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장준혁, 박정희를 존경하며” <영진공 71호>

구국의 소리
2007년 4월 5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얀거탑>의 장준혁
영화 <삼백300>의 레오니다스와 299명
그리고 박정희….

모두 극적으로 죽었기에 기억되는 인간들이다.
생전에 그들의 행적이 죽음으로써 용서되고 되려 신격화 되는…

이들이 계속 살아있었으면 지금처럼 칭송받을까. 결코 아니지.

하지만 이들을 떠받드는 영화를 만들거나 감상하는 것은 나름 괜찮은 일이다.
적어도 이전에 보아왔던 ‘희생양 영화’들에 비해서는 말이다.

영화 <파이란>을 보자. 구제불능깡패 강재는 파이란의 죽음 앞에서 개심한다.
<파송송 계란 탁> 에서도 철없고 한심하던 주인공은 아들의 죽음 앞에서 어른이 된다.
곧 개봉할 것 같은 <눈부신 날에>에서 박신양도 순수한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
모두 탕자의 구원을 위해서 누군가 희생되어야 하는 희생양 영화들이다.

이 반복되는 신파도 짜증나지만, 그 뒤에 숨은 논리는 무섭기까지 하다.

어떤 악한이 순수한 어린양의 희생 앞에서 개심한다는 이야기를 뒤집으면, 힘쎄고 악독한 자들이 계속 악독한 이유는 그들을 의해서 희생할 순수한 어린양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일단 니가 죽어바. 그럼 내가 좀 생각 바꿔볼께… 그렇다고 꼭 바꾼다는 보장은 없어.”
뭐 이딴 식이 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난 절대 굽힐 생각 없어. 이대로 장렬하게 죽을래!”
라며 죽음을 맞이한 위의 세 주인공들은 나름 정직하고 줏대도 있고 책임의식 마저 있다.

따라서 나 역시 이들을 깊이 존경하고 한 수 높이 쳐주려고 한다.

앞으로 이런 신념에 찬 인간들은 존경할 것이다.
그가 악질 파쇼든, 변태든, 정신병자든, 뭐든지 상관없다.

그리고 그들을 칭송하는 영화도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하련다.

단, 그들이 확실히 죽은 다음에.

이제 곧 구국의 소리에 책상 하나 놓으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장
짱가(jjanga@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