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두비”(2009), 메시지와 주제 사이의 균형감이 아쉬운 영화

반두비

뚱한 표정이 민서의 매력

신동일 감독은 참 운이 없다. 데뷔작을 포함해 그의 첫 두 영화는 모두 투자사와 배급사간 ‘자본’끼리의 이런저런 갈등과
사정 때문에 영화를 다 만들어놓고도 개봉이 한정없이 미뤄졌다가 가까스로 뒤늦게 소규모로 개봉했다. 제작위원회를 구성하여 저예산
독립영화 제작방식을 택함으로써 자본의 문제를 해결해 세 번째 영화를 찍어놨더니, 이제는 정치의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청소년 모방 위험’을 이유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아 개봉 전부터 영화 외적인 것으로
스캔들의 주인공이 돼버린 것이다. 영화를 지지하든 안 하든, 10대를 위해 만든 영화가 도리어 10대들이 볼 수 없도록 금지를
당했다.

딱히 눈에 띌 만한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없는데도 이러한 등급을 받은 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가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얼마나
‘불온한’ 영화인지 반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우려된 ‘청소년 모방 위험’의 타겟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하나는 모두가 짐작하는 바로 그 이유, 그러니까 현직 대통령을 향한 직설적인 조롱과 비난, 그리고 또
하나는 이주노동자와의 연애, 그것도 ‘까만 피부’를 지닌 이주노동자와 ‘성적인 텐션이 분명히 존재하는’ 연애다. 그리고 이
영화가 진정으로 불온한 것은 바로 후자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온함은 다시, 한국사회의 위선적인 허위의식을 고스란히
폭로한다.

재미있는 것은 감독이 이 위선적인 허위의식을 이미 영화 내에서 그대로 까발렸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민서(백진희)가 자신의 담임 선생님과 딱 마주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방문자>의 주연 김재록이 이 난감한 담임
선생님을 참 애처롭게 연기한다. 너무나 애처로워서 더욱 코믹하다.) 이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위력적인 장면이자,
남자어른들에게 가장 무시무시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10대의 성을 끝없이 터부시하면서 특히 10대 여성에게
‘순결하고도 무성적인 존재’로 있을 것을 강요하지만, 정작 막 10대를 벗어난 가장 젊은 여성들의 성을 가장 더럽고 치졸한
방식으로 착취하는 경향이 있다. 10대 청소년들이 성매매 시장으로 유입되는 것도 바로 이 틈새다. 게다가 그들은 ‘어리다고’
각광을 받으면서도 ‘불법’이라는 이유로 착취를 당하는 이중적 모순에 놓이곤 한다.) 담임 선생님 씬이 그토록 위력적이고 코믹한
것도 바로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현실이 고스란히 폭로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소위 ‘통제되어야 할’ 여성의 성이 ‘민족의 범위를 벗어난’ 남자들, 특히 가난한 외국 출신 남자들과 엮일 때 한국
남성들의 분노는 폭발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인터넷에는 이 영화를 공격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공격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영화는
민서와 카림(마붑 알엄) 사이의 성적인 텐션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민서는 카림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한국사회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방식, 즉 ‘(여성 착취적인) 봉사의 의미의’ 성적인 접촉을 시도한다. 이 영화가 다른 의미에서
‘선정적인’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즉, 이 영화가 선정적이라면 그것은 성을 다루거나 묘사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한국사회가 성, 특히 10대 여성의 성을 다루는 방식의 위선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인 남성들이 가장 터부시하고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에서 건드려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적 외피를 두른 채.
이것의 결과가 바로 현실 층위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인 셈이다. 영화의 허구적 층위에서 이미 고발된 아이러니와 모순이
현실의 층위에서 고스란히 반복을 통해 재현된다.

반두비

본국의 어린 여성과 이주노동자 유부남 남성의 자연스러운 신체접촉은,

한국의 남자어른들에겐 불편한 악몽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저 성적인 접촉의 장면이 여성, 특히 주인공인 10대 여성의 성적 주체성이나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고
보기에도 모호한 지점이 있다. 영화 전체적으로 민서를 생동감있게 해주는 것은 그녀가 어떤 일관된 사고나 가치관에 따라 숙고하고
행동한다기보다 거의 즉물적인 욕구와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라는 바로 그 지점에 있지만, 이 특징은 민서라는
캐릭터를 ‘알 거 다 아는 척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모순의 존재로 묶어둔다. 그녀는 유사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며
남성의 성적 욕구에 대해 잘 알고있는 듯 말하고 행동하지만 오히려 성에 대해 무지한 어린아이같은 존재다. 그녀가 카림에게 성적인
접촉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어떤 ‘난감한 천진함’이 포착되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성적인 행위의 생물학적인 ‘조건반사’
과정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 그 행위가 지닌 다층적 층위에서의 사적, 사회적,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단적인
근거가 어머니의 남자친구인 기홍(박혁권)에 대한 무조건적 적대다. 그녀는 어머니와 기홍 사이를 전적으로 ‘동물적인 성적 행위만
존재하는 관계’로 여기며 혐오감만 드러낼 뿐, 그 관계에 있을 다른 정서적 교감이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는 결코 이해는커녕
짐작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장면에서 민서의 행위는 오히려 사회가 여성의 성을 다루는 하나의 방식에 대해 그 외형을
그저 흉내내는 것일 뿐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녀가 그 의미들을 (새삼) 깨닫고 자신의 주체성 하에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은 영화 막바지에나 나오는 키스씬이다.

