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미치게 하는 메시지, ‘이중구속(Double Bind)’

Double Bind (“이중구속” 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는 1956년에 인류학자이자 언어학자인 그레고리 베이트슨(G.Bateson)이 팔로알토 연구소에서 발표한 이론적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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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y Bateson 1904-1990

Double bind(이후부터는 이중구속)는 간단히 말해서 상반되는 메시지(대부분은 요구)가 동시에 전달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부모나 가족이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똥씹은 표정을 짓는다거나, 직장 동료가 말로는 “편하게 대하라”고 하면서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거나, 교수가 수업시간에 “자유롭게 발언하라” 고 하면서 정작 질문을 하면 씹어버린다거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요구하면서 정작 그런 아이디어를 내면 더 많은 업무로 처벌을 내리는 회사의 회의실 장면이 그런 상황이다.

이중구속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늘 여러개의 정보채널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의사소통을 할 때 언제나 하나 이상의 채널을 사용한다. 문자로도 변환될 수 있는 언어메시지는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언어에도 어조가 있고 뉘앙스가 있으며 악센트나 기타 등등의 방법으로도 텍스트로 전달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게다가 얼굴을 보고 의사소통하는 경우에는 표정, 자세, 행동과 같은 더 뚜렷한 다른 채널들도 같이 사용한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자면 이 채널들이 온전히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대할 때만이 바로 그렇게 이구동성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하지만 만약 어떤 문제에 대해서 내적인 갈등을 느끼고 있거나,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거나, 인격에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위와 같은 이중구속 적인 메시지가 발생한다.

내 경우도 늘 말로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더 많은 질문을 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그 질문하는 학생들에게 과연 내 말과 온전히 일치하는 태도를 보여주는지 의심을 하게 된다. 가끔은 질문이 너무 멍청해보여서, 혹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심지어는 그냥 대답하기 귀찮아 할 때도 있고, 그럴 때면 분명히 내 몸의 어딘가에서는 “질문 자꾸 할래?” 라는 메시지를 흘리고 있을테니 말이다.

이중구속은 메시지 자체의 모순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순수해져라” 라는 말은 그 자체로 이중구속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순수는 순수해지려는 의도조차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순수해지기 위해서(혹은 순수해지라는 말을 듣고) 순수해진 것은 결코 순수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순수해지라”는 말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요구이며 이중구속이 된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해”라는 말도 이중구속이다. 사랑은 자발적인 행동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명령이 되니까. 마찬가지로 “니가 알아서 좀 해” 라는 말도 굳이 따지자면 이중구속이다. 알아서 하라는 명령에 따라서 하는 것은 더이상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니까.

아이들이 이런 이중구속 상황에 민감하고 그래서 더 타격을 많이 받는다. 예를 들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는 아이를 지극히 이중구속적인 상황에 꼴아박는 질문이다. 애가 어느 쪽을 선택하란 말인가. 친척이나 손님을 불러다 놓고 아이에게 “너 평소에 하던 것 좀 해 봐라”라고 말하는 것도 지극히 이중구속적이다. 손님 앞이면 이미 “평소”가 아니거든. 이런 상황에 처한 아이들은 말 그대로 몸이 꼬이고 마음이 꼬여서 미칠려고 한다.

베이트슨은 실제로 어쩌면 정신분열증이 이 이중구속적인 상황에서 유발되는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신 주변에 말과 행동이 늘 어긋나는 인간이 있다고 치자. 그래서 그 인간의 말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치자. 어떻게 하면 될까? 그 인간을 안보고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면 된다. 하지만 만약에 그와 매일같이 마주쳐야 한다면? 그 믿을 수 없는 인간을 믿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라면? 예를 들어, 그 인간이 당신이 생존하기 위해 의존해야 하는 부모라거나, 당신이 믿어야 하는 친구 혹은 연인이거나, 당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상사이거나, 혹은 당신이 몸담고 있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믿을 수 없는 인간을 믿어야 할 때, 모순되는 말과 행동에 나 자신을 맞춰야 할 때, 믿을 수 없는 자를 믿지 않으면 안될 때, 우리는 미치고 팔짝뛰게 된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몇 개월, 몇 년, 혹은 평생 지속되어야 한다고 할 때 정신줄을 놓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최근에 누군가가 남에게 “세뇌되었다”고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어떤 면에서 이중구속이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어떻게 해도 자신이 세뇌되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세시대 마녀사냥의 논리가 딱 그런 이중구속이었다. 마녀를 감별하는 법은 마녀를 묶어서 강물에 던지는 것이다. 만약 그녀가 꽁꽁 묶인 채로도 물위에 뜬다면 그녀는 마녀이므로 죽여야 한다. 인간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녀가 물에 빠져 죽어버린다면, 그제서야 그녀는 마녀가 아니다. 어쨌든 일단 마녀로 찍히면 죽어야 끝났다.


