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 하녀가 아니라 마님(들)이 주인공이다






김기영 감독의 원작이 무려 1960년도 작품이다. 아무리 유명하고 가치가 높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50년 전 영화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와서 리메이크를 한다는 기획 자체가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흥행 성적이야 내 걱정할 바는 아닌 거고, 그저 한 사람의 유료 관객으로서 보기에 영 어색하지나 않을런지 괜한 걱정이 앞서는 쪽이었다. 때 맞춰 깐느 경쟁부문에도 진출했겠다, 꽤 많은 상영관을 차지하며 개봉했지만 역시나 수도권 상영관 안의 객석은 상당히 한산한 편이다.

‘하녀’라는 단어가 주는 전근대적인 뉘앙스와 알려질 대로 알려진 원작의 설정이 지금의 관객들에게 그리 큰 호감이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듯 하다.











사실 지금이나 원작이 만들어졌던 그 시절에나 ‘하녀’라는 전근대적인 단어가 매우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매한가지라고 생각된다.

특별히 잘 사는 집안이 아니더라도 식모나 그외 집 안 일 도와주는 언니 한 명 쯤은 데리고 살았던 그 시절에도 그들을 ‘하녀’라고 부르며 하대하지는 않았기에 김기영 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하녀>라고 이름 지을 때에는 그녀의 역할이나 좀 더 확장된 사회적 맥락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으리란 생각을 하게 된다.




임상수 감독이 다시 만든 <하녀> 역시 단 한 번도 은이(전도연)를 하녀라고 지칭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 하녀가 존재했던 봉건 시대에나 동명의 두 영화가 만들어진 시점에도 그 역할 자체와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하녀>의 도입부는 누군가의 집 안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에 온갖 아랫 일을 하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비춰주는 일에 집중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그 하녀 한 사람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고 그 댓가를 돈으로 받아 생활하는 우리 대부분의 하녀 또는 하인 생활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되고자 한다.











그러나 하녀의 정의를 새롭게 하는 것은 영화 <하녀>가 관객들을 그 이야기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 취한 출발점에 불과하다.

주인공 은이의 캐릭터 역시 원작의 이상성격자와는 많이 다르다. 지극히 정상적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나이브한 면까지 갖춘 – 그리하여 어린 애한테 착하고 불쌍하다는 말을 듣게 되는 – 성격의 소유자로 그리면서 관객들이 은이의 입장에서 상황을 지켜볼 수 있게 만들 뿐이다.

정작 <하녀>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은이가 하녀의 입장이 되어서 들어간 ‘그들의 세계’를 묘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영화 <하녀>는 제목이 되고 있는 하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하녀라는 존재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그들이 아주 무서운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때 그 사람들>(2004)을 통해 10.26 사건 현장에 있었으나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하면서도 결과적으로 ‘그 때 그 분들’의 이야기에 집중된 작품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듯이 임상수 감독은 <하녀>를 통해서도 하녀의 윗분들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는 작품을 내놓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것이 임상수 감독의 장기인 동시에 한계가 되는 점이기도 한 바, <하녀>는 임상수 감독이 카메라로 다시 쓴 <재벌(의 사생활)을 생각한다>에 다름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나 혼자만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안의 딸로 출연한 아역 안서현의 큰 눈과 뚱한 표정이 우리나라 대표 재벌가인 이씨 집안 사람들을 생각나게 한다. <하녀>의 마지막 컷을 차지하는 얼굴도 다른 주연 배우들이 아니라 다름아닌 아역 안서현의 차지가 된다. 어쩌면 <하녀>라는 영화 자체가 임상수 감독이 내던지는 조롱 섞인 농담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주인 남자(이정재)와 여자(서우), 그리고 은이(전도연)의 뻔한 갈등 관계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하녀>가 충분히 각색되고 의도된 작품으로서의 성격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 주연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주인 남자의 장모(박지영)와 집사 조병식(윤여정)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주인 남자가 가진 막대한 부의 힘을 잘 이해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메카니즘을 이용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취하는 기생형 인물이라는 점이다.




추측컨데 왠만큼 잘 사는 집안 출신인 장모조차도 주인 남자 집안의 절대 권력 앞에서는 기도 못펴는 수준이 되고 마는 바, 장모는 시집 보낸 딸을 통해 그 권력의 쾌적함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인물로서 자신의 계획과 의도에 방해가 되는 은이의 존재를 제거하는 데에 처음부터 몸소 앞장 서는 역할을 한다.

