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연구] 미니멀리즘 영화 평론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해리포터와 불의잔
– 헤르미온느가 어디가 어때서? 배부른 포터쉐끼

2. 트랜스 포머
– 커머셜 필름의 효용을 보여주는 최접점.

3. 그놈 목소리
– 보다 잤다.

4. 남극일기
– 내츄럴시티의 재발견보다 흥분되는 쾌감, 이게 왜 구리다는거지?

5. 미녀는 괴로워
– 김아중이 이상하게 생긴건 아니네.

6. 일번가의 기적
– 하지원 복근만큼만 네러티브 관리가 되었다면…

7. 디워
– 이거 봐야 나도 주륜데…ㅠ,.ㅠ;;

8. 다이하드 4.0
– ㅅㅂㄻ 영화특급..

9. 타짜
– 영화계의 최훈이군화.

10. 극락도 살인사건
– 훗, 리얼라이프에는 황우석이 있는걸…

11. 300
– 천당도 줄서 가라면 안갈 판인데, 왕까지 복근있는 나라는…

끝.


영진공 그럴껄

잭 스나이더, <300> : 잭 스나이더는 자신이 영화에서 목적한 바, 그리고 자신의 영화가 성취해야 할 단 하나의 목적을 아주 훌륭하게 완수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300>이 그려내는 관점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바를 적절히 조합해 보면,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는 결국 (제국주의화한) 문명과 (걸어다니는 살인병기로 이루어진) 야만의 충돌이다. 주인공이 스파르타의 전사들이었던 이상 영화가 갖게 되는 입장은 일면 거시기해 보이긴 하지만, 아무리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용맹무쌍한 전사들의 장렬하고 비장하며 아름다운 죽음을 형상화하는 척하며 폼을 잡는다 할지라도 이 영화의 정체는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해서 실험하고 제시하는 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붉은 망토를 두른 스파르타 전사들은 투구를 쓰고 무릎보호대를 하고 창과 방패를 휘두르면서도 정작 갑옷은 입지 않은 채 삼각팬티 바람에 빨래판을 그대로 드러내며, 그에 반해 페르시아의 군대는 극도의 문명화를 상징하는 화려한 장신구와 화장과 가면을 쓰고 온몸을 갑옷으로 휘감는다.


가만, 페르시아가 문명의 상징으로 그려졌다고? 그렇다, 정말 그렇다. (많은 이들이 페르시아 왕이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졌다고 하길래 스스로의 미감을 좀 의심하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나에게 페르시아 왕 크셰르크세스는 9척 장신에 지독히 위엄있고 압도적인 제국의 왕, 스스로를 신 중의 신, 왕 중의 왕 혹은 God-King으로 자처하는 데에 있어 전혀 부족함이 없는 풍채를 가진 위압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페르시아 왕의 외모를 기괴한 것으로 보는 데에는 ‘화장한 남자’에 대한 적대와 혐오감이 전제되어 있는 듯한데, 실제 역사에서 페르시아 왕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이집트의 왕비뿐 아니라 왕들도 짙은 눈화장을 한 것은 미용의 ‘화장’ 목적이라기보다는 상징을 육체로 구현해내는 ‘분장’의 의미가 더 짙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짐은 국가와 결혼했노”라며 얼굴 위에 마스크와도 같은 화장을 썼을 때 그 화장이 어디 미용 목적이던가? 그것은 ‘그저 한 명의 여왕’이 아니라 대영제국 그 자체를 몸으로 구현한 것이었고, 살아있는, 육체를 가진 구체적인 인간을 그 자체로 상징과 개념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행위였다. 나는 페르시아 왕의 화장 아닌 ‘분장’ 역시 그런 의미로 파악한다. 크셰르크세스 역시 극도의 문명을 이룩한 대제국 그 자체의 상징으로서 얼굴에 분장을 썼고 온몸을 황금으로 휘감고 피어싱을 하며 수백의 노예들이 떠받치는 (이동하는) 거대한 왕좌 위에 앉아 세상을 호령하는 것이다. 왕의 최정예 부대인 임모탈은 또 어떤가? 개체성을 지운 위에 ‘집단의 정체성’으로서 가면을 씀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하나인 전체’로서 상징화한다. 고도의 상징을 사용하는 사회, 그리고 부를 드러내며 보석과 치장으로 예술적 심미안을 드러내는 사회. 페르시아는 진정 고작 살상병기 외에는 존재의 가치를 알지 못하던 야만적인 스파르타 전사에 비하면 확실히 문명의 첨단을 누리는 세계였고, 탐욕으로 제국을 넓히고 있던 세계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알세붑 숭배를 상징화한 저 왕좌까지... 황제님 멋쟁이셈


