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살인”이 조선으로 간 까닭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추리극을 표방하는 <그림자 살인>은, 실은 추리를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상한 추리극이다. 시작은
그럴싸하다. 시커먼 밤 인적 없는 숲속에서 시신 한 구가 누군가의 손에 운반된다. 시체는 누구일까? 시체를 운반하는 자가
범인일까? 궁금증은 곧 풀린다. 시체는 고관대작의 아들로 밝혀지고 의학도 장광수(류덕환)가 해부실습을 위해 주워왔던 것이다. 이
사실을 파악한 장광수는 누명을 벗기 위해 사립탐정을 고용하니 그가 바로 홍진호(황정민)! 홍진호는 발명가 순덕(엄지원)이 고안한
도구들로 진범 찾기에 나선다. 

박대민 감독의 <그림자 살인>은 여러 모에서 구미가 당기는 작품이다.
충무로 보증수표 황정민에, <놈놈놈>의 조화성 미술감독이 참여한 볼거리 가득한 경성, 그리고 화려한 액션까지.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추리는 없다. 영화의 모든 패를 던져버리는 초반에 다 드러나 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홍진호의 등장은
<차이나타운>(1974)의 기티스(잭 니콜슨)와 캐릭터 맥락이 일치한다. 남편이 집나간 사이 불륜을 벌이는 부인의
뒤꽁무니를 쫓아 벌거벗은 사진을 증거랍시고 찍어대는 한심한 사립탐정, 하지만 소싯적 지방검사를 지낸 적 있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 정의감 따위 엿 바꿔 먹고 돈(혹은 여자)에 혹해 사건을 맡게 되는 점 등 두 인물은 판박이인 것이다. 고로, 이와
같은 상관관계를 통해 <그림자 살인>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던 사건이
핵심에 다가설수록 더 큰 음모와 연루되어 있고 이를 통해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마주서게 되는 것. (<차이나타운>이
바로 그렇다!)

추리가 주가 되는 작품에서 예측 가능하다는 건 치명적이다. 게임오버다. <그림자
살인>처럼 홍진호가 기티스의 영향 하에 있고, 홍진호와 장광수의 관계가 홈즈․왓슨 콤비를 연상시켜도, 순덕의 존재가
<CSI 과학수사대>의 벤치마킹일지라도 설정은 설정일 뿐 오해하지 말지이니, 이에 관계없이 예측 불가한 전개를
보여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추리극의 재미요, 백미다. 그래서 추리를 다루는 작가는 종종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벌인다고 하지만
의도적으로 독자의 접근을 차단해 흥미를 배가시킨다.

물론 <그림자 살인>에도 관객의 접근을 차단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도무지 추리에 집중할 생각을 하지 않고 관객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려는 것이 문제일 뿐. 안타깝게도
<그림자 살인>의 작가들은 추리극을 쓸 능력이 없어 보인다. 가령, 범인의 정체를 초반에 노출하는데, 그것이 관객에게
혼란을 줄 목적이라지만 제2, 제3의 용의자가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복선이 깔리는 것도 아니고 애당초 호기심을 자아내는
미스터리? 그런 거 없다.

대신 영화는 액션과 경성 풍경에 승부수를 띄운다. <본 얼티메이텀>을
연상시키는 초반 액션장면에 대해 길고 지루하다는 평가가 잇따르는 걸 보면 <그림자 살인>의 노림수는 분명하다. 추리에
대한 부족한 능력치를 강력한 볼거리로 메워보겠다는 것. 그중에서도 내가 관심이 갔던 부분은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조선이라는
점이다.

<그림자 살인>뿐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추리극을 표방한 한국영화를 보면 유독 조선시대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했다. 김대승의 <혈의 누>(2005)가 그랬고, 김미정의 <궁녀>(2007)가
그랬으며, 이 영화가 그렇다. 나는 이것이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추리물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의
DNA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정이 중시되고 초자연적인 사고가 익숙한 문화 속에서는 과학과 증거가 뒷받침되는
합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추리물에 태생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는 법. 하여 한국인이 만드는 추리물은 오리지널리티가 떨어질 뿐 아니라
이야기 얼개도 굉장히 약한 편인데 아마 그런 난점을 조선시대라는 배경을 통해 가리려는 게 아닐까 추측해보는 것이다. 

