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래트럴”, Hands of Time


 


 


 


 



 


2004년 개봉 영화 “콜래트럴”(Collateral),


마이클 만 감독의 수작 중 하나인 이 영화에는 톰 크루즈와 제이미 폭스,


그리고 제이다 핀켓 스미스 외 재능있는 조연들이 열연을 펼친다.


 


이 영화에는 영화 못지않게 멋진 노래가 삽입되어있는데,


영화의 초반부, Annie(제이다 핀켓 스미스)가 Max(제이미 폭스)의 택시를 타고 사무실로 가는 장면에서 나온다.

L.A.의 밤 거리,
옅은 안개가 낀 듯 우울한 그 거리 여기저기,
높이 솟아있는 빌딩들에서는 불빛이 반짝이는데,
그 사이를 Max의 택시가 달린다.
그리고 흐르는 노래 …

“Hands of Time”

London 출신의 2인조 그룹, Groove Armada의 2003 년 앨범 “Love Box”에 수록되어있는 이 곡, Richie Havens가 피쳐링으로 참여한 이 노래가 문득 듣고 싶어졌다. 


 



 






 


 







 


 



Hands of Time



Groove Armada


Keep looking through the window pane
Just trying to see through the pouring rain
It’s hearing your name, hearing your name
I never really felt quite the same,
Since I’ve lost what I had to gain
No one to blame, no one to blame
Seems to me, can’t turn back the hands of time
Oh it seems to me, can’t back the hands of time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다보고 있네,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그 너머를 보고자 하네,
당신의 이름이 들려와 … 당신의 이름이 들리는듯 하네 …
내가 가져야만 했던 것을 잃은 이후로,
진정 이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네,


아무도 탓 할 수 없지, 누구도 탓 할 수 없네,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아,
아, 정녕 시간을 되돌릴 수가 없네.



Seems to me, can’t turn back the hands of time
Oh it seems to me, can’t turn back the hands of time
Seems to me, history was left behind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아,
아, 정녕 시간을 되돌릴 수가 없네.
모든 것이 이젠 과거로 남겨지고 말았네.


 


 


 


 


영진공 이규훈


 


 


 


 


 


 


 


 


 


 


 


 


 


 


 


 


 


 


 


 


 


 


 


 


 


 


 


 


 


 


 


 


 


 


 


 


 

“솔로이스트”, 당신의 솔로는 오늘도 무사합니까?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말이 있다.
뻔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 명제가 항상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조직사회나 팀스포츠에서 개개인을 어떤 틀이나 목표에 묶어서 조련을 하고 독려를 하면 그 개인 각각의 역량을 합친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결과를 얻어낼 수 있겠지만 반면에 그 틀이 엉성하거나 감독의 방식이 그르면 오히려 결과는 매우 허접해지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보면 저 말은 그렇다라는게 아니라 그래야한다라는 말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부분의 합보다 큰 전체의 속내를 보면 그 안의 부분들이 고르게 더 나은 결과를 내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단위는 역량보다 몇 배 뛰어난 결과를 내놓기도 하고 어떤 단위는 역량에 근접하는 결과를 내놓기도 하며 또 어떤 단위는 아예 결과를 깎아먹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같은 틀 안에 있으면서도 어떤 단위는 슈퍼스타가 되고 어떤 단위는 소위 “Loser”가 되는 것이다.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그닥 차이가 없어보이는데도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걸까.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많이 다른 단위들을 하나의 틀에 넣어 일정한 목표를 향해 매진하다보면 모든 단위에게 어느 정도의 획일성과 몰개성이 요구되기 마련인데, 이를 잘 받아들이면서 훌쩍 뛰어 넘으면 슈퍼스타가 될 터이고 그저 받아들이기에 급급하면 필요하지만 눈에는 띄지 않는 단위가 될 터이며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루저가 될 터이다.

루저를 지나쳐서 아예 탈락자가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 중에서도 개별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저 섞이지 못하거나 섞임을 견디지 못해서 그리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개별의 능력이 부족함에도 전체에 어떤 형태로든 과다밀착하여 마땅한 것보다 더 큰 이득을 챙기는 경우도 또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체라는 틀을 견디지 못해 탈락하는 이들은 그저 못난이에 불과한 것일까.
그게 그렇지만도 않은게, 전체 속의 유용한 부분으로 기능하는 것에 서투른 이도 홀로 무언가를 만들고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매우 뛰어난 경우가 많이 있다. 역사를 살펴보거나 아니면 그저 주변을 슬쩍 둘러보아도 그런 예는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이쯤되면 전체와 부분을 구분한다는게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전체 속에서 훌륭히 기능하는 단위는 따지고 보자면 유능한 Soloist인 것이고, 전체라는 틀을 견디지 못하는 Soloist도 그에게 맞는 전체가 주어지면 또한 훌륭한 단위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주인공 나다니엘 (제이미 폭스 분)에 대해서 국내 홍보문구는 “삶의 길을 잃어버린 천재 음악가”로 써놓았는데, 사실 영화 속 내용에서는 나다니엘을 천재라고 묘사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의 선생님이 그의 어머니에게 자기가 본 아이 중 가장 재능있다고 한 부분이 나올 뿐이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홍보태그도 “Nathaniel Ayers had lost his way. He was about to get a second chance. (삶의 길을 잃은 나다니엘, 두 번째 기회를 얻으려하다.)”라고 돼있다.

