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Saturday Night Live, SNL)”와 유사한 형식의 코미디 쇼인데, 내용은 SNL보다 파격적이고 직설적이어서 보는 이에 따라서는 ‘즈질’이라고 맹비난받는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바비 리가 MADtv에서 한국의 드라마를 패로디한 코너를 선보인 적이 있었는데 그걸 한 번 보도록 하자.

봐서 알겠지만 이게 말하자면 “막장”드라마의 원조라해도 좋을만큼 막 나가는 코너이다.
뭐 어쨌든 이 코너가 은근 인기가 있어서 현재 유툽에는 4부작이 올라와있으니 위 동영상이 재밌다고 느낀 분은 직접 찾아서 감상하시면 되겠다.

참, 혹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웃겨만 주면 장땡인 영화를 즐기는 분이라면 바비 리가 단역으로 출연한 “파인애플 익스프레스 (Pineapple Express)” 강추다.  이 영화에 한국인 갱단이 나오는데 “다 죽여버려, 씨*놈들 …” 따위의 한국말 대사가 슝슝 날라댕긴다.


자, 그럼 이제부턴 그냥 무순으로 정리해보도록 하자.

5. 제임스 카이슨 리 (James Kyson Lee, 한국이름 이 재혁)

1975년 12월 13일생 / 서울 / 열 살 때 미국으로 이민
現 출연작: “히어로즈 (Heroes)”, 안도 마사하시 役

처음에 히로의 충실한 동료로 시작하여 이제는 능력자의 반열에 올라 선 그.

“히어로즈”가 일본에서도 꽤나 인기인지라 일부 일본 친구들이 왜 굳이 일본인 역에 한국계를 캐스팅했냐고 툴툴대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뭐 어쨌든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여 이제는 고정출연자의 자리를 확보한 그는 이전에도 “CSI LV” “West Wing” 등 인기 시리즈에 잠깐 잠깐 출연한 적이 있다.
   
* 이 친구 짬짬이 패션모델로도 뛰고 있다능~

6. C.S. 리 (C. S. Lee, Charlie Lee)

1972년 12월 30일생 / 청주 / 여섯 살 때 미국으로 이민
現 출연작: “덱스터 (Dexter)”, 플로리다 경찰 CSI 빈스 마수카 役

살인범을 연쇄살인하는 경찰요원 덱스터의 밉지않은 변태(?) 동료인 청주 출신 챨리 리.

“Sopranos” “Law & Order” 등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다가 “Chuck”에서 나름 비중있는 역할을 맡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덱스터”를 통해 고정출연자로 자리를 잡은 그의 향후 활약을 기대해 보자.

7. 팀 강 (Tim Kang, 한국이름: 강일아)

1973년 3월 16일생 / 샌프란시스코
現 출연작: “멘탈리스트 (Mentalist)”, CBI 요원 킴벌 조 役

UC버클리 학사에다가 하바드 석사 출신인 그.

“Shell” “AT&T” 등 굴지의 기업 광고에서 모델로 활동하던 그는 2002년부터 “Sopranos” “Law & Order” “Monk” “The Unit” 등의 TV 시리즈와 “Two Weeks Notice” “Forgotten” “Rambo 4” 등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리고 2008년에 인기 시리즈 “멘탈리스트”에서 과묵하고 진지한 한국계 형사역으로 고정배역을 확보하였다.

8. 다니엘 헤니 (Daniel Phillip Henney)

1979년 11월 28일생 / 카슨 시티
現 출연작: “쓰리 리버즈 (Three Rivers)”, 닥터 데이비드 리 役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능~ ^^

9. 그레이스 박 (Grace Park)

1974년 3월 14일생 / LA 출생, 캐나다에서 성장
現 출연작: “배틀스타 갈락티카 (Battlestar Galactica)”, 중위 샤론 발레리 役

개인적으로 아무 주저 없이 최고의 미드 중 하나로 꼽는 “배틀스타 갈락티카”.
보통의 시리즈와 비교하면 극의 전개가 좀 늘어지는 편이지만, 미드를 좋아하는 분에게 항상 권하는 시리즈이다.

바로 이 시리즈의 2004년 1시즌부터 2009년의 4시즌 종영까지 극의 중심에서 Key 역할을 한 해군 비행사 중위 샤론 “부머” 발레리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그레이스 박이다.

두터운 매니아층을 형성한 이 시리즈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맥심지에도 등장한 그녀는 몇 차례 그 잡지 Hot 100 리스트에 오르기도 하였다.
아래는 인증샷 …


사실 2009년에 “배틀스타 갈락티카”가 무수한 매니아들의 탄식을 뒤로 하고 종영이 되었기에, 그녀를 어떻게 소개해야하나 초큼 고민을 했었는데 …

음화홧!!! 10월에 새로이 시즌 5가 시작하였으므로 고민 끝.

