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수”, 임창정, 슬픈 목숨의 노래

우연히 버스에 붙은 영화 <창수> 포스터를 봤어요. 임창정이 껄렁한 변두리 달건이 티셔츠 입고 사람들한테 끌려다니는데 창수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근데 창수가 슬플 창(愴), 목숨 수(壽)예요. 보통 사람 이름에 누가 이런 한자를 써요. 번성할 창에 빼어날 수 정도 쓰지. 그것만으로 이 캐릭터가 설명되더군요. 이 창수라는 놈은 태어난 게 불행한 놈이구나. 그런데 그 역할이 다름아닌 임창정이에요. 임창정은 이 방면에 아주 독보적인 배우죠.

그런데 작품을 개인 화보로 생각하는 배우들이 있어요. 대표로 이범수. 이 분 첫 인상은 강렬했어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서 차승원 운전기사로 나올 때. 아주 생양아치 단발로 나오죠. <태양은 없다>에서도 그렇죠. 그러다가 지명도가 생기니까 자기가 원빈인 줄 아는 것 같아요. <아이리스> 보면 정보요원이 아니라 모델이더라고요, 연기를 하지 않고 화보를 찍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보면 임창정은 굉장히 영리한 배우예요. 자기가 어떻게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지를 잘 알죠. 시나리오 상에서 자신의 역할이 어떠해야 되는지를 아주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스카우트>, <색즉시공>, <1번가의 기적> 등은 그냥 망가지는 캐릭터가 아니었어요. 그 망가짐 안에 페이소스들이 가득차 있죠.

독재의 ㄷ자도 모르던 대학시절에 대한 페이소스, 가난하고 못 생겨서 뒤처져야 하는 젊은이들의 페이소스, 가난해서 깡패가 됐는데 다시 가난한 이를 수탈해야 하는 이의 페이소스. 망가짐 안에 그 페이소스를 담아낼 수 있는 대한민국 유일한 배우라고 생각해요.

최동훈의 <도둑들>에서 이정재를 보고 굉장히 반가웠어요. 그는 굉장히 멋지고 세련된 이미지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정재에게는 그보다 더 특출난 이미지가 있지요.

배창호의 <젊은 남자>, 김성수의 <태양은 없다>에서의 이정재 말입니다. 그 이정재는 물질적인 욕망에 가득차 그것을 쫓아가는 ‘불나방 날라리’ 이미지예요. 그런데 그 속물적인 욕망이 너무 순수해서 안타까운 캐릭터죠. 또 그래서 남을 속이고 죽여서 성공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그 욕망을 이루지 못 하고 좌절하죠. 속물 날라리지만 좌절하는 날라리이고 애처로운 날라리이지요.

최동훈 감독이 <도둑들>을 개봉하면서 사실은 <범죄의 재구성>에서의 박신양 역할을 ‘이정재’를 생각했다고 했어요. 저는 옳다구나 했죠. 박신양은 자꾸 조폭이나 건달로 나오는데 도저히 조폭이나 건달, 날라리가 되지 못 해요. <범죄의 재구성>에서 열심히 하긴 했지만 그 날라리 역할을 이정재가 했으면 더 잘 어울렸겠죠.

<도둑들>에서 최동훈은 이정재를 잘 읽었어요. 딱 어울리는 캐릭터를 주었지요. 이정재가 연기한 뽀빠이는 <젊은 남자>, <태양은 없다>에서 이정재가 십년 늙은 버전이에요. 개날라리에 똥폼 잡으며 힘껏 잔머리 쓰고 대가리 굴려봐야 선수들을 못 당하지요.

전 영화에서 캐스팅이 그래서 아주 중요하다고, 캐스팅만으로도 영화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고 보는데 임창정은 ‘슬픈 목숨 달건이’ 역할로는 보지 않아도 최고이지요. 그래서 살펴보니 감독이 각본까지 써서 입봉하는 작품이더라고요.