여하튼 첼로연주에 재능을 가진 나다니엘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당시 인종차별이 심각했던 미국의 세상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애써 무관심한채 오로지 밤이고 낮이고 첼로에 몰두하였고 ‘홀로’ 연습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음악계의 재능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걸로 유명한 줄리어드 스쿨에 입학하게 된다.  허나 그 순간부터 나다니엘은 길을 잃기 시작한다. 재능있기로는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동료들과 함께 수업을 들으면서 그는 함께 연주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결국에는 정신건강의 문제가 겹치면서 낙오를 하고야 만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거리의 부랑자로 살아가던 나다니엘은 우연히 유명 신문 칼럼니스트 스티브(로버트 다우니 쥬니어)의 눈에 띄게 되고, 첼로를 연주하는 부랑자라는 점에 끌린 스티브는 나다니엘을 정상(?)의 삶으로 끌어올리고자 애쓰게 된다.

최소한의 주거 공간과 생활환경을 제공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유명 지휘자와 종교인 등에게 소개를 시키고 후원을 부탁하는 등 스티브는 나름의 최선을 다해 나다니엘을 정상인, 아니 그 이상의 훌륭한 연주가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스티브가 그리는 그림일 뿐이었고, 나다니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겠다고 발벗고 나선 이들 누구도 정작 나다니엘의 입장에서 상황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애초에 나다니엘이 견뎌내지 못했던, 그래서 벗어나야만 했던 틀과 유사한 틀을 다시 씌워주려 했을 뿐이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여러가지로 다르게 다시 해도 무방하다. “절이 싫으면 뜯어 고쳐라”, “절이 싫으면 사람들을 모아 새 절을 만들라”, “절이 싫으면 힘을 길러 주인이 되어라”, “절이 좋으면 사람들이 더 모이게 애쓰라” 등등 ……

하나의 절이라는 전체가 훌륭한 각 구성 부분들이 합쳐져서 그렇게 좋아진 것 만큼이나, 각각의 구성 부분을 전체로 잘 아우를 수 있어야 좋은 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여 전체와 부분은 긍정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전체를 위해 부분이 과도하게 희생하거나 일부가 전체인양 모든 걸 좌지우지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굳이 말로 다시 쓸 필요가 없겠다. 그러니 절이 싫으면 떠나야 할 것이 아니라 전체 틀이 잘못되었는지 또는 구성 부분이 문제가 있어서인지를 잘 가려서 그에 따라 대처하면 될 터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잘 안된다는 데에 있다. 보통 부분은 전체에 비해 힘이 턱없이 적고 여러 부분들이 힘을 합쳐도 기존의 전체와 맞선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중들이 떠나고 만다.

오늘도 나의 솔로는 경계선에서 연주되고 있다. 내가 속한 전체의 중간 쯤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동시에 그 전체의 문제점에 대해  적절히 분노하려고 한다. 월등히 뛰어난 솔로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형편없이 초라한 연주도 아니다. 이런 솔로는 매우 많아서 보통 다른 이들의 연주와 뒤섞여 그냥 퉁쳐서 한묶음으로 들린다. 참 피곤하면서 티도 안나는 솔로다.

월등히 뛰어난 솔로들 중에도 어느 하나는 전체를 이끄는 한편, 어느 솔로는 전체와 동떨어져서 홀로 연주하곤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퉁쳐서 한묶음 속에서 연주하면서 거기에서도 나서보겠다고 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그 속에서 연주도 안하고 놀면서 묻어가려고 한다. 이 중에 어느게 좋은 건지, 맞는 건지는 당연히 각자의 입장과 생각에 따라 달라질 터이지만.

자, 당신의 솔로는 어떠하신지. 오늘도 무사히 그럴듯하게 연주되고 있나요.


영진공 이규훈

“모범시민”, 복수극도 아니고 정치극도 아니고 넌 뭐냐???