반면 이들과 맞서 싸우는 스파르타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영화 서두에 길게 설명이 됐듯 아무리 자유를 외치고 숭고한 이상을 갖고있는 척한들 어릴 적부터 철두철미하게 ‘걸어다니는 살인병기’로 길러지고 삶의 풍성한 의미와 아름다움과 학문과 문명과 예술이 뭔지도 모른 채 오직 전쟁과 전투기술밖에 아는 바 없으며 그렇기에 ‘아름답고 가치있게 살며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멋지게 죽는(소멸하는) 것’ 하나에 목숨을 거는 골빈 머슬들(집단 가미가제 전투조?!)이 아닌가. 이들이 아테네 인들을 ‘호모들(boy-lovers)에 나약한 철학자’라고 비하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전장에서 갖는 전우애(!)와 특별한 우정(!)이 동성애적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 못한 채 열심히 머슬만 움직이는 가련한 존재임을 스스로 폭로하는 데에 이르면, ‘생각’이라는 걸 멈춘 채 그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야수를 자처하는) 잘 길들여진 (말하는)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마초-짐승들의 유치찬란한 유희놀음이 화면 가득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지들이야 나름대로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겠지. 그러나 인문학적 교양이 결여된 이들이 내뱉는 말들이 아무리 문명세계의 것들을 모방하고 얼기설기 주워모아 내뱉는들 그것이 과연 어느 정도의 가치와 의미를 가지게 될까. (아니 스파르타가 언제부터 그렇게 ‘이성’을 중시하는 사회였어? 아테네 인들은 나약한 철학자들이라며?) 그렇기에 레오나이다스 왕은 문명을 온몸으로 구현하고 있는 페르시아 왕 앞에서 쫄 수밖에 없고, 그러한 느낌을 제대로 표현할 단어 하나조차 제대로 찾을 수 없으며,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은 페르시아 왕의 그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서 그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고작 ‘당신의 피를 봬주겠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레오나이다스는 크셰르크세스를 죽일 수 없다, 고작 상처를 낼 뿐이다. 물론, 극도로 상징화된 존재는 굳이 숨통을 끊어놓지 않아 ‘상처를 입으면 피를 흘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는 걸 살짝 폭로하는 것만으로도 존재 기반이 무너지긴 하지만.