조병식은 고참 하녀로서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꼴을 오랜 세월 동안 감수하며 자기 아들을 또 다른 권력 체계에 편승시키는 데에 성공한 인물로 은이를 마음으로부터 동정은 하되 그 집안이 요구하는 바를 우선적으로 수행하는 하수인 역할을 하게 된다.

임상수 감독이 원작에서 서스펜스 스릴러를 걷어내고 그 대신 ‘게임의 법칙’을 채워넣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주인 남자의 장모와 집사 조병식이고 <하녀>가 원작을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으되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각색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부분 역시 두 인물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박지영이 연기한 장모 역할 덕분에 – 결국 그 시스템 안에서 머물기로 하는 한 어느 누구도 하녀 신세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하녀들>이 되었을 때 영화의 메시지에 좀 더 부합한다 –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던 영화이긴 했지만 기술적으로 완벽한 수준인 것은 아니다.

영화제 출품 일정을 맞추느라 서둘렀던 탓인지 약간 생뚱맞게 보일 수도 있는 에필로그와 함께 – 이 에필로그 때문에 <하녀>는 확실하게 하녀가 아니라 하녀를 부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읽혀진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려는 장면인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분위기가 영화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붕 뜨는 느낌을 준다 – 은이의 최후 역시 후련한 감은 있지만 극적인 상황을 좀 더 길게 이끌어갔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은이가 하혈을 한 후 조병식이 주인 남자를 보며 무언가 의사전달을 하다가 다음 컷에서 갑자기 은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표정으로 바뀌는 것은 분명 기술적인 실수다. 주절주절 많은 설명을 하는 법이 없는 이런 영화에서 주요 등장 인물들의 표정 하나가 이야기의 흐름에 맥을 짚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거의 점프 컷에 가까운 이 부분의 편집 실수는 적잖이 실망스러운 수준이라 하겠다.

아울러 은이의 폭주에 앞서 조병식의 입장이 갑작스럽게 전환되는 부분 역시 통렬한 느낌을 전달해주기 보다는 너무 급작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느낌을 준다. 아무래도 마지막 씨퀀스를 위해 좀 더 많은 촬영을 해놓고도 러닝타임 때문에 대폭 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임상수 감독은 그 앞 부분에서 이미 하고 싶었던 얘기를 다 해버린 참이었으니 아마도 별도의 디렉터스컷 따위는 만들어지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영진공 신어지

 




 

“그림자 살인”이 조선으로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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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극을 표방하는 <그림자 살인>은, 실은 추리를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상한 추리극이다. 시작은
그럴싸하다. 시커먼 밤 인적 없는 숲속에서 시신 한 구가 누군가의 손에 운반된다. 시체는 누구일까? 시체를 운반하는 자가
범인일까? 궁금증은 곧 풀린다. 시체는 고관대작의 아들로 밝혀지고 의학도 장광수(류덕환)가 해부실습을 위해 주워왔던 것이다. 이
사실을 파악한 장광수는 누명을 벗기 위해 사립탐정을 고용하니 그가 바로 홍진호(황정민)! 홍진호는 발명가 순덕(엄지원)이 고안한
도구들로 진범 찾기에 나선다. 

박대민 감독의 <그림자 살인>은 여러 모에서 구미가 당기는 작품이다.
충무로 보증수표 황정민에, <놈놈놈>의 조화성 미술감독이 참여한 볼거리 가득한 경성, 그리고 화려한 액션까지.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추리는 없다. 영화의 모든 패를 던져버리는 초반에 다 드러나 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홍진호의 등장은
<차이나타운>(1974)의 기티스(잭 니콜슨)와 캐릭터 맥락이 일치한다. 남편이 집나간 사이 불륜을 벌이는 부인의
뒤꽁무니를 쫓아 벌거벗은 사진을 증거랍시고 찍어대는 한심한 사립탐정, 하지만 소싯적 지방검사를 지낸 적 있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 정의감 따위 엿 바꿔 먹고 돈(혹은 여자)에 혹해 사건을 맡게 되는 점 등 두 인물은 판박이인 것이다. 고로, 이와
같은 상관관계를 통해 <그림자 살인>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던 사건이
핵심에 다가설수록 더 큰 음모와 연루되어 있고 이를 통해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마주서게 되는 것. (<차이나타운>이
바로 그렇다!)

