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커 펀치”,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표현력이 주는 쾌감


잭 스나이더 감독의 다섯번째 장편 연출작인 동시에 처음으로 다른 원작 없이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잭 스나이더 감독 자신의 원안을 바탕으로 스티브 시부야와 함께 공동 각본을 완성해냈다. 그래서인지 지나치게 게임식 진행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거나 설득력이 완전 부족한 – 한 마디로 눈요기 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작품이라는 평을 많이 듣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기대치를 잔뜩 낮추었던 덕분인지 꽤 재미있게 보고 나올 수 있었던 작품이다. 가급적 대형 스크린과 훌륭한 사운드 시스템이 잘 완비된 상영관에서 봐야만 최소한 <써커 펀치>의 현란한 액션 스펙타클을 만끽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한다. 물론 한 편의 영화로서 갖춰야 할 스토리텔링의 완성도는 그와는 별개의 문제이긴 하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어차피 대단한 걸작을 기대했던 것도 아닌 바에야 뭐 하나 참신한 구석이라도 있는 편이 지나치게 정형화된 스토리텔링을 반복하는 일 보다 차라리 낫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한다. <써커 펀치>는 내러티브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어설픈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대신 화려한 비주얼과 스펙타클에 있어서 만큼은 보기 드물게 자유분방함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이따금 TV에서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게임 CF를 보면 차라리 저런 비주얼로 만들어진 장편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써커 펀치>는 마치 그런 상상력과 욕망을 실제로 구현해놓은 듯한 장면을 연출해낸다. 꿈 속이거나 게임 속 상황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황당하면서도 거침 없는 액션 활극이 장르별로 다양하게 펼쳐지는 작품이 <써커 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 관객의 일반적인 요구란 화려한 비주얼과 액션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런 장면들이 펼쳐지게 되는 충분한 이유와 전후 맥락 상의 사실성까지 필요로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써커 펀치>에서의 화려한 액션은 말하자면 베이비 돌(에밀리 브라우닝)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동안에 빠져드는 혼자만의 상상 속 세계, 또는 그에 관한 은유법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런 식의 설정은 다른 영화에서는 도통 본 적이 없었던 경우라서 무척 참신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자, 그렇다 치고” 하는 기분으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혹시나 베이비 돌이 춤을 추는 동안 머리 속으로 한바탕 전쟁을 치루는 상상을 한다는 설정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점을 되새겨보길 바란다 – 주인공이 베이비 돌이라 불리며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상황 자체가 이미 주인공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영화 <써커 펀치>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신병원에 갇힌 소녀의 상상 속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는 설정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 영화의 주제이자 메시지 또는 이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게된 이유에 대해 영화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끝나기 마지막 몇 분 동안에 등장 인물의 대사(나레이션)으로 성급하게 정리를 해버린다는 점이 아닌가 싶다.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라는 측면에서 <써커 펀치>는 <매트릭스> 3부작의 그것과 적잖이 비슷한 맥락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게임식 스펙타클의 전시에 할애한 뒤에 막상 영화의 주제는 ‘말로 때우는’ 식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환영받기 어려운 접근 방식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다 만들고 나니 관객들이 영화의 본 뜻을 잘 이해해주지 못할 것 같아서 나레이션을 추가로 구성해 넣은 것이든 아니면 처음부터 주제 부분은 적당히 말로 떼울 생각이었든지 간에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써커 펀치>를 꽤 재미있게 봤던 탓에 작품의 수준을 놓고 맹비난을 하고 싶은 마음은 털끝 만큼도 없다. 수준 높은 작품은 아니지만 적당히 볼만 했다, 라는 정도로만 언급하기에는 오히려 –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 혼자만 보기에는 몹시 아까운 훌륭한 구석도 많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 베이비 돌을 중심으로 하는 5인조 걸파워 액션을 내세우고 있지만 일단 액션 씨퀀스가 시작되면 정말 다들 진지하게 액션에만 열중하는 모습이라서 등장 인물들이 처해있는 열악한 상황에 비해 막상 관객들 앞에 펼쳐지는 것은 오히려 순수한 액션 그 자체로 제한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각각의 전투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다치거나 죽게 될 일이 없다는 것 쯤은 쉽게 알아채고 – 그 만큼 긴장감은 덜 할 수 밖에 없겠지만 – 자세를 편하게 하고 눈 앞에 펼쳐지는 액션의 향연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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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잭 스나이더, <300> : 잭 스나이더는 자신이 영화에서 목적한 바, 그리고 자신의 영화가 성취해야 할 단 하나의 목적을 아주 훌륭하게 완수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300>이 그려내는 관점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바를 적절히 조합해 보면,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는 결국 (제국주의화한) 문명과 (걸어다니는 살인병기로 이루어진) 야만의 충돌이다. 주인공이 스파르타의 전사들이었던 이상 영화가 갖게 되는 입장은 일면 거시기해 보이긴 하지만, 아무리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용맹무쌍한 전사들의 장렬하고 비장하며 아름다운 죽음을 형상화하는 척하며 폼을 잡는다 할지라도 이 영화의 정체는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해서 실험하고 제시하는 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붉은 망토를 두른 스파르타 전사들은 투구를 쓰고 무릎보호대를 하고 창과 방패를 휘두르면서도 정작 갑옷은 입지 않은 채 삼각팬티 바람에 빨래판을 그대로 드러내며, 그에 반해 페르시아의 군대는 극도의 문명화를 상징하는 화려한 장신구와 화장과 가면을 쓰고 온몸을 갑옷으로 휘감는다.