외교 사절을 죽이고는 의회를 무시하고 국법을 어긴 채 전쟁을 감행하는 왕과,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한들) 의회에서 심지어  의원을 공개적으로 찔러죽이는 왕비라니 이런 개망나니 야만의 국가 수준에서 자기들이 싸우는 목적이 ‘자유와 숭고한 이상’이라고 착각한들 그게 어디 만인의 자유와 이상을 위한 것이었겠는가, 그 300명 빨래판의 자유와 이상(이들은 자기가 말하는 그게 진정 의미하는 바가 뭔지는 잘 몰랐으리라 확신한다.)을 위한 거였겠지. 그나마 이 왕이 조금이나마 양심적이라 할 수 있다면 자기가 직접 전장으로 달려나갔다는 사실 단 하나 때문이리라. (노무현, 니가 가라 이라크!)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에 정치적 공정성을 들이대고 역사 왜곡을 비판하며 ‘진지하게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우려를 표한다. ‘서사’ 장르가 매력적인 것은 설사 창작자가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누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든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표피에 내세우는 상징체계가 아닌 대안적 체계를 전제할 경우 완전히 다른 의미, 심지어 전복적인 정반대의 의미를 추출해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서 미국의 말도 안 되는 속좁은 자국중심주의와 호전성을 읽어내며 우려를 표하고 분노를 하지만, 골빈 머슬들의 멍청함을 그대로 폭로하며 엔터테이닝을 제공해주는 영화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공들인 페르시아 군 묘사에서 그걸 봤다면 내가 지나치게 아전인수 격으로 영화를 보는 것일까 아니면 욕심이 너무 없는 것일까. 아니 나는 그런 진지한 분노가 웬지 ‘내 딸래미는 얼굴도 이쁘고 돈도 잘 벌고 머리도 좋아야 하거든요’ 하는 거 같아서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무리 있어보이는 척 해봤자 야만인인데, 어째 로마시대 장교들을 좀 닮은 듯도.


잭 스나이더는 자신이 영화에서 목적한 바, 그리고 자신의 영화가 성취해야 할 단 하나의 목적을 아주 훌륭하게 완수했다. 비록 그가 지적이고 통찰력있는 감독이 아니라 해도 요즘엔 그렇게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하나만 밀어부쳐 일정 정도의 성취를 거두는 감독도 드물기 때문에, 그리고 그 기술적 측면에 있어서 충분히 ‘훌륭한’ 정도를 성취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잭 스나이더 감독이 아주 마음에 든다. <새벽의 저주>를 보고 찍었던 내 눈짐작이 틀리지 않아서 더욱 즐겁기도 하고. 전통적인 좀비영화 팬들은 <새벽의 저주>의 ‘존나빠른’ 좀비들을 저주스러워 했지만, <새벽의 저주>가 ‘액션-호러’라는 측면에서  얼마나 자신의 목적과 존재의 이유를 훌륭하게 완수해냈는지는 분명히 인정해 줘야 하지 않는가. <300> 역시 그렇다. 18세 이상 관람가인 이 영화를 보며 역사적 사실을 ‘새로 알고 공부’했다고 여길 이들은 어차피 얼간이일 테고, 영화 속의 바보들이 얼기설기 내뱉는 그럴 듯한 말들은 그런가보다 하고 봐주자. 그래봤자 이들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은 출렁이는 머슬이 만들어내는 곡선들이 어필하는 시각적 즐거움이리니. 육체의 스펙터클과 인간의 몸을 감싼 각종 문명의 상징들의 스펙터클의 대비, 그리고 인간이라는 종자의 가장 바보같은 짓 중 하나인 ‘전쟁’이라는 것이 극도의 방식으로 재구성됐을 때 제공할 수 있는 스펙터클. 영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그 화면, 움직이는 그래픽 노블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같은 프랭크 밀러의 원작이라도 잭 스나이더의 화면은 (<새벽의 저주> 때도 그랬지만) 묵직하고 깊이가 있는 <씬 시티> 로드리게즈의 화면과 달리 특유의 가볍고 좀더 화사하며 얄팍한 쌈마이 감성이 일관성과 뚝심으로 밀어부쳐질 때 느껴지는 맛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아주 기능적이고 말초적으로 제공되는 시각적 즐거움. 전체적인 톤과 화면과 앵글과 구도와 질감뿐 아니라, 각 육체가 전시하는, 그러니까 “걸어다니는 300개의 빨래판”이 전시하는 육체 그 자체의 스펙타클, 그 육체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각각의 동선의 아름다움은 물론, 이 300개의 빨래판이 모여 구조를 만들며 만들어내는 진과 동선이 주는 쾌감까지, 적어도 잭 스나이더는 그림을 꽤 잘 뽑아내는 감독이다. <300>을 볼거리가 풍부한 진지한 코미디 영화로 즐기는 게 아주 불가능하진 않다. 마치 WWF 프로레슬링 경기 관전에서 얻는 즐거움처럼.