 
누군가는 바로 그런 이중구속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그래도 여전히 그에 대해서는 이중구속 메시지를 보내는 인간도 있다. 죽지 않았을 때는 그렇게 살면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삿대질을 하다가, 그가 죽으니까 죽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고 삿대질이다. 어쩌란 말인가.

또 누군가는 “침묵하는 다수는 정부를 지지한다” 란다. 집회에 참석하면 방패로 찍고 삼단봉으로 패면서, 심지어는 그 근처에서 멀쩡히 걸어가는 사람을 두들겨패서 갈빗대 나가게 만들면서 집회에 안 나오면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거란다. 말 그대로 이중구속이다. 어쩔까? 집회 나가서 매맞아주면 믿을까? 아니 그때는 세뇌되었거나 좌파이거나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았다고 할텐데 …

뭐 그런 이중구속은 워낙 많이 경험해봐서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면 다행이다.
둔감화. 그거야 말로 우리나라에서 정신줄을 놓지 않고 살아남는 길이다.
하지만 둔감화에 큰 함정이 있다.
지금 이중구속을 저지르고 다니는 이들은 모두 이미 둔감화 된 자들이라는 점이다.
둔감화는 이중구속자가 되는 첫번째 발걸음이다.
그러고 보면 이 자체도 이중구속이구나 …

* Double Bind와 종종 혼동되는 개념이 Double Blind(이중맹목) 이다. Double Blind는 실험을 할 때 실험을 하는 사람이나 실험대상자 모두 그 실험의 정확한 목적이나 처치의 내용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실험자와 피험자 둘 다 모르기 때문에 더블이다. 왜 이런 짓을 하느냐 하면, 그 사람들의 주관적 기대가 실험결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의대에서 약의 효과를 실험할 때도 (환자 뿐만 아니라) 약을 주는 의사도 지금 자기 환자에게 주는 약이 가짜약인지 진짜약인지 몰라야 제대로 된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환자가 플라시보 효과를 보일 수 있다면, 의사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영진공 짱가

바쿠만(bakuman), 리얼리티 만빵의 만화작가 입문서



바쿠만(bakuman)


     오바 츠구미

그림  오바타 타케시

펴냄  대원


‘데스노트’ 콤비의 컴백작 이라고 할 수 있는 당 작품은 만화가의 길을 걷는 소년들의 도전기를 그리고 있다. ‘만화’가 ‘만화가’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리얼리티는 말해봐야 입 아픈 것일테고 등단 방법과 만화 연재의 결정, 잡지사의 내부구조 등 만화계 전반의 프로세서가 어떠한지 이야기 중간중간 상세히 소개를 하며 일본 만화계의 입문서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유치찬란한 연애구도에 일부 팬들의 원성이 구천을 떠돌고 있지만 만화를 읽고 나서는 왜 그들이 이렇게라도 연애이야기를 쑤셔 넣어야 했는지가 수긍이 되니 ‘사실 그대로 보여준다!’는 책 표지에 박힌 문구가 맞긴 맞나보다.  (30%를 차지하는 소녀 팬들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 )



 

현재 한일 동시 연재를 하고 있으며 단행본은 2권까지 출간되었다. 만화계에서 고군분투하는 작가나 작가지망생 혹은 소싯적 만화가를 꿈꿨던 이들이라면 그 재미와 긴장이 3.5배 증가할 것이지만 그와 더불어 열심히 그리고 있지 않는 자아를 돌아보며 자폐증에 빠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길~ 아무튼 세상 어딜가나 제일 무서운 것은 재능있고 실력있는 어린 것들이다.