추리가 주가 되는 작품에서 예측 가능하다는 건 치명적이다. 게임오버다. <그림자
살인>처럼 홍진호가 기티스의 영향 하에 있고, 홍진호와 장광수의 관계가 홈즈․왓슨 콤비를 연상시켜도, 순덕의 존재가
<CSI 과학수사대>의 벤치마킹일지라도 설정은 설정일 뿐 오해하지 말지이니, 이에 관계없이 예측 불가한 전개를
보여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추리극의 재미요, 백미다. 그래서 추리를 다루는 작가는 종종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벌인다고 하지만
의도적으로 독자의 접근을 차단해 흥미를 배가시킨다.

물론 <그림자 살인>에도 관객의 접근을 차단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도무지 추리에 집중할 생각을 하지 않고 관객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려는 것이 문제일 뿐. 안타깝게도
<그림자 살인>의 작가들은 추리극을 쓸 능력이 없어 보인다. 가령, 범인의 정체를 초반에 노출하는데, 그것이 관객에게
혼란을 줄 목적이라지만 제2, 제3의 용의자가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복선이 깔리는 것도 아니고 애당초 호기심을 자아내는
미스터리? 그런 거 없다.

대신 영화는 액션과 경성 풍경에 승부수를 띄운다. <본 얼티메이텀>을
연상시키는 초반 액션장면에 대해 길고 지루하다는 평가가 잇따르는 걸 보면 <그림자 살인>의 노림수는 분명하다. 추리에
대한 부족한 능력치를 강력한 볼거리로 메워보겠다는 것. 그중에서도 내가 관심이 갔던 부분은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조선이라는
점이다.

<그림자 살인>뿐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추리극을 표방한 한국영화를 보면 유독 조선시대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했다. 김대승의 <혈의 누>(2005)가 그랬고, 김미정의 <궁녀>(2007)가
그랬으며, 이 영화가 그렇다. 나는 이것이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추리물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의
DNA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정이 중시되고 초자연적인 사고가 익숙한 문화 속에서는 과학과 증거가 뒷받침되는
합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추리물에 태생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는 법. 하여 한국인이 만드는 추리물은 오리지널리티가 떨어질 뿐 아니라
이야기 얼개도 굉장히 약한 편인데 아마 그런 난점을 조선시대라는 배경을 통해 가리려는 게 아닐까 추측해보는 것이다. 

가령, <그림자 살인>의 배경은 조선 중에서도 황제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일제 강점기라 부르는
1900년대 초반 경성이다. 전쟁과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신문물이 유입됐던 시대, 한복과 하이힐이,
양복과 상투가 자연스럽게 한 몸에 공존하며 문화충돌이 기승을 부리는 모순의 시대가 바로 이때였다. 요는 근대와 반(反)근대가
난립했던 시대의 이중성만큼 앙상한 추리 서사에 대한 면죄부로 기능하기에 좋은 조건이 없다. 추리극의 면모를 유지하되 결정적인
상황에서 이성보다 정에 호소함으로써, 과학보다 초자연주의 현상을 보여줌으로써 합리주의와는 가장 동떨어진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바로 <궁녀>이다.

<궁녀>는 <그림자 살인>의
순덕 이전 이미 내의녀 천령(박진희)을 등장시켜 과학수사를 보여준 전례가 있다. 물론 <그림자 살인>과 달리
<궁녀>는 배경이 정조시대지만 (극중 정확한 시대가 언급되지 않지만 정황상 유추가 어렵지 않다) 정조가 신문물을
들이는데 관대했고 개혁책을 앞세워 고문(古文)을 옹호하는 보수 세력과 대립을 이뤘다는 점에서 경성이 갖는 시대의 이중성과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하여 <궁녀> 역시 궁 내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두고 초반엔 천령의 과학수사를 앞세워
추리극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중반이 지나면서부터 귀신의 존재를 암시하며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극을 해결한다.