ps1. 제러드 버틀러를 처음 눈여겨 보게 된 건 케이블에서 2부작으로 해준 TV영화 <훈족의 아틸라>인데 근육이 좋더라고. 근데 이 아저씨 완전히 이쪽 까라 – 멍청한 머슬 – 로 자리잡으시는구만.

ps2. 데이빗 윈햄도 빨래판 배를 드러내고 나왔을 때 생각했다. “윈햄 너마저…” 파라미르로 출연했을 때 부드럽고 사연 있어뵈는 얼굴에 인상이 깊었는데, 정말 좋아하게 된 건 <반 헬싱>에서 그 섬세하고 잘생긴 얼굴을 하고선 ‘어리버리 푼수 수도사’로 나오는 걸 보고서. 이 친구 눈이 정말 좋다.


ps3. 근데, 황제님 멋쟁이를 외치는 나, 정말 미감이 이상한 거야…?


산업인력관리공단 특등사수
노바리(http://darthvedder.com/vedder)

“300, 장준혁, 박정희를 존경하며” <영진공 71호>

구국의 소리
2007년 4월 5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얀거탑>의 장준혁
영화 <삼백300>의 레오니다스와 299명
그리고 박정희….

모두 극적으로 죽었기에 기억되는 인간들이다.
생전에 그들의 행적이 죽음으로써 용서되고 되려 신격화 되는…

이들이 계속 살아있었으면 지금처럼 칭송받을까. 결코 아니지.

하지만 이들을 떠받드는 영화를 만들거나 감상하는 것은 나름 괜찮은 일이다.
적어도 이전에 보아왔던 ‘희생양 영화’들에 비해서는 말이다.

영화 <파이란>을 보자. 구제불능깡패 강재는 파이란의 죽음 앞에서 개심한다.
<파송송 계란 탁> 에서도 철없고 한심하던 주인공은 아들의 죽음 앞에서 어른이 된다.
곧 개봉할 것 같은 <눈부신 날에>에서 박신양도 순수한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
모두 탕자의 구원을 위해서 누군가 희생되어야 하는 희생양 영화들이다.

이 반복되는 신파도 짜증나지만, 그 뒤에 숨은 논리는 무섭기까지 하다.

어떤 악한이 순수한 어린양의 희생 앞에서 개심한다는 이야기를 뒤집으면, 힘쎄고 악독한 자들이 계속 악독한 이유는 그들을 의해서 희생할 순수한 어린양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일단 니가 죽어바. 그럼 내가 좀 생각 바꿔볼께… 그렇다고 꼭 바꾼다는 보장은 없어.”
뭐 이딴 식이 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난 절대 굽힐 생각 없어. 이대로 장렬하게 죽을래!”
라며 죽음을 맞이한 위의 세 주인공들은 나름 정직하고 줏대도 있고 책임의식 마저 있다.

따라서 나 역시 이들을 깊이 존경하고 한 수 높이 쳐주려고 한다.

앞으로 이런 신념에 찬 인간들은 존경할 것이다.
그가 악질 파쇼든, 변태든, 정신병자든, 뭐든지 상관없다.

그리고 그들을 칭송하는 영화도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하련다.

단, 그들이 확실히 죽은 다음에.

이제 곧 구국의 소리에 책상 하나 놓으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장
짱가(jjanga@yonsei.ac.kr)

<300>, “용사여 네 무덤에 경의를 표하지만 …” <영진공 71호>

상벌위원회
2007년 3월 27일

짧고 굵게 사는게 인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이
굵지도 못하고 길게 살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죽기 살기로 싸우면 길이보인다
배수의 진을 치고 앞만 보고 간다
우리는 명예를 위해 살아간다.

