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하”, 홍상수식 남녀탐구생활 경남 통영편






홍상수 감독의 10번째 작품 제목은 그야말로 신선의 경지다. 한자로 여름을 뜻하는 하(夏)자를 세번 사용해서 웃음 소리의 의성어를 제목으로 사용했고 – <극장전>(2005)에 극장 앞이란 뜻과 극장 이야기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듯이 <하하하>도 웃음 소리인 동시에 여름 이야기라는 뜻도 된다 – 영화가 끝날 때 등장 인물들은 각자의 에피소드를 마치며 모두들 하하하 하고 웃는다. 물론 제목처럼 관객들에게도 하하하 크게 웃을 일을 제공하는 영화가 <하하하>이기도 하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민화나 풍속화가의 그림을 보는 듯한 해학적인 분위기를 띄면서 갈수록 관객 친화적으로 변모해왔고 그 변화는 <하하하>에서 더욱 깊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상경의 캐릭터는 거의 정신적으로 덜 자란 애어른에 가까울 지경이 되었는데 – 그런 캐릭터에 맞춰 둥글둥글하게 살집을 찌우고 출연했다 – 그런 엉뚱함 덕분에 영화 전체가 더욱 재미있어지기는 했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작위적인 느낌을 받게 된 이유가 되기도 한다.

홍상수 감독 영화의 관객 친화적인 성향은 나레이션의 활용을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관객들에게 극중의 상황을 명시적으로 해설해주기까지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는 데에는 효과가 꽤 있는 것 같다.

<하하하>는 선후배 사이인 문경(김상경)과 중식(유준상)의 술자리 대화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형식을 띄면서 매번 두 인물의 나레이션이 섞이게 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매번 크게 다를 바 없는 내용을 다루곤 한다. 남자(들)와 여자(들)가 등장하고 이들이 만나서 관계를 – 다양한 의미에서의 – 맺는다. 이제는 관객들조차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새로운 내용을 기대하지 않는 듯 하다. 그 대신 이전 작품들에서와 거의 다를 바 없는 남녀들의 이야기를 새 영화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해서 풀어가는지를 즐기기 시작한 것 같다.

이것은 지난 15년 간의 작품 활동을 통해 홍상수 감독이 관객들을 – 비록 일부 관객층에 제한되는 것에 불과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 학습시켜온 일종의 성과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지속적으로 보아온 관객들은 처음으로 의식적인 학습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영화의 형식미라는 것을 내용 보다 우선시해서 즐길 수 있게 된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마치 10 여 년 이상 동일한 소재로 그림을 그려온 화가처럼, 홍상수 감독도 매번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조금씩 다른 형식으로 변주하며 작품을 만들어 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영화를 예술 감상법으로써 대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는게 아닐까.











홍상수 감독 영화의 형식미라는 것은 스토리텔링의 근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댓구의 변주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예술만의 고유한 형식 미학을 찾기 위해 온갖 고민과 실험을 해온 다른 분들의 노고에 비하면 일견 시시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홍상수 감독의 영화의 형식미는 그것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을 거듭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관객들과 제법 조응을 잘 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렇게 댓구의 변주를 매번 새롭게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하하하>는 다시 한번 큰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경과 중식이 청계산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각자가 경남 통영에서 겪었던 일을 한 대목씩 들려주는데 두 사람은 통영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거의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왔으면서도 서로 간에는 한번도 마주치지 않는 기묘한 플롯을 보여준다.

이들이 각자 다닌 식당, 모텔, 커피숍 등은 모두 동일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거의 같은 시점에 일어나는 일들임에도 두 사람은 천연덕스럽게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자 마시자”라며 씨퀀스 사이사이에 흑백의 스틸컷으로 등장해 추임새를 넣곤 한다. 어찌보면 두 사람의 대화는 이승과 저승의 중간 어딘가에서 나누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주는데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생시 같고 막상 이야기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은 이 세상 사람 같게 느껴지지가 않으니 이 역시 <하하하>의 독특한 형식적 재미가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하하하>에서는 그 놈이 다 그 놈 같고 그 년들도 다 같아 보인다.











