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죽거리 잔혹사 (2003)’, 그 시절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

1978년, 지금의 양재동이 말죽거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웠고 그 인근의 모습이 아직은 농지와 잡초밭으로 황량했던 시절. 박정희 군사정권의 유신 통치 하나를 시대의 키워드로 꼽기에 충분했던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주인공의 이야기. 아니, 그때 즈음 검은 교복을 입고 학창 시절을 보냈었고 지금은 사십 줄에 들어섰을 형들과 누나들의 잔혹했던 시절 이야기.

어쩌면 이 영화는 오랫동안 386이라 불리던 그들이 하나 둘 대오에서 이탈해 가는 시점에 이르러 만들어진 스스로를 위한 송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소룡을 보고 자라 군대 보다 더 지랄 같은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대머리 군인 대통령 아래 최류탄 냄새가 곳곳에 배인 대학 캠퍼스를 거닐었던 그들의 로망스가 드디어 막을 내리는 시점이 된 것이다. 빨리 앞서간 몇몇은 대통령도 만들어냈고 스스로 새파란 얼굴을 내밀며 정치인 금품 비리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이 영화가 개봉하던 때에 그들은 더이상 새로운 세대가 아닌 그 시점의 기성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2009년, 어찌된 노릇인지 추억 속에 석화된 줄 알았던 이 영화의 풍경들은 현실에서 스멀스멀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군대 이야기라는 것들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의 취사선택에 의해 못가본 이들이 듣기에는 상상도 못할 끔직한 체험담이 될 수 밖에 없듯이 78년 말죽거리의 고등학교 이야기도 충분히 잔혹하며 엽기적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어쩌면 그렇게도 고리타분 하신지. 그보다 좀 더 이전 세대인 곽재용이 <클래식>에서 들려준 이야기 보다야 조금 낫긴 하지만 평면적인 한 남자의 추억담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한마디로 한편의 성장영화로서는 구태의연한 편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를 괜찮다 할만한 영화로 만들어주는 것은 꼼꼼하게 재연된 당시의 인물들과 소품들이다. 3학년 깡패 선배들이나 교사들이나, 등장하는 조연과 단역들이 예전 <넘버 3>에서 돌깡패로 나온 송강호를 처음 봤을 때 놀랐던 기억을 머쓱하게 만들 만큼 대단히 사실적이다. 그리고 학교 옥상의 격투 장면들 역시 과장 없이 그려져 은근히 아드레랄린을 솟구치게 만든다. 이 정도면 자국 영화에서 만큼은 오로지 사실주의만을 요구하는 우리나라 관객들의 유난함을 충분히 만족시켰다 할만 하다.

그 시절의 체험들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면 맞어 맞어 하면서 즐겁게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학교 다닐 때 꼭 저런 애들 있었어 하면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도저도 아닌 이라면 교복 입고 나타나 화끈하게 벗어주는 권상우의 열연을 즐기면 된다. 물론 그걸 보기 위해서는 그의 혀 짧은 쑥맥 연기를 오랫동안 견뎌야 한다.

영진공 신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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