영진공 self_fish



존 코너의 정치조작극을 폭로한다!

이미 결정되어 있는 미래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정치공작에 대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 무얼 어떻게 해 볼 힘도 이유도 없을 따름이다.  허나 멀디 먼 미래에서도 여전히 권력욕이 인간을 사로잡고 세상을 파괴해서라도 권력을 유지하려는 군상들이 온존한다는 사실을 알려 현재를 사는 우리 중 일부라도 함께 교훈을 얻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이 글을 적는다.

1. 존 코너는 우리가 알고있는 그가 아니다.

미래 인류의 운명을 홀로 양 어깨에 짊어진 선지자.  냉혹한 기계군단에 맞서 탁월한 전략과 전투력을 발휘하는 타고난 지도자.  이 모습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존 코너이다.

허나 이 모든 건 철저히 날조된 이미지조작일 뿐이며 우리가 알고있는 존 코너는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다.  왜냐고?  존 코너는 1984 년에 어머니인 사라 코너가 미래에서 온 사나이 카일 리스를 만나서 둘의 사랑의 결실로 태어났다고 알려져있다.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우리가 알고 있는 존 코너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미래에서 와줘야 한다.  그런데 그럴러면 어찌됐든간에 일단 카일 리스라는 인물이 존재할 미래까지 시간이 한 번은 흘러가줘야 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선행의 시공에서는 인류를 구원할 리더인 존 코너가 존재할 수가 없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카일 리스가 과거로 파견돼야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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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비슷하기는 하다 ...

이 사실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가 알고있는 그는, 존 코너라 불리우는 미래의 야심가가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이루기 위해 탄생설화를 조작하여 만들어 낸 인물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조작된 탄생설화를 미래에서 유포하는데 만족하였다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터이나, 존 코너는 그걸 그대로 믿으라고 우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는지 조작된 설화를 더욱 그럴듯하게 뒷받침하기 위해 카일 리스라는 인물을 실제로 우리가 살고있는 시공으로 보내고야만다.

그러나 그 결정이 오히려 자신이 조작한 설화를 부정하게 만드는 결정적 실책이 된 것이다.

2. 왜 그래야 했을까 …

그렇다면 존 코너는 무슨 이유로 자신의 탄생설화를 조작해야만 했을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요번에 새로 발견된 미래의 문서 [분류명: Salvation]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존 코너는 2018 년 당시 이미 저항군내에서 지휘부와 갈등관계에 있었다.

척 봐도 사이가 안 좋은 두 사람 ...

독불장군 행세를 하며 명령체계를 잘 따르지 않는 존 코너, 게다가 단독으로 라디오방송을 하며 마치 선지자인양 행동하는 그를 지휘부는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다고 하여도 언젠가는 지휘부에 의해 실권 또는 제거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존 코너는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 도박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녹음테이프를 하나 하나 내놓으며 자신의 출생을 신비롭게 각색하였고 인류의 운명은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설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혼돈의 시대에 이러한 신화는 의외로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 법.  허나 하나의 거짓은 언제나 더 큰 거짓을 낳게 마련이고 그 거짓은 항상 그럴듯한 증거로 뒷받침이 되어야 하기에 존 코너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무리한 액션을 취해야 했던 것이다.

3. 존 코너는 스카이넷과 내통하고 있다?

이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무척이나 조심스럽지만, 존 코너가 자신의 탄생설화 조작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음모의 이면에 스카이넷과의 뒷거래가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바이다. 

그렇게나 냉혹하고 철저한 스카이넷이 유독 존 코너의 사전제거작전에 있어서는 황당할 정도로 어설프게 대처하고 있음을 우리 모두 인지하고있다.  최초 T-800(Model 101)의 투입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이미 알고있는 스카이넷은 이후 개발된 T-1000과 T-X를 굳이 옛 모델들의 투입이 실패로 끝난 이후의 시점으로만 투입하고있다.  더 우수한 후속기종이 개발되었을 때 옛 모델의 투입시점보다 이전으로 보냈다면 존 코너 사전제거작전은 성공리에 마무리 하고도 남았을 터인데 말이다.