포스터를 통해 김상경, 유준상, 문소리가 출연하는 것은 미리 알았지만 김규리(a.k.a 김민선)의 등장은 와, 정말 즐거웠다. <아이언맨 2>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우물에 빠진 영화 한 편 건진 정도까지는 못되었지만 덕분에 출연진들의 평균 연령대가 조금은 낮아진 효과가 –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살짝 회춘한 듯한 – 분명히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9)에서 엉까지 말라면서 버럭대던 유준상이 이번 작품에서 당당히 주연 자리를 꿰어찼듯이 김규리도 다음 작품에선 주연으로 나와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가져본다.




그러고 보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의 등장 인물들은 그 연령대가 갈수록 다양화되고 있다. <하하하>에서 김상경, 유준상, 문소리, 예지원이 주력 부대라면 김규리와 김강우는 비교적 젊은 축이라 할 수 있고 여기에 아무나 마음에 들면 다 자기 양녀, 양아들로 삼는 – 이것이 바로 조문경과 왕성옥의 비극. 하하하 – 문경의 어머니로 윤여정이 주연급 조연으로 등장한다. 윤여정과 비슷한 연령대로 기주봉이 출연하긴 했는데 아쉽게도 이쪽에서는 별다른 에피소드가 나와주질 않았다. 문경의 꿈 속에 이순신 장군으로 등장하는 김영호도 <밤과 낮>(2007)에서 처음 홍상수 감독 작품과 인연을 맺은 이후 역시나 그 끈을 놓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영화 배우들에게 홍상수 감독 영화는 연기파 배우의 산실이자 재활 공장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다. 저예산으로 만들어지고 관객도 그리 많이 드는 편은 아니지만 일단 출연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대부분 다른 좋은 출연 기회를 잡곤 한다. 홍상수 감독 영화가 갖춘 나름대로의 선순환하는 에코 시스템 – 친환경 말고 생태계 – 이기도 하다.











그러잖아도 다음 여름은 남해안 여행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통영은 이제 완전히 필수 코스다. 나폴리 모텔이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 들려보고 호동 식당에서 다찌와 복국을 먹어봐야겠다. 경남에서는 무조건 씨원 소주라고만 생각했었는데 <하하하>를 보니 화이트가 협찬했나 보더라 – 그런데 왜 담배는 말보로야? KT&G는 대체 뭐하는 건지.

생각해보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전국 각지를 순회한다. 딱 한번 <밤과 낮>에서 파리로 해외 순방을 다녀오시기도 했었지. 대강의 시납시스만 들고 배우들과 지방에 내려가서 그날 그날 대사를 적어놓은 종이 쪼가리를 나눠주면서 영화를 찍는다더라. <하하하>는 홍상수 감독의 남녀탐구생활 시리즈, 경남 통영편이다.


영진공 신어지

 

“하녀”, 하녀가 아니라 마님(들)이 주인공이다






김기영 감독의 원작이 무려 1960년도 작품이다. 아무리 유명하고 가치가 높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50년 전 영화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와서 리메이크를 한다는 기획 자체가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흥행 성적이야 내 걱정할 바는 아닌 거고, 그저 한 사람의 유료 관객으로서 보기에 영 어색하지나 않을런지 괜한 걱정이 앞서는 쪽이었다. 때 맞춰 깐느 경쟁부문에도 진출했겠다, 꽤 많은 상영관을 차지하며 개봉했지만 역시나 수도권 상영관 안의 객석은 상당히 한산한 편이다.

‘하녀’라는 단어가 주는 전근대적인 뉘앙스와 알려질 대로 알려진 원작의 설정이 지금의 관객들에게 그리 큰 호감이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듯 하다.











사실 지금이나 원작이 만들어졌던 그 시절에나 ‘하녀’라는 전근대적인 단어가 매우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매한가지라고 생각된다.

특별히 잘 사는 집안이 아니더라도 식모나 그외 집 안 일 도와주는 언니 한 명 쯤은 데리고 살았던 그 시절에도 그들을 ‘하녀’라고 부르며 하대하지는 않았기에 김기영 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하녀>라고 이름 지을 때에는 그녀의 역할이나 좀 더 확장된 사회적 맥락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으리란 생각을 하게 된다.




임상수 감독이 다시 만든 <하녀> 역시 단 한 번도 은이(전도연)를 하녀라고 지칭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 하녀가 존재했던 봉건 시대에나 동명의 두 영화가 만들어진 시점에도 그 역할 자체와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하녀>의 도입부는 누군가의 집 안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에 온갖 아랫 일을 하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비춰주는 일에 집중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그 하녀 한 사람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고 그 댓가를 돈으로 받아 생활하는 우리 대부분의 하녀 또는 하인 생활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되고자 한다.