이 영화의 수상하고 기묘한 모순도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나는 <반두비>의 민서 캐릭터가 살아 생동하는 10대
여성을 그렸다기보다는, 386 지식인 남성이 ‘촛불소녀’에게 투영한 이상형을 그려낸 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허남웅 기자가 지적한 대로(새 창으로 열기),
‘감독의 이상을 뻣뻣하게 구현한’ 또 다른 의미에서의 모범생 로봇이라는 것이다. 사실 ‘촛불소녀’에 대한 386들의 기대가 과연
무엇인지 이 영화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영화도 또 없다. 카림의 월급을 떼어먹은 사장의 집에서 민서가 난동을 벌이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그녀는 말하자면 386 남성 지식인들이 ‘어른’이기에 대놓고 하지 못하는 일련의 체면구길 제멋대로의 행동과 거침없는
말들을 ‘어린 여자’라는 방패 하나로 대신 질러줄 수 있는 존재다. 혹은 동년배들의 혐오어린 시선이나 비난엔 끄떡도 않을 남성
어른의 위선을 대신 콕 찝어 폭로하고 수치를 안겨주어 윤리적 각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이거나. 민서가 남성의 욕망을 잘
알면서도 완전히 무지한 모순을 갖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이와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감독이 민서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오히려
“그녀는 매혹적인 존재이지만 결코 구체적인 성적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 읽힌다. 바라보는 자가 자신과 다른 이의
시선 모두를 애초부터 억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성적으로 완전히 무지한 천진한 존재고, 그러면서도 남성의 욕망을
꿰뚫어본다고 가정된 존재다. 어쩌면 이와 같은 메커니즘은 소위 ‘국민여동생’ 문근영을 향한 팬덤이 보여준 어떤 현상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녀는 성적으로 매력이 있으되 결코 그녀 자신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알아선 안 된다. 그녀를 보는 ‘나’는
그녀에게 성적인 매혹을 느끼되 그것을 성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건 절대로 안 된다. ‘내’가 할 수 없으므로 다른
이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건 죄다. 그러므로 그녀는 순결한 누이가 되어야 한다. 그녀와 성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건 외부의
타자뿐이거나 이 모든 소소한 서민들을 뛰어넘는 절대적으로 우월한 자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매혹은 사라지거나, 여전히
원존재의 상태로 봉인될 것이다 …

반두비

식사장면의 중요성

 

나아가 내가 우려하는 것은, 신동일 감독 영화의 캐릭터들은 갈수록 어려지지만, 한편으로 갈수록 생동감과 자연스러움도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캐릭터의 자연스러운 개연성을 해치며 ‘아귀가 안 맞는’ 어색함과 작위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은, 내
짐장에는 아무래도 신동일 감독의 주인공 캐릭터들이 나이가 많건 어리건 우리가 소위 ‘386’이라 부르는 특정 세대의 특정한
정서와 특징들을 고스란히, 그리고 일관되게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한다. 감독 자신이 가장 많이 반영되어 있던 데뷔작
<방문자>의 김재록 캐릭터는 실제 386 출신 지식인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그 나이 또래 아저씨’의
성격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로 오면, 인물들은 포스트-386에 속하는 지금의
30대들로 설정돼 있으면서도 이들 캐릭터의 사적 역사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기억과 재료 부분은 일관되게 386의 것들을 기반으로
한다. 즉, 감독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극중 나이에 어울릴 만한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거나, 90년대에 30대 초중반을 지나고 있던 인물들을 타임머신에 태워 2000년대로 불러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번 <반두비>에서의 민서 캐릭터 역시 계속해서 어딘가 어색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지금의
10대를 반영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라기보다는 감독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386 여성 친구/동지들이 10대이던 무렵의 소녀를
‘이상화’로 덧씌운 뒤 억지로 타임머신에 태워 2009년을 살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차피 허구의 창작물에서 인물들은
실제 그 나이대의 동시대 인물들보다는 감독의 목소리를 전하는 대리자이기 마련이고 그 자체만으로 흠이 되는 건 아니지만, 신동일
감독의 영화가 언제나 구체적인 시간적 배경 하에 특정한 시대를 특정한 나이로 거친 특정한 인간을 매우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간을 달리는 캐릭터’들은 관객들에게 어떤 면에서 상당히 경직성을 보여주며 예기치 않은 곳에
공감대를 흩뜨려버리는 치명적인 단점이 될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민서는 종종 너무 제멋대로에 생각이 없어보이거나 즉물적이고,
카림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착하다. 나는 과연 10대들이 이 영화를 보고 “아, 우리 얘기다”라고 반응할지 아닐지 상당히
궁금하다. 솔직히 말하면 내 짐작은 다소 부정적이다.

