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웨이 (Sideways, 2004)”, 최고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영화

영화의 홍보를 위해 동원되는 온갖 미사여구들 가운데 가장 흔해 빠졌던 만큼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게 된 표현이 바로 ‘최고의…’라는 수식어일 거다. 그런데 <사이드웨이>의 경우는 ‘전세계가 흠뻑 취해버린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포스터의 헤드카피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한 사람의 오랜 영화 관객으로서 <사이드웨이>의 가치를 묘사하기 위한 개인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면 ‘개봉한지 한참 지나 우연히 비디오로 빌려 보고는 아, 이 영화는 극장에서 꼭 봤어야 했는데!’라며 두고두고 오호통재라 하던 딱 그런 종류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14인치 TV 화면에 비디오로 빌려 본다고 해서 좋은 영화의 가치가 반감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 제대로 된 스크린 비율에 가슴 한켠을 울리는 사운드트랙과 제대로 된 화면 색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무래도 더 나은 방법이 아니겠느냐는 얘기다.

주인공들을 따라 함께 떠나는 LA 근교의 와인 여행과 손에 잡힐 듯 선명한 캐릭터의 등장인물들, 그리고 알렉산더 페인의 농익은 연출이 보는 동안 너무너무 즐겁고 보고 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되새김질 하게 만드는 ‘최고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렉스 피켓의 1인칭 소설이 영화의 질 좋은 재료들을 공급한 포도 농장이었다면 그곳에서 가격 대비 성능이 탁월한 2004년산 캘리포니아 와인 같은 영화를 빚어낸 것은 감독과 스텝들, 그리고 배우들의 공로다. 특히 <사이드웨이>는 낯익은 얼굴들이긴 하지만 그 자신들만으로는 관객 동원력은 거의 없다시피한 그간의 조연이나 단역 전문 배우들이 주연으로 나서 탁월한 연기력을 선보인 영화다.

<듀엣>(2000)에서 이미 ‘실패한 인생’의 중년 캐릭터로 눈에 익었던 폴 지아매티는 개인적으로 <사이드웨이>를 보기 싫게 만들었던 원인이기도 했었다. 코믹 연기를 잘하는 배우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너무 우울한 인상이었던 그가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에서 주인공이라니, 어쩌면 <어바웃 슈미트> 만큼이나 꿀꿀하게 진행하다가 꿀꿀하게 끝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사이드웨이>에서 폴 지아매티가 연기한 마일스는 <사이드웨이>가 좋은 영화로서의 영화적 완성도를 갖추는 데에 필요한 거의 절반 이상의 공헌을 해냈다. 폴 지아매티를 캐스팅하고 그의 연기를 조율했던 것은 알렉산더 페인의 선택이었겠지만 <사이드웨이>는 감독보다도 주연이었던 폴 지아매티라는 배우의 영화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어바웃 슈미트>가 꿀꿀이 영화로 남겨진 이유는 어쩌면 잭 니콜슨 한 사람의 영화였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이드웨이>에는 바닥으로 푹푹 내려 앉기만 하는 주인공 마일스 옆에 또 한 명의 주인공 잭이 있음으로 해서 깊이와 재미의 균형을 잘 맞출 수 있었지 않았냐는 얘기다. 토마스 해이든 처치가 연기한 잭의 비중은 폴 지아매티의 마일스 만큼 절대적인 수준은 아니었지만 영화의 사건 사고들을 만들어내는 실질적인 원동력으로서 <사이드웨이>의 이야기 구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다.

버지니아 매드슨과 산드라 오는 두 명의 여주인공으로서 적절한 수준의 연기를 보여주긴 했지만 스토리 상에서 배역 자체가 워낙 제한적이라 답답한 감이 없지 않다. ‘두 명의’ 여주인공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사이드웨이>는 두 명의 남자 주인공과 그들의 여자들 다수가 등장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즉, 마일스의 마야와 빅토리아, 그리고 잭의 스테파니와 얼굴도 제대로 안나오는 크리스틴, 심지어는 레스토랑의 뚱보 여종업원 간에 조차도 영화 속 존재감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처럼 남자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을 줄곧 견지하면서 나머지 구성 요소들을 재배치하고 있다는 점은 <사이드웨이> 뿐만 아니라 알렉산더 페인의 전작들, <일렉션>과 <어바웃 슈미트>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공통 분모다.