영화 “모범시민”의 원제는 “Law Abiding Citizen”, 즉 준법 시민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해석이 ‘모범’이든 ‘준법’이든 그게 그거 아니냐고 볼 수 있지만,


이 영화가 법을 지키며 사는 소박한 시민들의 권리가 되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법의 틈새를 이용해 심판을 모면하는 범죄자들과 법을 이득과 출세의 도구로 삼는 집행자들을 처단하는 내용으로 전개되기에 ‘준법’이 더 어울리는 제목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공간적 배경이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헌법이 작성된 그 곳, 허나 20세기 초에는 부패의 상징으로도 불리던 도시 필라델피아인 점도 이 영화가 헌법의 기본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애쓰는 걸로 보인다.  


예고편을 보았을 때는 거대한 액션신이 연신 터져나오는 치밀하고 후련한 복수극이라고 잔뜩 기대를 하였지만 … 실제 영화는 그것과는 무척 거리가 멀고도 멀다.

영화의 주인공 클라이드는 미국 사법집행시스템의 변질과 불합리성에 맞서 싸우고자 10년을 준비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는 사실 미국의 사법체계에 대해서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체계를 정상적으로 작동시키고자 그리 한 것이다.

스스로가 변론에서도 얘기하듯 그는 자신을 “준법 시민(Law Abiding Citizen)”이라고 알고 있고, 또 그가 자신에게는 변질된 사법집행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지방검사 닉에 대해서 품은 회한도 결국은 왜 기존의 시스템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고 제멋대로 재단하여 뒤틀었는가라는 정도일 뿐이다.

그래서 클라이드는 닉에게 … 왜 있는 그대로 법정에서 다투지 않았는가 … 그랬다면 그 결과가 비록 바람직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받아들였을 것이다 … 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클라이드는 자신의 행위는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잘못된 사법집행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자 함이라고 줄곧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그 아젠다를 전파하기 위해 시위나 정치참여 또는 숭고한 희생을 택한 것이 아니라 … 당한 대로 갚아주리라, 그러면 너희들이 배우리라 … 라는 폭력과 살인이 동반되는 방식을 택한다.

그래서 그 대상이 부패한 권력이나 질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대 범죄집단도 아닌,
자신에게 직접 피해를 입힌 범죄자와  – 그 죄질은 몇 번 죽어도 동정 받지 못할 추악한 것이다 – 조력자 그리고 그 범죄를 처벌하는 시늉을 한 법집행자로 한정되어지면서 좀체로 다른 대상으로 그 방식을 적용시키기 곤란해진다.

결국 클라이드의 행위는 그가 내세우는 아젠다와는 맞지 않게 개인적인 복수극으로 귀결되어버리고 말며, 그가 벌이는 복수극이 나름의 정당성을 잃고 복수의 대상이 직접 당사자를 넘어서 시스템 집행의 상층부로 확대되려는 순간에 그는 제지를 당하고 영화는 서둘러 마무리된다.

“불합리한 세상을 향한 통쾌한 복수가 시작된다!”라는 문구로 홍보되고있는 이 영화.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주인공의 복수는 불합리한 세상을 향하지 못하고 복수마저도 “통쾌”하지를 않다.

추악하고 간교한 거대 범죄자에 맞서는 평범한 시민의 복수극을 다룬 영화는 많다. 그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주인공에게 동화되고 몰입하여, 마침내 악인이 피흘리며 쓰러질 때 자신도 모르게 희열을 맛보게 된다. 현실에서 그리할 수는 없지만 영화라는 대리 경험을 통해 통쾌함 또는 후련함을 느끼는 것이다.

뒤틀리고 부패한 시스템에 대해 폭로하고 경고하는 정치 영화 또한 많다. 이런 영화를 통해 관객들은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왜 그리 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바로 잡을 수 있는지를 누군가는 짧게 누군가는 깊고 길게 고민해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도저도 아니다. 범법자가 심판을 받아도 그게 최종 목적이 아니기에 관객은 후련함을 느끼기 힘들고, 그렇다고 미국 사법현실에 존재하는 커다란 문제점을 까발려 타격하는 것도 아니니 … 그냥 어정쩡한 거다.

그렇다고 감독의 목을 조르면 안되지 ...

하나 더 짚어보자면, 무려 10년을 철저히 준비해 온 암살전문 전략가의 전술과 실행과정이 어찌 그리 허술한 건지,

뭐 이해는 간다. 주인공이 복수와 아젠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으니 여타의 액션영화들처럼 아무렇게나 거리낌 없이 때려 부수거나 쓰러뜨릴 수가 없어서 호쾌한 액션신이 나올 구석이 없을게다. 그래도 10년을 준비한 전문가의 행위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엉성하다.