뒷다마???

그리고 역시 요번에 발견된 Salvation 문서에 의하면 스카이넷은 2018 년에 이미 카일 리스를 제거리스트 1번에 올려놓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그들은 카일 리스가 지구로 파견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는 것인데, 정말로 그가 존 코너의 아버지라면 스카이넷은 카일 리스의 투입 이전에 털미네이러를 보냈으면 상황종료일 것이다.

이런 정황을 보았을 때 스카이넷은 애초에 카일 리스의 파견을 막거나 존 코너를 사전제거할 의사가 없음을 알 수 있고, 오히려 카일 리스를 제거리스트에 올림으로써 존 코너의 탄생설화에 대한 신빙성을 높여주는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까지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존 코너는 대규모 전투에서 유일한 생존자일 경우가 너무 많으며, 스카이넷이 일방적으로 우세한 여러 상황에서도 번번히 그는 혼자만의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았을 때 존 코너와 스카이넷은 각자의 영역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실제 뒷전에서 협력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 매우 합리적 의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만약에 이런 의혹이 사실이라면, 바라노니 존 코너와 스카이넷은 자신들의 나와바리를 장악하기 위한 더러운 야합을 당장 중단하고 Autobot과 힘을 합쳐 호시탐탐 지구를 노리는 Decepticon을 물리치는데 전력을 다하라.

여섯 지구의 생존자들과 Cylon들이 기나긴 전쟁 끝에 비로소 화합과 평화를 이루어, 새로이 만들어 놓은 이 지구를 함께 지켜내어 모두가 잘사는 터전으로 만들어야 함이 어찌 바람직하다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May the peace and truth be with us …

영진공 이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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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아버지의 초상

『파송송 계란탁』을 보면서 내내 절 울게 했던 것은 ‘전인권'(“이인성”)이란 아이가 처해진 슬픈 소아암도, ‘대규'(임창정)가 살아가고 있는 슬픈 삶의 현실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무식한 아버지’의 자식의 병에 대한 ‘무식한 태도’가 얼마나 스스로에게 좌절감을 주는가가 영화내내 동화되어 슬픔을 자아냈습니다.

제 부모님은 아마 상당수의 제 또래 부모님이 그러하듯, 그리 좋은 학력을 가지고 계시진 않습니다. 허나 부모의 마음은 학력의 고저를 불문하고 인간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일이기에. 전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행운아입니다. 한때 부모님의 실수로 제가 큰 병을 얻어 몸져 누었을때, 제 아버지께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모란게 무식해서 아를 이꼴로 만들었으니 이를 우짜면 좋으냐…’

나는 내가 태어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지만. 부모님은 제가 안쓰러워 어찌할 줄 모르고 계셨더랬습니다. 무엇을 어찌 할줄도 모른채 의사만 바라보아야 했던 부모님은 얼마나 답답하고 힘드셨을까요.

영화 『존 큐』는 비록 무식해도 착하게 살아왔던 아버지의 절박한 상황을 충분히 공감이 가도록 그려냈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돈이 없다’는 이유로, 한 생명이 사라져 가는 절박한 상황을 타파할 수 없는 ‘삶의 한계’는 무식한 아버지의 절규를 불러냅니다.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모든 이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이고, 그 생명은 나로 인해 만들어진 생명이며, 나의 정서와 내 사상, 나의 철학을 이어 받고 자란 아이이기 때문일겁니다.

지금의 저는 비록, 사회에서의 교육으로 인해 자꾸 변해가고 있지만, 아버지와의 대화로 부터 받아온 아버지가 깨달은 삶의 정수들은 벌써 저의 원칙이 되어가고 있고 철학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실없는 이야기라며 웃을 일일지도 모릅니다만, 제 아버지는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와 달리, ‘사람목숨을 파리목숨으로 여기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 하셨고, 당신께선 늘상 즐기시는 ‘바둑’을 사람을 속이는 기술이라 배우지 않길 권하셨고, 배운사람을 믿는 방법보다 솔직한 사람을 믿는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네, 삼국지를 본다고 생명경시풍조가 생기는 것도 아니며, ‘바둑’을 배운다고 ‘권모술수’에 능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허나 비록 저런 말씀들이 타인에겐 ‘무식한 아버지’로 보일지 몰라도, 지금까지 제가 지켜야 할 원칙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그런 가르침은 저의 논리 전개과정에 늘 합당한 이유를 부여했습니다.