그렇다고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가 보편성을 잃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들은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거나 막다른 길에 다다른 주인공들을 통해 어느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다가올 절망의 순간들을 묘사함으로써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보편적 진실에 줄곧 접근해왔다. 극장에서 보내는 두 시간의 여흥으로 누구나 바라는 그런 보편적인 즐거움은 아닐테지만 영화관 밖 실제 생활에서는 알렉산더 페인의 주인공들을 쉽게 잊을 수가 없는 것이 그 증거다.

영진공 신어지

“바보들의 행진”, 청춘영화 계보의 원조격인 작품

모두 바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면 배창호 감독의 1984년작 <고래사냥>(새 창으로 열기) 은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에 대한 오마쥬이기도 했다.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은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과 상당부분 통해있으며, 다시 이 노래는 <바보들의 행진>에 쓰였을 뿐 아니라 그 가사가 고스란히 주인공 중 하나인 영철의 대사로 뱉어진다. 게다가 <바보들의 행진>의 가장 중심적인 주인공은 <고래사냥>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병태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두 영화 모두 원작, 각본이 최인호다.) 하지만 <바보들의 행진>이 영향을 준 것은 비단 <고래사냥>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한동안 양산됐던 청춘영화는 이승현의 얄개 시리즈(어린 이승현이 <바보들의 행진>에 신문팔이 소년으로 잠깐 출연한다.)나 그 유사의 여학생 버전으로 임예진이 출연한 ‘좋아해’ 시리즈 외에도, 순진한 남자주인공과 되바라진 여자주인공이 대학생 신분으로 공부는 않고 맨날 놀러다니며 술과 미팅과 (특히 여학생의 경우) 결혼에 열을 올리며 좌충우돌하다가 난데없이 어디론가 떠나거나 하는 식의 계보에 속한 영화들이 꽤 있다. 심지어 박중훈, 강수연 주연의 <철수와 미미의 청춘스케치>도 말하자면 그 계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맨날 술만 마시고 공부는 않는 것은, 실은 그 시대가 뻑하면 휴교령이 내려졌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이를 영화에 담았을 때엔 얄짤없이 검열의 칼날이 휘둘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보들의 행진>의 이 계보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영화로 보인다.

동해바다에 고래를 잡으러 가겠다는 꿈은, 앞뒤옆위아래 꽉꽉 막힌 한국현실에서 젊음이 가질 수 있는 맨 마지막의 선택, 즉 ‘현실도피’를 뜻하는 것이었다. 물론 낙관주의자인 배창호 감독은 <바보들의 행진>과 달리 <고래사냥>의 끝을 더없는 해피엔딩으로 수놓았지만, <바보들의 행진>은 신검 장면으로 시작해 결국 주인공 병태가 입영열차를 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맨날 콧대만 세우던 영자가 달려와 결국 울면서 이별의 키스까지 하는 이 장면이 결국 비극의 엔딩인 것은, 언제나 과도하게 깔깔깔 웃어제끼며 명랑하기 짝이 없었던, 도대체 병태에게 속을 보여주지 않았던 우리의 영자가 기어코 눈물을 흘리는 유일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치기와 장난, 미팅과 술먹기 내기 등의 유희들이, 영화의 끝까지 이르고 나면, 비극의 끝을 이미 예정해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벌이는 처절한 유희처럼 보인다.

비록 데모하는 장면은 ‘체육전’을 하거나 축구를 하는 장면으로, 주인공이 교실 안에서 데모에 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는 장면이 그저 ‘인간의 신뢰’에 관한 한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갈등하는 것으로, 감독의 뜻과 무관하게 교체되고야 말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70년대 청춘들의 갈곳없는 막막함과 절망, 그 안에서의 무력감을 드러내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정말로 원래 그 장면들이 원래 시대와 시위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들이었다면, 영철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시대는 그토록 순수한 영혼은 결국 견딜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의 순수는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떨어졌는데 심지어 군대까지 떨어진’ 무능함으로만 치부될 뿐이다. 누구도 가고 싶지 않은 그곳, 군대에서조차 받아주지 않는 무능함을, 본래 그 이름대로 ‘순수’라 부를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흥청망청 노는 것이, 그리고 그깟 머리카락 안 자르겠다고 도망치다가 목숨을 걸고 육교에 매달리는 것이 ‘저항’이었던, 그런 시대였던 거다, 그때가. 그렇다면 결국 병태가 입영열차를 타는 것은 이 사회에 어쨌든 순응하겠다는 패배 선언으로도 읽힌다.