가령, <그림자 살인>의 배경은 조선 중에서도 황제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일제 강점기라 부르는
1900년대 초반 경성이다. 전쟁과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신문물이 유입됐던 시대, 한복과 하이힐이,
양복과 상투가 자연스럽게 한 몸에 공존하며 문화충돌이 기승을 부리는 모순의 시대가 바로 이때였다. 요는 근대와 반(反)근대가
난립했던 시대의 이중성만큼 앙상한 추리 서사에 대한 면죄부로 기능하기에 좋은 조건이 없다. 추리극의 면모를 유지하되 결정적인
상황에서 이성보다 정에 호소함으로써, 과학보다 초자연주의 현상을 보여줌으로써 합리주의와는 가장 동떨어진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바로 <궁녀>이다.

<궁녀>는 <그림자 살인>의
순덕 이전 이미 내의녀 천령(박진희)을 등장시켜 과학수사를 보여준 전례가 있다. 물론 <그림자 살인>과 달리
<궁녀>는 배경이 정조시대지만 (극중 정확한 시대가 언급되지 않지만 정황상 유추가 어렵지 않다) 정조가 신문물을
들이는데 관대했고 개혁책을 앞세워 고문(古文)을 옹호하는 보수 세력과 대립을 이뤘다는 점에서 경성이 갖는 시대의 이중성과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하여 <궁녀> 역시 궁 내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두고 초반엔 천령의 과학수사를 앞세워
추리극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중반이 지나면서부터 귀신의 존재를 암시하며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극을 해결한다.

<
그림자 살인>은 <궁녀>처럼 극단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더 영리해 보이지도 않는다. <궁녀>처럼
시대의 이중성을 노골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신 면죄부 삼으려는 태도를 취한다. 추리극을 표방하는 <그림자 살인>은
논리적인 사건 해결을 통한 지적 유희의 전달보다 일제를 향한 민족적 복수심의 쾌감을 극대화하는데 봉사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중성은 결국 ‘타락한’ 일본인에 맞서는 ‘정의로운’ 한국인의 대립으로 구체화된다. 이성보다 복수심에 기대 합리주의를 무효화하는
민족주의로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자 살인>에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이라든지 소품들은
사건의 단서 혹은 복선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철저히 무능력한 추리력을 감추려는 볼거리 혹은 일본을 제압하는 의미로써 작용한다.
사건 해결에 전혀 기능하지 못하는 은청기나 만시경 같은 신기한 도구들은 물론이요, ‘총’을 든 홍진호가 ‘칼’을 든 일본인을
이기는 이미지는 관객의 시선을 교란시키기 얼마나 좋은가.

코언 형제는 자신들이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다루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과거는 이국적인 느낌을 줘요. 과거를 스토리의 배경으로 삼으면 더 심도 있게 허구의 세계를 만들
수 있죠. 그렇다고 회고담 같은 건 아닌데, 우리 영화는 우리가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과거를 다루기 때문이죠. 상상력에
의존한다고 봐야죠.” 조선으로 간 추리극 <그림자 살인>은 정확히 반대다. <그림자 살인>은 추리력에
의존하지 않는 이상한 추리영화다.

영진공 나뭉

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 2004), “잘 만들어진 에로틱 스릴러”


변혁 감독의 두번째 장편 <주홍글씨>는 웰메이드 에로틱 스릴러의 외피를 쓰고 있고 실제로 러닝 타임의 대부분을 이미 주어진 장르의 밑그림 위를 따라가는데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탄탄한 기술적 완성도를 기본으로 장르의 컨벤션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말하고자 했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과감히 일탈하는 용기를 보여주는 수준작이다. 먼저 개봉한 <범죄의 재구성>과 <아는 여자>가 끝내 달성하지 못했던 마지막 2%에 해당하는 지점에 성큼 올라선 영화가 <주홍글씨>다. 비평가들과 관객들이 <주홍글씨>를 놓고 뭐라고 혹평을 하고 있는지 열심히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한석규의 컴백 등 영화에 쏠렸던 대중들의 관심에 비례하는 흔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원래 큰 잔치에는 멀리 사는 거지들까지 죄다 몰리곤 하지 않던가.