가만, 페르시아가 문명의 상징으로 그려졌다고? 그렇다, 정말 그렇다. (많은 이들이 페르시아 왕이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졌다고 하길래 스스로의 미감을 좀 의심하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나에게 페르시아 왕 크셰르크세스는 9척 장신에 지독히 위엄있고 압도적인 제국의 왕, 스스로를 신 중의 신, 왕 중의 왕 혹은 God-King으로 자처하는 데에 있어 전혀 부족함이 없는 풍채를 가진 위압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페르시아 왕의 외모를 기괴한 것으로 보는 데에는 ‘화장한 남자’에 대한 적대와 혐오감이 전제되어 있는 듯한데, 실제 역사에서 페르시아 왕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이집트의 왕비뿐 아니라 왕들도 짙은 눈화장을 한 것은 미용의 ‘화장’ 목적이라기보다는 상징을 육체로 구현해내는 ‘분장’의 의미가 더 짙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짐은 국가와 결혼했노”라며 얼굴 위에 마스크와도 같은 화장을 썼을 때 그 화장이 어디 미용 목적이던가? 그것은 ‘그저 한 명의 여왕’이 아니라 대영제국 그 자체를 몸으로 구현한 것이었고, 살아있는, 육체를 가진 구체적인 인간을 그 자체로 상징과 개념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행위였다. 나는 페르시아 왕의 화장 아닌 ‘분장’ 역시 그런 의미로 파악한다. 크셰르크세스 역시 극도의 문명을 이룩한 대제국 그 자체의 상징으로서 얼굴에 분장을 썼고 온몸을 황금으로 휘감고 피어싱을 하며 수백의 노예들이 떠받치는 (이동하는) 거대한 왕좌 위에 앉아 세상을 호령하는 것이다. 왕의 최정예 부대인 임모탈은 또 어떤가? 개체성을 지운 위에 ‘집단의 정체성’으로서 가면을 씀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하나인 전체’로서 상징화한다. 고도의 상징을 사용하는 사회, 그리고 부를 드러내며 보석과 치장으로 예술적 심미안을 드러내는 사회. 페르시아는 진정 고작 살상병기 외에는 존재의 가치를 알지 못하던 야만적인 스파르타 전사에 비하면 확실히 문명의 첨단을 누리는 세계였고, 탐욕으로 제국을 넓히고 있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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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세붑 숭배를 상징화한 저 왕좌까지... 황제님 멋쟁이셈