바보들의 행진

목욕하는 남자들.

이 영화에서 영자 역을 맡은 이영옥을 보고 상당히 놀란 게, 굉장히 현대적이다. 75년작인데도 이 배우는 90년대 말적인 미모라 해야 하나. 기본적인 이목구비가 일단 최정윤과 상당히 비슷하다. 거기에 옷을 쫄티에 나팔바지, 통굽구두를 신으니 도저히 75년 영화라곤 보이지 않더라. 다만 버스비가 25원, 짬뽕이 한 그릇에 100원이었다고 한다. 지금보다 약 1/40 수준의 물가였던 셈이다. 또한… 이 영화의 인물들은 대체로 집이 부유하고, 그래서 돈을 많이 쓴다. 미팅 참가비가 당시 돈으로 2천원일 걸 보고 조금 아찔… 했다. 물론 그때 2천원이 꼭 지금의 8만원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 초반 미팅을 하기로 하고 목욕탕에 가서 때빼고 광내는 장면을 보면서도 헉, 했는데, 남체를 그렇게 ‘탐스럽게 훑는 카메라’는 당시 한국영화로서는 거의 파격이었다고 할 만하겠다. 그리고 이 영화의 그 키스씬은… 아마 한국영화 역사상 길이 남는 키스씬이 될 듯. 어쩌다 보니 <소문난 칠공주> 같은 드라마에서조차 한번 베낀 적이 있다고 하더란 얘기까지 알게 됐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심지어 남녀가 반투명 유리문 하나를 두고 나란히 샤워를 하며 비누를 주고받고 하는데도 이상하게 성적인 느낌이 없다. 키쓰신도 마찬가지인데, 오히려 유일하게 에로틱한 맛이 느껴지는 게 저 목욕탕에서 두 남자가 미팅 전 목욕하는 씬이다. 하길종 감독의 영화 중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으로 동성애를 묘사한 영화가 있다던데 …

바보들의 행진

무기력한 젊음, 과도한 명랑의 의지. 영철(맨 왼쪽)-순자, 병태-영자(맨 오른쪽) 커플.

영진공 노바리

ps1. 영상자료원 조선희 원장의 말에 따르면, 이번 하길종 30주기 추모전에서 상영한 <바보들의 행진>은 검열 당시 삭제됐던 부분을 다시 삽입한 버전이라 한다. 일례로 저 목욕하는 장면, 영자의 룸메이트 순자가 담배 피우는 장면 등이 해당된다. 연고전/고연전을 연상시키는 듯한 체육전 장면과 축구경기 장면은 모두 원래 데모 장면이었던 것을 교체한 것. 고 하길종 감독의 부인인 전채린 교수(그 전채린이다, 전혜린 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교실에 남은 병태가 고민하다가 떠올리는 ‘신문팔이 소년 에피소드’는 응원전에 나가냐 안 나가냐의 고민이 아니라, 데모에 나가냐 안 나가냐의 갈등 장면이었다고. 여기저기 편집이 튀고 결정적으로 막판에 가면 멀쩡하던 얼굴에 갑자기 핏자국 등의 싸운 티가 나는 것도 그 사이 씬이 통째로 검열돼 버렸기 때문이라 한다. 부산행 열차 안에서 일본인들과 시비가 붙어 싸우는 장면이었다고.

ps2. 개막식에서 하명중 감독이 말하기를, “형이 그 젊은 나이로 간 건, 그 시대가 작가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에이 이놈의 세상 그냥 미련없이 가자,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영원히 청년으로 봉인된 천재감독 하길종은 한국영화사에 있어 하나의 ‘섬’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한국의 영화풍경이 지금과 많이 바뀌었겠지 싶다. 단순히 그가 천재여서가 아니라, 그가 살았다면 펼쳤을 영화의 풍이 그의 제자나 후배에게 전수됐을 때, 특히 80년대의 영화풍경이 꽤 달라졌겠구나 싶어서다. 하길종은 당시의 ‘한국영화의 혁명’을 부르짖는 일종의 ‘신세대’였다. 그와 영화집단을 함께 했던 이가 대충 김호선, 이원세, 홍파 등의 감독과 평론가 변인식이라 한다. 이들 역시 지금의 감독들에겐 일찌감치부터 ‘극복해야 할 구세대’가 돼버렸다. 그들 중 일부는 독재정권에 분노하며 절망했던 하길종과 다른 길을 갔다. 불과 30년 사이에 한국영화 역사 역시 사회 전반 만큼이나 급변했다.