<
그림자 살인>은 <궁녀>처럼 극단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더 영리해 보이지도 않는다. <궁녀>처럼
시대의 이중성을 노골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신 면죄부 삼으려는 태도를 취한다. 추리극을 표방하는 <그림자 살인>은
논리적인 사건 해결을 통한 지적 유희의 전달보다 일제를 향한 민족적 복수심의 쾌감을 극대화하는데 봉사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중성은 결국 ‘타락한’ 일본인에 맞서는 ‘정의로운’ 한국인의 대립으로 구체화된다. 이성보다 복수심에 기대 합리주의를 무효화하는
민족주의로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자 살인>에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이라든지 소품들은
사건의 단서 혹은 복선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철저히 무능력한 추리력을 감추려는 볼거리 혹은 일본을 제압하는 의미로써 작용한다.
사건 해결에 전혀 기능하지 못하는 은청기나 만시경 같은 신기한 도구들은 물론이요, ‘총’을 든 홍진호가 ‘칼’을 든 일본인을
이기는 이미지는 관객의 시선을 교란시키기 얼마나 좋은가.

코언 형제는 자신들이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다루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과거는 이국적인 느낌을 줘요. 과거를 스토리의 배경으로 삼으면 더 심도 있게 허구의 세계를 만들
수 있죠. 그렇다고 회고담 같은 건 아닌데, 우리 영화는 우리가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과거를 다루기 때문이죠. 상상력에
의존한다고 봐야죠.” 조선으로 간 추리극 <그림자 살인>은 정확히 반대다. <그림자 살인>은 추리력에
의존하지 않는 이상한 추리영화다.

영진공 나뭉

“박수칠 때 떠나라 (2005)”, 엔딩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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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크 존즈의 연출 보다, 그리고 니콜라스 케이지나 다른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보다 찰리 카우프먼의 시나리오로 기억되는 “어댑테이션”(2002)에는 로버트 맥기라는 실존 인물(브라이언 콕스가 연기)이 시나리오 작법 강의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는 엔딩이 중요하다. 엔딩이 좋으면 모든 걸 용서 받는다’는 식의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장진 감독의 “박수칠 때 떠나라”는 대중 영화에서 결말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해주는 영화다. 차승원의 다른 영화 “혈의 누”와 같이 결말 부분’만’ 괜찮았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 마지막 10분이 주는 임펙트는 정말 근사하다. 새 차를 샀다며 드라이브를 시켜주겠다고 해서 따라 나섰더니 옵션이나 이것저것이 참 좋긴 한데 길이 막혀 제대로된 속도감을 느껴보지 못하다가 막판에 집에 다와서 180Km를 잠깐 밟아보고 내린 느낌이다. 그리하여 결론은 ‘그 차 참 좋긴 하네’하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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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칠 때 떠나라”는 살인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가, 또는 살인의 동기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의 진짜 답을 마지막 최후의 순간까지 꼭꼭 숨겨놓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형적인 형사 추리물의 기본 형식을 갖춘 영화다. 여기에 장 진 특유의 코미디와 사회 풍자극의 요소를 곁들였고 후반부에 이르면서는 다소 생뚱 맞게 느껴지는 초현실적인 요소까지 접목한다. 그러나 영화는 검사와 유력한 용의자의 폭발적인 감정 충돌이 너무 급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살인 사건의 조사 과정 마저 TV로 생중계하는 세태 풍자의 맛도 그다지 신랄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못하는 편이다. 그런 와중에 하나 둘씩 밝혀지는 살인의 ‘참여자’들은 너무 당연해서 실망스럽기도 하고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맥이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몹시 느슨한 형태로 그저 연결만 되어 있는 것 같았던 서말의 구슬들을 한순간에 쫙 잡아당기면서 아주 근사한 보배로 돌변시키는 건 결국 영화의 최종 결말이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그 영화 참 괜찮네’하게 된다.

“박수칠 때 떠나라”의 엔딩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스포일링을 피하고 언급할 수 있는 건 한재권의 음악 정도다. 서정적이면서도 박진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만들어진 배경음악은 오프닝 씨퀀스에서부터 듣는 귀를 무척 즐겁게 하더니 대사 없이 표정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배우들과 함께 이 영화가 애초에 상기시키고자 했던 감정을 제대로 전달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박수칠 때 떠나라” 전체의 일등 공신은 물론 영화를 쓰고 연출한 장진 감독이지만 그 다음 자리는 음악을 맡은 한재권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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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갑자기 숲인가? 철저히 세트 안에서만 움직이는 영화 아니었나?
실제로 영화의 대부분은 세트 안에서 진행된다. 취조실과 수사본부,
방송국 스튜디오, 그리고 TV 브라운관과 CCTV 폐쇄회로까지 계속
닫힌 공간 안에만 머문다. 그러나 결국 “박수칠 때 떠나라”는 관객을
숲속으로 인도하려는 영화다. 범인이 누구인가, 왜 죽였나라는 선정적인
내용물에만 관심 갖던 사람들에게 잠시 눈 돌리는 기회를 선사한다.