영진공 이규훈

“콜래트럴(2004)”, LA 자체가 주인공인 영화

 

“톰 크루즈”가 처음으로 악당 역할을 맡았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던 영화 『콜래트럴』의 진짜 주인공은, 사실 반백의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고급 수트를 입은 쿨한 살인 청부업자 “톰 크루즈”도, 약간의 결벽증을 가진 성실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소중히 간직하고(만) 있는 택시기사 “제이미 폭스”도 아니다. 그것은, 인구 삼백만이 넘는 거대한 메트로폴리스 LA 그 자체이다. “톰 크루즈”의 냉소적인 대사에 의하면 LA는 지하철 역에 사람이 죽어도 6시간이나 방치가 되어서야 발견이 되는 도시다. 옆에서 누가 죽어나가도 모르는 비정한 도시고, 총을 맞아 죽어도 여간해선 범인을 잡을 수 없다. 검찰청 건물은 심지어 옆에 있는 철제 쓰레기통을 집어던져도 깨지지 않은 강화유리로 문을 달아놓았고, 거대하게 위로 솟은 건물 사이의 인간은 그저 개미 한 마리 정도로만 보인다. 그러니 살인 청부업자가 유유히 활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인 건 당연한 일이다.


언제나 도시들의 공통된 특성이긴 하지만 LA는 특히나 이민자들이 많은 도시다. 서유럽계 백인들마저 실은 이민자(혹은 침략자)들의 후손이니, 이탈리아계(같은 백인임에도!)나 멕시코 및 중남미계와 아시아인들만을 이민자 혹은 이민자의 후손으로 부르는 것은 언어도단이긴 하지만, 서유럽 출신의 백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40%가 채 안 되는, 그런 도시다. 이제껏 LA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다수의 백인과 끼워주기 식의 (주로 악당 전문) 히스패닉 혹은 이탈리아 계열, 그리고 가뭄에 콩 날 정도로 아시아인을 등장시켰던 건, 그러니까 몽땅 구라인 셈이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서유럽계 백인으로 ‘거의 유일하게’ “톰 크루즈”가 등장하는 것이, 실제 LA의 현실에 가깝다. 특히 한국 관객들을 웃게 만든, 영화 곳곳의 한글 간판들은, 사실은 이제까지 LA를 배경으로 한 백인 감독들의 영화가 인종적 편견에서 의도적/무의도적으로 무시해온, LA의 확실한 구성 요소이다.


정말이지, 이 영화의 LA가 보여주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흑인이거나, 이탈리아 계 혹은 히스패닉계이다. 첫 등장 순간 양아치일 거라고 대부분의 관객의 오해를 받는 패닝 형사는 상징적인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이제껏 범죄물에서 취해온 형식, 그러니까 백인 남녀 커플 주인공과 흑인의 침입자, 다수의 백인 주변인물이라는 구도를, 이 영화는 정확히 반대로 뒤집고 있다. “톰 크루즈”야말로 이 도시에 흘러들어온 낯선 침입자이자 도저히 LA라는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이며, 이 영화에서 카메라의 주목을 받는 거의 유일한 서유럽계 백인이다. 그렇기에 그는 택시에 가방을 두고 내리고, 택시기사의 삶에 간섭을 하고(심지어 문병을 간다), 가방을 병실 바닥에 내려놓은 채 움직이는 안이함을 보이며, 직업적 살인 청부업자이면서도 아무리 사고 직후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노트북과 메모리 자료를 사고차량 안에 그대로 놓은 채 자취를 감춘다.


환락과 타락의 도시, 살인과 강도와 각종 범죄와, 토박이보다 뜨내기와 밖에서 유입된 유동인구가 훨씬 많은 도시 LA. 뉴욕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라 하더라도, 뉴욕과 LA에 대한 미국 바깥 사람들의 이미지가 극과 극을 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간 I Love NY을 외치는 수많은 영화들을 봐왔고, 정말 아무 특징 없이 시끄럽기만 한 도시인 LA 영화를 많이 봐왔지만, 조금 더 속살을 드러낸 LA를 그리는 이 영화가 처음인 듯. 영화 내내, “톰 크루즈”는 제이미 폭스에게 다음 목적지를 (당연하지만, 구체적인 거리와 장소의 이름까지) 일러주고 “제이미 폭스”의 택시(와 영화제작진의 카메라)가 그곳을 향해 가면서, 우리는 일반적인 관광안내 엽서가 보여주는 LA의 광경이 아닌, 뒷골목과 좀더 현실적인 장소들로 이루어진 조금 특이한 아이템으로 구성된 LA 관광을 하게 된다.