* CSI 라스베가스 9시즌 에피소드 20에서 그레이스 박이 살짝 카메오로 나왔는데, 관심있는 분은 함 찾아보셈 ^.^

** 아래 동영상은 시즌 5의 예고편.

10. 김윤진 (Yunjin Kim)
11. 다니엘 김 (Daniel Dae Kim)

現 출연작: “로스트 (Lost)”, 선권(윤진) 진권(다니엘)

이 두 사람도 역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능~ ^^

12. 로렌스 피쉬번 (Lawrence Fishburne)

1961년 7월 30일생
現 출연작: “CSI 라스베가스 (CSI)”, 요원 레이몬드 랭스턴 役

오잉??? 이 사람이 한국계라고???

놀라실 것 없다.
사실인즉슨, 로렌스 피쉬번이 아니라 그 뭐냐 거시기 최근에 레이몬드 랭스턴의 출생지가 한국의 서울로 밝혀진 것이다.

에, 말하자면, 유머다 … 그냥 넘어가주면 안 될까, 응???

영진공 이규훈

“사이드웨이 (Sideways, 2004)”, 최고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영화

영화의 홍보를 위해 동원되는 온갖 미사여구들 가운데 가장 흔해 빠졌던 만큼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게 된 표현이 바로 ‘최고의…’라는 수식어일 거다. 그런데 <사이드웨이>의 경우는 ‘전세계가 흠뻑 취해버린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포스터의 헤드카피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한 사람의 오랜 영화 관객으로서 <사이드웨이>의 가치를 묘사하기 위한 개인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면 ‘개봉한지 한참 지나 우연히 비디오로 빌려 보고는 아, 이 영화는 극장에서 꼭 봤어야 했는데!’라며 두고두고 오호통재라 하던 딱 그런 종류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14인치 TV 화면에 비디오로 빌려 본다고 해서 좋은 영화의 가치가 반감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 제대로 된 스크린 비율에 가슴 한켠을 울리는 사운드트랙과 제대로 된 화면 색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무래도 더 나은 방법이 아니겠느냐는 얘기다.

주인공들을 따라 함께 떠나는 LA 근교의 와인 여행과 손에 잡힐 듯 선명한 캐릭터의 등장인물들, 그리고 알렉산더 페인의 농익은 연출이 보는 동안 너무너무 즐겁고 보고 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되새김질 하게 만드는 ‘최고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렉스 피켓의 1인칭 소설이 영화의 질 좋은 재료들을 공급한 포도 농장이었다면 그곳에서 가격 대비 성능이 탁월한 2004년산 캘리포니아 와인 같은 영화를 빚어낸 것은 감독과 스텝들, 그리고 배우들의 공로다. 특히 <사이드웨이>는 낯익은 얼굴들이긴 하지만 그 자신들만으로는 관객 동원력은 거의 없다시피한 그간의 조연이나 단역 전문 배우들이 주연으로 나서 탁월한 연기력을 선보인 영화다.

<듀엣>(2000)에서 이미 ‘실패한 인생’의 중년 캐릭터로 눈에 익었던 폴 지아매티는 개인적으로 <사이드웨이>를 보기 싫게 만들었던 원인이기도 했었다. 코믹 연기를 잘하는 배우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너무 우울한 인상이었던 그가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에서 주인공이라니, 어쩌면 <어바웃 슈미트> 만큼이나 꿀꿀하게 진행하다가 꿀꿀하게 끝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사이드웨이>에서 폴 지아매티가 연기한 마일스는 <사이드웨이>가 좋은 영화로서의 영화적 완성도를 갖추는 데에 필요한 거의 절반 이상의 공헌을 해냈다. 폴 지아매티를 캐스팅하고 그의 연기를 조율했던 것은 알렉산더 페인의 선택이었겠지만 <사이드웨이>는 감독보다도 주연이었던 폴 지아매티라는 배우의 영화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어바웃 슈미트>가 꿀꿀이 영화로 남겨진 이유는 어쩌면 잭 니콜슨 한 사람의 영화였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이드웨이>에는 바닥으로 푹푹 내려 앉기만 하는 주인공 마일스 옆에 또 한 명의 주인공 잭이 있음으로 해서 깊이와 재미의 균형을 잘 맞출 수 있었지 않았냐는 얘기다. 토마스 해이든 처치가 연기한 잭의 비중은 폴 지아매티의 마일스 만큼 절대적인 수준은 아니었지만 영화의 사건 사고들을 만들어내는 실질적인 원동력으로서 <사이드웨이>의 이야기 구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다.

버지니아 매드슨과 산드라 오는 두 명의 여주인공으로서 적절한 수준의 연기를 보여주긴 했지만 스토리 상에서 배역 자체가 워낙 제한적이라 답답한 감이 없지 않다. ‘두 명의’ 여주인공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사이드웨이>는 두 명의 남자 주인공과 그들의 여자들 다수가 등장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즉, 마일스의 마야와 빅토리아, 그리고 잭의 스테파니와 얼굴도 제대로 안나오는 크리스틴, 심지어는 레스토랑의 뚱보 여종업원 간에 조차도 영화 속 존재감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처럼 남자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을 줄곧 견지하면서 나머지 구성 요소들을 재배치하고 있다는 점은 <사이드웨이> 뿐만 아니라 알렉산더 페인의 전작들, <일렉션>과 <어바웃 슈미트>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공통 분모다.