영진공 신어지

허진호,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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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터가 더 어울립니다.
가진 것은 몸뚱이뿐인 인생이 바로 저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인데, 그 몸뚱이마저, 건강조차 갖지 못한 사람 둘이 만나 사랑을 합니다. 아무것도 없었던 사람 둘이 만나 사랑을 갖고 집도 갖고 행복도 갖게 되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을 텐데, 거참 그런 행복이 오래 가질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원래 간사한 거긴 하지만 또 인간 중엔 행복을 도저히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남자가 기적적으로 낫고 보니 슬슬 허파에 바람이 듭니다.


세상에 신파도 이런 신파가 없지만, 허진호 감독은 언제나 멜러를 찍으면서도 언제나 그 멜러는 대단히 드라이했습니다. 그의 신파는 눈물을 최대한 말려버리는 신파였습니다. <행복>에선,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봄날은 간다>에서 냉정한 한두 마디로 유지태를 떠나보냈던 이영애인데, 여기서의 황정민은 술먹고 주정하며 울면서 감정을 토해내고, 임수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임수정은 길을 달리며 울음을 터뜨리다가 목놓아 통곡까지 합니다. 어머나. 허진호가, ‘내놓는 감정’에 조금은 덜 쪽팔려할 줄 알게 됐나 봅니다. ‘길을 달리며’ 우는 건 다른 영화에서라면 유치했겠지만, 폐가 40%밖에 안 남은 임수정이 달리는 건 마음이 아픕니다.


섹스도 할 수 있는 엄마 대용으로 여자에게 어리광 부리다가, 지가 마음이 변해 헤어지고 싶은데 ‘나쁜 놈’ 되는 건 또 싫어서 그 책임을 여자에게 미루는 그런 개찌질이 같은 남자들이, 좀 있습니다. 먼저 이별을 통고하면서 나쁜 놈 역할조차 상대에게 떠넘기려 하는 무개념 무책임 남자놈들은 연애할 자격이 없는 놈들입니다. 어디 가서 또 어떤 여자들 등쳐먹고 가슴을 찢어놓으려고요. 그래서 세상엔 ‘착한 척’하는 남자들이 제일 재수없고 나쁜 놈들인 겁니다. 남자가 갸르랑거리는 가늘고 높은 고양이 목소리를 내면서 간이고 쓸개고 내줄 것처럼 애교떨며 착한 ‘척’을 할 때일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다른 여자한테 작업멘트가 담긴 이메일이나 쪽지를 보내거나 다른 여자의 머리와 손을 쓰다듬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헤어지는 순간에도 당신 뒷통수를 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찌질이들은 헤어지고 한참 지나서까지도 뒷통수를 치기도 한답니다. 이런 찌질이들의 단골멘트가 “너에겐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어서”입니다. 너무 부족한 사람이면 노력을 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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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붙이지 않고 그냥 이미지와 컷으로만 가서 다행인 씬.


하지만요, 이건 워낙 황정민이 그런 놈이어서 그랬던 거고, 사실 그 황정민이 이해가 안 되는 건 또 아닙니다. 저도 별로 고고하고 착한 사람이 아닌지라, 내가 상처를 받은 만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줬고, 거기엔 제가 인식하고 있는 것도, 제가 지금까지도 깨닫지 못한 채 부지불식간 준 것도 있습니다. 모나게도 모질게도 못나게도 찌질하게도 굴어봤고, 지금도 종종 그러합니다. 내가 모질게 굴었던 사람, 내가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 내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과 완전히 다른 사람만은 아닐 겁니다. 원래 관계라는 게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니까요. 이것은 연인관계에서만 통용되는 법칙도 아닙니다. 어떤 친구와, 혹은 어떤 선배와, 어떤 후배와, 우리는 날마다 새로이 관계를 갱신하고 서로에게 조금씩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그제껏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의 흔적(물론 전 연인 내지 배우자의 흔적을 포함해)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과거를 교훈삼아 더욱 열심히 사랑할 수 있게 됐을 때 우리도 한뼘쯤 다시 자라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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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예감.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납니다. 여자의 예감은 원래 무서운 겁니다(…)