전 그러면 놀라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 암튼 그런 말을 했지요. “모든 감독은 한 편의 걸작을 갖는다. 그건 바로 자기 이야기다.” 각본까지 쓴 거 보니, 거기다 입봉작이다 보니 아마 위의 말이 잘하면 이 작품에 들어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창수>의 시놉을 보니까, 태어난 게 불쌍한 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네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도 저는 매우 매력적으로 느낍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이죠. 사랑해서는 안 되는 철천지 원수 집안.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 더 귀한 것이 됐고 고전이 되었죠.

<레이디 호크>도 있었어요. 서로 만날 수가 없어요. 여자는 낮에 매로 변하고, 남자는 밤에 늑대로 변하지요. <리벤지>도 생각납니다. 조폭의 첩을 사랑한 케빈 코스트너. 사랑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디 인간사가 그렇게 되나요? 댓가를 받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 댓가는 아주 처참했지요. 그래도 사랑에 빠지는 것이 인간이지요.

“여자의 남자”도 있었어요. 김한길 민주당 대표의 소설이 원작이었죠. 영화였나 드라마였나 암튼 김혜수가 나오는 … 여자가 대통령의 딸이었지요. 도저히 사랑할 신분이 아니에요. 하지만 사랑은 시도 때도 없이 주제도 꼬라지도 안 보고 찾아와요.

<데미지>도 빼놓을 수 없어요. 아들의 아내, 며느리한테 사랑에 빠지지요. 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그 주인공을 힘들게 하고 고통에 빠뜨리고 좌절시키고 죽이는데도 끊임없이 변주돼요. 조건, 배경, 재산, 학벌 따지는 안전한 사랑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큰 코 다치는데 그게 사람 뜻대로 되지 않지요. 그게 사랑이지요.

영화를 꿈공장이라고 합니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기에 꿈이며 그것들을 컨베이어 벨트에서 기성품처럼 찍어대니 공장이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꿈이지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이나 <노팅힐>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꿈이겠지요. 하지만 <창수>는 제목만 봐도 해피엔딩일 리가 없죠. 꿈을 꾸게 하고, 그 꿈은 시궁창 현실에 꼬라박히겠지요. 저는 그 꿈이 얼마나 처절하고 처참하게 좌절될지 기대가 돼요.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꿈을 꾸는 게 좋을지, 이루어지지 않기에 꿈도 꾸지 말아야 할지,

영화 결말에 가서 창수는 좌절된 꿈이더라도 행복해 할까요? 좌절된 꿈이기에 불행해 할까요? 그래서 <창수>라는 영화가 궁금해요.

저는 창수가 행여 목숨을 내놓더라도 행복해 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사랑이니까요.

<스카우트>, 웃음과 재치 속에 비극을 담는 하나의 전범

스포일러를 잔뜩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Y대학 야구부 직원인 호창(임창정)이 고3 괴물투수 선동열 스카웃이라는 막대한 사명을 띠고 광주에 출장을 간다. 모처에서 비밀훈련을 한다는 선동열의 자취를 좇고, 그의 부모를 찾아가 조르는 한편, 그는 7년 전 갑자기 결별을 선언하고 사라져버린 옛사랑 세영(엄지원)과 재회한다. 한 축으로는 선동열이 가기로 예정한 K대학 야구부 직원의 집요한 방해를 뚫고 선동열을 뒤쫓는 모험, 그리고 또 한 축으로는 세영을 마음에 둔 주먹 출신 곤태(박철민)의 견제 속에서도 마음 깊이 미진하게 남은 세영과의 지지부진한 관계. 이 둘은 영화의 초반을 평범하고 다소 도식적인 코미디로 끌어간다.


이 두 축이 만나는 지점은 광주항쟁 ‘직전’의 대규모 시위이다. 마침내 선동열의 아버지가 호창에게 마음이 기울었을 무렵, 그는 세영이 자신을 왜 떠났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그 자신도 지우고자 했던 기억, 그래서 실제로 잊어버리고 있던 어떤 사건 때문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호창이 이 사건을 떠올리고는 세영을 찾아 헤매는 모험인데, 여기에 시대적 비극이 직접적으로 얽히면서 영화는 긴박감을 띄게 된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는 초반에 내세웠던 유머와 코미디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시대적 비극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다. 영화의 비극적 코드는 웃음 속에 대충 끼워넣는 휴머니즘 코드로서가 아닌, 그 웃음과 적절히 조응함으로써 더욱 배가되는 비극성, 그럼에도 ‘웃으며 피눈물을 쏟아내는’ 비극성을 표현해낸다.