도박 -1,2

1. 

 

돈을 갚을 수 있는 사람과 갚을 수 없는 사람을 구별하는 일은 책에서 글자와 종이를 구별하는 일처럼 간단하다. 척 보면 안다. 그는 돈을 갚지 못할 사람이다. 그의 표정은 아물거리는 안개처럼 떠다니고 그의 동선은 차에 치인 유기견처럼 기신댄다. 그래도 나는 그에게 돈을 빌려줄 것이다. 금세 빚은 원금에 이자에 이자에 이자가 붙어 결코 그가 갚을 수 없는 크기로 불어날 터이고, 나는 그 빚의 사십 프로를 할인해서 오거리 김사장에게 양도하면 끝이다. 그것만으로도 빌려준 원금에 은행 이자를 훌쩍 뛰어넘는 금액을 챙길 수 있다. 그 후 오거리 김 사장은 원금에 이자에 이자에 이자가 붙어 늘어난 빚에 다시 이자에 이자에 이자를 붙인 금액을 동생들을 시켜 받아낼 것이다. 더 이상 그를 짜낼 수 없다면 산간마을에서 가난한 소작을 치고 있을 부모, 형제, 친척들을 찾아가 협박할 것이고, 그의 이름으로 가능한 거의 모든 대출과 깡을 받아낼 것이고, 신체포기각서를 쓰게 할 것이고, 고깃배에 넘겨버릴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반전시킬 수 있으리라 믿으며 내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을 테지만 나는 안다. 그의 운명은 이미 끝났다.  

표준약관을 준수할 것을 확약하며 이외의 것은 일반 관례로 해결하며 분쟁시 채권자의 결정에 따른다. 그는 조악한 법률 용어로 포장한 사악한 대부 계약서를 읽는다. 계약서를 읽는다고 돈을 안 쓰는 사람은 없었고, 그도 여느 사람처럼 담배를 한 대 물더니 채무자 이름 옆에 힘차게 도장을 찍는다. 이천오백만 원. 고철구. 이제 그가 자신의 남은 인생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사채빚 이천오백만 원을 어디다 쓰느냐, 어디다 쓰고 삶으로부터 지워져 가느냐이다. 


2. 

 

고철구는 은하장 여관 305호에 장기를 끊고 살았다. 처음에는 월 삼십만 원을 내고 405호에 살았는데 육 개월이 넘어 진짜 장기가 되자 여주인은 월 숙박비를 이십칠만 원으로 낮춰주면서 말했다.  


“대신 305호로 옮기쇼. 욕조에 물 받아 놓고 빨래하면 수도세를 감당 못하요. 305호는 욕조가 없응께.” 


여주인은 카운터 쪽유리 너머에서 화투점을 떼고 있었다. 흑싸리에 오동을 잡았으니 여관바리 손님이 꽤 들 운세였다. 옮긴 방 또한 십 리터 냉장고, 십사 인치 TV, 나일론 이불이 전부였고 옆 건물이 하필 삼층이어서 창을 열면 벽만 보였다. 발돋움을 한 채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야 건물 틈 사이로 풍경이랄 게 걸렸다. 그 풍경 또한 어지럽게 연결된 전봇대 하나와 가끔 지나가는 자전거뿐이었다.  


