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사토시 감독의 인생철학



친구의 홈피를 보던 중 한 글귀가 눈길을 끌었다.  


“인생 참 별거 없다.


어릴 적부터 삶은 대단한 거라고 생각했었고


무언가 특별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 친구의 글이 종종 떠오른다. 나 역시 삶이란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줄 알았다. 방황의 20대를 보낸 것도 결국 남과 다른 삶을 살고 싶었던 발버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모습은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 걱정, 가족 걱정, 돈 걱정을 하며 살고 있는 모습. 마치 어떤 관광지를 가던지 손가락으로 V 포즈를 하고 있는 여행사진들처럼 우리 모두는 배경만 다를 뿐 똑같은 인생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리가 꿈꾸는 특별한 인생이란 무엇일까. 모 기업가처럼 죄를 짓고도 어디 소풍 다녀오듯 사면되어 나와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훈계하는 것일까? 히피족처럼 바람따라 구름따라 자유롭게 사는 것일까? 타임지의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뽑혀야 특별한 인생일까? 어떤 인생이 ‘특별’한 인생일까?




미키 사토시 감독은 이런 질문에 자신만의 확고한 답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지루하고, 무기력하고, 별 볼일 없는,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형 인간들이 주인공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특별한 것 없는 인생,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런 주인공들이 피똥싸는 노력 끝에 기사회생하여 인생의 대박을 얻는 성공 스토리를 그린 영화는 많다. 그러나 미키 사토시의 영화에는 그런 커다란 성공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게 당신의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리 없다는 듯 쪼잔하다 싶을 정도로 아주 작고 평범하고 사소한 것으로 시선을 돌린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2005)
지루한 인생에 지친 전업주부 우에노 주리 양이 등장해서 주부 스파이로 활약한다.
영화는, 평범한 일상이라도 조금만 생각을 바꾼다면 이 세상은 정말 기똥차게
재미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텐텐(轉轉, 2008)
텐텐은 여기저기 정처없이 걷는다는 뜻으로 오다기리 죠가
잉여인간으로 나오는 작품이다. 자기 앞길을 찾지 못하고 청춘을 썩히고
있는 오다기리 죠와 부인을 살해해 도쿄경찰청에 자수하러 가는
빚쟁이가 함께 도쿄시내를 산책하며 경찰청까지 가는 로드무비(?)다.
우리가 사는 주변, 내가 살아왔던 삶을 되돌아보며 그 안에서 일어났던 사소하고
작은 일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인스턴트 늪(インスタント沼, 2009)
초현실적인 존재를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 편집장이 찌든 일상을 접고
골동품가게를 열기까지의 좌충우돌 이야기로 익숙했던 주변을 다른 시선으로
본다면 놀라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소소한 것들의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미키 사토시 감독은 우리의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어떤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주변의 작은 것들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라고 말한다.

그런 눈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볼 수 있다. 식물에 관심이 없는 이에게 산에서 자라는 풀들은 그저 잡초들의 집합일 뿐이다. 하지만 식물을 사랑하고 관심있게 이에게는 산에 있는 풀 하나, 나무 하나 마다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특별한 삶을 꿈꾸지만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특별하다.

대학가고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낳고 … 이런 식으로 삶을 단순화 시키는 것은 모든 영화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단순해 보이는 나의 하루, 나의 한달, 나의 일년이지만 그 안에서 특별한 당신과 만나고 특별히 햇살 좋은 날도 있고 특별히 재수없었던 날도 있다.

오늘따라 매끈하게 유선형으로 깎여진 손톱이 맘에 들고 뫼비우스의 띠 처럼 묶여진 농구화 끈을 보며 오늘따라 자유투가 잘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특별한 삶이란 다름아닌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이다. 그래서 우리가 특별한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은 단지 지금 자신의 삶을 더 사랑해주는 일 것이다.


덧붙여.


국내 팬들 사이에선 일본의 장진 감독이라 불리는 미키 사토시 감독은 장진 감독처럼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초현실스런 사건과 인물들의 묘사, 그 인물들이 주고받는 중구난방 동문서답의 대화들로 아주 유쾌한 영화를 만들어 낸다. 게다가 장진 감독의 영화에서 정재영과 장영남씨처럼 미키 사토시 감독의 영화에도 터줏대감들이 있다. 그들은 이와마츠 료와 후세 에리라는 배우인데 이 둘은 거의 항상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이와마츠 료와 후세 에리. 사진만 보고 있어도 절로 유쾌해진다.

영진공 self_fish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죠.

 

많은 사람들에게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은 여전히 생소하다. 그래서 종종 낮선 사람들과의 소개 자리에서 ‘아..그 직업은 뭐하는 거죠?’ 라는 질문을 받아서 대화를 이어가는 좋은 수단이 되곤 한다. 프리랜서라는 것과 ‘일러스트레이터’라는 그럴듯한 직업명 때문에 가끔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뭐 어느 직업이나 그렇듯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애로사항이 꽃피는 건 마찬가지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문화 쪽으로 돈 벌어먹기가 참으로 힘들고 척박한 짓이기에 뭔가 놀면서 돈 벌겠다는 생각으로 이쪽 일을 준비한다면 돈은 커녕 손가락의 깊은 맛만 느끼기 쉽상이다.



귀염둥이 이케와키 치즈루가 나온다!!

도쿄에 사는 4명의 처자들의 홀로서기 고통과 아픔을 그린 일본 영화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는 일본판 ‘고양이를 부탁해’로 소개되며 국내에서도 젊은 여성들의 공감과 호응을 이끌어낸 좋은 작품이다. 재밌는건 일러스트레이터로 나오는 ‘토오코’ 역에 본 영화의 원작 만화의 작가인 나나난 키리코가 직접 나와 연기를 펼쳤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예전에 종영했던 모 드라마에서의 헐랭이 일러스트레이터완 달리 당 영화 속 일러스트레이터의 모습은 꽤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작곡가나 소설가 등 창작직업이 그러하듯 일러스트 작업도 고독에 익숙해져야 한다.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는데 마감일 마저 다가오면 정신줄을 놓기 일쑤다.

일을 끝냈는데 그 다음 일이 들어오지 않으면 공황상태에 빠진다.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회사원인 치히로와 프리랜서인 토오코의 관계였다. 쳇바퀴 도는 일상과 비전없는 회사생활에 시달리며 그저 남자 한명 잘 꼬셔서 시집가려는 치히로와 프리랜서이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토오코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치히로는 그런 토오코를 부러워한다.

“토오코 넌 그래도 좋은 편이야.
돈도 많이 벌지, 이름도 꽤 알려졌지 …
네 의견도 눈치 안보고 말할 수 있고

너는 모를거야. 나 같은 사람이 고생하고 불안하게 사는걸 …

네가 정말 부러워.”



아마 프리랜서를 하는 이들이라면 위와 같은 치히로의 말을 쉽게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란게 어딨겠는가. (아. 국개의원 빼고.) 불안정한 수입과 모든 문제를 홀로 헤쳐나가야 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프리랜서들이 행복하고 여유있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회사생활 힘든데 프리랜서나 해볼까?’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난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프리랜서로 하려는 일이 정말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시작하세요. 하지만 단지 회사가 싫고 돈을 더 많이 벌 것 같아서 시작하려는 거라면  하지마세요. 다니기 싫은 회사를 다닐 때는 회사만 벗어나면 천국이었지만 하기 싫은 일을 프리랜서로 한다면 일상이 지옥이 될 테니까요.’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