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펀트 (Elephant, 2003)”, 그 날도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환경과는 다른 곳, 여전히 비행기로 하루의 거리를 날아가야 닿을 수 있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하지만 두 명의 고등학생이 중화기로 무장을 하고 자기가 다니던 학교 안에서 무고한 다른 이들을 사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TV에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생존자 – 그렇다! 지옥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달아난 생존자 – 들이 울부짖는 인터뷰가 전세계로 전파되었고 그곳의 각급 학교에는 공항에서나 볼 수 있는 검색대가 설치된 모습이 방영되었다. 불가능이 없는 세상에서, 언제 어디서든지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막상 그런 일이 눈 앞에 벌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경악하게 된다. 그건 정말 경악스런 일이었다.

이후로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2002)이 만들어져 그때 사건을 회상하고 설명하고 미국에 대해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 사건을 알았고 그중에 어떤 이들은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의 총기 난사 사건과 미국을 이해하는 새롭고도 매우 설득력있는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2003)는 <볼링 포 콜럼바인>이 보여주지 못했던 그 사건 자체를 그 날의 풍경 속에 담아 고스란히 목격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날의 하늘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가장 보고 싶어하는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었고 땅에는 푸른 잔디와 붉은 낙옆들이 덮여 있었다. 그런 하늘과 땅 사이에 아직 미래를 알 수 없는 어리고 젊은 삶들이 자기 일상 속에 놓여 있었다. <엘리펀트>는 그런 일상의 순간 순간들을 부분적인 슬로모션으로 처리하며 강조점을 여기저기 찍어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우리가 듣고 어렴풋이 짐작 정도나 하고 있었던 그 사건 자체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준다. 그 사건의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 보다 훨씬 더 계획된 일이었으며 우리가 알고 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탄환이 사용되었으며 (탄환 뿐만이 아니라 미리 설치된 폭탄까지 학교 건물 안에서 터졌던 것이었으며) 학생 식당 같은 하나의 장소에서 마구잡이식 난사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 하나를 정확히 겨냥해 저격하고 사냥함으로써 이루어진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의 가을 하늘은 여전히 높고 푸르기만 했다.

그러나 <엘리펀트>는 그 날의 사건으로 인한 전율과 공포, 충격과 고통까지 전달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그런 일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와 감정을 보여야 좋은지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그런 것들을 애써 자극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구스 반 산트가 애써 의도했던 바는 이미 일어난 그 일에 대한 하나의 시각과 하나의 반응과 하나의 의견과 하나의 주장을 솜씨 있게 피해나가는 일이었다.

세상 모두가 다 아는, 이미 일어난 사건의 전후 사정에 대해 면밀하게 조사하고 최대한 있었던 그대로를 재연하여 영화화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사건에 대해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거나 관객들에게 그 날의 충격과 공포, 고통과 슬픔을 동감하게끔 해주는 일 역시 유능한 작가라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구스 반 산트가 <엘리펀트>를 통해 하고자 했고 결국 해낸 일은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효과를 빚어내는 일이었다. 하나의 견해와 주장으로 인해 관객들이 둘로 셋으로 갈라지지 않도록, 오히려 모든 개개인이 제각각의 시각과 견해를 갖도록, 그리하여 결국엔 하나로 남아있게끔 한다.

충격? 전율? 비극? 모두 <엘리펀트> 앞에서는 홍보 문구일 뿐이다. 그 사건에 대한 표현은 될 수 있겠지만 그 사건을 다룬 이 영화, <엘리펀트>에 대한 표현으로는 걸맞지가 않다. 왜 <엘리펀트>는 스스로의 견해와 표현을 애써 회피하여 했는가? 어떤 이유로 <엘리펀트>는 정치적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한 무비판, 무견해, 무감정의 입장을 스스로 택하게 되었는가? 그러나 이런 질문에 앞서 먼저 답해져야 할 질문이 있다. 모든 사람이 이미 경악했고 누가 보아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설명들이 쏟아져 나온 상황에서 또 한편의 영화는 과연 어떤 식으로 만들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물어보나 마나한 ‘눈으로 보는 참조 문헌’의 하나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다시 돌이켜보기도 싫은 충격의 사건을 통해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엔터테인먼트가 되었어야 할 것인가. 그도 저도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삶에 대한 통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영화를 만들어 볼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누구도 쉽게 해설할 수 없고 오직 개인적인 질문과 답변의 연속만 가능케하는 커다른 의문 부호와 같은 영화를 선보일 수도 있는 건 아닐까.

어떻게 보면 구스 반 산트는 <엘리펀트>를 통해 몹시도 이기적인 선택을 했던 것일 수도 있다. 모두가 아파하는 그런 이야기를 소재로 자신의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내다니! 못된 인간 같으니라구! 그러나 구스 반 산트는 최소한, 멜 깁슨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통해 얻어낸 그런 식의 이기적인 성취는 아니었다고 본다.

ps. 실제 콜럼바인 고등학교 사건은 99년 4월 20일에 있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과 낙옆들 위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란 얘기다. <엘리펀트>가 다큐멘터리나 논픽션 드라마로 남고자 했었던 건 아니란 얘기다.