글쎄요 정말 그게 진리 일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화이트 데이에 300을 보았습니다.
지난주 금주 미국 박스 오피스 일위의 영화이지만 평일의 저녁은 그다지 관객으로 붐비지 않습니다. 대형 스크린에 600명 정도의 객석은 3분의 1정도만 차있습니다.

프랭크 밀러의 신시티에 감동받고 300의 예고편 및 반지의 제왕을 능가할거라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리고 미국만화 별로여서 원작은 보지 않고 영화만 보았습니다.

박스 오피스 일위를 하였지만 화려한 CG와 수많은 대군의 모습들 실감나는 전투신들 몸과 창검으로만 싸우는 장면 장면들은 감탄 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반지의 제왕을 능가하는 스토리 라인이니
구성이니 이런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긴 전략과 전술이 필요한 대군들의 전투가 아님 300대 몇십만의 전투를 그리자니 접근전 위주의 격투신에 중점을 두었지만,
이또한 오히려 슬로우 모션의 남발이나 팍팍 잘려져 나가는 몸통등의 구성등, 어떻게 보면 글라디에이터의 전투신을 확장해서 70년대
일본 사무라이 영화들 그리고 80년대 오우삼 감독등의 홍콩느와르의 기법을 차용한거에 불과한 느낌이 팍팍팍 들기도 합니다.
헐리우드가 변방이라고 무시했던 제삼국들의 옛 영화기법들이 차용되고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 기법에 자극받는
돌고도는 그런 느낌이였습니다.

게다가 복장들도 오히려 닌자들이라고 하면 맞을것 같은 마지막 전투신들의 선봉대들 그리고 그리고 페르시아의 군대에 스트리트 오브
파이트의 게임에서 나온 듯한 특수 캐릭터들을 보면 이거 만든 사람 일본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평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본 영화가 사실적으로 만화의 캐릭터를 재현 했다고 하니 프랭크 밀러의 만화가 일본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밖에
없겠네요.

볼만 한 영화는 영화 입니다만. 반지의 제왕과도 글라디에이터에도 심지어는 작년에 나온 킹덤오브 헤븐과 비교해도 좀 떨어지는
영화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임에도 미국에서는 현재 대박을 터트리고 있으니 역시 동양인과
서양인의 정서는 좀 다른가 싶습니다. 아님 제 취향이 미국인들과는 좀 다를지도 모르지요.

하여간 제게는 짜집기의 느낌이 강한 이미지로 다가 왔습니다. 300을 보다가 생각난 영화들로는
글라디 에이터, 반지의 제왕, 영웅본색, 7인의 사무라이, 동방불패, 이오지마에서의 편지, 황후화, 아기를 업은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 그리고 킬빌. 별영화를 다 같다가 붙인다고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제게는 잘 만든 장편 패러디 대하 서사극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막없이 보는 영화라 많은 대사들을 놓치고 있었지만 보면 볼 수록 불편해 지기 시작 했습니다. 작년에 리들리 스콧의 킹덤 오브 헤븐이 생각나면서는 점점 더 불쾌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서양인들의 동양인들에 대한 무시가 기분 나빠졌습니다. 스파르타와 페르시아가 붙었던 그시기에 사실 모든 선진 문명은
아시아에서 나왔습니다. 물론 중동 아시아를 아시아라고 해야 하지만 그리고 우리가 배운 스파르타의 민주주의도 사실은 귀족주의라고
할 수 있고 하여간 스파르타는 선진국이고 페르시아는 쪽수만 믿고 문명을 부수어 버리려는 야만인으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그들이
데리고온 대군들과 괴물들도 꼭 몇십년전 서부영화의 문명인 백인과 야만괴물 인디안의 구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실 영화에서 적들의 시체로 방어벽을 쌓거나 하는 등등에서 피차 잔인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노예보다는 죽음을 등등의 대사들에서 감동을 먹을 수 있겠지만 많은 대사의 말투가 너희같은 미개인들이
우리같은 문명국을 넘보다니 라는 투의 선민의식은 좀 그렇습니다. 스파르타의 용맹과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였지만 만화라는
장르에서 그리고 프랭크 밀러의 원작들이 그러니 할 수 없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스파르타는 선이고 페르시아는 악인이고 미개
야만이라는 설정들은 영화 곧곧에 산재하고 그러함이 서양인이 아닌 저에게는 불편함을 발산 합니다.