물론 몇가지 아쉬운 점이 눈에 띄기는 한다. 주인공들이 영위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생활 환경(트랜디 정장만 입어주는 강력반 형사들이나 재즈바에서의 현악 합주, 독신 재즈가수 집의 초호화판 인테리어)이나 몇 군데에서 발견되는 문어체를 벗어나지 못한 대사의 어색함 등은 잘 만든 영화이긴 하지만 왠지 아이 캔디를 우선 지향하는 에로틱 스릴러의 전형을 보는 듯 하다. 그러나 뻔한 내용의 불륜 영화를 패턴을 밟아가던 <주홍글씨>는 일순간에 지금까지 쌓아온 럭셔리 맨션 전체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모험을 감행한다. 허영의 불꽃을 뒤따르는 인과응보식의 전복적인 내러티브가 새로울 것은 없지만 <주홍글씨>는 정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전복을 제시하고 강조하고자 했던 주제를 뒤늦게 드러낸다. <주홍글씨>는 어느 누구도 절대 악인으로 내몰지 않으면서도 이제껏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던 모든 장면들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이 재해석된 영화의 요점을 관객들은 별로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듯 하다.

개인적인 아쉬움은, <주홍글씨>에서의 ‘형벌의 공간’을 좀 더 지옥 같은 현장으로 남겨두었으면 좋지 않았겠나 하는 점이다. ‘장난 처럼 시작된’ 유혹과 그것에 응답한 인간이 어떤 형벌의 현장으로 인도받게 되는지를 부각시키려고 작정했었다면 두 남여 주인공의 애틋한(?) 과거지사를 밝힘으로써 면죄부를 부여하는 수순은 밟지 말았어야 했을텐데 <주홍글씨>는 마지막에 밝혀지는 감춰졌던 사연을 통해 완전한 희생자로만 보였던 인물 역시 같은 ‘죄와 벌’의 굴레 속의 동일한 존재로 끌어들이는 대신, 순수한 욕망의 화신들로 보였던 인물들에게는 동정의 여지를 남김으로써 주제의 부각을 약간 희석시켜버린 결과를 낳지 않았나 싶다. 피칠갑 보다 더욱 잔인한 지옥의 구현이 못내 아쉽다.


영진공 신어지

<스카우트>, 웃음과 재치 속에 비극을 담는 하나의 전범

스포일러를 잔뜩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Y대학 야구부 직원인 호창(임창정)이 고3 괴물투수 선동열 스카웃이라는 막대한 사명을 띠고 광주에 출장을 간다. 모처에서 비밀훈련을 한다는 선동열의 자취를 좇고, 그의 부모를 찾아가 조르는 한편, 그는 7년 전 갑자기 결별을 선언하고 사라져버린 옛사랑 세영(엄지원)과 재회한다. 한 축으로는 선동열이 가기로 예정한 K대학 야구부 직원의 집요한 방해를 뚫고 선동열을 뒤쫓는 모험, 그리고 또 한 축으로는 세영을 마음에 둔 주먹 출신 곤태(박철민)의 견제 속에서도 마음 깊이 미진하게 남은 세영과의 지지부진한 관계. 이 둘은 영화의 초반을 평범하고 다소 도식적인 코미디로 끌어간다.


이 두 축이 만나는 지점은 광주항쟁 ‘직전’의 대규모 시위이다. 마침내 선동열의 아버지가 호창에게 마음이 기울었을 무렵, 그는 세영이 자신을 왜 떠났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그 자신도 지우고자 했던 기억, 그래서 실제로 잊어버리고 있던 어떤 사건 때문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호창이 이 사건을 떠올리고는 세영을 찾아 헤매는 모험인데, 여기에 시대적 비극이 직접적으로 얽히면서 영화는 긴박감을 띄게 된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는 초반에 내세웠던 유머와 코미디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시대적 비극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다. 영화의 비극적 코드는 웃음 속에 대충 끼워넣는 휴머니즘 코드로서가 아닌, 그 웃음과 적절히 조응함으로써 더욱 배가되는 비극성, 그럼에도 ‘웃으며 피눈물을 쏟아내는’ 비극성을 표현해낸다.