아쉬운 점은 또 있다. 나는 영화에서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직설화법으로 드러나는 정치적 자의식이 부담스럽다. 소신이 너무
명확해서 그 소신의 이론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잡히지 않는 현실의 모든 면까지도 이론으로 제어하려는 듯한 답답함이 종종 보인다.
나아가 이것이 지나치게 우직하고 직설법으로 드러나는 것도. 사실 <반두비>는 괜찮은 정도를 넘어서 상당히 훌륭한
로맨틱 코미디가 될 수도 있었다.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도 상당하다. 그런데 여기에 지나친 정치적 자의식이 끼어들면서
매력을 깎아먹고 있는 것 같다. 정치적 메시지와 주제가 왜 매력을 오히려 돋우지는 못할망정, 지지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부담을
먼저 안겨주며 종종 민망함을 느껴야 하는가. 세련된 위트와 재치, 혹은 함축과 비유가 아쉽다. 특히나 이런 ‘장르영화’적 외피를
빌어온 영화에 그런 식의 날 것의 정치적 자의식을 부딪히게 하는 건 종종 덜컹거리며 영화의 전체적 균형감을 망치는 결과가 되기
쉽다. 극소수의 대가들이 충돌을 통해 오히려 시너지를 내는 방식으로 그려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내공이 아닌 것이다.

ps 1. 신동일 감독의 영화엔 그만의 반복되는 몇 가지 코드들이 있다. 신감독의 따님의 캐스팅도 그 중 하나인데, 이
영화에선 실물로도 이름으로도 등장하지 않았던 듯. 다만 신감독은 이번 영화에도 카메오 출연을 했다. 무려 1인 2역이다.
마르크스의 사진도 어딘가에 붙어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서점 씬이 아니었을까 싶다.)

ps 2. 민서의 기원이 지금의 10대보다 오히려 386인 여자의 어린시절에 대한 ‘상상’일 거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
하나. 민서는 ‘오늘의 책’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다.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의 알바생이란 2009년엔 거의 사라진 희귀한 존재다.

영진공 노바리

‘말죽거리 잔혹사 (2003)’, 그 시절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

1978년, 지금의 양재동이 말죽거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웠고 그 인근의 모습이 아직은 농지와 잡초밭으로 황량했던 시절. 박정희 군사정권의 유신 통치 하나를 시대의 키워드로 꼽기에 충분했던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주인공의 이야기. 아니, 그때 즈음 검은 교복을 입고 학창 시절을 보냈었고 지금은 사십 줄에 들어섰을 형들과 누나들의 잔혹했던 시절 이야기.

어쩌면 이 영화는 오랫동안 386이라 불리던 그들이 하나 둘 대오에서 이탈해 가는 시점에 이르러 만들어진 스스로를 위한 송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소룡을 보고 자라 군대 보다 더 지랄 같은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대머리 군인 대통령 아래 최류탄 냄새가 곳곳에 배인 대학 캠퍼스를 거닐었던 그들의 로망스가 드디어 막을 내리는 시점이 된 것이다. 빨리 앞서간 몇몇은 대통령도 만들어냈고 스스로 새파란 얼굴을 내밀며 정치인 금품 비리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이 영화가 개봉하던 때에 그들은 더이상 새로운 세대가 아닌 그 시점의 기성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2009년, 어찌된 노릇인지 추억 속에 석화된 줄 알았던 이 영화의 풍경들은 현실에서 스멀스멀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군대 이야기라는 것들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의 취사선택에 의해 못가본 이들이 듣기에는 상상도 못할 끔직한 체험담이 될 수 밖에 없듯이 78년 말죽거리의 고등학교 이야기도 충분히 잔혹하며 엽기적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어쩌면 그렇게도 고리타분 하신지. 그보다 좀 더 이전 세대인 곽재용이 <클래식>에서 들려준 이야기 보다야 조금 낫긴 하지만 평면적인 한 남자의 추억담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한마디로 한편의 성장영화로서는 구태의연한 편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를 괜찮다 할만한 영화로 만들어주는 것은 꼼꼼하게 재연된 당시의 인물들과 소품들이다. 3학년 깡패 선배들이나 교사들이나, 등장하는 조연과 단역들이 예전 <넘버 3>에서 돌깡패로 나온 송강호를 처음 봤을 때 놀랐던 기억을 머쓱하게 만들 만큼 대단히 사실적이다. 그리고 학교 옥상의 격투 장면들 역시 과장 없이 그려져 은근히 아드레랄린을 솟구치게 만든다. 이 정도면 자국 영화에서 만큼은 오로지 사실주의만을 요구하는 우리나라 관객들의 유난함을 충분히 만족시켰다 할만 하다.