반면 이들과 맞서 싸우는 스파르타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영화 서두에 길게 설명이 됐듯 아무리 자유를 외치고 숭고한 이상을 갖고있는 척한들 어릴 적부터 철두철미하게 ‘걸어다니는 살인병기’로 길러지고 삶의 풍성한 의미와 아름다움과 학문과 문명과 예술이 뭔지도 모른 채 오직 전쟁과 전투기술밖에 아는 바 없으며 그렇기에 ‘아름답고 가치있게 살며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멋지게 죽는(소멸하는) 것’ 하나에 목숨을 거는 골빈 머슬들(집단 가미가제 전투조?!)이 아닌가. 이들이 아테네 인들을 ‘호모들(boy-lovers)에 나약한 철학자’라고 비하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전장에서 갖는 전우애(!)와 특별한 우정(!)이 동성애적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 못한 채 열심히 머슬만 움직이는 가련한 존재임을 스스로 폭로하는 데에 이르면, ‘생각’이라는 걸 멈춘 채 그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야수를 자처하는) 잘 길들여진 (말하는)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마초-짐승들의 유치찬란한 유희놀음이 화면 가득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지들이야 나름대로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겠지. 그러나 인문학적 교양이 결여된 이들이 내뱉는 말들이 아무리 문명세계의 것들을 모방하고 얼기설기 주워모아 내뱉는들 그것이 과연 어느 정도의 가치와 의미를 가지게 될까. (아니 스파르타가 언제부터 그렇게 ‘이성’을 중시하는 사회였어? 아테네 인들은 나약한 철학자들이라며?) 그렇기에 레오나이다스 왕은 문명을 온몸으로 구현하고 있는 페르시아 왕 앞에서 쫄 수밖에 없고, 그러한 느낌을 제대로 표현할 단어 하나조차 제대로 찾을 수 없으며,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은 페르시아 왕의 그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서 그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고작 ‘당신의 피를 봬주겠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레오나이다스는 크셰르크세스를 죽일 수 없다, 고작 상처를 낼 뿐이다. 물론, 극도로 상징화된 존재는 굳이 숨통을 끊어놓지 않아 ‘상처를 입으면 피를 흘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는 걸 살짝 폭로하는 것만으로도 존재 기반이 무너지긴 하지만.

외교 사절을 죽이고는 의회를 무시하고 국법을 어긴 채 전쟁을 감행하는 왕과,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한들) 의회에서 심지어  의원을 공개적으로 찔러죽이는 왕비라니 이런 개망나니 야만의 국가 수준에서 자기들이 싸우는 목적이 ‘자유와 숭고한 이상’이라고 착각한들 그게 어디 만인의 자유와 이상을 위한 것이었겠는가, 그 300명 빨래판의 자유와 이상(이들은 자기가 말하는 그게 진정 의미하는 바가 뭔지는 잘 몰랐으리라 확신한다.)을 위한 거였겠지. 그나마 이 왕이 조금이나마 양심적이라 할 수 있다면 자기가 직접 전장으로 달려나갔다는 사실 단 하나 때문이리라. (노무현, 니가 가라 이라크!)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에 정치적 공정성을 들이대고 역사 왜곡을 비판하며 ‘진지하게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우려를 표한다. ‘서사’ 장르가 매력적인 것은 설사 창작자가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누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든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표피에 내세우는 상징체계가 아닌 대안적 체계를 전제할 경우 완전히 다른 의미, 심지어 전복적인 정반대의 의미를 추출해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서 미국의 말도 안 되는 속좁은 자국중심주의와 호전성을 읽어내며 우려를 표하고 분노를 하지만, 골빈 머슬들의 멍청함을 그대로 폭로하며 엔터테이닝을 제공해주는 영화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공들인 페르시아 군 묘사에서 그걸 봤다면 내가 지나치게 아전인수 격으로 영화를 보는 것일까 아니면 욕심이 너무 없는 것일까. 아니 나는 그런 진지한 분노가 웬지 ‘내 딸래미는 얼굴도 이쁘고 돈도 잘 벌고 머리도 좋아야 하거든요’ 하는 거 같아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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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있어보이는 척 해봤자 야만인인데, 어째 로마시대 장교들을 좀 닮은 듯도.