영진공 신어지

<파라노이드 파크>, 지금도 소년은 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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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헐리웃의 메이저 제작사와 몇 작품을 만든 시기도 있었습니다만 구스 반 산트 감독이라고 하면 여전히 미국 독립영화를 떠올리게 되고 또 <아이다호>(My Own Private Idaho, 1991)와 리버 피닉스를 추억하게 됩니다.1) 콜롬바인 고등학교 사건을 소재로 만든 <엘리펀트>(2003)가 깐느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이제는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요. 그러나 구스 반 산트에게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왠지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는 건 그의 영화들이 이제껏 관심을 기울여온 대상들이 지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싸이코>(1998)와 같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음지 속에 감추어진 청춘들의 상황과 심리를 포착해온 것이 구스 반 산트의 작품들입니다. 거렁뱅이 마약쟁이건 레즈비언이건, 천재적인 수학자이건 작가이건 음악가이건 간에 그들은 모두 아직 어리거나 아웃사이더들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소수자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구스 반 산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공통 분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영화에는 만든 이의 입장과 시각이 반영됩니다. 구스 반 산트의 특히 최근 영화들을 보면 무슨 미국의 방정환 선생 같은 작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십대 청소년들을 내세운 영화들은 숱하게 많지만 그들의 일상을 희화화하거나 또는 주제의 부각을 위해 착취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같은 콜롬바인 고등학교 사건을 소재로 다루어도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롬바인>(2002)과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의 접근 방식은 천양지차입니다. 마이클 무어가 미국 내 총기 관련 이슈에 대한 자신의 주장(그리고 정치적 입장)을 피력하기 위해 콜롬바인 사건과 미국 내 청소년 문제들을 최대한 활용했던 쪽이라면 구스 반 산트는 콜롬바인 사건을 중심으로 다뤄지는 세간의 시각에서 벗어나 그 일을 경험한 당사자들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합니다. 기성 세대의 시각으로만 사건을 바라보고 다루려 할 것이 아니라 총기 난사를 직접 경험한 그들의 세계를 그들의 입장에서 다시 바라보고자 했던, 그럴 기회를 관객들에게 제공해준 작품이 <엘리펀트>였다는 생각입니다.2)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며칠을 소재로 했던 <라스트 데이즈>와 함께 <파라노이드 파크> 역시 동일한 입장과 시각이 유지되고 있는 작품들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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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노이드 파크>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어느 소년의 고백입니다. 영화는 같은 장면들을 두 차례 이상씩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지난 며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단편적으로 뿌려집니다. 장면 마다 다양한 장르의 배경음악이, 별로 상황에 잘 어울리지도 않는 것 같은데 좌우지간 계속 흘러나옵니다. 드디어 소년이 경험한 그날 밤의 현장에 관객들도 초대됩니다. 그리고 미리 보여졌던 장면들이 다시 반복됩니다. 그제서야 소년의 행동과 무뚝뚝한 표정 속에 감추어졌던 심적 고통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날 밤 샤워를 하며 머리 위로 쏟아지던 물줄기 만큼 알렉스(게이브 네빈스)가 고통스러운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음을, 어린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 고통을 자연스럽게 전달합니다.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게 될테지만,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며 고백하여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건 잊지 말고 꼭 해볼만한 일이라는 걸 영화는 일러주고 있습니다. 밤새 장문의 글을 완성한 알렉스가 새벽 동틀녘에 자신의 고해성사를 한장씩 불태울 때에는 죽은 엘리엇 스미스의 노래가 살아남은 자를 위한 축가처럼 울려퍼집니다.

알렉스의 동년배들을 제외한 어른들은 대부분 카메라의 시선 밖에 머물거나 너무 멀리 있거나, 아니면 아주 흐릿하게 처리됩니다. 촬영 감독으로 참여한 크리스토퍼 도일이 삼촌으로 등장은 하지만 소년의 주변을 맴돌다가 금새 사라질 뿐입니다. 카페에서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 어른은 거스 반 산트의 카메오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리차드 루 형사의 얼굴은 지나치게 크게 부각되고 어머니와 이혼을 앞둔 아버지는 한참 뒤에야 얼굴이 나오는 식입니다. 반면에 스스로 준비가 안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루빨리 그 안에 들어가 함께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싶어했던 파라노이드 파크는 꿈 속의 한 장면처럼 그려집니다. 그렇게 <파라노이드 파크>는 소년의 입장과 시각으로 세상을 인지합니다.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가 근거리이긴 하지만 주인공들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시점이었다면 <파라노이드 파크>는 아예 주인공의 입장과 시각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안에서 발견한 무엇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보다는(작가의 입장과 시각에 따른 재해석을 들려주기 보다는) 그런 시도와 경험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관객들 스스로가 탐문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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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까지의 거스 반 산트 감독 영화들은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85년 장편 데뷔작 <말라 노체>부터 <드럭스토어 카우보이>(1989), <아이다호>(1991), <카우걸 블루스>(1993) 등을 통해 미국 독립영화 감독으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시기와 헐리웃의 메이저 제작사를 통해 <투 다이 포>(1995), <굿 윌 헌팅>(1995), <싸이코>(1998), <파인딩 포레스터>(2000)를 만든 시기, 그리고 다시 독립영화 쪽으로 돌아와서 <제리>(2002), <엘리펀트>(2003), <라스트 데이즈>(2005) 등을 만들고 있는 요즘입니다. 특히 <제리> 이후의 작품들은 전통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을 벗어나면서 그 이전까지의 작품들과 다시 한번 구분될 수 있습니다.

2) <엘리펀트>는 그야말로 ‘슬프도록 아름답다’는 표현이 정말 잘 어울리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콜롬바인 사건과 같은 현실적인 이슈를 다룰 때 만큼은 마이클 무어의 방식이 (다소 간의 오류가 있을지언정) 좀 더 적합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거스 반 산트의 방식은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될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추구한 결과물로 보입니다. 그것을 통해 수준 높은 예술이 완성되고 좀 더 근원적인 성찰이 가능했다고 한들, 당장에 할 수 있는 일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은 틀리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충격적인 사건을 앞에 두고서도 <엘리펀트>와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그런 태도가 조금은 얄밉게도 보인다는 겁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