<1992년 영화 '로렌조 오일' 영화 포스터>

영화『로렌조 오일』은 어찌 보면 모든 아버지의 로망일지도 모릅니다. 자식의 아픔을 낫게 하기 위해 자신의 논리적 역량을 다하고, 없는 지식을 긁어 모으고,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그로 인해 결국 “로렌조”를 구해내는 이 실화는, 아마 지구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자식이 아플때 진정 원하는 바를 표현해준 이상에 가깝지 않을까요. (물론 자식이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걸 보는게 가장 큰 이상이겠지요 …)

영화의 모티브인 로렌조와 아버지. 로렌조는 서른 살이 되던 2008년에 운명하였다.

자식이 육체적 병을 얻어 아프던, 심리적 압박으로 괴로워 하던. 같이 아파해줄 사람, 같은 시각으로 이해해 줄 사람은 부모입니다. 그 누구도 제 아픔을 같이 아파할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없을 테니까요.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현실의 한계로, 아는 것 없음의 한계로.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는 슬픔은 그 무엇보다 억울하고 괴로울 겁니다. 그런 마음을 늘 갖고, 가족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우리네 아버지.

하루에 한번.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전화 한통화 하세요.
효도는 해도해도 모자랍니다.

영진공 함장

‘미스틱 리버 (2003)’, 아메리칸 시네마의 저력을 보여주는 작품

대단한 감독과 대단한 배우들이 함께 했던 영화로 <미스틱 리버> 이전에 <슬리퍼스>(1996)가 있었다. 감독은 <레인맨>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통해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서 널리 인정받고 있었던 배리 레빈슨이었고, 출연진으로 브래드 피트와 케빈 베이컨, 로버트 드 니로, 더스틴 호프먼, 그리고 주연급으로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은 제이슨 패트릭, 빌리 크루덥, 미니 드라이버 등이 있었다. 마치 서너 편의 영화에 출연할 배우들을 한 작품에 모아놓은 듯한 캐스팅이어서 상당한 화제가 되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본 꿀단지 속에는 싱거운 설탕시럽만 들어있는 듯한, 꽤나 실망스러운 영화였다.

<미스틱 리버>도 유명했던 서부극의 단골 총잡이 배우에서 명감독의 반열에 오른지 오래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에 단독 주연을 하기에 손색이 없는 숀 펜, 팀 로빈스, 케빈 베이컨, 로렌스 피시번, 로라 리니, 마샤 게이 하든 등이 잔뜩 출연한 작품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두 영화는 내용면 에서도 약간 비슷하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동네 친구들의 성장 이후의 이야기라는 점과 모두들 그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미스틱 리버>는 <슬리퍼스>와 달리, 우리가 종종 무시하다 못해 실컷 비웃곤 하는 헐리웃 영화, 즉 아메리칸 시네마의 저력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수작으로 빚어졌다. 음향효과는 극도로 자제된 가운데 스릴러와 인간 드라마 로서의 양 측면을 모두 만족시킨다. 기대했던 배우들의 연기 또한 실망시키는 법이 없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숀 펜 보다 팀 로빈스의 복잡미묘한 연기에 점수를 좀 더 주고 싶다. 케빈 베이컨은 언제 봐도 반갑지만 극중의 갈등과 미스테리의 중심에서 한발짝 벗어나 평소보다 훨씬 여유로운 모습이었던 것 같다.

한가지 아쉬운 부분은 새벽 아침에 두 친구가 나눈 ‘자, 이제 관객 여러분들을 위해 이 영화의 결론을 친절하게 설명해드리겠어요’라는 식의 대화. 불필요했던 이 대화만 걷어내고 바로 숀 펜과 로라 리니의 대화로 넘어갈 수 있었더라면 <미스틱 리버>는 수작이 아닌 걸작이라고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