그렇다고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가 보편성을 잃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들은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거나 막다른 길에 다다른 주인공들을 통해 어느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다가올 절망의 순간들을 묘사함으로써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보편적 진실에 줄곧 접근해왔다. 극장에서 보내는 두 시간의 여흥으로 누구나 바라는 그런 보편적인 즐거움은 아닐테지만 영화관 밖 실제 생활에서는 알렉산더 페인의 주인공들을 쉽게 잊을 수가 없는 것이 그 증거다.

영진공 신어지

“눈먼 자들의 도시”, 원작의 무게에 눌려 범작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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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눈먼 자들의 도시>는, 영화의 제작과 홍보에는 원작의 유명세가 많은 도움이 되었겠지만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 있어서는 발목을 잡힐 수 밖에 없는, 즉 ‘문학 작품을 영화화’할 때 빠질 수 밖에 없는 흔한 딜레마를 반복합니다. 사건의 인과관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이도 그 중간 과정에서 인물들의 사고와 감정의 변화를 통해 충분한 자극을 줄 수 있는 문학과 달리 영화는 시청각적으로 인지되는 내용들을 우선시하면서 적당한 논리적 설명을 요구하는 장르(그게 아니라면 충분한 감정적 이입이라도 필요하죠)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이 때문에 영화가 원작 소설 만큼 성공적이거나 그 이상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대부분 적지 않은 각색을 필요로 합니다. 때로는 에피소드의 생략과 추가, 주요 등장인물의 비중이나 캐릭터의 변화가 필요하고 심지어 결말을 바꿔버려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죠. 그렇게 과감한 각색을 했음에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작품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 또한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는 데에 따른 어려움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원작은 캐스팅과 펀딩을 용이하게 해줍니다. 일단 판권 계약에 성공하면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배우와 감독들은 생판 모르는 작가의 시나리오를 들고 제작자들이 뛰어다니는 경우에 비해 훨씬 많을 수 밖에 없겠죠. 그러나 정작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돌입하게 되면 앞에서 언급한 문학 작품과 영화 장르 간의 ‘화법 상의 괴리’ 때문에 연출자는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물론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존 그리샴 등과 같이 처음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쓰는 대중 소설류는 상관 없겠지요) 원작을 그대로 따르자니 영화로 만들어져 보여졌을 때 아무래도 허전한 감을 줄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과감하게 뜯어고치자니 원작을 이미 읽은 관객들로부터의 맹비난이 두려운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우 ‘과감하게 뜯어고쳐야 한다’는 쪽입니다. 원작이 죽어야 영화가 산다고나 할까요. 원작과 조목조목 비교하며 ‘문학계의 걸작을 영화가 망쳤다’는 비난을 감수하며 소설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처음 접하는 더 많은 관객들을 위해 새로운 걸작을 탄생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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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눈먼 자들의 도시>는 원작에 좀 더 충실하기로 하는 길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한 편의 영화로서 <눈먼 자들의 도시>는 ‘만약에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린다면?’이라는 간단한 아이디어와 거기에서 시작된 상상력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하는 작품입니다. 문학에서는 이런 간단한 아이디어도 훌륭한 작품으로 발전될 수 있는 시작점이 됩니다. 그러나 영화는 사건의 발생 원인과 인과관계 따위에 대한 좀 더 논리적인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지극히 아름답고 긍정적인 결말은 이런 영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더욱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결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문학 작품과 달리 2시간 분량의 영화는 ‘결말이 작품의 모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16부작 TV 미니시리즈라면 좀 다를 수 있겠습니다)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한 성공적인 영화라고 한다면 원작을 모르는 상태에서 보았을 때에도 그 자체로 높은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 되어 ‘원작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리하여 영화가 미처 다뤄주지 못한 디테일이나 원작과 다른 부분들을 발견하고 싶다’는 욕구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할텐데 안타깝게도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런 걸작들의 반열에는 오르기 힘든 또 한번의 ‘시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캐나다 출신의 배우이자 작가이기도 한 돈 맥켈러(영화 초반에 차를 훔치다가 자신도 눈이 멀게 되는 인물로 직접 출연도 했더군요)의 각색을 기초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눈 앞에 하얗게 되는 현상과 그 감정적인 상태를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기술적인 부분’에 역량을 집중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극악의 재난 상황에 대처하는 인간 공동체의 광기와 절망, 그리고 희망을 남미 특유의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데에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언제나처럼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줄리엣 무어와 마크 러팔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등의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무척 훌륭했고 이제는 그다지 스펙타클한 광경도 아닌 것이 되었지만 ‘폐허가 된 대도시의 풍경’들 역시 충분한 볼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영화는 역시 눈으로 보여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플롯으로 승부하는 ‘2시간의 문법과 미학’의 장르라는 생각을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관객들을 사로잡는 고유의 방법론에서 실패하고 있는 영화가 뒤늦게 나레이션 등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등의 노력은 그저 안타깝게만 보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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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