그러나 하녀의 정의를 새롭게 하는 것은 영화 <하녀>가 관객들을 그 이야기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 취한 출발점에 불과하다.

주인공 은이의 캐릭터 역시 원작의 이상성격자와는 많이 다르다. 지극히 정상적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나이브한 면까지 갖춘 – 그리하여 어린 애한테 착하고 불쌍하다는 말을 듣게 되는 – 성격의 소유자로 그리면서 관객들이 은이의 입장에서 상황을 지켜볼 수 있게 만들 뿐이다.

정작 <하녀>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은이가 하녀의 입장이 되어서 들어간 ‘그들의 세계’를 묘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영화 <하녀>는 제목이 되고 있는 하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하녀라는 존재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그들이 아주 무서운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때 그 사람들>(2004)을 통해 10.26 사건 현장에 있었으나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하면서도 결과적으로 ‘그 때 그 분들’의 이야기에 집중된 작품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듯이 임상수 감독은 <하녀>를 통해서도 하녀의 윗분들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는 작품을 내놓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것이 임상수 감독의 장기인 동시에 한계가 되는 점이기도 한 바, <하녀>는 임상수 감독이 카메라로 다시 쓴 <재벌(의 사생활)을 생각한다>에 다름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나 혼자만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안의 딸로 출연한 아역 안서현의 큰 눈과 뚱한 표정이 우리나라 대표 재벌가인 이씨 집안 사람들을 생각나게 한다. <하녀>의 마지막 컷을 차지하는 얼굴도 다른 주연 배우들이 아니라 다름아닌 아역 안서현의 차지가 된다. 어쩌면 <하녀>라는 영화 자체가 임상수 감독이 내던지는 조롱 섞인 농담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주인 남자(이정재)와 여자(서우), 그리고 은이(전도연)의 뻔한 갈등 관계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하녀>가 충분히 각색되고 의도된 작품으로서의 성격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 주연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주인 남자의 장모(박지영)와 집사 조병식(윤여정)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주인 남자가 가진 막대한 부의 힘을 잘 이해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메카니즘을 이용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취하는 기생형 인물이라는 점이다.




추측컨데 왠만큼 잘 사는 집안 출신인 장모조차도 주인 남자 집안의 절대 권력 앞에서는 기도 못펴는 수준이 되고 마는 바, 장모는 시집 보낸 딸을 통해 그 권력의 쾌적함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인물로서 자신의 계획과 의도에 방해가 되는 은이의 존재를 제거하는 데에 처음부터 몸소 앞장 서는 역할을 한다.

조병식은 고참 하녀로서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꼴을 오랜 세월 동안 감수하며 자기 아들을 또 다른 권력 체계에 편승시키는 데에 성공한 인물로 은이를 마음으로부터 동정은 하되 그 집안이 요구하는 바를 우선적으로 수행하는 하수인 역할을 하게 된다.

임상수 감독이 원작에서 서스펜스 스릴러를 걷어내고 그 대신 ‘게임의 법칙’을 채워넣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주인 남자의 장모와 집사 조병식이고 <하녀>가 원작을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으되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각색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부분 역시 두 인물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박지영이 연기한 장모 역할 덕분에 – 결국 그 시스템 안에서 머물기로 하는 한 어느 누구도 하녀 신세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하녀들>이 되었을 때 영화의 메시지에 좀 더 부합한다 –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던 영화이긴 했지만 기술적으로 완벽한 수준인 것은 아니다.

영화제 출품 일정을 맞추느라 서둘렀던 탓인지 약간 생뚱맞게 보일 수도 있는 에필로그와 함께 – 이 에필로그 때문에 <하녀>는 확실하게 하녀가 아니라 하녀를 부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읽혀진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려는 장면인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분위기가 영화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붕 뜨는 느낌을 준다 – 은이의 최후 역시 후련한 감은 있지만 극적인 상황을 좀 더 길게 이끌어갔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은이가 하혈을 한 후 조병식이 주인 남자를 보며 무언가 의사전달을 하다가 다음 컷에서 갑자기 은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표정으로 바뀌는 것은 분명 기술적인 실수다. 주절주절 많은 설명을 하는 법이 없는 이런 영화에서 주요 등장 인물들의 표정 하나가 이야기의 흐름에 맥을 짚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거의 점프 컷에 가까운 이 부분의 편집 실수는 적잖이 실망스러운 수준이라 하겠다.