액션영화야 그냥 액션으로 재미있게 보면 어떠냐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불과 몇년전 많은 분들이 불쾌하다고 했던 007의 북한처럼 중동 사람들이 보면 참 기분 나쁠법도 합니다.

그런의미에서 300은 볼거리와 CG로 흥행에야 성공하겠지만 서양에 사는 사람들 이외에는 참 불편지도 모르는 그런 영화입니다.

20자평:너무 장엄하고 자기들은 너무 존귀하다, 별 세개반

시와 함께 느껴보는 영화 이야기
클린트

<300>, “어무나. 늬들 넘 웃긴거 아니니.” <영진공 71호>

공연윤리위원회
2007년 3월 23일

회식때 영화를 보게 되서 (팀원들이 술을 안하다 보니 회식 문화가 이런 식으로 점점 바뀌고 있다. 어찌보면 전사적인 추세이기도
하고), 팀장님의 강력한 추천으로 300을 봤다. 난 스파트라랑 페르시아랑 싸우는 영화라길래 ‘글래디에이터’, ‘트로이’분위기를
기대하고 봤는데, 보는 내내 ‘씬 씨티(Sin City)’생각 나더라고. 집에와서 찾아봤더니 감독은 다른데, 원작자가 같더라.

이런 영화보면서 ‘인종 차별’이니, ‘장애인 차별’이니, ‘성 차별’이니 정치적 올바름을 같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건 그 자체로
황당무계한 생각이니까 그냥 넘어가고. 비주얼과 만화적 잔인함과 액션으로 승부하는 영화라면, 그것만으로 평가를 해 줘야 하는데.
어쩌니. “300”은 그 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갑빠 좋은 남성들 몸매보는 거야. 한 두명이면 족하지 300명씩 나와서
설쳐대는데. 계속 보다보면 그냥 빨래판에 다름 아니고.
화살 무쟈게 날아오는 건 그나마 좋아하지도 않는 ‘영웅’같은
영화에서 우리 연걸이 오빠가 맞아주던거잖아. 똥그란 방패 촬촬촬 돌아가는 것에서도 80년대 홍콩영화 생각나던데(정확히 무슨
영화인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음. 버디님 혹시 아시면 알려주시기 바람). 것도 2000년대 판으로 세련되게 만든게 아니라
改惡이 되어버린 판으로 말이지. 피 철철 내 주고 카메라 뺑뺑 돌려준다고 해서 멋진 비주얼은 절대 아니었단거.
게다가 코끼리용사, 코뿔소 용사, 게용사 나올 때는 데굴데굴 웃다가 굴러버렸잖아.
어무나. 얘… 늬들 넘 웃긴거 아니니.

근데, 이거 미국 국정홍보처에서 만든 영화 아닐까? 아… 물론 페르시아 입장에서 만든거.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기개가
좋더라도, 강대국에 아무리 개겨봐야 너만 손해입니다.” 이러면서 이거 제 3국에 풀어가지고 우리 위협하는 영화 아니냐고?
아… 내가 자격지심이라고? 그런 생각도 든다.
근데 보면서 베트남전 생각도 간간히 나더라고 그 엄청난 병력과 물량공세 가지고 300명의 게릴라전 앞에서 엄청나게 손실을 입잖아. 술탄이 중제자로 나서야 할 만큼 말이지. 게릴라들한테 당한 미국 짝으로 보이더라고.

암튼… 이런거나 보다니. 난 시간이 아깝더라고.

공연윤리위원회 상임간사
라이(ley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