<콜래트럴 예고편>

그 거대한 과잉인구의 도시에서, 소외되고 고독한 현대인이라는 모티브가 상반된 직업과 배경을 가진 두 남자의 ‘적과의 동침’ 모드의 플롯을 통해 “심리적 대결”이라는 스토리를 취하며 갈등이 증폭된다. 현란한 비주얼과 액션의 ‘보이는 스펙터클’ 대신, 캐릭터 간 대결과 변화라는 ‘보이지 않는 스펙터클’을 취한 이 영화는 그래서, 영화 중간중간 코믹한 지점들마저 웃음과 함께 묘한 무게를 얻으며, 지구 반대편 인구 천만의 도시에 살고 있는 동양인에게도 정서적 동질감을 얻어낸다. 범죄물 중에서도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이런 타입의 영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인 캐릭터의 확실한 구축과 캐릭터 간 갈등과 변화의 완급과 조절을, “마이클 만”은 매우 능숙하게 다루면서 정확한 포인트를 집어내어 증폭시키고 있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매우 훌륭하다. 톰 크루즈는 충분히 수긍 가는 살인 청부업자이며, 매우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제이미 폭스” 역시 신뢰감을 준다.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음악도 매우 좋다. 각본가이기도 했던 “마이클 만” 감독과 그는 LA를 상징하는 음악으로 ‘재즈’를 설정했고, 이는 한인타운의 피버 클럽 씬을 제외한 영화 전반을 관통한다. “톰 크루즈”의 재즈에 대한 취향은 일종의 조크인 듯. 흑인들의 음악이 어느새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이 되고, 그 이후엔 흑인들보다 백인들에게 주로 소비되는 사회적 현상을 단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지만, 역시나 외부의 이방인으로서, “LA에서는 아무도 듣지 않을 것 같은” 재즈에 대한 취향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씬은 그 자체로 충분히 유머러스하기 때문에.


<영화 삽입곡 “Hands Of Time (By Groove Amada with Richie Havens)>


영진공 노바리

마이애미 바이스 (Miami Vice, 2006), “몹씨나 액쑌적인 멜로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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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는 그 이름만으로 품질 보증수표나 다름 없다는 생각이다. <라스트 모히칸>을 시작으로 <히트>, <인사이더>, <알리>, 첫번째 HD 영화였던 <콜래트럴>까지 일관된 스타일과 완성도를 보여준다. 스케일이 큰 액션 영화에 강점을 보인다는 점에서 리들리 & 토니 스콧 감독과 유사하지만 <인사이더>와 <알리>는 마이클 만 감독의 궁극적인 지향점과 차별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TV 연출자 시절 자신의 히트작의 영화 버전인 <마이애미 바이스>는 그러나 TV 시리즈물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여전히 마이애미가 중심이긴 하지만 사실상 ‘월드 와이드 바이스’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로케이션 스케일이 방대하면서도 돈 존슨의 하얀색 여름 양복과 여유 있는 미소 같은 건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한마디로 ‘마이클 만 감독이 정색을 하고 만든 ‘몹씨 액쑌 영화’가 <마이애미 바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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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액션 이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콜린 패럴과 공리의 멜러 부분이었는데, 이로 인해 마이클 만의 필모그래피에서 <마이애미 바이스>와 가장 유사한 영화로 <라스트 모히칸>과 <히트>를 꼽아야지 싶다. 다시 말하자면 <마이애미 바이스>는 마이클 만의 가장 성공한 장르 영화의 컨벤션을 최대한 답습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시도는 매우 환영할 만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콜래트럴>과 마찬가지로 필름이 아닌 HD 영화라는 부분이다. HD 촬영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마이클 만 영화의 전작들에서 얻을 수 있었던 시각적 충일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마이애미 바이스>를 보는 동안 여러 장면에서 ‘저게 그림이 필름이었더라면’하는 아쉬움을 곱씹을 수 밖에 없었다.

전체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들,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는 일일히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훌륭하다. 일부 대중적인 장르 영화의 컨벤션은 충분히 눈감아줄만 한 수준인데 딱 한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리와 콜린 패럴을 바라보는 ‘질투의 눈물 글썽임’과 그것으로 뭔가를 설명하려 했던 부분은 좀 불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공리는 <2046>에서 장즈이의 열연을 무색케 했던 그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생각된다. <마이애미 바이스>는 공리와 콜린 패럴의 케미스트리가 뿜는 설득력으로 인해 ‘몹씨 액쑌 멜로’ 영화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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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