회사 편에서 노조를 깨뜨리고 파업을 깽판놓던 구사대의 학교 버전, 구교대는 실제로 학교에 존재했다. 그네들이라고 좋아서 데모하는 다른 애들을 두들겨 팼겠냐만, 운동으로 학교에 스카웃된 학생들과 소위 시험쳐서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높은 장벽이 분명히 존재했고, 때로 끼어드는 적대심에는 분명 구교대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위하는 학생들을 깽판놓기 위해 운동부 학생들을 동원할 때 학교는 한마디로 “너희들 불러다 공부시켜주고 운동시켜주는 게 누군데.”였던 건데, 이것은 영화에서도 “니들이 공짜로 운동해?”였나, 하는 대사 한 마디로 압축되어 표현된다. 결국 시위하던 학생들과 운동부 학생들의 싸움이 일어나는데, 이 장면의 비극성은, 우리가 매일 보는, 거리에서 벌어지는 시위에서 충돌하는 시위대와 전경의 모습 그대로이기도 하고, 혹은 광주에서 대치했을 시위대와 군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세영이 왜 자기를 떠났는지를 깨달았을 때, 그것을 돌이키기 위해 그가 취했던 액션.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숨기고 있던 비장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돌이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했고, 경찰서에 잡혀있는 세영을 드디어 구출해낸 후 그녀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과거의 과오를 대하는 가장 올바른 방식이 아니겠는가. 호창은 참으로 용기있는 사람이고, 이것이야말로 소시민 호창의 위대한 영웅의 승리이기도 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장면은 두 주연배우의 연기가 너무나 빛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원래 가장 훌륭한 코미디가 ‘슬픈’ 코미디인 것은, 코미디라는 장르의 전통 중 하나가 삶의 ‘비극’을 뒤트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현석 감독은 임창정이란 배우가 가진 장기, 즉 ‘처절한 웃음’을 표현해 낼 줄 아는 그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 표현한다. 역사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소시민이 처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상황, 그리고 너무나 거대한 비극 사이에 껴 있는 소소한 비극이기에 자연스럽게 희극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러한 희비극적 상황을, 임창정은 특유의 우직한 성실함과 넉살로 돌파한다. 그가 미친 듯이 세영을 향해 뛰어가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관객이 있을까? 광주에 대해 여전히 ‘사태’라 생각하든 ‘항쟁’이라 생각하든, 그 장면에서의 임창정의 진심에 감동하지 않을 관객이 있을까? 이 장면에서 임창정이 호창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 울음은 가슴을 찢어놓는 통한의 울음이다. 한편 착잡하고 비밀을 가진 듯한 세영의 모습은 호창의 회상 속에서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했다가(이것이 연애의 ‘회상’이기에 더욱 그렇겠지만), 호창이 그 사건을 기억해내는 장면에서 그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모습 때문에 그녀의 상처와 경악과 슬픔이 더욱 비극성이 배가되어 표현된다. 이 장면에서 엄지원의 연기 역시 그 고통을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의 마지막, 호창의 운명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가운데, ‘현재’ 시재에서 TV에 등장한 선동열을 보며 세영은 회상에 젖는다. 평범한 가정의 어머니이자 아내로, 그리고 40대 중년의 소시민이 되어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호창 역시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으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었고, 역사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걸, <스카우트>는 웃음 속에서 넌지시 보여주고, 넌지시 이들에게 찬가를 바친다. 영웅이 아니기에 진정한 영웅인 사람들의 모습을, <스카우트>는 너무나 훌륭히 그려내었다. 상업영화, 특히 ‘코미디영화’의 틀 안에서, <스카우트>는 자칫 무겁고 경직될 수 있는 비극을 매우 모범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면서도 그 비극성에 함몰되지 않는 지혜를 보여준다. 그것이 쉽지 않음을 알기에, <스카우트>가, 김현석 감독이, 그리고 임창정과 엄지원이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럽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