그 시절의 체험들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면 맞어 맞어 하면서 즐겁게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학교 다닐 때 꼭 저런 애들 있었어 하면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도저도 아닌 이라면 교복 입고 나타나 화끈하게 벗어주는 권상우의 열연을 즐기면 된다. 물론 그걸 보기 위해서는 그의 혀 짧은 쑥맥 연기를 오랫동안 견뎌야 한다.

영진공 신어지

<88만원 세대>를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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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맡은 연구 주제 중에 하나가 미래전략이라서 계속 이런 주제에 관한 책들을 찾아보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최근(이 아니라 오늘 낮)에 읽은 책이 이 <88만원 세대>.
노바리 님의 블로그에서 한번 언급한 걸 읽었고
http://vedder.tistory.com/104
그 이후 어디선가 책의 내용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소개기사를 읽으면서 이 책은 꼭 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현재 우리나라의 핵심적인 구도는 개혁-보수, 민주-반민주 구도가 아니라
세대간 격차 라고 말한다. 정확히는 386세대와 그 이전, 이후 세대의 갈등이다.

한나라당에서도 이명박 대 박근혜를 나누려는 386세대 의원의 뻘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
이념이 아니라 세대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 그럴듯하게 보인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현재 20대와 10대가 처한 현실에 대한 분석은 정말 뼈저리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몰고 온 주범이 386세대와 이 참여정부의 소위 ‘선택과 집중’ 전략이라는 사실도…

생각해보면 다 맞는 말이다.
우리 세대가 기성세대가 된 이후부터
구멍가게보다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할인마트에서 물건을 대량소비하기 시작했고
원정출산에 사교육열풍의 대중화가 시작되었고
대기업만 잘 살고 중소기업은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죽어가기 시작했으며
비정규직의 영속화가 관행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나는 80년대 학번에서 비교적 끝물쪽에 속하지만
나도 고등학교 시절 과외 한번 하지 않고 대학에 입학했으며
대학에서도 1-2학년때는 거의 수업 반 휴강 반(87년!), 학점 너무 잘 받으면 이상한 놈이던 시대를 보냈다.
그러고도 졸업한 친구들 대부분 한 자리씩 하고 먹고사는데 지장없다, 주식으로 대쪽박을 찬 경우 제외하고는 여유도 좀 있고…

물론 나보다 더 윗 세대는 (정치적으로는 더 험악했지만) 경제적 사회적으로는 더 편한 시절을 보냈다.
대학교는 더 공부와 상관없이 움직였으며, 취직하기도 우리 때보다 더 쉬웠다.

여기에 현재의 10대, 20대가 처한 상황을 비교하자면
앞으로가 걱정이라는 것이 맞는 말이다.

교육비와 교육기간은 가면 갈수록 더 많이 들어가며,
대학에서 조차 무한경쟁에 시달려야 하고,
그렇게 교육받고 졸업해도 괜찮은 직업은 하늘에 별따기로 적다.
인생에서 가장 창조적이고 생산성 넘치는 20대를 학원과 알바로 소진하고나면
결국 공무원 시험이나 꿈꾸는 야망도 에너지도 없는 미래 세대가 탄생한다.

물론 그 원인이나 해법에는 이해 못할 부분도 있고 빼먹은 것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상황에서 뭘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적은 새롭고 정확하다.

얼마 전에 읽은 유시민의 <대한민국개조론> 보다 한 3배쯤 더 좋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문국현을 지지할 이유가 한 두개 더 늘었다.
적어도 참여정부의 현 노선의 문제가 뭔지 조금은..

아 참, 이 책은 책을 출판할 때 겪을 수 있는 사고란 사고는 다 겪은 저주받은 책이다.
천기누설을 했기 때문일까… (자세한 사고내역은 아래 글 참조, 역시
노바리님 블로그에서 링크 찾았다)
http://fryingpan.tistory.com/entry/88%EB%A7%8C%EC%9B%90-%EC%84%B8%EB%8C%80-%EC%B6%9C%EA%B0%84%EC%97%90-%EB%8C%80%ED%95%9C-%EC%A3%BC%EC%9A%94-%EC%82%AC%EA%B3%A0-%EC%A0%95%EB%A6%AC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