아울러 은이의 폭주에 앞서 조병식의 입장이 갑작스럽게 전환되는 부분 역시 통렬한 느낌을 전달해주기 보다는 너무 급작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느낌을 준다. 아무래도 마지막 씨퀀스를 위해 좀 더 많은 촬영을 해놓고도 러닝타임 때문에 대폭 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임상수 감독은 그 앞 부분에서 이미 하고 싶었던 얘기를 다 해버린 참이었으니 아마도 별도의 디렉터스컷 따위는 만들어지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영진공 신어지

 




 

“하하하”, 18禁이 옳아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가 아무리 유쾌하대도 관객이 꽤 들 영화는 아니다.
홍상수의 마니아가 분명 존재하지만 항상 그렇듯 폭발적 지지를 끌어낼 만큼 파워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의 팬임을 자처하는 나만해도 “하하하” 정말 좋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든 추천하기엔 주저되는 부분이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거듭 될 수록 호기롭게 웃어젖히게 되는 그의 영화가 점점 더 좋아진다는 거다. 지지리 궁상의 여자들은 사라지고 쿨하게 젊은 남녀를 딸 아들 삼는 초로의 여인과, 바람 피고 모텔을 걸어 나오는 애인에게 “업어 줄게.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래.” 라며 건들줄 아는 여성의 등장은 더욱이 반갑다.

영화는 하룻밤 섹스나 몰래한 키스 같은 일탈이 시각적으론 전혀 섹시하지 않더라도 야하게 느껴질 만큼 사건과 사고 속에 깊이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다. 영화적으로 과장하지 않았지만 평범함과 일상의 사이를 넘나드는 에피소드는 꼭 남의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이 주인공을 들여다봄이 아닌 함께 빠져드는 황홀경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미안하지만 지금의 소년소녀들에게 그의 영화는 아직 이른 감이 없지 않다. 갓 스물을 넘기고서 홍상수 영화를 보기 시작한 내가 그의 초기 작품에 대한 감흥이 미미한 것도 아마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세상과 술을, 남자와 여자를, 그들의 관계 얽힘을 조금 더 알고 봐야 제 맛이다.

‘하하하’는 오래된 애인이랑 손 놓고 보며 제식대로 킥킥 웃거나, 설렘이 앞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상대와 데이트삼아 봐야한다. 다 본 후에는 ‘영화 좋았지?’ 같은 한 마디로 끝내기엔 무지 아쉬우니 ‘자! 한잔해! 건배!’ 를 위해 소주 한잔 하자며 어둑한 밤길을 걷는거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진정한 The End.


영진공 애플

“놓아라, 다 놓아라. 꽃피는 봄은 어차피 오지 않더냐?”, 『꽃피는 봄이 오면』



그러니까 30년이 지난 오래된 이야기다.
나는 일곱살이었고 은퇴하신 할머니는 할 일이 없으셨다. 아버지는 부지런히 세 번째 사업 실패를 준비 중이었고 어머니는 아파트 상가에 아동복 점포를 알아보러 분주하였으며 밤이면 두분의 싸움이 잦았다.
낮은 길었다. 7살의 낮은 하루의 전부였으며 시간은 사각사각 지나갔다. 7살 세상은 홍옥 같이 사각사각했다. 어른들이야 어쩌건….

저녁이 되어 집에 들어오면 할머니는 손수 손주의 양말의 벗겨주시며 손을 씻으라 하셨고 얼굴을 씻으라 하셨으며 그 물을 버리지 않고 내 발을 손수 씻겨주시는데 쓰셨다. 뽀득뽀득 꼭 발은 닦아 주셨다. 난 발정도는 씻을 수 있는 7살이었다.

발을 누가 씻겨주는 것. 참 기분좋은 일임을 그 때 알았다.
내가 교회를 가기로 마음 먹은 것도 그즈음이다.
할머니 말씀하시길… 나즈막히…
“예수님도 이렇게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주셨단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 교회를 그만두게 된 건 누구의 발을 닦아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보다 최하 3개국어 방언 실력에 두둑한 염봇돈을 내며 기도할 때마다 울부짓고 고함을 질러야 3개월 속성 회개 2급 자격증을 따는 이 땅 교회들의 웃기면서 기막한 포퍼먼스 를 본 뒤다.