만약 내가 지금 사랑을 잘 하고 있다면, 처음부터 잘했을 가능성보다 찌질하고 못났던 과거를 교훈삼은 결과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다만 그렇게 사람 가슴 찢어놓고 갔으면 잘 살 것이지, 왜 그렇게 다시 폐인이 됐나, 싶습니다. 하긴, 나는 여전히 아프고 사막을 헤매는데 나 버리고 간 놈이 잘 먹고 잘 살고 연애도 잘 하고 있다고 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약오르고 열받는 일이 되겠지요. 사람 마음이란 왜 이리 좁고 간사하고 못돼먹었을까요? 아, 저만 그런 거라고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진정 사랑했다면, 그가 잘 살아도, 못 살아도 한동안은 신경이 쓰일 겁니다. 이것은 꼭 그에게 마음과 미련이 남아서는 아닐 겁니다. 누군가와 함께 한 시간의 나도, 지금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 하는 나도, 같은 사람이니까요.


허진호 감독이 말하기를, 황정민이 영수 캐릭터를 조금 더 이해갈 만하게, 결을 불어넣어 줬다고 합니다. 그렇더라고요. 저도 황정민이 무척 미우면서도, 근데 또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짠하기도 하더라고요. 마냥 미워하지만은 못 하겠더라고요. 임수정도 황정민도, 둘 다 나의 모습을, 혹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코 화해하지 못하는 한 사람 안의 두 개의 자아일 수도 있겠지요. 누군가에게 특별한 증오와 혐오를 품는 건, 그가 나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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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처럼 아파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여겨지는 순간들. 누구나 가슴에 삼천원 있는 겁니다아~


그냥, 사랑은,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사랑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사랑 자체가 현실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현실엔 가끔 이벤트가 필요하지만, 이벤트로만 이루어진 현실은 불안하고 연속성이 없습니다. 임수정과의 시골생활은 임수정에겐 현실이었지만 도시남자 황정민에게 결국 ‘현실’, 내지 ‘새로 선택한 현실’이 아니라 ‘이벤트’였고 ‘가상세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관계가 오래갈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 결국 사랑이 진정한 행복으로 결실을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에 대한 답을 하나 얻은 것 같습니다. 원래 가장 상투적인 이야기가 가장 고질적인 고민과 물음에 대한 답을 품고 있는 법입니다.


ps. 그간 자꾸 “못생기지만 정감 가는 아가씨”로만 나오던 공효진이 세련되고 시크한 역으로 우정출연합니다. 최근 <M>에서도 그런 역으로 나오던데, 슬슬 그런 쪽으로 이미지를 바꾸려는 듯. 사실 공효진은 굉장히 우아하고 세련된 옷발을 소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좋은 몸매와 감각의 소유자이기도 하죠.


영진공 노바리

<사생결단> – 남자들의 팬시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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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저렇게 섹시할 수는 없단 말이지 . 아니 . 왼쪽 말고 오른쪽 말야 .

 이 영화 감독이 ‘최호’ 라는 사람인데 , 그 사람이 전에 뭘 만들었는지는 모르겠고 내가 개인적으로 황정민에게만 너무 기대를 하고 있었나봐 . 하긴 황정민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와이키키 브라더스 , 로드 무비 , 바람난 가족 등의 비주류 영화와 천군 , 너는 내 운명 , 검은집 등등의 주류 영화들이 전주 비빔밥 마냥 마구 뒤섞여있단 말이지 . 그가 나온 주류 영화는 내가 본 일이 없으니 … 난 비주류 황정민을 기대했나봐 .


 이건 그냥 말 그대로 ‘남자영화’ 야 . 여자들이 왜 , 간혹 딱히 크게 필요한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팬시점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시간을 때우다 나오곤 하잖아 . ‘사생결단’ 이 그래 . 이건 남자들의 팬시점같은 거라고 . 술 , 담배 , 다툼 , 경찰 , 조폭 , 여자 , 마약 , 네온사인 , 밤 , 총 등등 남자들이 좋아하는건 다 포진해있잖아 (사실 그런건 나도 좋아해) .


 난 그래서 영화를 본 뒤엔 팬시점에서 두시간 동안 돌아다니다가 빈 손으로 나온 기분이 됐어 . 이런게 진짜 킬링 타임 用 영화라고 .


영진공 담패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