잭 스나이더는 자신이 영화에서 목적한 바, 그리고 자신의 영화가 성취해야 할 단 하나의 목적을 아주 훌륭하게 완수했다. 비록 그가 지적이고 통찰력있는 감독이 아니라 해도 요즘엔 그렇게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하나만 밀어부쳐 일정 정도의 성취를 거두는 감독도 드물기 때문에, 그리고 그 기술적 측면에 있어서 충분히 ‘훌륭한’ 정도를 성취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잭 스나이더 감독이 아주 마음에 든다. <새벽의 저주>를 보고 찍었던 내 눈짐작이 틀리지 않아서 더욱 즐겁기도 하고. 전통적인 좀비영화 팬들은 <새벽의 저주>의 ‘존나빠른’ 좀비들을 저주스러워 했지만, <새벽의 저주>가 ‘액션-호러’라는 측면에서  얼마나 자신의 목적과 존재의 이유를 훌륭하게 완수해냈는지는 분명히 인정해 줘야 하지 않는가. <300> 역시 그렇다. 18세 이상 관람가인 이 영화를 보며 역사적 사실을 ‘새로 알고 공부’했다고 여길 이들은 어차피 얼간이일 테고, 영화 속의 바보들이 얼기설기 내뱉는 그럴 듯한 말들은 그런가보다 하고 봐주자. 그래봤자 이들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은 출렁이는 머슬이 만들어내는 곡선들이 어필하는 시각적 즐거움이리니. 육체의 스펙터클과 인간의 몸을 감싼 각종 문명의 상징들의 스펙터클의 대비, 그리고 인간이라는 종자의 가장 바보같은 짓 중 하나인 ‘전쟁’이라는 것이 극도의 방식으로 재구성됐을 때 제공할 수 있는 스펙터클. 영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그 화면, 움직이는 그래픽 노블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같은 프랭크 밀러의 원작이라도 잭 스나이더의 화면은 (<새벽의 저주> 때도 그랬지만) 묵직하고 깊이가 있는 <씬 시티> 로드리게즈의 화면과 달리 특유의 가볍고 좀더 화사하며 얄팍한 쌈마이 감성이 일관성과 뚝심으로 밀어부쳐질 때 느껴지는 맛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아주 기능적이고 말초적으로 제공되는 시각적 즐거움. 전체적인 톤과 화면과 앵글과 구도와 질감뿐 아니라, 각 육체가 전시하는, 그러니까 “걸어다니는 300개의 빨래판”이 전시하는 육체 그 자체의 스펙타클, 그 육체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각각의 동선의 아름다움은 물론, 이 300개의 빨래판이 모여 구조를 만들며 만들어내는 진과 동선이 주는 쾌감까지, 적어도 잭 스나이더는 그림을 꽤 잘 뽑아내는 감독이다. <300>을 볼거리가 풍부한 진지한 코미디 영화로 즐기는 게 아주 불가능하진 않다. 마치 WWF 프로레슬링 경기 관전에서 얻는 즐거움처럼.


ps1. 제러드 버틀러를 처음 눈여겨 보게 된 건 케이블에서 2부작으로 해준 TV영화 <훈족의 아틸라>인데 근육이 좋더라고. 근데 이 아저씨 완전히 이쪽 까라 – 멍청한 머슬 – 로 자리잡으시는구만.

ps2. 데이빗 윈햄도 빨래판 배를 드러내고 나왔을 때 생각했다. “윈햄 너마저…” 파라미르로 출연했을 때 부드럽고 사연 있어뵈는 얼굴에 인상이 깊었는데, 정말 좋아하게 된 건 <반 헬싱>에서 그 섬세하고 잘생긴 얼굴을 하고선 ‘어리버리 푼수 수도사’로 나오는 걸 보고서. 이 친구 눈이 정말 좋다.


ps3. 근데, 황제님 멋쟁이를 외치는 나, 정말 미감이 이상한 거야…?


산업인력관리공단 특등사수
노바리(http://darthvedder.com/ved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