사랑은 요란하지 않고, 아픔은 눈물에 있지 않고, 진실은 열띠지 않는다.

그런면에서 “허진호”는 멋진 감독이다. 요란한 세상에 요란하지 않은 이야기를 제대로 쓴 사람은 “허진호”가 처음이었다.

‘철구'(“이한휘”분)가 ‘정원'(“한석규”분)의 “주정”을 말없이 받아주는 요란하지 않은 사랑, ‘다림'(“심은하”분)이 일없이 사진관에서 자고 가는 것을 봐야만 하는 정원의 아픈 웃음, 정원이 아버지에게 리모콘 사용법을 몇 번이나 가르쳐야 하는지 역정 낼 때 나오는 죽음에 대한 사실, 혹은 진실.

사랑이 뒤돌아가는 사람의 숨죽인 호흡에 있다는 것, 아픔이 억눌러 참아가는 사람의 어깨 들썩임에 있다는 것, 진실은 그리 거창한게 아니라 일상의 관계 속에 소소하다는 것. 난 참 크고, 빠르고, 우렁차고, 요란한 것에만 집착하고 즐겼지.

“류장하”의 『꽃피는 봄이 오면』을 기대한 건 그 “허진호”의 조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수연”을 떠나보내야 하는 “현우”는 도계초등학교 음악교사로 떠난다. ‘탄’밥을 먹어가며 살아온 관악부 아이들에게 음악은 꿈이자 오락이지만 “현우”에게 음악은 비루한 삶을 있게 만든 장본인이자 끝내 잡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이다. 아이들과 “현우”의 대립은 그 쯤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좋은 설정에서 시작한 영화가 육수에 물탄듯, 콜라 김 빠지듯 하기 시작하는 건 “류장하” 감독의 욕심 때문일까? 아니면 런닝타임이 빠듯했기 때문일까?

“연희”와 “현우”의 말랑말랑한 관계는 니맛도 내맛도 없이 흐지부지
“수연’의 결혼과 “현우”의 괴로움은 끝에가선 아무일도 없다는 듯 대사 한마디로 흐리멍텅
“재일”과 재일 할머니의 사랑은 소소한 할머니의 사랑 하나 없이 민숭맨숭
관악부 아이들의 캐릭터는 하나같이 얼렁설렁

소소한 이야기를 소소하게 보여주는 방식은 감독이 알았지만
왜 소소한 이야기 속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매듭이 어떠하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왜 몰랐을까? 결국 어떤 플롯의 영화든 이야기의 기본 구조는 이야기가 열린 이유에 합당한 결과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에 반해 조연 연기자들의 절륜의 연기는 감동적이었다.

깐깐한 엄마 역으로 나온 “윤여정”의 툴툴 털어내는 대사는 장삼이사의 옆집 엄마들 푸념처럼 정겨웠고(그녀를 누가 『화녀』(1971년작)에서 분한 팜므파탈이라고 연상하겠는가?), 특히 “김영옥”의 말한마디 없이 수수한 할머니 눈빛은 절절한 이시대를 부대껴온 할머니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이 또한 누가 그녀를 보고 마징가 쇠돌이역의 성우라고 생각하겠는가 말이다.)

“최민식”, 이제는 절정인 듯한 폐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이 얼기설기한 그물같은 시나리오에 마지막 끈으로 역할을 다 한다.


할머니는 18년 전에 돌아가셨고 나는 아직 그 발가락 사이에 뽀드득하던 할머니의 늙고 가는 손가락 느낌을 잊지 못한다. 그 분의 사랑하는 방식은 이리도 소소하셨다. 사람들은 아직도 큰 소리로 싸우고, 왁자지껄하게 사랑하고, 미친년 널 뛰듯이 요란하게 슬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꼭 적이 된 그녀를 총구 앞에 두고 마지못해 죽여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꽃피는 봄이 오면』은 아쉽지만 외면할 수는 없는 영화가 된다. 아직 세상이 이 영화가 필요할 만큼 충분히 지랄중이다.

 


영진공 그럴껄