옆방, 그러니까 304호에선 이틀에 한 번 꼴로 여자 신음소리가 새나왔다. 처음에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벽에 귀를 대고 수음을 했다. 상상의 밑천조차 곤고해서 주로 이혼한 아내, 전주 대명동 미스 송, 여관 여주인을 떠올렸다. 여자의 교성은 그의 수음보다 오래 갔다. 바지를 추스르고 담배를 피울 때면 그 교성은 멀리 닿지 못하는 오지의 풍문처럼 허름한 여관방을 떠다녔다. 풍문처럼, 그 소리를 귀에 담아도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얼마 후 그는 그 교성이 같은 여자의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리에 묻어나는 흥분과 열기가 진심일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지만 소리의 주인은 한 여자였다. 낮이면 그 여자는 크게 볼륨을 올려놓고 TV, 주로 드라마를 보다가 TV 소리를 밀치며 씨펄이라고 외쳤고, TV 소리에 숨어 끅끅 울었다. 누워 있다가도 그 울음소리가 들리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고장에 흘러 들어온 것처럼 다른 곳으로 다시 흘러 들어갈 수도, 이곳에 고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가진 돈은 말라가고 있었다. TV 소리에 숨은 옆방의 울음소리를 추려내 듣고 있노라면 그의 방에 노을이 내리고 썰물이 들고 안개가 찼다. 변 부장의 전화는 일주일 전부터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라는 응답만 지려댔다. 


그날. 옆방이 소란스러웠다. 또 여자의 달뜬 교성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방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남자들의 음탕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씨발 뭐하자는 플레인데요?” 

여자의 목소리는 앳되었다.  

“괜찮아. 내 친구들이야.” 

“그냥 하던 거 해.” 

“우린 옆에서 얌전히 술 먹고 있을게.” 

여자의 목소리가 자르랑 흔들렸다. 

“돌리려고?” 

“왜? 안돼?” 

“너 칠수 친구들하고도 강강술래 탔다며?” 

“그럼 두당 오만 원씩 더 얹으세요.” 

“쑈 까네. 씨발년.” 


그날 밤 더 이상 여자의 교성은 들리지 않았다. 가는 빗줄기가 유리창을 두드리기 시작하자 묵힌 곰팡내가 여자의 교성을 대신해 텅 빈 그의 방을 흘러 다녔다. 남자들의 삿된 숨소리와 웃음이 종종 이어졌고 다시 문 여닫는 소리가 그 뒤를 잇더니 정적이 찾아왔다. 정적은 무겁고 가무레해서 가여웠다. 도시는 높은 인구밀도를 해결하기 위해 건물 간 경계선 거리를 지키지 않고 덩굴처럼 뒤엉켜 땅 위에 솟아나 있었지만 해괴하게도 사람이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수백만의 인구는 행정 문서에만 존재했고 사람들은 각자의 정적에 들어앉아 나오지 않았는데 그 정적은 사람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 정적 속에서 빗물이 들이치도록 창을 열어놓은 채 잠들었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었을 때는 새벽 네 시가 넘어 있었다.  

“담배 세 가치만 빌려줘요.” 

옆방, 304호의 목소리로 여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목소리처럼 앳된 얼굴이었다. 여관 복도 야간등의 짙은 명암이 여자의 얼굴에 닿자 이마의 여드름이 더 돋아나 보였고 웨이브가 풀린 단발이 부산스러웠다. 외국 배우 사진이 천격스럽게 프린팅 된 하얀 라운드 티는 길게 늘어져 적벽돌 색깔의 반바지를 다 덮고 내려왔다. 여자는 고개를 숙여 앞 터진 슬리퍼 사이로 나온 자신의 발톱만 내려다봤는데 발톱에는 까만 매니큐어가 덮여 있었다. 여자의 차림은 확실히 여자의 질감과 겉돌았다. 여자의 나이가 궁금했고, 왜 하필 세 개비인지가 궁금했지만 잠자코 웨죽웨죽 담배를 꺼내줬다.  


그는 문을 닫고 들어와 담배를 피웠다. 여자도 벽 너머 옆방에서 그가 건네준 담배를 피우고 있을 것이었다. 헤어진 아내가 데리고 간 딸이 지금 열여섯인지 열일곱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여자의 교성을 들으며 수음을 하던 지난밤들의 욕정이 문득 무기력했다. 딸과 아내가 떠난 뒤 제초제를 들고 찾아간 목포 갓바위에는 멀리 물러난 바다만큼 검은 개펄이 드러나 있었다. 개펄 위를 펄떡이는 망둥이가 빙렬처럼 땅거미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는데 석양에 반사돼 반짝이는 망둥이의 등허리가 어찌나 많고 찬란한지 그는 제초제를 마실 수 없었다. 철썩철썩. 철썩철썩. 망둥이가 짧은 앞지느러미를 튕기며 은하장의 낡은 벽을 타고 삼층까지 기어올라 빗물처럼 그의 방 유리창으로 밀려들었다. 여자는 세 명을 받았을 것이다. 이 망둥이들이 여자의 방도 방문했을까 궁금해하며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  

 


 

 

영진공 철구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죠.