회사 편에서 노조를 깨뜨리고 파업을 깽판놓던 구사대의 학교 버전, 구교대는 실제로 학교에 존재했다. 그네들이라고 좋아서 데모하는 다른 애들을 두들겨 팼겠냐만, 운동으로 학교에 스카웃된 학생들과 소위 시험쳐서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높은 장벽이 분명히 존재했고, 때로 끼어드는 적대심에는 분명 구교대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위하는 학생들을 깽판놓기 위해 운동부 학생들을 동원할 때 학교는 한마디로 “너희들 불러다 공부시켜주고 운동시켜주는 게 누군데.”였던 건데, 이것은 영화에서도 “니들이 공짜로 운동해?”였나, 하는 대사 한 마디로 압축되어 표현된다. 결국 시위하던 학생들과 운동부 학생들의 싸움이 일어나는데, 이 장면의 비극성은, 우리가 매일 보는, 거리에서 벌어지는 시위에서 충돌하는 시위대와 전경의 모습 그대로이기도 하고, 혹은 광주에서 대치했을 시위대와 군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세영이 왜 자기를 떠났는지를 깨달았을 때, 그것을 돌이키기 위해 그가 취했던 액션.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숨기고 있던 비장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돌이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했고, 경찰서에 잡혀있는 세영을 드디어 구출해낸 후 그녀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과거의 과오를 대하는 가장 올바른 방식이 아니겠는가. 호창은 참으로 용기있는 사람이고, 이것이야말로 소시민 호창의 위대한 영웅의 승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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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두 주연배우의 연기가 너무나 빛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원래 가장 훌륭한 코미디가 ‘슬픈’ 코미디인 것은, 코미디라는 장르의 전통 중 하나가 삶의 ‘비극’을 뒤트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현석 감독은 임창정이란 배우가 가진 장기, 즉 ‘처절한 웃음’을 표현해 낼 줄 아는 그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 표현한다. 역사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소시민이 처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상황, 그리고 너무나 거대한 비극 사이에 껴 있는 소소한 비극이기에 자연스럽게 희극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러한 희비극적 상황을, 임창정은 특유의 우직한 성실함과 넉살로 돌파한다. 그가 미친 듯이 세영을 향해 뛰어가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관객이 있을까? 광주에 대해 여전히 ‘사태’라 생각하든 ‘항쟁’이라 생각하든, 그 장면에서의 임창정의 진심에 감동하지 않을 관객이 있을까? 이 장면에서 임창정이 호창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 울음은 가슴을 찢어놓는 통한의 울음이다. 한편 착잡하고 비밀을 가진 듯한 세영의 모습은 호창의 회상 속에서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했다가(이것이 연애의 ‘회상’이기에 더욱 그렇겠지만), 호창이 그 사건을 기억해내는 장면에서 그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모습 때문에 그녀의 상처와 경악과 슬픔이 더욱 비극성이 배가되어 표현된다. 이 장면에서 엄지원의 연기 역시 그 고통을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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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호창의 운명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가운데, ‘현재’ 시재에서 TV에 등장한 선동열을 보며 세영은 회상에 젖는다. 평범한 가정의 어머니이자 아내로, 그리고 40대 중년의 소시민이 되어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호창 역시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으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었고, 역사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걸, <스카우트>는 웃음 속에서 넌지시 보여주고, 넌지시 이들에게 찬가를 바친다. 영웅이 아니기에 진정한 영웅인 사람들의 모습을, <스카우트>는 너무나 훌륭히 그려내었다. 상업영화, 특히 ‘코미디영화’의 틀 안에서, <스카우트>는 자칫 무겁고 경직될 수 있는 비극을 매우 모범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면서도 그 비극성에 함몰되지 않는 지혜를 보여준다. 그것이 쉽지 않음을 알기에, <스카우트>가, 김현석 감독이, 그리고 임창정과 엄지원이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럽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