 

많은 사람들에게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은 여전히 생소하다. 그래서 종종 낮선 사람들과의 소개 자리에서 ‘아..그 직업은 뭐하는 거죠?’ 라는 질문을 받아서 대화를 이어가는 좋은 수단이 되곤 한다. 프리랜서라는 것과 ‘일러스트레이터’라는 그럴듯한 직업명 때문에 가끔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뭐 어느 직업이나 그렇듯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애로사항이 꽃피는 건 마찬가지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문화 쪽으로 돈 벌어먹기가 참으로 힘들고 척박한 짓이기에 뭔가 놀면서 돈 벌겠다는 생각으로 이쪽 일을 준비한다면 돈은 커녕 손가락의 깊은 맛만 느끼기 쉽상이다.



귀염둥이 이케와키 치즈루가 나온다!!

도쿄에 사는 4명의 처자들의 홀로서기 고통과 아픔을 그린 일본 영화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는 일본판 ‘고양이를 부탁해’로 소개되며 국내에서도 젊은 여성들의 공감과 호응을 이끌어낸 좋은 작품이다. 재밌는건 일러스트레이터로 나오는 ‘토오코’ 역에 본 영화의 원작 만화의 작가인 나나난 키리코가 직접 나와 연기를 펼쳤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예전에 종영했던 모 드라마에서의 헐랭이 일러스트레이터완 달리 당 영화 속 일러스트레이터의 모습은 꽤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작곡가나 소설가 등 창작직업이 그러하듯 일러스트 작업도 고독에 익숙해져야 한다.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는데 마감일 마저 다가오면 정신줄을 놓기 일쑤다.

일을 끝냈는데 그 다음 일이 들어오지 않으면 공황상태에 빠진다.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회사원인 치히로와 프리랜서인 토오코의 관계였다. 쳇바퀴 도는 일상과 비전없는 회사생활에 시달리며 그저 남자 한명 잘 꼬셔서 시집가려는 치히로와 프리랜서이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토오코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치히로는 그런 토오코를 부러워한다.

“토오코 넌 그래도 좋은 편이야.
돈도 많이 벌지, 이름도 꽤 알려졌지 …
네 의견도 눈치 안보고 말할 수 있고

너는 모를거야. 나 같은 사람이 고생하고 불안하게 사는걸 …

네가 정말 부러워.”



아마 프리랜서를 하는 이들이라면 위와 같은 치히로의 말을 쉽게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란게 어딨겠는가. (아. 국개의원 빼고.) 불안정한 수입과 모든 문제를 홀로 헤쳐나가야 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프리랜서들이 행복하고 여유있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회사생활 힘든데 프리랜서나 해볼까?’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난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프리랜서로 하려는 일이 정말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시작하세요. 하지만 단지 회사가 싫고 돈을 더 많이 벌 것 같아서 시작하려는 거라면  하지마세요. 다니기 싫은 회사를 다닐 때는 회사만 벗어나면 천국이었지만 하기 싫은 일을 프리랜서로 한다면 일상이 지옥이 될 테니까요.’

영진공 self_fish


“엘리펀트 (Elephant, 2003)”, 그 날도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환경과는 다른 곳, 여전히 비행기로 하루의 거리를 날아가야 닿을 수 있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하지만 두 명의 고등학생이 중화기로 무장을 하고 자기가 다니던 학교 안에서 무고한 다른 이들을 사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TV에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생존자 – 그렇다! 지옥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달아난 생존자 – 들이 울부짖는 인터뷰가 전세계로 전파되었고 그곳의 각급 학교에는 공항에서나 볼 수 있는 검색대가 설치된 모습이 방영되었다. 불가능이 없는 세상에서, 언제 어디서든지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막상 그런 일이 눈 앞에 벌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경악하게 된다. 그건 정말 경악스런 일이었다.

이후로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2002)이 만들어져 그때 사건을 회상하고 설명하고 미국에 대해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 사건을 알았고 그중에 어떤 이들은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의 총기 난사 사건과 미국을 이해하는 새롭고도 매우 설득력있는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2003)는 <볼링 포 콜럼바인>이 보여주지 못했던 그 사건 자체를 그 날의 풍경 속에 담아 고스란히 목격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날의 하늘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가장 보고 싶어하는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었고 땅에는 푸른 잔디와 붉은 낙옆들이 덮여 있었다. 그런 하늘과 땅 사이에 아직 미래를 알 수 없는 어리고 젊은 삶들이 자기 일상 속에 놓여 있었다. <엘리펀트>는 그런 일상의 순간 순간들을 부분적인 슬로모션으로 처리하며 강조점을 여기저기 찍어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우리가 듣고 어렴풋이 짐작 정도나 하고 있었던 그 사건 자체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준다. 그 사건의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 보다 훨씬 더 계획된 일이었으며 우리가 알고 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탄환이 사용되었으며 (탄환 뿐만이 아니라 미리 설치된 폭탄까지 학교 건물 안에서 터졌던 것이었으며) 학생 식당 같은 하나의 장소에서 마구잡이식 난사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 하나를 정확히 겨냥해 저격하고 사냥함으로써 이루어진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의 가을 하늘은 여전히 높고 푸르기만 했다.

그러나 <엘리펀트>는 그 날의 사건으로 인한 전율과 공포, 충격과 고통까지 전달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그런 일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와 감정을 보여야 좋은지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그런 것들을 애써 자극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구스 반 산트가 애써 의도했던 바는 이미 일어난 그 일에 대한 하나의 시각과 하나의 반응과 하나의 의견과 하나의 주장을 솜씨 있게 피해나가는 일이었다.

세상 모두가 다 아는, 이미 일어난 사건의 전후 사정에 대해 면밀하게 조사하고 최대한 있었던 그대로를 재연하여 영화화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사건에 대해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거나 관객들에게 그 날의 충격과 공포, 고통과 슬픔을 동감하게끔 해주는 일 역시 유능한 작가라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구스 반 산트가 <엘리펀트>를 통해 하고자 했고 결국 해낸 일은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효과를 빚어내는 일이었다. 하나의 견해와 주장으로 인해 관객들이 둘로 셋으로 갈라지지 않도록, 오히려 모든 개개인이 제각각의 시각과 견해를 갖도록, 그리하여 결국엔 하나로 남아있게끔 한다.

충격? 전율? 비극? 모두 <엘리펀트> 앞에서는 홍보 문구일 뿐이다. 그 사건에 대한 표현은 될 수 있겠지만 그 사건을 다룬 이 영화, <엘리펀트>에 대한 표현으로는 걸맞지가 않다. 왜 <엘리펀트>는 스스로의 견해와 표현을 애써 회피하여 했는가? 어떤 이유로 <엘리펀트>는 정치적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한 무비판, 무견해, 무감정의 입장을 스스로 택하게 되었는가? 그러나 이런 질문에 앞서 먼저 답해져야 할 질문이 있다. 모든 사람이 이미 경악했고 누가 보아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설명들이 쏟아져 나온 상황에서 또 한편의 영화는 과연 어떤 식으로 만들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물어보나 마나한 ‘눈으로 보는 참조 문헌’의 하나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다시 돌이켜보기도 싫은 충격의 사건을 통해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엔터테인먼트가 되었어야 할 것인가. 그도 저도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삶에 대한 통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영화를 만들어 볼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누구도 쉽게 해설할 수 없고 오직 개인적인 질문과 답변의 연속만 가능케하는 커다른 의문 부호와 같은 영화를 선보일 수도 있는 건 아닐까.

어떻게 보면 구스 반 산트는 <엘리펀트>를 통해 몹시도 이기적인 선택을 했던 것일 수도 있다. 모두가 아파하는 그런 이야기를 소재로 자신의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내다니! 못된 인간 같으니라구! 그러나 구스 반 산트는 최소한, 멜 깁슨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통해 얻어낸 그런 식의 이기적인 성취는 아니었다고 본다.

ps. 실제 콜럼바인 고등학교 사건은 99년 4월 20일에 있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과 낙옆들 위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란 얘기다. <엘리펀트>가 다큐멘터리나 논픽션 드라마로 남고자 했었던 건 아니란 얘기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